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국의 세신사 영애님-87화 (87/150)

87화.

다음 날이 되었지만 루헤는 여전히 남작령에서 떠날 줄을 몰랐다.

남작저의 귀빈실에 머물고 있던 그가 특명을 내리기 위해 휴와 듀를 자신의 방으로 불러들였다.

쌍둥이 박쥐들은 마왕이 저들을 불렀다는 사실에 잔뜩 흥분한 채 방으로 들어왔다.

인간 꼬마의 모습을 한 그들이 루헤를 향해 크게 외쳤다.

“마왕님!”

“명령해 줘!”

휴와 듀는 마왕의 발치에 무릎 꿇고 눈을 반짝거렸다.

하급 마족이 마왕을 마주하는 것은 흔한 기회가 아니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군주가 어떤 명령을 내릴지 가슴이 마구 뛰었다.

마침내 루헤가 그들에게 입을 열었다.

“지금 당장 마계로 돌아가서 슐레히트 보좌관에게 전해주세요. 제가 인간세계 정찰을 위해 며칠 마왕성을 비울 예정이라고요.”

“목욕탕 얘기는 빼고?”

“비밀로 해?”

루헤가 만족스러운 듯 웃으며 말했다.

“이해가 빠르네요. 이번 일을 잘 완수한다면, 또 이곳을 방문할 수 있게 해 줄게요.”

쌍둥이들이 눈을 빛내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응응!”

“우리 약속 잘 지켜!”

그렇게 두 꼬마 마족은 박쥐의 모습으로 변해 창밖으로 날아갔다.

한편 그의 방으로 들어오던 산수이는 창밖으로 날아가는 휴와 듀를 발견했다.

그녀가 혀를 내둘렀다.

“저 애들도 역시 마족이었던 거군요? 세상에, 박쥐였다니.”

“그럼 마왕이 데리고 다니는 애들이 천사라도 될 줄 알았나요, 수이?”

“하아. 그래서 대체 언제까지 여기 머무르실 거냐고요. 마왕님이 이렇게 인간세계를 막 돌아다니고 그러시면 안 되는 거 아니에요?”

“그래서 최대한 들키지 않게 여기에만 머무르고 있는 거잖아요, 수이.”

“그러니까 왜요!”

“왜냐니…….”

루헤가 산수이에게 다가가 그녀의 귓가에 대고 나른하게 속삭였다.

“그야, 수이가 나의 때를 밀어주는 게 좋으니까요.”

그의 목소리가 귓가에 닿자 산수이의 몸에 한기가 느껴졌다.

이어서 루헤가 희고 차가운 손으로 그녀의 머리카락을 살며시 쓸어내렸다.

그러자 산수이의 온몸에서 솜털이 쭈뼛쭈뼛 돋았다.

하지만 루헤의 그 아름다운 얼굴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얼어붙을 것만 같았던 심장도 이내 사르르 녹아버리고 말았다.

‘도대체 이 마왕 놈은 뭐야? 몽마라도 되는 걸까? 어떻게 이렇게 사람을 홀려……?’

사실이었다.

몽마의 피를 이어받은 루헤의 가장 강력한 무기는, 바로 타고난 얼굴이었던 것이다.

한편 루헤는 산수이를 바라보며 속으로 한 가지 고민에 잠겨있었다.

‘흐음, 수이한테 미혹술을 써야 할까요, 말아야 할까요……?’

지금 마음만 먹으면 그녀를 사로잡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제가 미혹술을 담아 산수이를 한 번만 바라보고 나면, 그녀는 몸과 마음까지 자신의 포로가 될 터였다.

하지만 왠지 그녀에게만큼은 그러고 싶지가 않았다.

‘이상하게도 수이가 꼭두각시처럼 움직이는 모습은 보고 싶지가 않단 말이죠.’

그렇게 되면 자신의 말에 발끈하는 저런 귀여운 모습도, 톡톡 튀어 오르는 듯한 말투도 모두 더 이상은 보고 들을 수 없게 될 것이었다.

그래서 우선은 그녀를 이대로 내버려 두고 조금 더 지켜볼 요량이었다.

‘미혹술이야 언제든 사용할 수 있으니 서두를 필요가 전혀 없으니까요.’

그가 산수이를 바라보며 생긋 웃었다.

***

그렇게 오늘도 산수이는 루헤의 세신사로 직접 나섰다.

그의 말대로 다른 세신사를 들여보냈다가는 무슨 사달이 날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으니까.

‘평화 조약이 있으니 인간을 그리 함부로 죽이진 않겠지만, 그래도 이상한 마법이라도 걸려서 나올지 누가 알아!’

게다가 루헤가 원하는 것은 아무래도 자신의 베테랑급 때밀이 기술인 것 같았다.

그래서 당분간은 그가 원하는 대로 맞춰주는 게 낫다고 판단했다.

산수이는 VVIP 때밀이실에서 제 손에 이태리타월을 돌돌 감았다.

‘설마 여기 평생을 죽치고 있겠어? 언젠간 저도 마계로 돌아가야 하겠지. 마왕이라며!’

일 안 하고 비덴탕에 죽치고 머무는 건 이 대마왕이나 황태자인 프리트나 똑같다고, 산수이는 생각했다.

‘참 인간계나 마계나 걱정이다, 걱정.’

그렇게 산수이는 또다시 루헤의 몸 위에 제 손을 얹고 때를 밀기 시작했다.

그의 때를 밀어줄 때마다 느끼는 거였지만, 마족의 피부는 확실히 인간의 것과는 사뭇 달랐다.

굳이 비교하자면 드래곤인 얀피르의 피부와 비슷하다고 해야 할까.

웬만한 날붙이로는 뚫을 수 없을 것 같은 그런 단단함.

얀피르와 한 가지 다른 게 있다면 바로 그의 살갗에 손을 댔을 때 전해져 오는 느낌이었다.

피부 밑으로는 피가 돌지 않는 듯, 마족의 피부는 소름이 돋을 만큼 차가웠다.

하지만 그의 몸에 손을 대고 있노라면 홀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시리도록 섬뜩하면서도, 손을 뗄 수가 없는 중독성이 있달까.

‘이래서 악마한테 홀린다는 말이 나오는 건가 봐.’

그의 몸에 손끝만 갖다 대도 매혹당할 것 같은 기분이 드는데, 루헤는 계속해서 산수이를 보며 살살 눈웃음을 쳐 대기까지 했다.

게다가.

“흐으응…… 정말 시원하네요, 수이.”

그 목소리는 여태껏 산수이가 들어본 중 가장 교태로운 것이었다.

‘아니 무슨 목소리까지 저래? 진짜 미치겠네!’

결국 시각, 촉각, 청각의 3박자에 지배되어 정신이 혼미해진 산수이.

그녀는 갑자기 제 입가를 타고 흘러내리는 뜨뜻하고 비릿한 감촉에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어……?’

하지만 이미 그녀의 코에서 흘러내린 붉은 핏방울이 루헤의 팔뚝 위로 툭툭 떨어지고 있었다.

당황한 산수이가 자신의 코를 부여잡고는 루헤에게서 한걸음 물러났다.

‘코, 코피……? 나 지금 저 마왕 때문에 코피 흘린 거야?!’

산수이는 근처의 수건을 집어 들곤 얼른 루헤의 팔에 묻어있는 제 핏자국을 닦아주려 했다.

하지만.

이미 몸을 일으킨 루헤가 제 팔에 묻어있는 산수이의 피를 가볍게 핥기 시작했다.

할짝—

너무도 태연한 그의 모습에 산수이의 손에 들려있던 수건이 바닥으로 툭 하고 떨어졌다.

“마, 마왕님? 그걸 왜 드세요……?”

하지만 루헤는 산수이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그저 계속해서 제 팔에 묻은 그녀의 피를 핥았다.

마침내 고개를 들어 올린 그가 새빨간 입술을 슥 닦으며 배시시 미소 지었다.

“맛있어서요, 수이.”

그 말을 들은 산수이는 거의 혼절할 지경이 되어 소리쳤다.

“서, 설마 당신 흡혈귀야?!”

“이런, 들켜버렸네. 그럼 어디 한번 맛 좀 볼까요……?”

루헤가 새빨간 눈을 번뜩이며 산수이의 목에 제 이를 갖다 댔다.

“꺄, 꺄악! 살려줘! 잡아먹지 마세요!”

산수이는 온 힘을 다해 발버둥 쳤다.

그때 갑자기 루헤가 그녀의 어깨에 제 얼굴을 파묻고는 미친 듯이 웃기 시작했다.

“크, 크큭. 아하하하……!”

“살려……! 어?”

“크큭. 아 미안해요, 수이. 많이 무서웠어요?”

“뭐, 뭐야. 나 안 잡아먹는 거예요?”

“아하하, 그럼요. 저, 인간을 잡아먹는 악취미는 없거든요.”

그가 배시시 웃으며 생각했다.

‘다른 거라면 몰라도.’

그렇게 제 앞에서 웃는 루헤를 보고 있자니 산수이는 부아가 치밀었다.

그래서 그의 등짝을 마구잡이로 두드려 패기 시작했다.

“놀랐잖아요! 사람 놀리는 게 재밌어요? 왜 그런 장난을 쳐, 왜!”

하지만 루헤가 그녀의 손목을 콱 잡아 말렸다.

아까까지의 장난기 어린 목소리는 온데간데없어진 그가, 진지한 눈빛으로 산수이를 향해 말했다.

“그야 당신이 나를 계속 무서워하니까. 자꾸 날 괴물 보듯이 하고 있잖아요, 어제부터. 빨리 쫓아내려고만 하고.”

산수이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사실이었으니까.

그런 산수이에게 루헤가 다시 한 번 강조하듯 말했다.

“내가 말했잖아요. 나는 두 종족 간의 평화를 원한다고.”

“……정말요?”

“정말이에요.”

산수이는 여전히 의심스럽다는 표정으로 조심스레 물었다.

“그럼 여기 머무는 동안 나뿐만 아니라 누구도 해치지 않을 거예요?”

“누구도 해치지 않는다고 약속해요. 난 그냥 인간세계에 휴가를 즐기러 왔을 뿐이라니까요.”

“알겠어요. 미안해요, 멋대로 오해해서…….”

멋쩍은 표정을 짓는 산수이를 향해, 루헤는 일전의 천사 같은 미소를 다시금 지어 보였다.

하지만 그녀를 바라보는 루헤의 눈빛은 이전과는 사뭇 다른 것이었다.

“미안하면 내 부탁 하나만 들어줄래요?”

“뭔데요?”

루헤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물었다.

“대체 왜 마왕인 제게, 인간 황족과 똑같은 요금을 적용하는 거죠?”

“네……?”

황족의 때밀이 요금 1만 에우로, 즉 천만 원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 말에 산수이의 머릿속을 지배하던 공포가 한순간 싹 사라졌다.

산수이의 눈빛이 순식간에 사업가의 것으로 변했다.

“당연히 황족 요금을 내셔야죠? 그냥 마족도 아니고, 대마왕님이시잖아요?”

“하지만 전 인간이 아닌데요.”

“그럼 여기에다 항목을 추가하죠, 뭐.”

“뭐라고요.”

“종족 불문.”

“…….”

루헤의 표정이 서늘하게 변했지만, 산수이는 조금도 움츠러들지 않았다.

루헤가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아까 나를 무서워하던 인간은 어디 갔죠, 수이?”

“어머, 제가 언제요?”

돈 얘기라면 상황이 다르지.

루헤가 아쉽다는 듯 말했다.

“흐음. 첫날과 같은 특별 대우는 다신 없을 모양이네요.”

“당연하죠.”

그렇게 말하던 산수이는 저도 모르게 손을 멈칫했다.

마냥 그렇다고 하기엔 이미 휘온과 프리트에게 무료 세신을 해주지 않았던가.

‘드, 들키지만 않으면 되는 거니까!’

산수이는 태연한 척 웃어 보였다.

하지만 그녀를 지켜보고 있던 루헤는 이미 돌아가는 상황을 파악한 후였다.

‘흐응, 누군진 몰라도 수이에게 무료로 때를 민 놈이 나 말고 또 있는 모양인데……?’

그는 왠지 기분이 불쾌해졌다.

대체 어떤 놈일까?

그리고 한편으로는 이걸 궁금해하는 제 자신이 놀라웠다.

자신이 이토록 타인에게 관심을 가졌던 적이 있었던가?

산수이가 특별 서비스를 해 준 놈.

그 질문에 대한 해답은 얼마 후 찾을 수 있었다.

***

루헤는 노천탕에 몸을 푹 담근 채 경치를 감상하고 있었다.

‘정말 아름답고 평화롭네요…….’

아마도 선대 마왕이 인간계를 침략하고 싶었던 이유 역시 이런 것 때문이었으리라.

오랜 세월 지하에만 갇혀 지냈던 마족들은 이제 땅속의 삶에 이골이 나 있던 상태였다.

그들 역시 땅 위의 삶을 동경했으니까.

그리고 이는 루헤 역시 마찬가지였다.

햇빛을 받고 자란 신선한 작물들을 마음껏 소비하고 싶었다.

자연을 감상하며 맑은 물과 바람을 만끽하는 꿈을 항상 꿨다.

‘모든 종족이 화합하여 함께 공존하며 살아가는 것은 정말 불가능한 일일까요……?’

하지만 그러기엔 자신들의 조상이 이미 피를 너무 많이 본 후였다.

심지어 저들 때문에 지상에 숨 쉬던 한 종족은 아예 역사 속에서 사라지지 않았던가.

루헤는 제 옆에 놓아두었던 바나나우유에 빨대를 톡 꽂아서 쭉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그것은 지하 세계에서는 먹어볼 수 없었던 황홀한 달콤함이었다.

‘그녀의 피 역시 이처럼 달았었죠.’

그의 머릿속에 산수이가 떠올랐다.

그녀가 자신의 품에서 울던 모습부터 시작해 놀라던 표정, 웃는 표정, 화내는 표정…….

그 다채롭던 얼굴들이 하나씩 파노라마처럼 그의 머리에 떠올랐다 스러졌다.

제가 근 몇백 년 동안 재야에서 낚시나 하며 지내던 동안, 이보다 더 자신의 흥미를 끄는 것이 있었던가.

‘역시 피의 계약을 맺어 수이를 마왕성의 안주인으로 데려가 버려야 할까요……?’

그렇게 한다면 영원히 그녀를 자신의 곁에 둘 수 있을 텐데.

그런 생각을 하던 찰나, 갑자기 그의 뒤에서 누군가의 인기척이 느껴졌다.

루헤가 뒤를 돌아본 곳엔, 세 명의 미남자들이 허리에 수건을 두른 채 삐딱하게 서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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