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비, 비덴비덴 남작?!”
갑작스런 산수이의 등장에 황후는 자신도 모르게 제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버리고 말았다.
옆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황제가 놀란 표정으로 황후를 바라보았다.
“황후……?”
황제와 눈이 마주친 그녀는 서둘러 다시 자리에 앉았다. 애써 침착한 척하려 했지만 점점 불안감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어떻게 된 거야? 분명 사경을 헤매고 있다며!’
그사이 산수이가 황제 앞으로 다가와 예를 표했다.
“제국의 황제 폐하를 뵙니다.”
“오오, 비덴비덴 남작! 위험한 고비는 넘긴 것인가?”
“걱정해주신 덕에 이렇게 건강히 회복했나이다, 폐하.”
황제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좌중을 향해 말했다.
“이렇게 남작이 직접 걸음을 했으니 이제 모든 전말을 밝힐 수 있을 터. 그래, 그대를 독살하려 한 범인이 대관절 누구인가?”
“그것은…….”
산수이는 손가락을 들어 올려 바닥에 꿇어 앉아있는 미모세 백작 부인을 가리켰다.
살인 미수범으로 지목당한 미모세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나, 남작! 제게 왜 이러시는 겁니까!”
한편,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황후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래, 나에 대한 증좌를 찾을 수 있었을리 없지. 우선은 됐어. 저 산수이라는 계집은 나중에 다시 처리하면 될…….’
하지만 산수이는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그녀는 나머지 한 손을 들어 올려, 제 앞의 또 다른 한 사람을 정확히 가리켰다.
바로, 제국의 황후를.
산수이가 황제를 향해 입을 열었다.
“저를 죽이려 했던 자들은, 바로 이 두 사람이옵니다, 폐하.”
“!”
모두의 앞에서 범인으로 지목된 황후의 손이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뭐야? 대체 뭘 믿고 저러는 거지?’
한편 제 여인이 또다시 범인으로 지목되자, 참을 수 없이 화가 난 황제가 산수이를 향해 다그쳐 물었다.
“대체 무슨 연유로 황후가 그대를 해치려 했다고 생각하는 것이지, 남작?”
“그것은 제가 황후 마마의 비밀을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황후의…… 비밀?”
잠깐의 정적 끝에 산수이가 단호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렇습니다. 그것은 바로, 황후 마마께 숨겨진 정인이 있다는 것이지요.”
“너!”
그 말에 격분한 황후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녀는 목에 핏대를 세우며 소리 질렀다.
“모함입니다, 폐하! 전 억울하옵니다!”
황제 역시 말도 안 된다는 표정이었다.
“비덴비덴 남작, 물론 증거는 가지고 있겠지? 그렇지 않다면 마땅히 황족을 능멸한 죗값을 치러야 할 것이다.”
그때, 갑자기 휘온이 앞에 나섰다.
“그 증좌는 제가 가지고 있습니다, 폐하.”
“에데카나 공작, 자네가?”
휘온이 손짓하자, 결박된 사내 하나가 그들의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놀란 황제가 휘온에게 물었다.
“저자는 누구인가?”
“일전에 보다폰이 감옥 안에서 피살되었던 일을 기억하십니까, 폐하?”
“보다폰이라면, 가짜 이태리타월 사건의 진범이었던 자가 아닌가?”
“그렇습니다. 보다폰이 처형 직전, 마지막으로 뵙길 청했던 분이 바로 황후 마마였더군요. 물론 다음 날 주검으로 발견되었지만 말입니다.”
휘온이 손짓하자, 그 사내가 황제를 향해 고하기 시작했다.
“다, 당시 황후마마의 명으로 제가 보다폰을 독살했나이다, 폐하!”
하지만 황제는 당최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대체 보다폰 그자의 죽음이 이번 사건과 무슨 관련이 있단 말인가, 에데카나 공작?”
그러자 휘온이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황제를 향해 고했다.
“그것은 과거 보다폰이 페니아 왕국으로부터 유푸스 꽃을 들여올 때, 황후마마께서 힘을 실어주셨기 때문입니다.”
“유푸스? 그건 가짜 이태리타월 사건 때 사용되었던 맹독을 지닌 꽃이 아니던가?”
휘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이후 황후마마께서는 보다폰을 통해 유푸스 꽃을 지속적으로 공급받으셨더군요.”
그 말을 듣던 황후가 휘온을 향해 코웃음을 쳤다.
“에데카나 공작, 그대는 나의 취미생활마저 욕보이려는 것이오? 나는 그저 관상용으로…….”
“예, 그렇지요. 하지만, 다른 꽃의 성분을 섞는다면 어떨까요?”
“!”
휘온이 자신의 품 안에서 서류 하나를 꺼내 황제의 앞에 내밀었다.
“전 대륙을 통틀어 오로지 제국의 황실에서만 자라는 꽃. 그 추출물을 유푸스 성분과 함께 배합한다면, 인체에 들어가도 흔적이 전혀 남지 않는 독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알아냈습니다, 폐하.”
웅성거리는 좌중을 향해 휘온이 말을 이었다.
“그 독은 바로 비덴비덴 남작이 선물 받은 머리빗에 묻어있던 성분이었을 뿐만 아니라.”
곧이어 여태껏 그들의 말을 잠자코 듣고만 있던 프리트가 앞으로 나와 휘온의 말을 이어받았다.
“……9년 전, 황후마마께서 제2황자를 통해 제게 사용하셨던 독약과도 동일한 성분이지요.”
황후가 다급히 소리를 질렀다.
“두 사람 모두 말을 삼가시오!”
분노한 그녀가 파들파들 떨며 계속해서 외쳐댔다.
“내가 어찌하여 그런 해괴한 일을 벌인단 말이야! 게다가, 그 독약을 내가 만들었다는 증거가 어디 있지?”
황후는 계속해서 모두를 향해 패악질을 해 댔다.
“이러다 폐하의 아이가 잘못되기라도 하는 날엔, 모두가 목숨으로 그 책임을 져야 할 것입니다!”
그때였다.
갑자기 대전의 천장 쪽에서 커다란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하아, 진짜 더는 못 들어주겠네. 이봐 인간, 네 배 속에 있는 그 아이 역시도 황제의 씨앗이 아니잖아?”
순간 놀란 모두가 고개를 돌려 소리가 들려오는 곳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천장에 달린 창문 너머로 드래곤의 거대한 황금 눈동자가 보였다.
“드래곤님이시다!”
이윽고 창문이 거세게 열리며, 새하얀 빛과 함께 인간의 모습으로 변한 얀피르가 대전 아래로 가볍게 착지해 내렸다.
“저, 저자는?!”
모두가 경악한 표정으로 얀피르를 바라보던 찰나, 휘온이 그를 향해 불평하듯 내뱉었다.
“기다리다 목 빠지는 줄 알았다, 얀피르.”
“아아, 미안해. 이놈이 통 모습을 드러내질 않아서 좀 오래 걸렸어.”
그렇게 말하며 얀피르는 황후의 발아래 무언가를 툭 하고 던졌다.
그것은 다름 아닌 제국 황후와 헤슬리히 국왕의 전서구였다.
피투성이가 된 그 작은 동물이 대전 바닥에서 몸부림치자, 그의 발에 묶여있던 편지가 스르륵 풀려버렸다.
“……!”
순간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황후가 재빨리 몸을 날려 편지를 낚아채려 했으나, 이미 얀피르에게 선수를 뺏긴 후였다.
“안 돼!”
얀피르가 황후를 저지하며 편지를 황제에게 건네주었다.
“직접 보고 판단해라, 황제. 체면을 생각해 내용까지 공개하지는 않을 테니까.”
황제가 떨리는 손으로 얀피르에게서 쪽지를 받아들었다.
편지를 읽어 내려가는 황제의 눈동자가 연신 흔들렸다.
마침내 편지를 들고 있던 그의 손이 바닥으로 축 늘어졌다.
그는 배신감에 몸을 떨며 말없이 황후를 노려보았다. 그 눈빛이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끝났다. 정말 모든 것이.
황후는 절망한 표정으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때였다.
프리트가 황제의 앞에 나서서 무릎을 꿇었다.
“분부 내려주십시오, 폐하.”
잠시 동안 말이 없던 황제는, 이내 손을 들어 올리며 프리트에게 명했다.
“가서 헤슬리히 국왕의 목을 가져와라.”
“안 돼!”
그 말을 들은 황후가 미친 듯이 소리 지르며 황제에게 매달리기 시작했다.
“안 됩니다, 폐하! 제발 그것만은! 제발 그이를 살려주십시오, 폐하!”
그녀가 처절하게 울며 애원했지만, 그 모습은 오히려 황제의 분노에 더욱 더 부채질을 해 댈 뿐이었다.
그는 자신의 발밑에 매달린 여인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제가 너무나 사랑했던 여인.
그 사랑이 너무 깊어서 오랜 시간 동안 눈이 가려진 채 살아왔다.
하나뿐인 제 아들의 상처조차 알아봐 주지 못한 채.
이윽고 황제가 결심한 듯 명했다.
“……당장 황후를 옥에 가둬라.”
“폐하!”
그렇게 황후가 대전 밖으로 끌려 나간 뒤, 프리트는 다시 드래곤의 모습이 된 얀피르의 등에 올라타 페니아 왕국으로 향했다.
창공을 가르며 날아오른 얀피르를 향해 프리트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이봐, 드래곤. 부탁할 게 있는데.”
하지만 얀피르는 이미 프리트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말했다.
“하아. 주인을 해치려 했던 놈이라 내 손으로 없애고 싶었지만 하는 수 없지. 이번엔 황태자 너한테 양보해 줄게.”
프리트가 피식 웃었다.
“하여간 얀피르 네놈, 눈치 하나는 빠르다니까.”
페니아의 저항은 길지 않았다.
또다시 페니아의 성곽 위로 드리워진 드래곤의 그림자를 보자, 병사들은 일제히 도망가기 바빴고.
헤슬리히의 집무실 안으로 가뿐히 날아내린 프리트는 자신의 장검을 단단히 쥐고 그를 향해 달려들었다.
“나와 내 아버지를 능멸한 죄, 그 목숨으로 갚아라!”
몇 차례의 검합이 오간 끝에, 헤슬리히의 목에서 새빨간 피의 분수가 뿜어져 나왔다.
“이벨…… 이벨린……!”
마지막까지도 제가 사랑하는 여인의 이름을 애타게 부르던 헤슬리히는, 그렇게 눈을 감았다.
얼마 후, 황후 역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고.
그렇게 마지막 왕족을 잃은 페니아에는 제국 출신의 섭정공이 보내졌다.
***
한편, 황궁의 감옥에 갇힌 미모세는 공포에 질린 모습으로 차가운 바닥에 웅크려 앉아 떨고 있었다.
‘드래곤…… 얀피르 그자가 드래곤이었어! 아아, 어떡하지? 분명 날 죽이러 올 텐데!’
그때, 감옥 앞으로 누군가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가 가까워질수록 겁에 질린 미모세의 눈동자가 서서히 커지기 시작했다.
‘정말로 드래곤이 나타났어! 날 죽이러!’
하얗게 질린 미모세는 당장이라도 숨이 넘어가기 직전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앞에 모습을 드러낸 건, 바로 산수이였다.
“비, 비덴비덴 남작?”
그녀의 얼굴을 보고 안도한 미모세는, 재빨리 철창에 매달려 산수이를 향해 울부짖기 시작했다.
“나, 남작! 나 좀 살려 줘, 응? 당신이 얀피르 그 사내의 주인이었잖아? 가서 내 얘기 좀 잘…….”
하지만 산수이는 그녀를 서슬 퍼런 눈으로 내려다보며 차갑게 내뱉었다.
“어디 그 더러운 입으로 함부로 얀피르 이름을 들먹이지?”
미모세가 얀피르에게 하려 했던 짓을 떠올리면, 아직도 그녀를 용서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산수이는 입술을 꽉 깨문 채 미모세에게 말했다.
“증언을 해준 대가로 사형은 면하게 해 줬으니, 그리 알아.”
그 말에 미모세의 얼굴에 한 줄기 희망의 빛이 돌았지만, 이어진 산수이의 말에 그녀는 또다시 절망 속으로 빠져들었다.
“하지만 작위와 재산을 몰수당한 채, 제국 땅에서 영원히 추방될 거야.”
“뭐……?”
당황한 미모세를 향해 산수이가 마지막 말을 이었다.
“물론 페니아에도 당신의 자리는 없어.”
“안 돼-! 이게 다 너 때문이야!”
분노한 미모세가 산수이의 머리채를 쥐어 잡기 위해 철창 밖으로 손을 내뻗었다.
“죽어! 산수이 비덴비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