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국의 세신사 영애님-84화 (84/150)

84화.

온실에서의 사건 이후, 산수이와 얀피르는 한동안 서로 거리를 두었다.

물론 그것은 각자 다른 이유에서였다.

산수이는 얀피르를 향한 자신의 마음이 더 커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그를 멀리하는 것이었고.

얀피르는 미친 듯이 사우나스의 흔적을 찾아다니기 때문이었다.

그런 두 사람 사이의 미묘한 기류 변화를 가장 먼저 눈치챈 것은 역시나 집사와 유모였다.

오랜만에 사용인 휴게실에서 만난 두 사람은 심각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요새 산수이 남작님과 얀피르 후작님의 사이가 심상치 않아 보여요.”

유모가 화두를 던지자, 집사 역시 모노클을 빛내며 말을 이었다.

“얀피르 후작님께서 드래곤이시라는 사실을 알았을 땐 정말 어찌나 놀랐던지……. 그래도 두 분께서 종족을 뛰어넘는 사랑을 하고 계시는구나 생각하고 있었는데 말입니다.”

“그렇다고 남작님께서 공작님이나 황태자 저하를 따로 만나고 계신 것 같지도 않았어요.”

“하아…… 대체 두 분 사이에 무슨 일이 있으셨던 건지.”

두 사람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갑자기 유모에게 불길한 예감이 번뜩 스쳤다.

그것은 반평생 산수이를 키워낸 사람의 직감 같은 것이었다.

그녀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혹시, 정말 혹시나 말이에요, 집사님.”

“말씀하십시오, 유모.”

“우리 남작님께 제4의 남자가 나타난 것은 아닐까요?”

“!”

네 번째 남자라니!

집사가 그럴 리 없다며 고개를 저었다.

“설마요. 여기서 한 명을 더 늘리시겠습니까?”

“역시 그렇지요? 우리 남작님께서 바람둥이도 아니시고, 제가 쓸데없는 걱정을 했네요.”

집사와 유모는 그럴 리 없다고 굳게 믿었다.

하지만 그날 오후, 그들의 불길한 예감은 맞아떨어지고 말았다.

***

“남작님, 저번에 비덴탕을 방문했던 꼬마 외국인 손님들이 다시 찾아오셨는데요?”

“정말요?”

산수이는 유모의 안내를 받아 비덴탕 입구로 향했다.

그곳에는 정말로 일전에 노천탕을 방문했던 휴와 듀가 싱글벙글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그들은 산수이를 발견하자 크게 손 흔들며 외쳤다.

“인간 여자!”

“우리 또 왔다!”

산수이는 반갑게 달려가 그들을 꽉 껴안아주었다.

“얘들아! 오랜만이네!”

아이들을 만난 산수이의 얼굴에 오랜만에 웃음꽃이 피었다.

안 그래도 얀피르와 있었던 일 때문에 며칠째 죽상이 되어 축 처져있던 그녀였다.

그런 와중에 천진난만한 아이들을 다시 만나니 기분 전환이 되는 것 같았다.

한편, 얀피르 역시 꼬마들의 소식이 내심 궁금했던지라 비덴탕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던 터였다.

하지만 산수이는 얀피르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민망한 듯 고개를 휙 돌려버렸다.

그 모습에 얀피르의 마음이 또 한 번 무너졌다.

한편 유모는 그들의 냉랭한 분위기를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정말로 두 분 사이에 뭔가 있긴 한 모양이네. 크게 싸우셨나?’

그때였다.

갑자기 휴와 듀의 뒤에서 검은 로브를 두른 사내가 순식간에 모습을 드러냈다.

드래곤인 얀피르는 이 수상한 등장을 곧바로 눈치챘다.

그가 낯선 사내를 향해 공격 태세를 갖추며 생각했다.

‘뭐야 저건? 분명 허공에서 갑자기 나타났어!’

산수이 역시 검은 로브의 사내를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어? 방금 전에도 저 사람이 애들이랑 같이 있었던가?’

분명 이곳에는 휴와 듀만이 서 있었던 것 같았는데?

산수이가 고개를 갸웃하며 아이들에게 물었다.

“얘들아, 혹시 저 남자분하고 일행이니?”

“응응! 같이!”

“목욕할 거야! 같이!”

“아, 그렇구나!”

그럼 이 남자가 애들의 아빠겠구나!

산수이는 검은 로브의 사내에게 다가가 정중히 인사했다.

아까 그가 갑자기 나타난 듯 보였던 건, 그저 제 착각이었겠지 하며.

“어서 오십시오, 비덴탕에. 아이들의 보호자 되십니까?”

하지만 그자는 별다른 대답 없이 그저 제가 뒤집어쓰고 있던 로브를 휙 벗어젖혔다.

그 로브 속의 얼굴을 본 산수이의 동공이 일순 커다래졌다.

“……!”

그것은 강림한 천사라고밖에는 생각할 수 없는 고결하고도 성스러운 얼굴이었으니까.

순간 불어온 미풍에 그의 길고 짙푸른 머리칼이 바람에 휘날리며 청초함을 배가시켰다.

투명할 정도로 뽀얗고 흰 피부에, 우수에 젖은 붉은 눈동자.

그 모습이 너무도 아름다워서, 산수이는 제 눈앞에 있는 사람이 사내인지 여인인지조차 헷갈릴 정도였다.

큰 키와 넓은 어깨만 보았을 땐 분명 사내라 생각했지만, 그의 얼굴을 보자마자 드는 생각은 단 하나뿐이었으니까.

“여신……?”

순간 산수이의 가슴이 크게 뛰기 시작했다.

그녀의 눈에선 저도 모르게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나왔다.

드디어 기다렸던 그 순간이 온 것이었다.

산수이는 저도 모르게 그에게 달려가 목덜미를 와락 끌어안으며 외쳤다.

“사, 사우나스 님……!”

지금껏 흰 빛에 가려져있던 사우나스의 얼굴을 제대로 본 적이 없는 산수이였다.

그런데 이렇게 천사를 그대로 빚어놓은 듯한 인물이 나타나다니.

이 사람이 여신이 아니라면 그 어느 누구도 여신일 수가 없을 것이었다.

갑자기 나타난 낯선 자에게 달려들어 안기는 산수이의 모습에,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이들이 돌덩이처럼 굳어버린 건 당연한 일이었다.

산수이는 루헤의 품에 안겨 생각했다.

‘역시 노천탕이 정답이었어……!’

그제야 산수이는 이제껏 있었던 모든 일들이 이해가 되는 듯했다.

아마도 휴와 듀는 하늘에 살고 있던 아기 천사들이리라.

꼬마 천사들이 사우나스 님보다 먼저 목욕탕을 구경하러 놀러 왔던 거구나.

그래서 제국어가 짧았던 거였어.

한편 옆에서 이 모든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유모는 부리나케 사용인 휴게실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지, 집사님! 우리의 추측이 맞았습니다. 네, 네 번째 남편 후보가!’

그리고 휴와 듀는 놀라 입을 쩍 벌리고 서 있을 뿐이었다.

‘뭐, 뭐냐, 저 인간!’

‘마왕님의 숨겨둔 인간 애인?!’

‘역시 짝사랑남은 진짜 짝사랑?!’

얀피르는 눈앞에 벌어진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에 머리를 얻어맞은 듯한 충격에 빠져있었다.

허공에서 나타난 수상한 외간 남자의 품에 산수이가 안긴 채 울고 있는 것도 기가 막힌데, 방금 전 그녀의 입에서 나온 이름은 분명.

‘사우나스!’

그랬다.

바로 저자가 사우나스였던 것이다.

산수이가 그렇게 오매불망 찾아 헤매던 사우나스의 정체가 바로 저놈이었다.

그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정체 모를 불편한 기운에, 얀피르가 얼굴을 잔뜩 찌푸렸다.

‘역시 저 사우나스라는 자, 인간이 아니었어!’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본체로 변신해 저 사우나스라는 놈을 찢어 죽여놓고 싶었다.

하지만.

“으흐흑, 사우나스 님……! 왜 이제야 오신 거예요? 제가 얼마나 기다렸다구요!”

그의 품에 안겨서 울고 있는 산수이의 표정이 너무나도 행복해 보여서.

그래서 얀피르는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결국 얀피르는 산수이와 루헤를 뒤로한 채 어디론가 떠나버리고 말았다.

한편 이 모든 난리통 중에 가장 당황한 건 역시 루헤였다.

“저, 저기요? 인간……?”

이게 다 무슨 일이란 말인가.

자신은 그저 휴와 듀를 따라서 인간계 목욕탕에 놀러 왔을 뿐인데.

그런데 갑자기 그 목욕탕 주인이란 인간 여자가 저를 보더니 달려들어 품에 안기는 것이 아닌가.

그것도 자신을 다른 이름으로 부르면서.

심지어 자신이 미혹술을 쓴 것도 아닌데……!

당황한 루헤가 산수이를 저에게서 떼어내고 오해를 밝히려고 했지만, 산수이는 이미 그를 붙잡고 대성통곡을 하고 있었다.

“흐어어엉-사우나스 님, 보고 싶었다고요!”

이제 그의 검은 로브는 온통 산수이의 눈물과 콧물로 범벅되어 끈적해져 가고 있었다.

“……하아.”

귀찮은 건 딱 질색이었던 루헤는 지금 눈앞에 있는 이 여자를 목 졸라 치워버릴까도 생각했지만.

‘종족 간 평화 조약…… 평화…….’

게다가 역시 누군가를 죽이는 건 루헤에게 있어선 너무나 귀찮은 일이었다.

물론 선대 마왕이야, ‘그’ 일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죽였던 거지만.

그렇게 산수이는 루헤를 사우나스로 착각한 채 그의 품에 안겨 한참을 울고 나서야 정신을 차렸다.

***

산수이는 루헤를 응접실로 모신 후 수차례 사죄를 했다.

“손님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제가 다른 분과 착각을 하여 그만 큰 결례를!”

루헤가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뭐, 그럴 수도 있죠. 그런데…….”

“네?”

루헤는 산수이에게 자신을 왜 사우나스라 불렀느냐고 물으려다가 이내 관뒀다.

‘물어보기도 귀찮아…….’

대신 그는 산수이에게 부탁을 하기로 했다.

힘겹게 입을 여는 그의 표정엔 피로감이 가득했다.

“아니,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냥 우리 애들이 가 있는 목욕탕에나 안내해 주세요. 하아암…….”

루헤는 세상만사 귀찮다는 표정으로 크게 하품하고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산수이는 그런 루헤를 보며 조금 걱정이 되었다.

‘으음, 역시 손님께서 마음이 다 풀리지 않으셨어. 사죄의 마음으로 최상의 서비스를 보여드릴 때야!’

그래서 산수이는 루헤의 뒤에다 대고 말했다.

“저 손님 혹시.”

“……?”

“제가 때 밀어드릴까요?”

***

한편 얀피르는 심란한 표정으로 창공을 날아올라 어디론가 향하고 있었다.

마침내 그가 도착한 곳은 바로 에데카나 공작저였다.

이제는 예전처럼 새벽에 몰래 날아올 필요도 없었다.

이미 저 멀리서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질 때부터 공작저 내 사용인들이 드래곤 후작님이 방문하셨다며 부산을 떨었으니까.

하지만 얀피르는 대문을 향해서 들어가지 않고 예전처럼 휘온의 집무실 창가로 가서 발톱으로 유리를 퍽퍽 긁어댔다.

끼기기기긱—

그 소리에 놀란 휘온이 짜증 난 듯 고개를 돌렸다.

“이 드래곤 놈아! 너 때문에 유리를 대체 몇 번 교체한 줄 아느…….”

하지만 유리창 너머에 매달린 얀피르의 표정을 본 휘온은 입을 다물었다.

그의 표정은 평소와는 다르게 세상 다 산 듯해 보였으니까.

‘산수이한테 무슨 일이 있구나!’

휘온은 욕지거리를 하려던 것도 잊은 채 서둘러 창문을 열어주었다.

“무슨 일이지, 얀피르?!”

마침 휘온을 방문해 있던 프리트 역시 예상치 못한 얀피르의 등장에 놀라긴 마찬가지였다.

그가 불만스러운 듯 내뱉었다.

“너희 둘, 평소에도 이렇게 은밀히 만나고 있었냐?”

하지만 얀피르는 그 누구의 질문에도 대답하지 않은 채, 인간의 모습으로 변해 창문을 타고 들어와 소파에 길게 누웠다.

불안해진 휘온이 재차 물었다.

“대체 무슨 일이냐니까? 역시 산수이한테 무슨 일이 생긴 거지?”

“사우나스…….”

얀피르가 한 팔을 제 눈 위에 얹은 채 힘없이 중얼거렸다.

“뭐? 안 들린다. 더 크게 좀.”

“사우나스…… 그놈을 찾았다고.”

“뭐?!”

그 이름을 들은 프리트가 놀라 벌떡 일어났다.

일전에 헤슬리히의 집무실을 뒤지다가 우연히 보게 된 페니아 제국민 명단에도, 사우나스라는 이름은 없었는데.

“대체 어디서 찾은 거지? 그래서 사우나스 그 자식은 지금 어디에 있는 거냐?”

놀라기는 휘온 역시 마찬가지였다.

“산수이가 그자를 찾던 이유는 알아냈고?”

쏟아지는 질문 속에 얀피르가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그가 제 손으로 얼굴을 부여잡으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 모습을 본 프리트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다는 듯 얀피르의 어깨를 잡고 앞뒤로 흔들며 다그쳤다.

“말을 해라, 드래곤!”

하지만 얀피르의 얼굴을 본 두 사람은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의 얼굴은 가관일 정도로 일그러져 있었으니까.

“야, 얀피르 후작……?”

휘온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건 분명 보통 일이 아닐 것이었다. 그는 여태껏 이렇게까지 비탄에 잠긴 얀피르를 본 적이 없었다.

이윽고 얀피르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사우나스 그자가 비덴탕으로 직접 찾아왔다.”

“뭣? 대체 그놈의 정체가 뭐였어?”

“아주 고운 사내놈이었는데, 주인이 그놈 품에 안겨서는 왜 이제야 왔냐며 울었어.”

“!”

얀피르가 비통한 얼굴로 말을 맺었다.

“그 모습이 너무 행복해 보여서, 차마 그자를 죽일 수조차 없었다.”

순간 세 남자 사이에 정적이 흘렀다.

한참의 침묵 후 프리트가 입을 열었다.

“휘온, 술 좀 있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