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루헤는 방금 전 눈앞의 인간 여자가 한 말이 무슨 뜻인지 전혀 알아듣지 못했다.
“뭘…… 민다고요?”
“때요! 제가 때 밀어드릴게요. 아까 큰 결례를 범한 만큼, 최상의 서비스로 모시겠습니다.”
“아니 그러니까, 때를 민다는 게 대체 무슨 뜻인지…….”
그 말에 오히려 산수이가 깜짝 놀랐다.
‘지금 제국에서 제일 핫한 때밀이를 모르신다고? 역시 이 고객님은 외국에서 오신 분인가?’
산수이는 그제야 납득이 갔다.
왜 여전히 사우나스가 자신을 찾아오지 않는지.
이렇게 아직까지도 때밀이의 존재조차 모르는 사람들이 남아있는데, 제가 신이라 해도 강림하지 않을 것이었다.
‘그래, 아직 미션이 제대로 수행되지 않은 거였어. 많이 부족했네. 정진하자. 오늘 이 고객님 제대로 모셔서, 저분의 나라에도 때밀이를 전파하는 거야.’
그렇게 다짐하며, 산수이는 루헤에게 때밀이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고객님, 스크럽은 해 보신 적 있으시죠?”
“스크럽……?”
스크럽도 해 본 적 없는 고객이라니.
그렇다면 괜히 때밀이에 대해 장황하게 설명했다간 자칫 혐오감만 불러일으키게 될지도 몰랐다.
산수이는 제2의 플랜으로 가기로 결심했다.
“때밀이를 받으시면 고객님의 피부가 정말 새로 태어난 듯 매끄러워지실 거예요! 고객님께선 그저 저에게 모든 걸 맡기시고 마사지 베드에 편안히 누워계시기만 하면 됩니다.”
이른바 설명을 생략한다 플랜이었다.
“누워있기만 하면 된다고요……?”
루헤는 이 인간 여자가 하는 말에 점점 흥미가 생기기 시작했다.
감히 한낱 인간인 주제에 몇백 살이나 먹은 저를 다시 태어난 듯 만들 수 있다고 자부하는 것이 우습기도 했지만.
그가 꽂힌 부분은 따로 있었다.
그냥 누워있기만 하면 된다는 것.
세상 그보다 편안하게 들리는 말이 있을 수 없었다.
게다가 마사지 베드라니.
그 때밀이라는 것이 대관절 어떤 것인지는 몰라도 일단 누워서 마사지를 받는 것과 비슷할 거라고 추측되었다.
‘적어도 날 귀찮게 하려는 것은 아니겠군요……?’
루헤가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그 때밀이라는 거 받아볼게요. 하아암…….”
***
산수이는 VVIP 때밀이실로 루헤를 모시고 갔다.
그곳은 남녀 고객의 구분 없이 때를 밀어드릴 수 있도록 얼마 전 새로 지은 곳이었다.
새하얀 대리석으로 꾸며진 방 안엔 몸을 불릴 수 있는 작은 욕조가 딸려있었다.
그 뒤로는 새로 들여온 최고급 대리석 판이 크게 자리하고 있었다.
마치 천국을 연상시키는 새하얀 인테리어에 루헤가 잔뜩 인상을 찌푸렸다.
‘너무 밝잖아요……!’
그가 때밀이실을 둘러보며 괜한 걸음을 한 것은 아닐까 생각하던 찰나.
산수이가 그에게 욕조를 가리켰다.
“그럼 이곳에서 몸을 충분히 불려주십시오. 20분쯤 지나서 들어오겠습니다.”
“……알겠어요.”
이윽고 산수이가 문을 닫고 나가자, 루헤는 제 눈앞에 있는 욕조를 빤히 바라보았다.
마계에서는 경험해보지 못한 괴상한 문화였다.
‘이것이 휴와 듀가 말한 목욕탕이라는 것인가 보죠.’
물론 마족들의 세계에도 수영장은 존재하긴 했다.
용암으로 만들어진 수영장이라는 게 조금 다른 포인트였지만.
하지만 루헤는 그 용암 수영장을 정말로 혐오했다.
그곳에서 나는 특유의 냄새도 싫었고, 용암이 부글부글 끓는 소리도 싫었다.
마족들이 시끄럽게 모여 서로 패싸움을 해 대는 분위기가 가장 최악이었다.
하지만 인간계의 목욕탕은 머리에 수건 하나 올려둔 채 그저 명상하듯 온수에 몸을 지질 뿐이라고 했다.
그야말로 딱 루헤의 온화한 성품에 걸맞은 고급스러운 취미 생활이 아니겠는가.
‘게다가 이곳은 저 혼자만 쓸 수 있는 개인실이기까지 하네요? 좋아, 마음에 들어요…….’
그렇게 루헤는 조심스럽게 욕조 안에 몸을 담갔다.
“하아아…….”
인간의 목욕탕이라는 것은 생각보다도 꽤 괜찮았다.
그는 머리끝까지 물속에 잠긴 채 적절히 데워져있던 물의 온도를 즐겼다.
‘노곤하니 좋네요…….’
그렇게 루헤는 물속에서 그대로 잠이 들어버렸다.
한편 산수이는 이 낯선 고객이 20분이 지나도록 자신을 부르지 않자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설마 목욕하다 잠드셨나?’
결국 30분이 지나도록 그에게서 아무런 말이 없자, 산수이는 염치 불고하고 목욕탕 안으로 들어가 보기로 했다.
“저, 고객님……?”
끼익 하고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지만 루헤에게선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산수이는 때밀이실 내부를 훑어보았으나, 루헤는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어? 어디 가셨지?”
그녀는 곧바로 때밀이실 전체를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여전히 그를 찾을 수 없었다.
놀란 산수이가 경비를 부르기 위해 때밀이실을 나가려던 찰나.
“으, 으악!”
그녀는 목욕탕 안에 잠수한 채 잠들어있는 반라의 루헤를 발견하고 말았다.
“고객님!”
산수이는 욕조 안으로 들어가 그 안에 잠들어있는 루헤를 재빨리 건져냈다.
“정신 차리세요!”
하지만 그는 여전히 눈을 뜨지 못하고 있었다.
서둘러 그의 코에 손을 갖다 대 보았으나 숨결이 느껴지지 않았다.
원래도 새하얀 그의 얼굴이 더욱더 시체처럼 보였다.
‘수, 숨을 안 쉬셔!’
도대체 이 안에서 얼마나 오래 있으셨던 거지?
산수이의 얼굴이 공포에 질려 새하얘졌다.
그의 얼굴을 몇 차례 두들겨보다, 이어 인공호흡을 해야겠다고 결심하던 찰나-.
루헤가 눈을 반짝 떴다.
“고, 고객님!”
“흐아암…… 대체 무슨 일이죠?”
하지만 그에게 뭐라 답하기도 전에 긴장이 탁 풀려버린 산수이가 또다시 울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루헤는 재차 당황했다.
“이, 이봐요? 목욕탕 주인?!”
“고객님 정말 죽은 줄 알았잖아요, 흐어엉-.”
“아니 죽긴 누가 죽…….”
산수이는 정말로 많이 놀랐었는지 어깨를 들썩이며 울음을 그칠 줄 몰랐다.
루헤는 하는 수 없이 그녀를 엉거주춤 품에 안고는 등을 토닥여주었다.
‘하아, 미치겠네. 이 인간 여자는 왜 자꾸 나만 보면 우는 거죠……?’
귀찮은 건 딱 싫은 그였지만.
그는 자꾸만 이 목욕탕 주인 인간과 얽혀드는 것 같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누군가랑 엮이는 건 딱 질색인데 말이죠…….’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 마음을 진정시킨 산수이는 루헤의 때를 밀어주기 위해 손에 이태리타월을 감았다.
마사지 베드 위에 길게 엎드린 루헤가 그녀를 흘끔 바라보며 물었다.
“이제 다 울었습니까?”
“놀리지 마세요.”
“물속에서 잠수 좀 할 수도 있지 뭘 그리 놀라고 그래요.”
“보통은 그렇게 오래 잠수하지 않잖아요.”
“몸을 불리라면서. 그럼 오래 들어가 있을수록 좋은 거 아닌가요?”
“설마 30분 내내 잠수하고 있었단 소린 아니시죠?”
산수이는 설마 그럴 리 있겠냐 생각하며 피식 웃고는, 루헤의 다리를 밀기 시작했다.
이윽고 찌릿하는 감각이 그의 몸을 타고 흘러 들어가기 시작했다.
“으허억……!”
루헤의 눈이 놀라 커졌다.
이 때밀이라는 것은 지금껏 마계에서는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새로운 것이었다.
마사지 베드에 편안히 누워있기만 하면 되는 것도 모자라, 이렇게 시원하기까지 하다니?
저 거칠면서도 부드러운 이상한 천이 제 몸에 닿을 때마다 그는 자신의 육신이 대리석 판 위에 얼음처럼 녹아내리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 루헤는 지금 자신이 인간계에 와 있다는 사실조차 잊은 채, 그만 산수이에게 사실대로 대답해버리고 말았다.
“30분 내내 잠수하고 있던 거 맞는데요……?”
순간 산수이의 손이 멈칫했다.
지금 뭐라고?
그녀는 이 고객이 자신을 놀리나 싶었다.
세상에 그만큼 잠수를 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어?
“농담이시죠? 세상에 30분이나 숨을 참을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그야 나는 사람이 아니니까요.”
“……네?”
놀란 산수이가 루헤의 새빨간 눈동자를 빤히 바라보았다.
루헤가 반쯤 눈이 풀린 채 그녀에게 예쁘게 미소 지어 보였다.
“아 설마 여태 눈치 못 챈 거예요? 내가 인간이 아닌 걸?”
하지만 그 말을 들은 산수이의 얼굴에는 오히려 화색이 돌았다.
“아 역시! 그럴 줄 알았어요, 사우나스 님의 친구분이셨군요!”
이 얼굴이라면, 역시나 천족밖에는 답이 없지 않은가!
역시 그랬다. 이분을 잘 모시고 나면, 그다음엔 사우나스 님이 오시는 게 분명했다.
저를 보고 뛸 듯이 기뻐하는 산수이를 보며 루헤의 미간이 잔뜩 찌푸려졌다.
“아까부터 왜 자꾸 나를 천족으로 착각하는지 모르겠지만…… 그거, 마족인 나한테는 엄청난 모욕이라고요.”
“마족…… 예에?!”
산수이는 놀라서 때를 밀던 손을 일순 멈추었다.
그 시원한 손길이 멈추자 루헤는 아쉬웠는지 몸을 일으켜 앉으며 그녀를 재촉했다.
“왜 하다 멈추죠? 시원해서 좋았는데…….”
“저, 저저…… 고객님, 설마 진짜 마족? 천족 아니라 마족?!”
그러자 루헤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흐으응, 마족은 처음 보나 봐요.”
루헤는 제 긴 머리를 슬쩍 들어 올렸다.
그러자 뾰족한 양쪽 귀가 드러났다.
“이걸 보여줬으면 바로 눈치챘으려나?”
“마, 마마마마……! 마족!”
산수이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물론 일전에 제 입으로 마족이 온다 해도 때를 밀어줄 의향이 있다는 둥 헛소리를 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직접 이렇게 눈앞에서 마주하니 다리가 떨리게 무서웠다.
그도 그럴 것이 마족은 드래곤족을 모조리 도륙했던 잔인한 학살자들 아닌가.
그런 산수이를 보며 루헤가 웃기 시작했다.
“아하하-! 왜, 천족은 괜찮고 마족은 무섭나요? 이거, 내 뿔까지 보여주면 거품 물겠는걸요.”
“뿔!?”
산수이는 거의 쓰러지기 직전이었다.
루헤가 섭섭하다는 듯 말했다.
“지금 그거 종족 차별이라고요, 목욕탕 주인. 왜 마족을 무서워하죠? 우린 이미 인간들과 평화 협정을 맺었는데요.”
“저, 잠깐만요.”
산수이가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물었다.
“뿔이 있는 마족이라는 건. 그러니까…….”
마족인데 뿔이 있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단 하나였다.
산수이 역시 이 몸의 원래 주인이 가지고 있던 지식을 그대로 물려받아 배운 바가 있으니까.
그때였다.
“흐응, 마족의 뿔에 대해선 잘 알고 있나 봐요.”
서늘하게 웃던 루헤의 양쪽 머리에서, 갑자기 두 개의 뿔이 미친 듯한 속도로 돋아나기 시작했다.
굽이치며 자라난 거대한 뿔을 본 산수이는 그제서야 실감할 수 있었다.
‘이, 이 남자가 정말로……!’
그런 산수이를 향해 루헤가 세상 아름다운 미소를 지으며 악수를 청했다.
“반갑습니다. 나는 마계의 대마왕 루헤 슈바츠발트.”
그렇게 자신에게 내밀어진 루헤의 손을 보자, 손톱 역시 인간의 것과는 다르게 새카맣고 뾰족했다.
그가 산수이를 향해 물었다.
“목욕탕 주인의 이름은?”
우수에 젖어있다고 느껴졌던 그의 붉은 눈동자는 이제 섬뜩한 악마의 것으로 보였다.
‘저, 정말로 대마왕이었어!’
산수이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간신히 루헤와 악수하며 대답했다.
여기서 질문을 씹었다간 제 목이 댕강 날아갈 것만 같아서.
“저, 저는 산수이 비덴비덴 남작이라고 합니다……, 대마왕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