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국의 세신사 영애님-89화 (89/150)

89화.

산수이가 특별하게 생각하는 자가 누구냐니.

그게 무슨 뜻이지?

세 남자는 잠시간 혼란에 빠졌다.

설마 산수이가 마음에 둔 남자를 말하는 건가?

아니, 그렇다면 왜 하필 저 마왕 놈이 그런 질문을 하는 거지?

그때, 얀피르의 머리에 무언가 불길한 예감이 스쳤다.

그가 성난 표정으로 루헤를 향해 물었다.

“이봐, 마족. 너 설마 주인한테 공짜로 때 밀었어?”

얀피르의 갑작스런 물음에도 루헤의 여유로운 표정에는 한 점 흔들림이 없었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에는 명백한 한기가 서려있었다.

“제가 먼저 물었습니다만.”

“그래서 밀었냐고, 안 밀었냐고.”

“…….”

그렇게 얀피르가 따져 묻는 사이, 누군가 그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그만.”

두 남자가 뒤를 돌아본 곳엔, 프리트가 서 있었다.

“마왕 네놈이 말한 특별하다는 게 그런 뜻이었나?”

프리트의 입꼬리가 하늘을 향해 치솟았다.

그가 두 남자를 향해 제 넓은 가슴을 앞으로 쭉 내밀며 자신만만한 태도로 외쳤다.

“그렇다면 마왕 네놈이 찾는 그 사람은, 바로 나다!”

“!”

프리트의 이러한 폭탄선언에 깜짝 놀란 것은 결코 마왕 루헤만이 아니었다.

얀피르가 경악하듯 되물었다.

“뭐?!”

휘온 역시 놀라 자빠질 지경이었다.

“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저하?!”

두 남자는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지, 제 귀로 똑똑히 듣고도 믿을 수가 없었다.

얀피르와 휘온이 동시에 따발총처럼 외쳐댔다.

“주인이 정말 저하 네놈도 공짜로 때를 밀어줬어?”

“황태자 저하 역시 산수이에게 무, 무료 세신을……?”

그러자 얀피르가 놀란 표정으로 휘온을 돌아보았다.

“휘온 설마 네놈도?!”

“아, 앗 그게……!”

물론 그게 끝이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지만 곧 두 남자 사이에 한 명의 시선이 더 얹어졌다.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지고 있는 프리트의 시선 말이다.

“하……! 그러니까 이 몸뿐 아니라, 휘온 너까지?”

프리트는 이 상황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는 듯 분노하며 포효했다.

얀피르 역시 기절할 노릇이었다.

‘주인, 나 말고는 다 때밀이 요금 받을 거라며-!’

휘온은 허탈함에 사로잡혔다.

‘나, 난 그것도 모르고, 그날의 추억을 둘만의 소중한 비밀이라 여겨왔는데……!’

모든 전의를 상실한 세 남자는 서로 멱살을 잡고 싸울 기운조차 남아있질 않았다.

이럴 거면 도대체 세신 요금표는 왜 만든 거야?

내가, 오직 나만이 그녀에게 조금 더 특별한 존재라고 믿고 있었는데!

이 아수라장 속에서 오직 루헤만이 평온할 뿐이었다.

그가 작게 하품하며 생각했다.

‘흐음…… 역시 예상대로군요.’

그는 다시 노천탕 안으로 몸을 쏙 담갔다.

이윽고 정신을 차린 세 남자의 삼파전이 시작되었다.

루헤는 세 남자의 신경전을 구경하기 위해 물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쪼오오옥—

싸움을 구경하며 마시는 바나나우유는 평소보다 더 꿀맛이었다.

프리트와 얀피르, 그리고 휘온은 계속해서 서로를 향해 으르렁거렸다.

휘온이 허탈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산수이, 나만 밀어준 것이 아니었군요…….”

얼굴이 시뻘개진 프리트가 물었다.

“대체 언제지, 휘온? 이 몸보다도 더 빨리 민 건 아니겠지?!”

하지만 휘온이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얀피르가 그를 향해 외쳤다.

“휘온, 나한테 먼저 동맹을 맺자고 한 건 네놈이었잖아! 그런데 이렇게 배신을 해?”

“배신이라니! 그건 동맹 전에 이미 산수이와 주고받았던 약속…….”

“둘이 따로 약속을 주고받았었다고?!”

그때 프리트가 끼어들며 소리쳤다.

“네놈들, 동맹은 또 언제 맺었던 거야!”

하지만 이 소란은 곧 사그라졌다.

문제의 주인공이 친히 이곳까지 귀한 걸음을 하셨으니까.

그들의 뒤편에서 산수이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에요?”

***

루헤와 떨어져 자신의 방에서 오랜만의 휴식을 취하고 있던 산수이.

‘하아. 마왕님한테서 떨어져 있는 게 대체 얼마 만이야.’

아무리 인간계에 우호적인 마왕이라지만, 마족은 마족이었다. 아직은 무서운 게 당연했다.

사실 그를 피하고 싶은 건 비단 그가 마족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계속해서 그 옆에 있다간 정말 홀려버릴 것만 같았으니까.

‘그 잘생긴 얼굴로 날 홀린 다음에 영혼을 빼앗는다거나, 잡아먹는다거나 그럴지도 모르잖아!’

원래 세계에서 판타지를 너무 많이 본 산수이였다.

아무튼 그녀는 오랜만에 주어진 달콤한 휴식을 즐기기 위해 침대 위에 길게 늘어졌다.

그러나 그 기쁨은 당연히 오래가지 않았다.

갑자기 사용인 하나가 달려와 산수이에게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전했으니까.

“남작님!”

그 다급한 목소리에 산수이는 직감했다.

분명, 그 네 남자 중 하나와 관련된 귀찮은 일이 터진 거라고.

‘아냐, 제발 아니라고 해줘. 나 좀 쉬자!’

산수이는 마음속으로 빌고, 또 빌었지만 불길한 예감은 항상 틀리질 않았다.

“무슨 일이죠?”

“아까 그 긴 머리의 고객님께서 노천탕으로 들어가시고 나서 말입니다.”

사용인이 매우 곤란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그러고 나서 세 분이 곧바로 그분을 따라 들어가셨는데…….”

“세 분이라면 설마?”

사용인은 이제 익숙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렇습니다. 황태자 저하와 에데카나 공작님, 그리고.”

“……얀피르 후작님.”

“네, 맞습니다! 아무튼 그 세 분이 남탕 안으로 들어가시자마자, 그 안에 계시던 손님들이 모두 밖으로 도망 나오셨다고요!”

“뭐라고! 아니 대체 왜요?”

“그게, 근처에서 꼭 칼부림이라도 날 듯한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고.”

“…….”

그렇게 산수이는 하는 수 없이 자리를 털고 일어나 또다시 비덴탕으로 향해야만 했던 것이다.

***

예상치 못한 산수이의 등장에 네 남자는 모두 깜짝 놀랐다.

“산수이! 여긴 어찌…….”

산수이가 그들을 향해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곳 분위기가 어찌나 살벌한지, 마음 편히 목욕을 할 수가 없다는 신고가 들어와서 말이죠.”

그 말에 정신을 차린 네 남자가 주위를 살펴보니, 정말 그들 말고는 아무도 남아있질 않았다.

산수이가 제 눈앞의 남자들에게 다그치듯 말했다.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손님들이 다 나가버리실 정도로 싸우면 어떡해요! 애들도 아니고 진짜!”

그때였다.

여태껏 조용히 물속에만 잠겨있던 루헤가 산수이를 향해 입을 열었다.

“이게 다 수이 탓인걸요.”

“네?”

자신을 바라보며 싱긋 웃는 루헤를 향해, 산수이가 당황한 듯 되물었다.

“제 탓이라고요?”

루헤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왜요?”

“음, 죄가 많은 탓?”

“죄……?”

산수이가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세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런 산수이의 천진무구한 얼굴을 바라보는 세 남자의 심경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복잡했다.

저 사랑스러운 여인.

하지만 지금은 그녀가 자신들의 심장에 칼이라도 박아 넣은 것처럼 가슴이 찢어지게 아팠다.

그런 세 남자에게 산수이가 마지막 비수를 꽂아 넣고 말았다.

“제가 뭘 잘못했는데요?”

그들은 결국 참지 못하고 일그러진 표정으로 산수이를 향해 울부짖었다.

“주인,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산수이, 그대를 믿고 있었는데!”

“그러니까 대체 뭐가요!”

“분명 나뿐이라고 했잖아, 남작! 그대가 특별히 세신 요금을 받지 않고 때를 밀어준 건!”

산수이는 그제야 전말을 파악했다.

“커헉!”

들키고 만 것이다.

그 일을.

‘따, 딱 걸렸구나!’

언젠간 걸릴 거라고 생각은 했다.

하지만 그게 오늘일 줄은 몰랐지!

‘큰일 났다. 저 세 남자의 성격상 이걸 그냥 넘어갈 리가 없는데!’

예상치 못한 상황에 당황한 산수이를 향해, 루헤가 하나의 짐을 더 얹어주었다.

물속에서 몸을 일으킨 그가 턱을 괴곤 싱긋 웃었다.

“그럼 저도 공짜 맞죠, 수이?”

혼돈의 카오스였다.

생각, 생각을 할 시간이 필요했다.

하지만 그녀가 뭐라 대꾸할 틈도 없이, 자신을 향해 서서히 다가오는 네 남자의 모습을 보며 산수이는 결심했다.

피할 수 없을 땐 즐겨…….

‘아니, 도망쳐.’

그녀는 재빨리 몸을 돌려 출구로 냅다 달리기 시작했다.

“어머, 갑자기 잊고 있던 때밀이 예약이 생각났네?”

“주인!”

“산수이!”

“남작!”

세 남자는 속수무책으로 멀어져가는 산수이를 바라만 보았고.

그중 오직 루헤만이 평온한 표정이었다.

***

겨우 남탕에서 도망쳐 나온 산수이는 인적이 드문 복도에서 거센 숨을 몰아쉬었다.

“허억, 허억…… 이제 어쩌지?”

언젠가는 들통 날 일이긴 했다.

하지만 왜 하필이면 오늘이냔 말이다.

저 골칫거리 네 남자가 한자리에 모여 있는 날!

산수이는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누르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래, 언제까지 피하고 있을 수만은 없어. 설명을 해야 되는데, 설명을…….”

하지만 뭐라고 설명한단 말이냐.

‘게다가 이대로라면 한 명이 추가되고 말아.’

이 모든 사건의 전말을 눈앞에서 지켜본 마왕, 루헤.

그 역시 한 번은 더 공짜로 때를 밀어줘야 할 것이 분명했다.

그렇게 되면 이제부터 전쟁이 시작되겠지. 한 번이 어렵지, 두 번은 쉬운 법이니까.

절대 그렇게 둘 수는 없었다.

‘으으, 그렇게 되면 우리 비덴탕 매출 손해가 대체…… 가만, 근데 내가 왜 이런 걸로 고민하고 있어야 돼?’

산수이가 벌떡 일어나며 외쳤다.

“내가 여기 주인인데, 내 맘대로 좀 공짜로 밀어줄 수도 있지! 하기 싫으면 안 해도 되고-!”

“물론 하기 싫으면 안 해도 되죠, 수이.”

“으응……?”

순간 산수이의 눈앞에 흐릿한 환영이 번지더니, 그 아지랑이는 곧 루헤의 모습으로 변했다.

“하지만 기왕 시작한 거, 제 차례까지는 밀어줘야죠.”

“꺄악!”

검은 로브를 걸친 루헤가 완전한 모습을 드러냈다.

그가 산수이를 향해 미소 지으며 천천히 다가왔다.

산수이는 놀라 뒷걸음질 쳤지만, 곧 막다른 벽에 부딪혔다.

“윽!”

“이제 도망 못 가겠네요?”

그가 팔을 뻗어 산수이를 제 안에 가두었다.

그러고는 얼굴을 불쑥 들이밀며 싱긋 웃었다.

그 치명적인 미소에 산수이의 심장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아, 잘생겼…… 아니, 이게 아니지!’

또다시 루헤에게 홀릴 뻔한 산수이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정신을 차렸다.

“마, 마왕님? 저기 그러니까.”

“루헤.”

“루헤. 비켜주시면 참 감사할 것 같은데…….”

“먼저 약속부터 해요, 수이.”

“뭐, 뭐를요?”

“알면서.”

루헤가 산수이를 향해 또다시 예쁘게 활짝 웃었다.

“나랑 때밀이실로 가요, 지금 당장.”

나른하면서도 매혹적인 그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지자, 산수이의 가슴은 또다시 하릴없이 세차게 뛰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