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영업이 끝난 비덴탕 안.
산수이는 물빛의 긴 머리를 모두 수건으로 감아올린 채, 온탕 안에서 차가운 바나나우유를 쪽쪽 빨아 마시고 있었다.
“크아-!”
페니아 왕국의 영토가 모두 카데베르 제국 아래로 들어오게 되면서, 마침내 바나나가 제국 전역에 유통되기 시작했다.
특히나 산수이는 바나나우유를 만들어 특허 출원까지 마친 덕에 엄청난 수익을 올리고 있었다.
그녀가 제 손에 들린 바나나우유를 만족스럽게 바라보며 감탄사를 외쳐댔다.
“이거지!”
몇 번의 죽을 위기를 넘겼지만 결과적으로 산수이는 더 부자가 되었다.
세신사 전문학교에서 쏟아져 나오는 인재들 덕분에 이제는 굳이 산수이가 직접 나서지 않아도 괜찮았다.
VVIP 고객들을 만족시킬 수 있는 우수한 세신사가 넘쳐났으니까.
게다가 찜질방 매점 안에 바나나우유가 독점으로 판매된 후.
안 그래도 성황이었던 비덴탕은 연일 북적거리는 고객들로 가득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산수이가 상상도 하지 못했던 돈줄이 하나 더 추가되었으니까.
바로 황제로부터 구 보다폰 백작의 영토를 하사받은 얀피르가, 토지 문서를 산수이에게 모두 넘겨준 것이다.
“이, 이걸 정말 날 주겠다고?”
“응, 주인 너 돈 좋아하잖아. 땅문서면 뭐 말 다 했지.”
‘그거야 맞는 말이다만…….’
그간 얀피르에게 있어서 자신이 어떤 이미지로 비쳐 왔던 것인지, 산수이는 심히 고민되었다.
그녀가 얀피르에게 토지 문서를 도로 건네주며 말했다.
“이건 황제 폐하께서 너한테 직접 내리신 거잖아. 이렇게 맘대로 막 주고받고 할 수 있는 게 아니라고.”
하지만 얀피르는 단호했다.
“애초에 이러려고 받은 건데? 난 땅이나 집 따위에 관심 없어. 주인 너한테 줄 생각 아니었음 이딴 거 받지도 않았을 거야.”
“아니, 땅도 집도 없으면 대체 앞으로 어디서 살려고 그래?”
그 말에 얀피르의 동공이 커다래졌다.
그가 못 들을 걸 들었다는 듯 놀라 물었다.
“무슨 소리야……? 그야 당연히 지금처럼 주인 너랑 같이 여기서 살아야지!”
“하지만 얀피르, 아니다. 이젠 후작님이라고 불러야 되지?”
“윽…… 제발 그렇게 부르지 마, 소름 돋으니까.”
얀피르는 진심으로 토할 것 같다는 표정을 지었으나, 산수이는 아랑곳 않고 말을 이어갔다.
“하지만 후작님, 제국법상 저 같은 일개 남작 따위가 후작님께 하대를 해서도 안 되고요. 혼인도 하지 않은 남녀가 계속 한집에서 같이 사는 것도 좀 거시기합니다만?”
“뭐?”
얀피르의 눈이 번쩍 빛났다.
“지금 그 말은…… 설마 혼인하자는 뜻이야?”
“네? 저기요, 후작님? 왜 얘기가 그렇게 흘러가는 거죠?”
하지만 이미 얀피르는 산수이의 앞에 무릎을 꿇은 후였다.
“이 순간만 기다렸어, 주인. 나랑 결혼해 줘……! 아야.”
결국 산수이는 또다시 얀피르의 등짝을 후려쳤다.
“누가 프러포즈를 이따위로 멋없게 하냐?!”
“어, 그럼 멋있게 하면 나랑 결혼해 줄 거야?”
“아니?”
그렇게 어찌저찌 결혼하자는 소리는 단념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얀피르가 제게 땅문서를 넘기겠다는 것만큼은 끝내 막을 수가 없었다.
그야 얀피르가 양도증에 서명해버리면 끝나는 문제였기 때문에.
그래서 산수이는 졸지에 얀피르 후작령까지 넘겨받아 실로 거대한 관광지의 소유자가 되어버렸다.
그러다 보니 얀피르가 남작저에 그대로 눌러앉게 된 것도 당연지사였다.
산수이가 지끈거리는 머리를 누르며 외쳤다.
“아니 세상에 후작이 남작네 집에 얹혀사는 경우가 어디 있어!”
“애초에 인간들이 멋대로 정한 기준을 왜 나한테 적용하는데? 자꾸 그러면 나 이 작위라는 것도 물러버릴 거야.”
“뭐어?!”
산수이는 얀피르를 어르고 달래서 작위만큼은 유지하도록 설득했다.
그것마저 사라져버리면 얀피르가 이 제국 땅에서 기댈 곳이 없어질 것이라는 걱정 때문이었다.
‘그것만은 막아야 돼! 내가 이 세계를 떠나게 되더라도, 얀피르는 여기 계속 남아 살아가야 하니까.’
그것이 혼자 남겨질 그를 위해 산수이가 해줄 수 있는 유일한 것이었다.
‘그때가 되면 꼭 잊지 말고 저놈의 땅문서도 다시 양도시켜버리고 가야지.’
그때, 갑자기 산수이는 잊고 있었던 중요한 사실 하나를 떠올렸다.
‘어……? 그러고 보니, 드래곤의 비늘을 선물한다는 거 자체가 프러포즈 아니었나?’
그렇다기엔 방금 전 분명 얀피르가 자신에게 또다시 프러포즈를 하지 않았던가?
그녀는 제 목에 걸린 얀피르의 비늘 목걸이를 만지작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뭐지? 얀피르한테 제대로 한번 물어봐야 하나? 아니, 그랬다가 또 대뜸 결혼하자고 하면 어떡해?’
이 목걸이에 대해 물어볼 것이 한가득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차마 얀피르에게 입을 뗄 수가 없었다.
‘네 마음을 다 알면서, 그걸 어떻게 내 입으로 물어봐.’
그렇게 산수이는 고개를 저으며 자리를 옮겼다.
아무튼 산수이는 이제 비덴비덴 남작령의 목욕탕뿐 아니라 얀피르 후작령의 수영장까지 함께 운영하게 되면서, 카데베르 제국 휴양업의 큰손으로 떠올랐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욕의 신 사우나스는 여전히 코빼기도 뵈지 않고 있었다.
산수이는 일전에 천당을 오가며 사우나스와 재회했던 일을 떠올렸다.
그때 분명 사우나스가 제게 했던 말이 있었지.
‘임무를 완수하기엔, 딱 한 가지가 부족하다고.’
대체 그게 뭘까.
‘생각해보자. 내가 빠트린 게 대체 뭐지? 아직 해보지 않은 게 뭐가 있지?’
거기까지 생각하던 산수이가 갑자기 제 이마를 탁 치며 벌떡 일어났다.
“아하!”
제가 빼먹은 것이 하나 있긴 했다.
목욕탕에 찜질방, 수영장까지 갖춰놓고도 그걸 잊고 있었다니.
‘야외에 자쿠지…… 그러니까 노천탕을 깜빡했어!’
***
본디 비덴비덴 남작령은 수질 좋기로도 이름나있었지만,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요소가 있었으니.
바로 빼어난 자연경관이었다.
특히나 비덴탕이 위치한 곳은 완벽한 배산임수를 이루는 곳이었다.
건물 뒤편으로 펼쳐져있는 비덴산의 산자락이 가히 절경이었다.
‘비덴탕 부지의 정원에 노천탕을 짓는 거야! 그래, 사우나스 님이 말했던 한 가지란 바로 그거였어. 목욕의 꽃은 역시 노천탕이니까!’
산수이는 재빨리 자신의 최대 투자자인 휘온에게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좀 더 구체적인 아이디어를 내려면 그와 머리를 맞대야 했다.
산수이의 머릿속에 행복 회로가 데구루루 굴러가기 시작했다.
노천탕 안에서 행복해할 고객들의 모습과, 이를 통해 벌어들일 수익이 눈앞에 아른거리는 것만 같았다.
‘노천탕까지 짓고 나면, 분명 인근 왕국에서 외국인 고객님까지 유치할 수 있을 거야!’
최대한 천국에 온 것만 같은 느낌으로 경관을 꾸미겠다고 산수이는 다짐했다.
그러면 하늘에 있는 사우나스도 마음이 혹하겠지.
절대 오지 않고는 못 배길 것이었다.
‘이곳을 무릉도원이라 느끼게 해 드리죠. 기다리세요, 사우나스 님!’
하지만 산수이는 이 노천탕의 최대 이용객이 될 자가 누구일지, 전혀 짐작조차 못 하고 있었다.
***
대륙의 끝자락에는 마계로 이어지는 입구가 존재했다.
과거 마계 전쟁에서 패한 마족들은 천족의 탄압 아래 모두 지하 세계로 쫓겨났다.
그 후 해당 통로는 오랜 시간 동안 봉인되어왔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 결계는 느슨해져갔다.
그리고 결국 마계의 입구를 남몰래 넘나드는 이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통로를 빠져나온 마족들은 자신들이 만든 마도구를 암시장에 판매했다.
그렇게 벌어들인 인간의 주화로 그들이 구매하는 것은 보통 인간 세상의 신선한 과일과 야채들이었다.
이유야 간단했다. 지하 세계에는 햇빛이 전혀 들지 않았으니까.
몇백 년 동안 양측간에 평화가 유지되어 왔던 터라, 이제 이 정도의 가벼운 암거래는 모두가 쉬쉬하며 넘어가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그날만은 좀 달랐다.
새벽녘, 작은 박쥐 마족 두 마리가 몰래 마계의 통로를 빠져나온 것이다.
두 꼬마 마족의 이름은 휴와 듀.
마계의 동굴 안에서 살고 있는 하급 마족이었다.
그들은 가끔씩 마계에서만 캘 수 있는 암석을 떼다가 인간세계의 물건과 바꿔먹곤 했다.
그리 값나가는 암석은 아니었던 터라, 바꿀 수 있는 물건이라 해봤자 기껏해야 인간계의 주전부리가 전부였다.
그러던 어느 날, 이 꼬마 박쥐들은 맛보고 말았다.
바로, 바나나우유라는 신세계를.
“우와아!”
“맛있다!”
눈이 휘둥그레진 두 꼬마를 향해 암시장 업자가 껄껄대며 웃었다.
“그건 처음 먹어보냐?”
“응응! 처음! 너무 맛있다, 이거!”
“인간계엔 이런 맛있는 게 한가득이냐?”
암시장 업자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 음료는 인간 세상에서도 흔하지 않다. 오직 한 곳에서만 구할 수 있지.”
“한 곳! 거기가 어디냐?”
“비덴탕이라는 곳인데. 가만있자, 마계에도 목욕탕이 있던가?”
두 꼬마 박쥐는 고개를 갸웃했다.
“목욕탕……?”
“뭔데, 그거?”
모든 걸 마법으로 해결하는 마계에 목욕탕이 있을 리 만무했다.
애초에 마족이란 잘 씻지 않는 족속들인 데다가, 몸이 더러워지더라도 마법으로 세척하면 그만이었으니까.
그렇기에 난생처음 목욕탕, 그것도 노천탕에 대한 설명을 들은 휴와 듀의 두 눈이 샛별처럼 빛났다.
“뜨, 뜨거운 물에 들어가서 첨벙첨벙?”
“대자연을 구경하면서? 주스를 꿀꺽?”
암시장 업자가 그런 두 아이들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이렇게 어린 꼬마들인데, 인간 세상에 하루 정도 소풍 나갔다 온다고 뭐 별문제 있겠어?’
평소 휴와 듀를 귀여워하던 암시장 업자는 그들에게 몰래 비덴탕의 초대장을 건네주었다.
“대신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몰래 다녀와야 한다? 특히 마왕님한테는 절대 들켜선 안 돼. 그분은 뭔가 선대 마왕님보다 더 께름칙한 데가 있거든…….”
그렇게 휴와 듀는 오로지 노천탕에 가겠다는 일념 하나로 마계의 경계를 넘어버리고 만 것이다.
“바나나우유! 두근두근!”
“서둘러! 그분께 들키면 날갯죽지 다 뽑힌다.”
힘찬 날갯짓과 함께 두 꼬마 박쥐는 비덴탕으로 빠르게 날아가기 시작했다.
***
노천탕이 오픈한 지 불과 며칠밖에 지나지 않은 어느 날.
산수이는 아침 댓바람부터 비덴탕을 방문한 두 명의 꼬마 손님들 때문에 매우 당황한 상태였다.
각각 붉고 푸른 머리칼을 가진 열 살 가량의 두 사내아이가, 새빨간 눈동자를 초롱초롱 빛내며 자신을 바라보고 서 있는 것이 아닌가.
‘얘들은 대체 누구지?’
하지만 산수이가 뭐라 묻기도 전에, 두 아이들이 먼저 그녀를 향해 당당하게 질문했다.
“어이 인간, 여기가 비덴탕이 맞아?”
“으음, 맞습니다만. 그런데 너희들 부모님은 어디 계시니……?”
새벽부터 보호자도 없이 목욕탕을 방문한 아이들이라니.
산수이는 혹시 이 아이들이 가출 청소년은 아닐까 심히 걱정이 되었다.
하지만 아이들은 대답 대신 산수이에게 노천탕 초대권을 불쑥 내밀며 알 수 없는 말을 해 댔다.
“오 찾았다! 빨리 들어가게 해줘! 뜨거운 물로 씻을 수 있는 커다란 통에!”
“인간 세상의 풀과 나무를 구경하며 씻을 수 있는 데가 있다고 들었어! 우리를 거기로 데려다줘라, 인간!”
아이들의 말을 듣고 산수이는 생각에 잠겼다.
‘노천탕을 말하는 건가? 그런데 왜 자꾸 아까부터 나보고 인간, 인간 하는 거지? 제국말을 잘 못 하나?’
어찌 됐건 그들이 내민 초대장은 가짜도 뭣도 아니었다.
‘으음, 일단은 목욕을 시켜주면서, 얘들의 부모님을 따로 찾아봐야겠어.’
그렇게 산수이는 두 명의 꼬마에게 제 손을 내밀었다.
“자아, 그럼 손님 여러분. 저와 함께 가 보실까요?”
휴와 듀는 양쪽에서 산수이의 손을 꽈악 맞잡고 해맑게 웃어 보였다.
“응!”
“가자! 인간!”
그렇게 인간의 모습을 한 두 꼬마 마족들은 산수이의 양팔에 매달린 채 신나게 목욕탕 안으로 이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