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국의 세신사 영애님-86화 (86/150)

86화.

산수이는 계속해서 마왕 루헤의 때를 밀어주고 있었다.

세상 어느 때보다 더 열심히 밀고 있다고 자부할 수 있을 정도로.

‘나는 지금 인간세계의 평화를 위해 이 한 몸 바치고 있는 것이다.’

혹시라도 마왕의 몸에 상처라도 냈다간 종족 간 전쟁으로 번질지도 모른다고 산수이는 생각했다.

‘대체 마왕이 목욕탕엔 왜 방문한 거야? 인간세계에 갈 데가 그렇게 없어?’

한편 루헤는 산수이가 아까와는 다르게 기합이 잔뜩 들어간 채 자신의 때를 밀고 있는 것이 퍽 귀엽다 느껴졌다.

그래서 조금 놀려주기로 결심했다.

“흐음…… 어째 처음과는 좀 다른 느낌이네요.”

“다르다뇨?”

“혹시 내가 마왕인 걸 알고 나서 더 잘 밀어주는가 싶어서요.”

너무나 정곡을 찌르는 말에 뜨끔했던 산수이는 저도 모르게 때를 밀던 손을 멈춰버렸다.

그 반응에 루헤가 작게 웃었다.

“정말인가 보네? 에이, 장사 그렇게 하면 안 돼요, 수이.”

“그, 그런 거 아닌데요? 그리고 수이는 대체 뭔데요!”

“그대와 나 둘 사이의 애칭이라고 해 두죠.”

“그러니까 제가 왜 마왕님과 애칭을?”

“마왕이라고 부르지 마요, 수이.”

“그럼 뭐라고 불러요.”

“자, 따라 해 봐요, 내 이름. 루헤-라고.”

아니, 이놈이나 저놈이나 왜 이렇게 이름으로 부르라고 난리야!

하지만 산수이는 그의 나른하면서도 뇌쇄적인 눈빛에 이끌려 결국 입을 열었다.

“루…… 루헤 님.”

“님 빼고요, 수이.”

“수이라고 부르지 마시라니까요?”

“싫은데요? 수이.”

루헤가 실실 웃으며 산수이의 말꼬리를 잡았다.

루헤는 저 자신도 신기할 노릇이었다.

눈 뜨는 것도 귀찮던 제가 이렇게 상대와 오래 대화를 나누기는 실로 오랜만이었으니까.

‘잔소리만 해대는 슐레히트 그놈보다야 훨씬 더 재미있긴 하네요.’

루헤는 자신의 보좌관을 떠올리며 고개를 저었다.

슐레히트 그는 자신의 나른한 일상에 가장 방해가 되는 인물이었다.

루헤가 마왕성에서 낮잠을 퍼질러 자고 있을 때면, 으레 나타나 제왕의 본분에 대해 일장 연설을 늘어놓곤 했으니까.

하지만 지금 이렇게 누워서 때밀이를 받고 있자니, 그 귀찮았던 기억은 이미 까마득하게 멀어져만 가고 있었다.

게다가 이 인간 여자가 해주는 때밀이라는 것을 받고 있으니 자꾸만 몸과 마음이 간지러웠다.

저도 모르게 계속 그녀와 대화를 나누고 싶은 이상한 마음이 들었다.

그런 루헤를 보며 산수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 그런데요, 마왕님.”

“루헤.”

“루헤, 대체 인간세계는 왜 방문하신 거예요? 혹시 전쟁을 일으킨다거나…… 그러실 생각은 아니죠? 아닐 거예요, 그쵸?”

산수이는 여차하면 프리트에게 전서구를 날릴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질문에 대한 루헤의 대답은 예상외의 것이었다.

“애초에 난 인간계와의 전쟁을 막기 위해서 마왕이 된 건데요?”

“……네?”

루헤는 크게 한 번 하품한 뒤, 귀찮음을 무릅쓰고 산수이에게 지금까지의 일을 대강 설명해 주었다.

그의 이야기는 간단했다.

선대 마왕이 인간계와 다시금 전쟁을 일으키려 하길래, 전쟁을 막기 위해 그를 죽여버리고 자신이 대신 마왕좌에 올랐다는 것이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산수이는 더더욱 혼란스러워졌다.

‘저게 말이 돼?!’

마족인 그의 말을 믿어야 할지 도통 감을 잡을 수 없었지만, 하나는 확신할 수 있었다.

이렇게 저에게 때를 밀리고 있는 상황에선 그게 누구든 진짜 속마음을 털어놓지 않던가.

‘하지만 마족에게도 내 때밀이 기술이 통하는지는 확인된 적이 없으니까, 혹시 모르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걸지도.’

그래서 산수이는 루헤에게 또다시 질문을 던졌다.

“인간세계와의 전쟁을 막기 위함이었다고요? 루헤도 마족이잖아요. 보통 마족들은 호전적이라고 하던데.”

그러자 일순 둘 사이의 공기가 얼어붙었다.

루헤가 서늘한 표정으로 산수이를 바라보았다.

“수이.”

그가 정말로 모르겠냐는 듯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전쟁이 나면 번거롭게 참전해야 하잖아요.”

크게 하품을 하던 그가 나른한 표정으로 산수이를 향해 미소 지었다.

“그게 아니라면 굳이 그를 왜 죽였겠어요, 귀찮게.”

몇 번을 들어도 도저히 말 같지도 않은 이유였다.

산수이는 제 손에 감긴 때수건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내 때밀이 능력이 마족에게만 예외인 게 아니라면, 저건 진짜 대마왕의 진심이라는 건데.’

그때 나른한 표정의 루헤가 꿈을 꾸듯 배시시 웃었다.

“때마침 마왕성 침대가 정말 푹신해서…… 낮잠 자기에도 딱 좋더라고요.”

이쯤 되니 산수이는 정말로 경을 칠 노릇이었다.

‘저게 진심이든 아니든 미친놈은 확실하다!’

산수이는 요동치는 동공을 감추며 열심히 손을 놀려 루헤의 몸을 밀어댔다.

얼른 끝내자. 최대한 빨리 마무리해서 돌려보내야 한다.

더는 이 정신 나간 귀차니즘 최종 보스와 얽히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슬프게도 이 미친놈은, 너무…… 예뻤다.

그래서 산수이는 도무지 루헤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저 얼굴이 어떻게 마족이야? 어떻게 마왕이냐고! 천사라고 해도 믿겠다!’

이 세계에 와서 여태껏 수많은 미남들을 봐 왔지만, 루헤는 그들과는 사뭇 달랐다.

‘이건 말하자면…… 잘생겼다는 차원을 넘어서, 그냥 아름다워!’

가장 완벽한 피조물이란 바로 이런 게 아닐까.

새하얗기만 한 줄 알았던 그의 피부는 햇빛에 반사될 때마다 찬란한 무지갯빛이 났다.

어찌나 투명한지, 마치 그 안의 핏줄이 그대로 다 드러나 보일 것처럼.

자신을 보며 나른하게 웃고 있는 붉은 눈동자도 이제는 루비같이 영롱해 보였고.

루헤가 눈을 깜빡일 때마다 그의 인형 같은 속눈썹을 넋 놓고 바라보게 되었다.

그렇게 모든 것이 다 산수이의 마음을 헤집어놓고 있었다.

손이 베일 것만 같이 날카로운 콧날도, 공단처럼 찰랑이는 저 군청색의 길고 탐스러운 머리칼도.

어느 하나 세상의 때가 전혀 묻지 않은, 천상의 것이라고밖에는 설명할 수 없었다.

꿀꺽.

산수이는 그의 얼굴을 한번 어루만져 보고 싶은 욕망을 힘겹게 꾹 내리눌렀다.

‘미치게 예쁘다, 진짜…….’

이러니 아까 자신이 루헤를 사우나스라고 착각하곤 그에게 안겨 울었던 게 아닌가.

마족을 천족이라 착각해서!

정말이지 그건 이불킥 백 년 감이었다.

산수이는 서둘러 바가지에 물을 퍼서 루헤의 몸에 뿌려주었다.

어서 이 홀릴 듯한 때밀이를 끝마치기 위함이었다.

“자, 때밀이가 모두 끝났습니다, 고객님. 그럼 저는 이만.”

하지만 벌떡 몸을 일으킨 루헤가 산수이에게 제 얼굴을 들이대는 게 더 빨랐다.

“고, 고고 고객님?!”

“흐음…… 마력이라곤 전혀 느껴지지 않는데.”

“네?”

“아니 꼭 마법을 부리는 것같이 나를 계속 흔들어 놓길래 하는 말이에요.”

그가 또다시 예쁘게 웃으며 산수이와 눈을 맞추었다.

제 앞에서 사슴처럼 깜빡이는 깊고 붉은 눈망울을 보자, 산수이는 정신이 나갈 지경이었다.

‘와 정말 이 마왕님, 사람 잡겠네!’

그녀는 제 얼굴이 벌게지는 것을 느끼며 서둘러 자리를 피하려고 했다.

하지만 루헤는 산수이를 쉽사리 놓아주질 않았다.

“가지 마요, 수이. 이렇게 누군가와 오래 대화를 나눈 게 실로 처음이라 신기해서 그래요.”

“아하하…… 원래 때밀이를 하실 때는 다른 고객님들께서도 말이 많아지시는 편이세요. 자연스러운 겁니다, 네.”

절대 루헤의 반응이 특별한 게 아님을 강조하기 위해 한 대답이었다.

하지만.

“아아, 그런 거군요?”

루헤가 싱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럼 심심한데, 앞으로 더 자주 와야겠네요.”

자주 온다고?

당황한 산수이가 서둘러 말을 내뱉었다.

“아, 저는 앞으로 매우 매우 바쁠 예정이라, 또 때를 밀고 싶으시다면 다른 세신사를 배정해 드리겠…….”

그 말을 들은 루헤의 입가는 여전히 미소를 짓고 있었으나, 눈동자는 그렇지가 못했다.

그가 서늘한 눈빛으로 물었다.

“그대가 아닌 다른 사람을 배정했다가, 내가 그 세신사를 죽여버리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래요?”

“……!”

“농담이에요, 수이.”

잘못 걸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곱게 미친 예쁜 놈한테 잘못 걸린 것이다.

***

한편 에데카나 공작저의 식당에서는 한바탕 술판이 벌어지고 있었다.

분명 처음은 우아하게 와인 한 병으로 시작했었다.

휘온이 직접 지하실로 내려가 제가 가진 중 가장 독하고 귀한 와인을 엄선해 골라왔었고.

최고급 안주와 함께 우아하게 셋이서 와인 잔을 쨍 하고 마주쳤었는데.

그런데 어쩐 일인지 세 남자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테이블 위에 수십 개의 빈 병이 굴러다니고 있었다.

이미 최초의 와인병은 비워진 지 오래였고, 휘온의 저장고에 있던 각종 술들이 모두 동이 난 것도 모자라.

프리트가 황궁에서 추가로 훔쳐 온 독한 양주병까지 테이블 위에 널브러져 있었다.

이제 거의 필름이 끊기다시피 한 얀피르가 제 머리를 힘겹게 들어 올리며 구슬프게 중얼거렸다.

“주인…… 주인이 말이야, 딸꾹! 내가 자기 취향이라고 그랬거든?”

크게 딸꾹질을 해 대는 그를 바라보며 프리트 역시 혀 꼬부라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 쉐…… 이 쉐키가 그 조신남이었어. 그랬던 거였쒀! 얀피르 이놈이 조신남이었어!”

휘온 역시 한마디 거들었다.

“저 짐승 놈이 조신하다뇨? 히끅. 그 무슨 말도 안 되는 말씀이십니까아!”

그러자 얀피르가 손을 크게 내저으며 말을 했다.

“그게 아냐! 그게 아니라고…… 딸꾹. 주인이 좋아하는 건 그저 내 얼굴뿐이었다고!”

그렇게 내지른 얀피르는 테이블에 제 이마를 쾅 박고 쓰러졌다.

그 말을 들은 프리트가 불쾌하게 뇌까렸다.

“이 드래곤 놈의 쉐키…… 지금 자기가 잘생겼다고 제 입으로 말한 건가? 어? 감히 나! 프리트를 앞에 두고!”

얀피르와 프리트를 보며 휘온이 혼자 조용히 중얼거렸다.

“이 중 제일 잘생긴 건…… 그래도 나 아닌가?”

그때 얀피르가 벌떡 일어나 외쳤다.

“나도 주인이 내 얼굴만 좋아하는 줄 알았어! 그런데 주인은 잘생긴 남자면 다 좋대! 게다가 사우나스라는 그놈은 정말, 정말…… 잘생겼더라고.”

그 말을 끝으로 얀피르는 다시 테이블에 제 머리를 쾅 박고는 깊은 잠에 빠져버렸다.

얀피르의 말을 듣던 프리트와 휘온의 표정 역시 심각하게 일그러졌다.

프리트가 재빨리 얀피르에게 다가가 그를 흔들어 깨워댔다.

“어이 드래곤! 일어나! 그 사우나스라는 새퀴는 조신했어? 엉? 조신했느냐고 묻잖아! 이런 제기랄!”

분노에 휩싸인 프리트를 향해 휘온이 제 짙은 회색빛 눈동자를 빛내며 말했다.

“이럴 게 아니라 지금 당장 남작저로 가 보죠! 제가 이 두 눈으로 확인해야겠습니다. 대체 사우나스라는 놈이 어떤 놈인지! 얀피르! 당장 변신해, 얼른!”

휘온이 얀피르를 거칠게 흔들어 깨웠다.

하지만 이미 의식이 끊긴 얀피르는 테이블에서 일어날 줄을 몰랐다.

그런 휘온의 어깨에 프리트가 손을 턱 올리며 만류했다.

“휘온, 안 돼. 안 된다고!”

“뭐가 안 된다는 겁니까, 저하!”

프리트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마지막 말을 내뱉었다.

“음주 비행은…… 위험하다고.”

그 말을 끝으로 프리트 역시도 테이블 위로 엎어져 깊은 잠에 빠졌다.

두 남자를 바라보며 휘온이 안 되겠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후우. 이 사람들, 이렇게 술이 약해서야. 벌써 쓰러지면 어떡해? 이제 시작인데.”

그렇게 휘온은 마지막 남은 양주를 모조리 제 술잔에 따라 마시기 시작했다.

그렇게 에데카나 공작저의 밤이 깊어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