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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 세신사 영애님-88화 (88/150)

88화.

루헤는 제 뒤에 선 세 남자에게서 이루 말할 수 없는 어둠의 기운이 뿜어져 나오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누구인진 몰라도, 단순히 목욕을 하러 온 평범한 객들은 아닌 것 같네요…….’

곧이어 루헤 역시도 그 사내들을 한 명씩 차례대로 훑어보기 시작했다.

먼저 은발의 사내가 그와 눈을 한번 마주치고는, 탕 안으로 들어와 루헤의 오른편에 자리하고 앉았다.

루헤는 그 사내의 손에 배긴 굳은살을 보며 짐작했다.

‘학자. 하지만 잘 단련된 몸과 기품 넘치는 걸음걸이로 봤을 때 그냥 공부만 한 자는 결코 아니겠어요. 인간들 중에서도 고위 귀족이겠군요.’

그다음으로 들어온 금발의 사내는 온몸이 흉터로 가득했다.

그 사내는 바로 맞은편에 앉아 살기 가득한 눈빛으로 루헤를 바라보았다.

루헤가 속으로 혀를 끌끌 찼다.

‘전장의 우두머리네요. 저자의 몸에 서린 피의 원한이 여기까지도 느껴지는 듯해요. 그런데 저 인간, 뭔가 낯이 익은데……?’

그리고 마침내 마지막 흑발의 사내가 제 왼편으로 다가와 물속에 몸을 담갔다.

그를 본 루헤의 눈이 놀라 커졌다.

‘이, 이자는 인간이 아니군요……?!’

그 마지막 사내를 한참 동안 관찰하던 루헤는 제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황금빛 눈동자 너머로 보이는 저 강렬한 기운, 그리고 그에게서 느껴지는 이 체취는.

‘설마? 하지만 그들은 이미 몇백 년 전…….’

그러나 루헤가 무어라 입을 열기도 전에, 그는 이 세 명의 사내가 모두 저를 뚫어져라 노려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오른쪽엔 백호랑이, 가운데는 사자, 그리고 왼쪽엔 드래곤 한 마리라…….’

이 형국을 바라보며 루헤가 제 입꼬리를 씩 비틀어 올렸다.

‘분명 이 세 명 중에 제가 찾는 자가 있겠네요.’

그렇게 네 남자는 드디어 노천탕 안에서 운명의 사자 대면을 시작하게 되었다.

넷 중 그 어느 누구도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

잠시간의 침묵이 흐르고 서로를 탐색하는 시간이 이어졌다.

마침내 그 정적을 깬 것은 다름 아닌 프리트였다.

그가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제 옆의 두 사내에게 말했다.

“이놈은 사우나스가 아니야.”

그 이름을 또다시 듣게 된 루헤 역시 표정이 좋지 않은 건 마찬가지였다.

‘또 사우나스라…….’

양쪽에서 프리트의 말을 듣고 있던 휘온과 얀피르는 예상치 못한 소리에 깜짝 놀랐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저하?”

“저하 네가 아는 놈이었어?”

하지만 프리트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는 단숨에 루헤의 코앞까지 다가가 제 커다란 손으로 그의 목을 덥석 붙잡았다.

“말해, 대체 여기까지 온 이유가 무엇이지?”

루헤가 뭐라 답하기도 전에, 휘온이 그들 사이에 끼어들어 프리트의 팔을 붙잡아 만류했다.

“저하, 이렇게 다짜고짜 목을 조르시면……!”

얀피르 역시 다가와 물었다.

“대체 이놈이 누군데!”

프리트는 루헤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그의 목을 한층 더 졸랐다.

분노한 그의 이마에서 핏줄이 불거졌다.

하지만 루헤는 그저 묘한 미소를 지으며 태연하게 말했다.

“평화 조약을 깨지 않는 것이 좋을 텐데요, 인간의 황태자?”

“너……! 내가 누군지 아는 모양이군? 조약을 아는 놈이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함부로 기어 나와 있어!”

하지만 루헤는 크게 하품을 할 뿐이었다.

“하아암, 저는 조약을 깬 적이 없어요.”

“지금 여기에 네놈이 있다는 것 자체가 그 증거라는 걸 몰라?”

“하지만 조약에 인간계에서 목욕하지 말란 법은 없었잖아요.”

“뭐……?”

루헤는 싱긋 웃으며 제 목을 조르고 있던 프리트의 굵은 팔목을 아주 가볍게 제압해 양쪽으로 크게 벌렸다.

그렇게 프리트는 루헤의 앞에서 강제로 양팔을 벌리고 서 있게 되었다.

그가 고통스럽게 신음했다.

“크윽…… 이거 안 놔?”

루헤의 악력이 얼마나 센지, 프리트는 그에게 잡힌 제 손을 움직일 수조차 없었다.

그런 프리트를 향해 루헤가 예쁘게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정식으로 인사드릴게요. 저는 마계의 대마왕 루헤 슈바츠발트. 뭐, 이미 다 알고 계신 것 같지만요.”

곧이어 루헤의 머리 양쪽에서 무서운 속도로 뿔이 자라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얀피르와 휘온은 그제야 비로소 루헤의 정체를 깨닫고는 경악했다.

“대, 대마왕……!”

“저를 이렇게 두 팔 벌려 환대해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네요, 인간의 황태자님.”

“이, 이 새끼가……! 이거 놔!”

한편 양옆에 선 휘온과 얀피르는 이 상황이 대관절 무엇인지 따라잡질 못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지금 이 천사같이 아름답게 생긴 사내가 마왕이라는 소리인가? 산수이가 오매불망 그리던 사우나스라는 놈이 아니라……?

얀피르가 혼란스러운 듯 중얼거렸다.

“마족? 그것도 대마왕이라고? 그럼 주인은 대체 왜 이놈을 사우나스라고……!”

그 말에 루헤가 고개를 돌렸다.

“그건 오히려 제가 묻고 싶은 말이에요. 대체 왜 다들 저를 사우나스와 착각하는 거죠? 불쾌하게.”

루헤의 말을 들은 세 남자가 일제히 놀란 표정으로 그를 돌아보았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그들의 입에서 같은 말이 튀어나왔다.

“너, 사우나스…… 그자를 알아?”

루헤가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말했다.

“당연히.”

프리트가 그에게 되물었다.

“그자의 정체가 대체 뭐지? 어서 말해!”

하지만 루헤는 하품을 크게 한 후 다시 물 안으로 쏙 들어가 눈을 감아버렸다.

“제가 왜 그래야 하죠? 보자마자 멱살부터 잡아대는 무례한 인간의 황태자에게 말입니다.”

“이 자식이……!”

그때 휘온이 가운데 나서 둘 사이를 중재하며 만류했다.

“자 자, 두 분 모두 진정하시고. 크흠!”

휘온은 곧바로 루헤를 향해 예를 갖춰 인사를 건넸다.

“처음 뵙겠습니다, 마계의 군주이시여. 저는 휘온 에데카나 공작.”

루헤가 만족스러운 듯 휘온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흐음, 그래도 한 분과는 대화가 통할 것 같네요.”

“휘온, 지금 뭐 하는 거야-!”

뒤에서 프리트가 성을 냈지만 휘온은 그를 무시한 채 계속해서 소개를 이어나갔다.

“그리고 저분은 이미 아시는 것 같지만 저희 제국의 프리트 폰 카데베르 황태자님이십니다. 그리고 이쪽은…….”

이어서 휘온은 얀피르를 가리켰다.

하지만 얀피르는 고개를 홱 돌리고는 저 역시도 물속으로 들어가 눈을 감아버렸다.

“마족과 통성명이라니, 웃기지 마. 그들과는 말도 섞지 않겠어.”

“……라고 하시는 저분은 얀피르 후작이고요.”

“후작……?”

루헤가 고개를 갸웃하곤 웃으며 물었다.

“드래곤이 아니고요……?”

그 말에 눈을 번쩍 뜬 얀피르가 루헤에게 달려들었다.

“너!”

“아아, 진정하세요. 일단 다들 이름은 알았으니까.”

루헤가 저에게 달려드는 얀피르를 막아 세우며 말했다.

“알고 싶잖아요? 사우나스에 대해. 아마 제가 아니면 들을 데가 없을 텐데요?”

“윽…….”

그 말에 우뚝 멈춰선 얀피르를 보고, 루헤가 만족한 듯 미소 지었다.

“이렇게 하자구요. 제가 사우나스에 대해 말해드릴 테니, 대신 여러분도 제 질문에 한가지 답을 해 주셔야 해요.”

“무슨 질문인데.”

프리트가 불만스러운 듯 내뱉었지만, 루헤는 그저 배시시 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그건 어차피 나중에 알게 되실 거예요. 그래서, 저와 거래를 하실 건가요, 마실 건가요?”

***

그렇게 루헤에게서 사우나스의 정체에 대해 듣게 된 세 남자는 그저 할 말을 잃었다.

“그러니까 사우나스가.”

“여신의 이름이라고?!”

당황한 세 남자를 보며 루헤가 예쁘게 미소 지었다.

“네, 맞습니다. 천족 중 한 명의 이름이지요.”

프리트가 이를 바득 갈며 루헤에게 물었다.

“네놈은 사우나스의 정체를 어떻게 알고 있던 거지?”

“흐암…… 말씀드렸잖아요, 저 대마왕이라고. 천족들의 이름을 아는 것이야 당연한 일이죠.”

이번엔 휘온이 물었다.

“하지만 고대 서적을 아무리 뒤져봐도, 사우나스라는 이름은 존재하지 않았었습니다. 대관절 그녀는 무엇을 관장하는 신이길래, 여태껏 역사 속에 등장하지 않았던 것입니까?”

루헤가 크게 하품하며 대답했다.

“그럴 수밖에 없죠. 사우나스는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신이니까.”

그 말을 들은 휘온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것은 그가 공부했던 그 어떤 책에도 서술되어 있지 않은 사실이었다.

“예에……?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다고요? 신은 태초부터 존재하던 것이 아니었습니까?”

그 말에 루헤가 진심으로 답답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니까 당신들이 과거에 마계 전쟁 따위를 겪은 거예요. 이렇게 아무것도 모르니까.”

“뭐야?!”

프리트가 성을 내었지만, 루헤는 크게 하품할 뿐이었다.

“하아암. 아무튼 사우나스는, 바로 목욕을 관장하는 신이에요.”

목욕을 관장하는 신!

그 말을 들은 세 남자는 무언가 얻어맞은 듯한 표정이 되었다.

그렇다면 산수이가 사우나스라는 자를 그리 애타게 찾아 헤매던 것도 이해가 되었다.

사우나스 그는 흑마술사도 아니었고, 산수이가 연모하는 사내도 아니었다.

그저 목욕을 관장하는 여신일 뿐이라니.

하지만 세 남자는 여전히 의문이었다.

그렇다면 산수이는 왜 돌아가고 싶다는 말을 한 거지?

사우나스가 여신의 이름이라는 것을 알게 된 지금이 오히려 더 불안했다.

정말로 산수이가 말한 ‘돌아가고 싶다’는 것은, 죽음을 의미하는 것인가? 신을 찾아 갈구해야 할 정도로?

하지만 루헤가 던진 한마디에 그들은 지금까지의 모든 의문을 풀 수 있었다.

“목욕탕 주인인 그녀가 목욕의 신에게 은총을 갈구하는 건 당연한 것 아니겠어요? 세 분 모두 뭔진 몰라도 오랜 헛걸음을 하신 듯 보이네요.”

“……!”

그렇다면 설명이 되었다.

산수이가 돌아가고 싶다고 한 건, 과거 비덴비덴 남작령이 목욕 관광명소로 이름나던 시절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여전히 산수이가 어떻게 사우나스의 존재를 알아낸 건지에 대한 의문은 남아있었지만.

적어도 저들이 지금껏 걱정했던 문제는 일단 해결된 듯싶었다.

이윽고 모든 설명을 마친 루헤는 하품과 함께 다시 뜨거운 물 속으로 들어가 노곤하게 몸을 지졌다.

하지만 얀피르는 여전히 의문스럽다는 표정이었다.

“그런데 마족 너, 우리가 산수이 때문에 사우나스를 찾고 있다는 건 어떻게 알았지?”

“그야…….”

그가 생긋 웃으며 세 남자를 향해 입을 열었다.

“제가 지금부터 여러분에게 질문할 것 역시 수이에 관한 것이니까요. 아까의 거래를 잊진 않으셨겠죠?”

“수, 수이?”

“설마 산수이를 말하는 겁니까?”

“너 이 자식, 그 애칭은 대체 뭐야?!”

하지만 루헤는 그에 대한 설명은 일절 하지 않았다.

그저 시뻘건 눈을 번뜩이며 그들에게 제가 묻고 싶은 것을 폭탄 터뜨리듯 던져넣었다.

“그래서, 나의 수이가 특별하게 생각하는 건 당신들 세 명 중 대체 누구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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