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화.
산수이가 자신들의 눈앞에서 도망쳐버린 후, 곧바로 루헤마저 허공 속으로 사라져버리자.
세 남자의 만담이 시작되었다.
프리트가 소리쳤다.
“저, 저 마왕 놈! 산수이 남작에게 공짜로 때를 밀러 간 것이 분명해. 어서 붙잡아야……!”
휘온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잡으면요. 무슨 논리로 때를 못 밀게 하실 겁니까? 저하 역시 신나게 미셨지 않습니까.”
“휘온 너도 밀었잖아!”
“크흠! 그야 저는 당시 그럴만한 자격이 있었기 때문에…….”
그러자 여태껏 듣고만 있던 얀피르가 분노에 가득 찬 얼굴로 끼어들었다.
“휘온 너 설마 번식기에 주인을 만났던 건 아니겠지?”
번식기라니.
그 단어를 들은 휘온이 귀 끝까지 빨개지며 세차게 말을 더듬었다.
“버, 번식기라니! 나를 네놈과 똑같은 짐승으로 보지 마라, 얀피르!”
그 말을 들은 얀피르가 놀라 물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인간한테는 번식기가 없어?”
“그딴 게 있을 리가!”
“아니 그럼 대체 어떻…… 설마.”
얀피르가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되물었다.
“너, 너희 인간은 설마, 365일 내내 위험한 거냐?!”
이에 프리트가 얀피르를 향해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외쳤다.
“너 이 자식! 설마 번식기에 세신을 한 거냐!”
얀피르 역시 분노에 가득 차 소리쳤다.
“누가 할 소릴 하는 거야!”
“저하!”
휘온이 얀피르에게로 달려드는 프리트를 붙잡았다.
“고정하십시오! 여기서 싸우시면 안 됩니다!”
“이거 놓지 못해? 휘온 네놈은 어떻게 저딴 얘길 듣고도 태연할 수가 있어!”
물론 휘온 역시 기분이 좋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휘온은 적어도 이성이 있는 자였다.
그는 알고 있었다. 산수이라는 여인은…….
‘산수이는 남자에겐 관심이 정말 눈곱만큼도 없단 말입니다, 저하. 아직도 그걸 모르십니까.’
신하 된 자로서, 휘온은 프리트에게 그 얘기만큼은 차마 해줄 수가 없었다.
자신들은 산수이에게 있어서 이태리타월보다도 못한 존재들일지 모른다고.
때밀이실 안에 놓인 저 대리석 판이 어쩌면 그녀에겐 더 소중할 수도 있다고 말이다.
그런 휘온과 프리트의 뒤로, 얀피르 역시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사실 짐작은 하고 있었어. 주인이 언젠간 남들 때도 공짜로 밀어줄 거라고. 보나 마나 마케팅인지 뭔지를 한다며 또 엄청 열심히 밀어줬겠지. 하지만…….’
얀피르는 산수이 곁에서 맴돌고 있는 세 명의 남자들 얼굴을 차례대로 떠올렸다.
휘온 에데카나 공작.
프리트 폰 카데베르 황태자.
그리고 갑자기 등장한 루헤 슈바츠발트 대마왕.
‘주인, 네가 마음속에 담고 있는 건 누구야?’
얀피르는 결코 물어보지 못할 질문을 가슴속으로만 되뇌고 있었다.
***
한편, 비덴탕 안의 VVIP 때밀이실.
산수이는 결국 루헤의 때를 밀기 위해 제 손에 이태리타월을 감았다.
‘부디 이게 마지막이길.’
여기서 제 때밀이 추종자가 더 늘어난다면 정말이지 견딜 수 없을 것만 같았다.
‘벌써 손해가 대체 얼마야? 무료 세신은 이제 그만…….’
그렇게 산수이는 깊은 한숨을 내쉰 채 루헤가 엎드려있는 대리석 판 앞으로 다가갔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루헤는 대답 대신 산수이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가 촉촉하게 젖은 새빨간 눈동자로 산수이를 보며 싱긋 미소 지었다.
그 심장 어택 공격에 산수이는 또다시 속수무책으로 무너졌다.
‘하 진짜 이 요망한 마왕님 같으니라고. 내 심장이 남아나질 않네.’
산수이가 심호흡을 크게 하며 팔을 좌우로 흔들었다.
명상, 명상이 필요했다.
그런 산수이를 보며 루헤가 물었다.
“뭐 해요, 수이?”
“때를 밀기 전 몸을 푸는 중입니다.”
“그런데 얼굴은 왜 빨개졌죠?”
“더, 더워서 그렇습니다!”
“흐응…….”
그가 예쁘게 배시시 웃으며 말을 이었다.
“내 얼굴 보고 그런 건 아니고요?”
“아, 아니거든요?!”
속내를 들킨 산수이는 포커페이스를 유지하지 못하고 심하게 동요했다.
그런 산수이를 보며 루헤는 귀엽다는 듯 쿡쿡 웃었다.
그가 다시 고개를 돌려 대리석 판 위에 머리를 편안히 내려놓았다.
“얼굴 돌릴 테니까, 세신에만 집중해 줘요.”
“어, 얼굴 보고 그런 거 정말 아니라니까요!”
“알겠어요, 믿을게요.”
산수이의 작은 반응 하나하나가 루헤의 관심을 끌었다.
저 인간은 어쩜 저리 감정을 숨기지 못하지?
그 투명함이 그녀를 더욱더 사랑스럽게 만드는 것 같았다.
게다가 그녀에겐 따로 미혹술을 쓸 필요도 없는 듯했다.
그저 제 얼굴만 보여주면 그녀의 몸에 돌고 있는 모든 피가 모조리 얼굴로 가서 쏠리는 듯했으니까.
‘수이는 미남을 좋아하나 보군요.’
그는 자신이 빼어난 미남이라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거기까지 생각하던 루헤는 문득 한 가지 사실을 떠올렸다.
‘아까 만났던 그 공작과 황태자 모두 보통의 인간들보다 몇만 배는 더 잘생긴 것, 아니었나……요?’
게다가 드래곤 한 마리 역시 제가 역대로 본 그들의 종족 중 가장 뛰어난 외모를 자랑하고 있었다.
그랬다.
지금 대륙에 현존하는 다양한 종족들 중, 가장 잘생긴 자들만이 모여 이 눈앞의 작은 인간 여인을 추종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는 이 상황이 참으로 기가 막혀 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아하하…… 이것 참.”
“응? 왜 그러세요, 루헤?”
“아무것도 아니에요, 수이.”
루헤가 속으로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어쩐다.
이 여자한테 미혹술을 써서 꼭두각시처럼 만들어, 말아?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찰나.
사삭—
산수이가 루헤의 등 위에 손을 얹었다.
“으흑……!”
또다시 느껴지는 극강의 시원함에 루헤가 제 몸을 바르르 떨었다.
정말이지, 몇 번을 겪어봐도 놀라운 기술이었다.
“시원하세요, 루헤?”
시원하냐니.
이 경이로운 때밀이는 그것만으론 설명이 부족했다.
이제 루헤의 눈에는 산수이가 한낱 인간이 아닌, 위대한 마신으로 보일 지경이었다.
성실히 구석구석 깨끗하게 밀어주는 산수이의 손길 아래, 루헤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모든 생각의 끈을 놓아버리고 말았다.
그저 평생 여기에 누워 죽을 때까지 이것만 받고 싶었다.
‘그녀에게 미혹술을 썼다간…… 다시는 이걸 경험하지 못하겠지.’
한낱 꼭두각시가 된 산수이가 이렇게 맛깔나게 밀어줄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렇다면 결론은 나왔다.
미혹술 없이, 오로지 제 매력으로만 승부한다.
이윽고 산수이의 손이 더욱더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다.
“……!”
이어지는 시원함에 루헤는 더 이상 아무런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반면 산수이는 때밀이가 계속될수록 정신을 가다듬기가 힘들었다.
‘루헤의 몸에 손을 댈 때마다 정신을 차릴 수가 없어.’
몽마란 굳이 미혹술을 쓰지 않아도 자신에게서 선천적으로 흘러넘치는 색기를 감출 수가 없는 법이었다.
그러니 산수이의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도 당연했다.
‘할 수 있다. 흐읍!’
그동안 혹독한 수행을 거듭하며 정신을 강인하게 단련한 산수이니까 그나마 이 정도 버틸 수 있는 것이었다.
보통의 인간이었다면, 이미 루헤에게 넘어가고도 남았으리라.
“아아, 수이!”
제발! 그 교태로운 목소리라도 좀 자제해 주세요, 마왕님!
산수이가 속으로 절규했다.
‘빠, 빨리 끝내야 한다.’
슥삭슥삭—
산수이는 더욱더 박차를 가해 때를 밀었다.
그때였다.
“수이…… 물어볼 게 있어요.”
얼굴이 발갛게 상기된 루헤가 또다시 자신의 속내를 털어놓기 시작한 것이다.
“네 물어보세요, 루헤.”
루헤가 산수이에게 고개를 돌렸다.
“수이는 어떤 취향을 좋아하죠? 섹시? 냉미남? 남성미? 그것도 아니면…….”
그의 눈이 초승달처럼 예쁘게 휘어졌다.
“청순……?”
‘허, 허억!’
루헤는 산수이를 향해 청아한 미소를 흘렸다.
결국 산수이는 또다시 그의 넓은 등짝 위에 새빨갛고 뜨뜻한 코피를 줄줄 흘리고 말았다.
***
“괜찮아요, 수이?”
루헤가 산수이에게 수건을 건네며 물었다.
산수이는 건네받은 수건으로 제 코를 지그시 눌렀다.
그녀가 멋쩍은 듯 중얼거렸다.
“하하…… 과로를 했나, 왜 이러지.”
하지만 이미 코피의 진실을 꿰뚫어 본 루헤는 그녀를 향해 싱긋 웃을 뿐이었다.
“과로라.”
그는 산수이의 눈을 빤히 바라보다, 제 손등에 튄 그녀의 핏자국을 모조리 핥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산수이의 팔에 또다시 닭살이 오소소 돋았다.
“그걸 왜 또 먹어요!”
“수이가 흘린 건, 하나도 남기고 싶지 않아서요.”
“예?!”
아아 진짜. 무서운데 설레고, 가슴 떨리는데 오싹하고!
그런 산수이를 보며 미소 짓던 루헤가 입을 열었다.
“아직 내 질문에 답하지 않았어요, 수이.”
돌겠네.
섹시 청순 뭐 아까 그거. 그건 분명 저를 포함한 네 남자를 의미하는 게 분명했다.
산수이가 고개를 세차게 저으며 말했다.
“취, 취향 그런 거 없어요!”
루헤가 미소 지으며 생각했다.
그럴 리가.
“흠. 그럼 이건 어때요? 내 질문에 대답해주면, 수이의 소원을 하나 들어줄게요.”
“소, 소원이요?”
마왕이 소원을 들어준다니.
‘이거 엄청 위험한 거 아냐?!’
보통 그렇잖아. 악마한테 소원을 빌면 그 대가로 뭔가를 바쳐야 하잖아!
게다가 방금 내 피를 마셨어, 이건 피의 계약!
산수이가 새하얗게 질린 표정으로 거듭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니 전 괜찮…….”
하지만 그녀의 반응을 본 루헤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가 손으로 제 얼굴을 쓸어내리며 한숨 쉬었다.
“하아, 수이. 내가 종족 차별하지 말라고 했잖아요.”
“제, 제가 언제요.”
루헤가 손가락으로 산수이의 이마를 가볍게 톡 밀었다.
“지금, 속으로 ‘마왕한테 소원 빌면, 영혼을 바쳐야 하는 거 아냐?’ 따위의 생각, 정말 안 했어요?”
“으헉……!”
또다시 루헤에게 속내를 들킨 산수이는 벙찐 표정이었다.
“몇 번을 말해야 믿어줄 거예요? 나는 인간에게 우호적인 마족이라니까.”
“죄, 죄송해요…….”
“한 번만 더 그러면, 나 정말 화낼 거예요.”
진심으로 섭섭해하는 루헤를 보며, 산수이는 내심 미안해졌다.
‘그래, 나와 사람들을 해칠 거였으면 진작 했겠지. 남을 의심부터 하면 못써.’
“알겠어요, 루헤.”
자신을 향해 고개를 끄덕이는 산수이를 보며, 루헤가 싱긋 웃었다.
“그래서, 소원은?”
소원이라.
사실 자신의 소원이야 뻔했다.
‘저를 원래의 세계로 데려다주세요!’라는 말이 산수이의 목 끝까지 차올랐다.
하지만 그야 불가능하겠지.
괜히 잘못 말했다간 자신의 정체만 들키게 될 뿐이었다.
‘그렇다고 사우나스 님을 만나게 해달라는 소원을 빌기엔, 아직 미션을 완수하지 않은 듯하니 별 소용없을 것 같고.’
무엇을 빌어야 하나?
부와 명예도 관심 없는 산수이였다.
그녀에게 필요한 건 오로지 하나뿐.
하지만 여길 온천 관광 명소로 만들어 달라는 소원은 너무 애매모호했다.
이미 이곳은 충분히 유명한 관광지가 되었으니까.
‘임무 완수의 조건이 노천탕도 아니라면, 대체 정답이 뭐지?’
거기까지 생각하던 산수이는 비로소 자신이 루헤에게 어떤 소원을 빌어야 하는지를 깨달았다.
‘설마, 사우나스 님이 말씀하신 그 한 가지라는 게……?’
산수이가 루헤에게 물었다.
“루헤, 당신은 제 소원을 어디까지 들어줄 수 있나요?”
“흐응, 마법으로 할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그 말을 들은 산수이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루헤가 물었다.
“그럼 어디, 무슨 소원을 빌고 싶은지 들어볼까요?”
마침내 결심을 내린 산수이가 눈을 빛내며 외쳤다.
“네, 루헤. 제 소원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