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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 세신사 영애님-80화 (80/150)

80화.

졸지에 제가 가진 모든 것을 잃게 된 미모세의 눈에 더 이상 보이는 게 있을 리 없었다. 분노에 찬 그녀가 손톱을 세운 채 산수이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곧이어 미모세의 앞에 황금빛 눈동자가 번뜩였다.

“……!”

이윽고 감옥 안의 어둠 속에 숨어있던 인간 모습의 얀피르가 모습을 드러냈다.

“드, 드래곤님?”

얀피르는 재빨리 산수이를 감싸 보호하며, 미모세를 향해 제 송곳니를 드러냈다.

“역시 너 같은 인간에게는 두 번째 기회를 줄 필요가 없어.”

“사, 살려주십시오!”

“크르르르…… 더 이상은 봐 주지 않겠다, 인간.”

얀피르는 미모세를 향해 마법을 시전하려 했지만, 곧바로 산수이가 그의 앞을 막아섰다.

얀피르가 화난 표정으로 외쳤다.

“비켜 봐, 주인! 이번에야말로 저 인간을……!”

하지만 산수이는 고개를 저었다.

“그럴 필요 없을 것 같아, 얀피르. 저길 봐.”

그렇게 그들이 내려다본 곳엔, 눈이 까뒤집혀진 미모세가 침을 질질 흘리며 허공을 향해 중얼거리고 있었다.

“히히힉! 드래곤이 날 죽일 거야. 날 죽일 거라고…….”

숨을 옥죄는 듯한 공포감에 압도되어버린 그녀는 결국 미쳐버리고 만 것이다.

그렇게 산수이를 음해하려던 자들은 모두 비참한 말로를 맞이하게 되었다.

실로 많은 이들에게 상처를 남긴 사건이었다.

***

산수이는 프리트를 만나기 위해 또다시 황궁으로 향했다.

그는 홀로 연무장에 앉아 상념에 잠겨있었다. 그곳은 과거 프리트가 2황자와 함께 검술 대련을 즐겨 하던 곳이기도 했다.

산수이는 말없이 그의 옆에 앉아있어 주었다.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 프리트가 산수이를 향해 입을 열었다.

“내 아우…… 아니,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으니 남이겠지.”

그가 피식 웃으며 중얼거렸다.

“모든 걸 다 알아버렸는데도 가끔 그 녀석이 생각나는 걸 보면 나도 참 한심해. 그렇지 않나?”

그 말에 산수이가 자신의 손을 내뻗어 그의 등을 살며시 어루만져주었다.

“당연한 거예요. 그래도 괜찮아요, 프리트.”

그러자 프리트가 산수이의 눈을 빤히 바라보며 옅게 웃었다.

“그대가 날 이름으로 불러주는 건 처음인데.”

“앗, 저도 모르게 그만!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저하!”

당황한 산수이가 프리트의 등에서 재빨리 손을 떼었지만, 그가 다시 그녀의 손을 덥석 잡았다.

“괜찮으니까, 앞으로도 그렇게 날 이름으로 불러 줘.”

“저하……?”

프리트가 옅게 웃었다.

“하여간, 이름으로 부르라니까 또 말 안 듣지.”

“……프리트.”

마침내 산수이의 입에서 자신의 이름이 흘러나오자, 프리트는 조용히 그녀의 눈을 바라보았다.

사파이어처럼 빛나는 그의 올곧은 눈동자가 오로지 자신만을 향해있자, 그 순간 산수이는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잠시간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며 앉아있었다.

그때였다.

갑자기 등 뒤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웬 놈이냐!”

인기척에 뒤를 돌아본 프리트의 눈이 놀라 커졌다.

“바, 발레아나?”

프리트는 아주 기가 막힌 타이밍에 나타난 제 동생을 원망스러운 듯 쳐다보았다. 하지만 발레아나의 표정을 보는 순간, 뭐라 불만을 말하기 힘들었다.

눈물이 그렁그렁 차오른 발레아나가 프리트를 향해 물었다.

“오라버니는 왜 자꾸 다른 동생이 있다는 사실은 잊어버리시는 거예요?”

“뭐……?”

“항상 이곳에 와서 둘째 오라버니를 그리워하시던 거, 저도 다 알고 있어요. 그런데요, 오라버니. 제가 그분과 다른 점이 뭔지 아세요?”

“하아, 뭔데?”

“저는 그분과는 다르게 프리트 오라버니를, 정말 너무너무 사랑한다는 거예요.”

그렇게 말하며 발레아나가 프리트의 품에 와락 안겨들었다.

“!”

“너무 슬퍼하지 마세요. 오라버니에겐 제가 있잖아요.”

제 품에 안긴 발레아나를 한참이나 바라보던 프리트는, 처음으로 그녀를 꽉 끌어안아 주며 미소 지었다.

“그래, 맞다. 나에겐 네가 있었지.”

산수이는 그런 두 사람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

얼마 후, 얀피르는 제국의 황제로부터 서신을 한 통 받았다.

“황궁으로 와 달라고?”

그렇게 산수이와 함께 황궁에 당도한 얀피르.

그런데, 갑자기 황제가 옥좌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얀피르의 앞까지 친히 다가와 그의 손을 덥석 붙잡는 것이 아닌가.

그 자리에 선 모든 이들이 황제의 격의 없는 행동에 깜짝 놀랐지만 무어라 말릴 수 있는 자는 없었다. 지금 황제의 앞에 서 있는 자의 정체를 이제는 모두 알고 있었기 때문에.

황제가 얀피르를 향해 입을 열었다.

“오오, 드래곤. 아니, 이제는 얀피르 경이라 불러야겠지. 이리 어려운 걸음을 해 주어서 짐은 너무나 고맙게 생각한다네.”

“용건이 뭔데?”

“다름이 아니라, 내 그대에게 이곳 제국에서 머물 신분과 거처를 마련해주고자 한다네.”

그 말에 얀피르가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거처라면 이미…….”

여기까지 말하던 얀피르가 입을 다물었다.

‘맞다! 주인이 우리 같이 살고 있는 거 절대 비밀로 하랬지.’

그렇게 입을 꾹 다문 얀피르의 앞에 황제가 말을 이었다.

“그런 연유로 짐이 그대에게 후작위를 내리려고 하네만.”

“응, 그래. 후작…… 뭐?!”

순간 대전에 있던 모든 이들이 깜짝 놀랐다.

갑자기 후작이라니.

그럼 얀피르가 이 제국에서 에데카나 공작 다음가는 권세를 누리게 되는 것이 아닌가!

하지만 황제는 그게 끝이 아니라는 듯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그리고 얼마 전 몰수되었던 보다폰의 백작령 전체를 자네에게 내릴까 생각한다네.”

그 말에 대신들은 또 한 번 놀랐다.

옛 보다폰의 영지는 비덴비덴 남작령 다음가는 관광지가 아닌가.

영토는 몰수되었지만 그곳에는 아직도 수영장 등의 시설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대신들은 그제야 황제의 의도를 깨달을 수 있었다.

드래곤에게 작위와 토지를 내려 이 제국 땅에 정착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가 혹시라도 다른 나라로 떠날 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하지만 얀피르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답했다.

“난 작위 같은 거 필요 없는데? 그리고 영토도. 그냥 지금처럼 살아도 상관없…….”

“받앗!”

순간 대신들 사이에서 우레와 같은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소리의 진원지는 바로 산수이였다.

다행인 건 방금 전 그녀가 외친 말이 제국어가 아닌 바로 한국어였다는 것. 난생처음 듣는 외국어 두 음절을 아무도 알아들었을 리 없었다.

저도 모르게 본심을 내뱉어버린 그녀가 헛기침을 해대며 말을 둘러댔다.

“아, 누가 제 발을 밟으셔서 그만! 아야야.”

하지만 그러면서도 산수이는 저를 바라보고 있는 얀피르에게 눈으로 사인을 보내는 것을 잊지 않았다.

‘받아! 받으라고! 왜 줘도 못 먹어!’

그 텔레파시를 받은 얀피르의 눈이 반짝 빛났다.

물론 그가 내린 해석은 산수이가 의도한 것과는 전연 다른 것이었지만.

‘아, 그렇구나! 산수이가 그 백작령을 먹고 싶은가 보구나! 우리 주인이 돈 좋아하는 걸 깜빡할 뻔했네. 그래, 알았어. 황제가 주는 건 뭐든 다 털어먹어다가 너에게 줄게!’

얀피르가 황제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이 바뀌었다. 작위와 영토 둘 다 받도록 하지.”

“오오, 잘 생각했네! 그럼 부디 이 제국 땅에 오래 머물며 짐과 황태자에게 힘이 되어주게나!”

그렇게 해서 얀피르는 갑자기 카데베르 제국의 후작이 됨과 동시에, 광대한 구 보다폰 백작령을 가지게 되었다.

제국 전역은 이 뜨거운 소식으로 연일 화제였다.

비덴탕의 세신사였던 자의 정체가 다름 아닌 드래곤이었다는 것도 놀라 자빠질 지경이었는데, 이젠 그가 황제에게서 직접 후작위를 하사받았다는 소문까지 퍼져나간 것이다.

물론 이에 가장 크게 동요한 것은 바로 얀사모 회원들이었다.

얀피르가 남탕 전문 세신사가 된 이후 그 세력은 점차 줄어들었지만, 여전히 그를 잊지 못하고 팬클럽 활동을 하던 소녀들이 남아있었으니까.

하지만 그가 드래곤이었던 것도 모자라, 이제는 고위 귀족이 되었다니?

자신들의 오빠가 더더욱 손에 닿을 수 없는 별이 되어버렸다는 걸 알게 된 소녀들은 눈물로써 그를 이만 보내주기로 하였다.

‘안녕, 야니 오빠……! 행복해야 해요!’

***

그날 저녁, 황제는 제 집무실로 조용히 프리트 황태자를 불렀다.

그의 집무실로 향하는 프리트의 발걸음은 적잖이 무거웠다.

저에게는 원수였던 황후였지만, 어쨌든 제 아비에게는 사랑하는 여인이었지 않던가. 그런 황후를 직접 처형한 황제의 마음이 괜찮을 리 없었다.

프리트가 황제를 향해 힘겹게 입을 뗐다.

“……황제 폐하를 뵙니다.”

“왔느냐.”

그들 부자 사이에 한동안 긴 침묵이 흘렀다.

그 침묵을 먼저 깬 건 다름 아닌 황제였다.

그가 프리트의 앞으로 걸어가, 자신의 아들 앞에 무릎을 꿇은 것이다.

“프리트, 내 아들아. 나를 용서해 주겠느냐.”

크게 당황한 프리트가 서둘러 제 아비를 일으켜 세웠다.

“왜, 왜 이러십니까, 폐하! 어서 일어나십시오!”

그러자 황제가 씁쓸한 표정으로 웃었다.

“여전히 나를 폐하라 부르는구나.”

순간 프리트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그런 제 아들을 쓸쓸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황제가 말을 이었다.

“9년 전, 네 아픔을 헤아리지 못하고 그저 여색에 빠져 사건을 제대로 수사하지 못한 이 못난 아비를 용서해 다오.”

잠시간 말이 없던 프리트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이미 다 지난 일입니다. 더는 괘념치 마십시오……, 아바마마.”

“!”

그 말을 들은 황제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하지만 그는 차오르는 눈물을 꾹 삼킨 채, 자신의 아들을 향해 미소 지으며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이 아비가 준비한 선물은 마음에 들었느냐?”

“언제 선물을 보내셨습니까? 전 아무것도 받지 못했습니다만.”

“얀피르 경에게 후작위를 내렸지 않느냐.”

“하? 그 드래곤 놈이 작위를 받은 게 왜 저를 위한 선물이란 말입니까?”

어이없다는 표정의 프리트를 향해, 황제가 껄껄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래야 드래곤 그자가 비덴비덴 남작저에서 나와, 그녀와 따로 살지 않겠어?”

“……!”

그 이름을 들은 프리트의 사고가 일순 정지했다.

저 말의 뜻은, 설마!

황제가 프리트를 향해 크게 웃으며 물었다.

“왜, 내 아들놈이 어떤 여인을 마음에 두고 있는지조차 알아채지 못하는 무심한 아비인 줄 알았던 게냐?”

“아, 아바마마!”

당황한 표정의 프리트를 향해 황제가 혀를 쯧쯧 찼다.

“하필 드래곤과 같은 여인을 마음에 두다니. 고생길이 훤하겠구나, 프리트.”

“그, 그것까지 알고 계셨습니까?”

“그럼, 네놈들의 그 눈빛을 보고도 알아채지 못할 바보 천치가 세상에 어디 있겠느냐?”

다행히 제국의 황제가 나머지 한 놈의 눈빛은 미처 발견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멋쩍은 듯 헛기침을 해대는 프리트를 향해 황제가 첨언했다.

“힘을 길러라, 프리트. 드래곤에게 결코 지지 않도록.”

“힘이라면 지금도 지지 않을 자신이 있습니다만.”

“성군이 되라는 소리다!”

“!”

황제가 제 아들을 애틋하게 바라보며 말했다.

“이제 전쟁터에서 피 냄새를 풍기는 일은 그만두고. 궁에서 정무를 배우며, 그렇게 내 곁에 머물러 다오, 아들아.”

“아바마마…….”

곧이어 그가 심각한 표정으로 프리트를 향해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리고 사실, 지금 그 어느 때보다 너의 힘이 필요하다, 프리트.”

“무슨 일이 있으십니까?”

“마계에 관한 일이다.”

그 말을 들은 프리트의 눈이 일순 놀라 커졌다.

과거 마계와의 전쟁이 있은 후, 만일에 대비하기 위해 항상 마계의 동향을 몰래 조사해오던 카데베르 제국이었다.

황제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몇 해 전 있었던 마계의 쿠데타에 대해선 프리트 너도 이미 들어 알고 있겠지.”

“물론입니다. 듣기로는 좀 특이한 자가 마왕좌에 올랐다고 하던데, 혹시 수상한 움직임이라도 발견된 것입니까?”

“아니, 오히려 그 반대다.”

황제의 얼굴에 그늘이 드리웠다.

“지금껏 여러 차례 정찰을 보내봤지만, 여태껏 이상할 정도로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는다고 하더구나.”

프리트 역시 고민에 빠졌다.

“흐음, 확실히 그편이 더 수상해 보이긴 하는군요.”

황제가 프리트의 어깨에 제 손을 얹으며 다시 한 번 강조했다.

“혹시라도 마왕이 다시 전쟁을 일으키는 날엔 인간계는 끝장이다. 그러니 절대 드래곤과의 동맹을 깨어서는 안 돼.”

“흠……. 산수이 남작을 황태자비로 맞이하면서도, 얀피르 그자와의 동맹은 깨지 않을 방법을 고민해봐야겠군요.”

황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쉽지 않겠지. 하지만 이 아비도 물심양면으로 돕도록 하겠다.”

그렇게 두 사람의 대화는 밤늦도록 깊어갔다.

이때까지만 해도 프리트는 몰랐다.

저들 부자가 그토록 두려워하는 마왕을 강림시키는 게 바로 산수이가 될 거란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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