소설리스트

제국의 세신사 영애님-97화 (97/150)

97화.

절망의 무도회가 끝났다.

무도회가 무르익었을 무렵, 황제는 약속대로 제국의 모든 귀족 앞에서 곧 있을 양위에 대해 선포했다.

하지만 프리트는 별로 기쁘지 않았다.

이 무도회의 가장 큰 목적이었던, 산수이의 마음을 사로잡는 데는 실패했으니까.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인 건, 자신의 경쟁자 중 그 누구도 성공한 자가 없었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그녀와 춤을 추고, 함께 시간들을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그날 그들의 뇌리에 남은 것은 오로지 얀피르와 휘온의 첫 키스뿐이었으니까.

‘후우, 휘온 녀석. 어쩌다 그…… 하아아.’

고통스러운 표정의 프리트가 손으로 제 얼굴을 연신 쓸어내렸다.

본인이 당한 일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날의 그 장면이 프리트의 머릿속에서 무한 재생되고 있었다.

프리트는 계속해서 마음속으로 휘온을 애도하고, 또 애도했다. 미리 명복까지 빌어줄 기세였다.

하지만 얀피르에게 입술을 빼앗긴 가엾은 휘온에 대한 연민보다도 더 중요한 게 있었다.

바로 산수이의 마음을 얻는 일이었다.

지금의 이 상황은 프리트에게 유리하다면 유리했지, 결코 마이너스가 될 리는 없어 보였으니까.

제 앞에서 사내 둘이 입을 맞추는 걸 직접 봤는데, 세상 어느 여자가 그걸 좋아하겠느냔 말이다.

‘그럼 이제 남은 후보는 나와 그 마왕 놈 둘뿐인가.’

제 추측에 대해 확신을 가지고 싶었던 프리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발레아나의 방으로 향했다.

하지만 프리트는 아직 모르고 있었다.

자신이 그들에게 정신을 팔고 있는 동안, 제 하나뿐인 여동생의 마음속에 어떤 불장난이 벌어지고 있었는지를 말이다.

똑똑-

“발레아나, 나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평소대로였다면 문을 박차고 달려 나와 자신의 목에 대롱대롱 매달렸을 발레아나가, 오늘따라 조용했던 것이다.

‘음?’

이를 이상하게 여긴 프리트가 방문에 귀를 갖다 대었다.

그러자 안쪽에서 끙끙거리며 앓는 소리가 들려왔다.

“끄응…… 님, 하아아…….”

“!”

분명 무슨 일이 생긴 게 틀림없었다.

괴한의 침입인가? 그도 아니면 또다시 이 황궁 안에 독극물이?!

당황한 프리트가 방문을 벌컥 열며 소리쳤다.

“무슨 일이냐, 발레아나!”

하지만 그 안에는 괴한도, 독약도 없었다.

오직 발레아나가 괴상하게 생긴 천 뭉치에 열심히 바느질을 해 대고 있었을 뿐.

프리트가 놀란 눈으로 그 요상한 물건을 빤히 살폈다.

‘저게 대체 뭐…… 설마 인형?’

도저히 인형이라고 봐 주기 힘들 만큼 엉망으로 얼기설기 바느질된 솜 뭉텅이였다.

프리트와 눈이 마주친 발레아나는 얼굴이 새빨개진 채, 제가 들고 있던 걸 서둘러 등 뒤로 감췄다.

하지만 프리트는 이미 그 해괴망측한 걸 보고 난 후였다.

그가 얼굴을 찌푸리며 물었다.

“그게 뭐냐, 발레아나? 오징어 인형인가.”

“오, 오징어라뇨! 아니에요!”

오징어가 아니라고? 살색 뭉텅이 위에 기다란 게 주렁주렁 달렸는데 그럼 저게 대체 뭐지?

“아! 문어?”

발레아나가 극도로 분노한 표정으로 받아쳤다.

“문어라니, 실례라고요! 이건 이국의…… 아니, 그보다 숙녀의 방에 노크도 없이 들어오시는 법이 어디 있어요!”

“아까부터 계속 노크했는데 네가 못 들은 거잖아.”

“그, 그럼 대답이 있을 때까지 기다리셨어야죠.”

“그건 내가 미안하다. 그런데 정말 급한 일이라서 말이야.”

“급한 일이요?”

“그래. 일전에 말했던 그 대마왕에 대한 이야기인데…….”

프리트는 무도회장에서 있었던 참혹했던 사건과, 자신이 추측하는 네 남자의 현재 스코어에 대해 상세하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발레아나의 눈앞엔 여전히 루헤의 얼굴만이 아른거리고 있었다.

그런 발레아나의 귀엔 이 모든 것이 백색소음처럼 한쪽 귀로 들어와 한쪽 귀로 나가고 있을 뿐이었다.

발레아나가 프리트를 향해 물었다.

“그래서, 그 대마왕이라는 자는 잘생겼어요?”

“잘생겼냐고? 그야 당연히 나보다 한참 못하지!”

그러자 발레아나가 관심 없다는 듯 심드렁한 표정으로 대충 내뱉었다.

“네에, 그럼 뭐 오라버니가 이기시겠네요.”

“그게 정말이냐?”

“네, 그러니 이제 그만 제 방에서 나가주시겠어요?”

“뭐?”

난생처음 보는 발레아나의 태도에 당황한 프리트가 되물었다.

“뭐냐 그 말투는. 이 오라버니가 반갑지도 않아?”

프리트는 발레아나를 향해 제 양팔을 벌려보았다. 어서 평소처럼 품에 안겨 와 보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발레아나는 그를 경멸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뭐 하세요, 오라버니?”

“으, 으응? 보면 알지 않느냐.”

그가 발레아나를 향해 열심히 팔을 파닥거려보았지만.

제 여동생에게선 또다시 싸늘한 시선만이 돌아올 뿐이었다.

“다시 한 번 부탁드릴게요. 숙녀의 방에서 나.가.주.세.요.”

쾅!

그렇게 프리트는 발레아나의 방에서 쫓겨났다.

‘뭐야, 사춘기인가?!’

프리트는 발레아나의 방 앞에서 한동안 벙찐 표정으로 서 있었다.

한편 프리트가 나간 후, 발레아나는 제 뒤에 감춰뒀던 오징어…… 아니, 제가 만든 수제 루헤 인형을 품 안에 소중히 꼭 끌어안았다.

“아아, 이국의 왕자님……! 당신의 초상화라도 한 장 가질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발레아나는 프리트가 말한 대마왕의 정체가 루헤라는 사실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저 꿈을 꾸듯 루헤의 얼굴을 떠올리며 아련한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

혼돈의 황실 무도회가 끝난 지 벌써 며칠이 지났지만, 얀피르는 아직도 일전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날의 딸기 맛 첫 키스가 얀피르에게 외상 후 스트레스처럼 남아, 두 번 다시 딸기는 입에 대지도 못하게 된 것이다.

딸기 냄새만 맡아도 화장실로 달려가 구역질을 할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정말로 큰 문제는 따로 있었다.

바로 이번 주부터 비덴탕에서 제철 과일 이벤트가 열린다는 것이었다.

무도회 한참 전부터 계획되어 있던 이벤트인 데다가.

하필이면 그 수많은 제철 과일 중 딸기가 메인으로 선정되어있었다.

“따, 딸기 말고 다른 과일로 바꾸면 안 될까, 집사?”

차마 이 말을 산수이에게 꺼낼 수 없었던 얀피르는 집사를 찾아가 사정해 보았지만.

“으음, 그것이…… 이미 딸기 그림이 인쇄된 홍보물이 온 제국민들에게 발송되어 버렸는데 어쩌죠, 후작님? 무슨 문제라도 있으신 겁니까?”

“……아무것도 아니야.”

얀피르가 절망한 얼굴로 돌아섰다.

그 이벤트 날엔 딸기로 만든 수많은 디저트들이 비덴탕에서 판매될 예정이었다.

게다가.

신메뉴를 판매하기 전에 반드시 거쳐야 할 과정은 뭐니 뭐니 해도 바로 시식.

딸기 디저트 역시 맛을 보고 평가해 줄 사람이 필요했다.

그렇게 딸기 디저트 시식단으로 선정되어, 다가오는 시식회에 참석해야 하는 이들 중 하나가 바로.

얀피르였다.

첫 키스의 아픔 때문에 이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던 얀피르는, 뒤늦게 시식회 일정을 떠올리곤 좌절했다.

이제 와서 안 하겠다고 발을 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랬다간 분명 산수이가 크게 실망할 게 뻔했다.

딸기 디저트 리스트를 들고 있는 얀피르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이젠 딸기의 앞 글자만 봐도 휘온의 얼굴이 떠오르는 듯했다.

“죽일 거야.”

얀피르가 허공을 향해 중얼거렸다.

하필 때마침 옆을 지나고 있던 산수이가 깜짝 놀라 그에게로 다가왔다.

“얀피르? 누굴 죽이겠다는 거야?”

“휘온 놈…… 죽여 버릴 거라고.”

“뭐어?”

그런 얀피르를 향해 산수이가 단호하게 말했다.

“속상한 건 알겠지만 말은 바로 해야지, 얀피르. 당한 건 휘온 쪽이라고.”

***

한편, 휘온의 상태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딸기를 입에 대기는커녕 똑바로 마주하지도 못하게 된 건 그 역시 마찬가지였으니까.

하지만 얀피르보다도 정신적 대미지가 컸던 건 역시 휘온 쪽이었다.

그 증거로, 휘온은 벌써 며칠째 방 안에만 틀어박힌 채 딸기는 둘째 치고 식음을 전폐하며 바싹 말라가고 있었다.

그런 휘온의 앞으로도 딸기 디저트가 빼곡히 적힌 서신이 도착했다.

그 리스트를 받아들고 새하얗게 질려버린 휘온은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휘청였다.

딸기라는 글자를 읽는 순간 그날의 기억이 다시 한 번 휘온의 대뇌 속에서 회오리쳤으니까.

하지만 이런 감정적인 문제 때문에 일을 그르칠 순 없었다.

‘정신 차리자.’

그는 호흡을 가다듬고 책상에 앉아 리스트를 찬찬히 훑어보았다.

수많은 딸기 디저트 중 대중에게 인기가 없을 만한 메뉴를 골라내고, 새로운 아이디어를 짜내는 것이 바로 휘온이 맡은 임무였다.

하지만 딸기를 보면 볼수록 자꾸만 구역질이 나서 정신을 가다듬기가 힘들었다.

‘안 돼. 산수이를 실망시킬 순 없어!’

하지만 계속해서 딸기가 얀피르의 얼굴로 보였다.

결국 내적 갈등이 극에 달한 휘온의 눈가에 눈물이 차올랐다.

“으아아!”

휘온은 서신을 바닥에 모두 던져버리고, 책상 위에 엎드려 들썩였다.

그때 갑자기 누군가 그의 방문을 두드렸다.

“어이, 휘온.”

“저, 저하?”

그가 걱정되어 찾아온 프리트였다.

휘온은 다급히 제 얼굴을 가렸지만, 프리트는 이미 보고 말았다.

휘온의 그 예쁜 눈에서 구슬 같은 눈물방울이 뚝 하고 떨어지는 것을.

놀란 프리트가 휘온의 주위를 둘러보자, 역시나 예상대로였다.

휘온의 발밑에는 곧 있을 딸기 시식회에 대한 서신이 아무렇게나 흩어져 있었던 것이었다.

프리트는 아무것도 보지 못한 척 말없이 자리에 앉아 친우의 상처 입은 마음이 진정될 때까지 기다려주었다.

그런 프리트를 보며 휘온은 마음 깊이 감동했다.

‘불충한 나를 위해 이곳까지 친히 방문해주신 것도 모자라, 내 부끄러운 모습을 모른 체해 주시기까지 하다니.’

서둘러 눈물 자국을 지워낸 휘온이 의연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저하, 기별을 주셨다면 제가 직접 찾아뵈었을 텐데요.”

“네놈이 걱정돼서 가만히 앉아있을 수가 있었어야지. 몸은 좀 괜찮나? 식사를 거의 하지 않고 있다 들었다.”

“덕분에 많이 좋아졌습니다.”

프리트는 그런 휘온을 애잔하게 바라보다,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런데 말이야, 휘온.”

“예, 저하.”

“그날 말이야.”

“그날이라 하시면 설마…….”

“그래, 그 빌어먹을 무도회 날 말이야.”

프리트가 답답하다는 표정으로 뇌까렸다.

“기왕 할 거면 네놈이 얀피르 놈의 위에 있었어야지. 이거야 원, 오랜 친구로서 자존심이 허락하질 않는데.”

“…….”

신하 된 자로서 감히 프리트를 한 대 칠 수 없는 것이 휘온의 천추의 한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공포의 딸기 디저트 시식회 날이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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