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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 세신사 영애님-76화 (76/150)

76화.

혼수상태로 병상에 누운 산수이의 모습은 금방이라도 죽을 것처럼 창백해 보였다.

하지만 에데카나 공작저 내의 그 누구도 산수이가 쓰러진 이유를 알아내지 못하고 있었다.

사건 발생 전, 그녀가 마지막으로 휘온과 산책을 다녀왔을 때까지만 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을뿐더러.

산수이가 머물던 방 안에선 어떠한 침입의 흔적도 찾아볼 수 없었으니까.

늦은 저녁, 사용인이 침소에 방문했을 땐 이미 그녀가 의식을 잃고 쓰러져있었다고 했다.

산수이의 몸에는 그 어떤 타박상의 흔적조차 남아있지 않았던 데다가, 휘온의 지시 아래 사용인들이 산수이의 방 안을 샅샅이 뒤져보았지만 수상한 물건 역시 아무것도 발견되지 않았다.

침대 아래에 떨어져있던, 고가의 머리빗을 제외하고는.

하지만 그 어느 누구도 그 물건을 의심하지 않았다.

한편 산수이를 바라보는 휘온과 얀피르의 얼굴 역시 파리하게 시들어가고 있었다.

그들은 잠도 자지 않고 밤낮으로 그녀의 곁을 지켰지만, 차갑게 식어가고 있는 산수이의 몸에서는 그 어떤 미동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휘온이 산수이의 손을 부여잡고 울먹이듯 속삭였다.

“제발 일어나요, 산수이.”

그날, 그렇게 그녀를 보내는 게 아니었는데.

마음을 거절당해도 좋으니 계속 정원을 함께 거닐걸. 그녀가 다시 눈을 뜰 수만 있다면, 그깟 고백쯤은 아무리 차이더라도 수백 번은 더 할 수 있을 텐데.

그는 산수이의 가녀린 손에 제 이마를 갖다 대며 후회 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얀피르 역시 맞은편에서 제 볼에 산수이의 손바닥을 연신 비비며 절규하고 있었다.

“이러지 마, 주인. 제발 눈을 떠 줘.”

역시 그녀를 혼자 두는 게 아니었다. 그녀가 아무리 부탁을 해도 그깟 목욕탕 경영 따위 무시하고 끝까지 옆에서 지켰어야 했는데.

하지만 이제 와서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겠는가.

그녀를 바라보는 두 남자의 눈빛엔 이루 말할 수 없는 회한과 슬픔이 가득했다.

그때 갑자기 방문이 벌컥 열리더니, 거센 숨을 몰아쉬며 프리트가 달려들어 왔다.

“산수이 남작!”

프리트는 죽은 듯 잠들어있는 산수이의 모습을 보며 그 자리에 우뚝 굳어버렸다. 그의 손이 미친 듯이 떨려오기 시작했다.

곧이어 프리트의 뒤로 하얀 가운을 걸친 고령의 의사가 방 안으로 따라 들어섰다.

프리트의 협박으로 인해 제국의 황제 몰래 그녀를 왕진하러 온 황실 주치의였다.

프리트가 그를 향해 외쳤다.

“어서 진료를 시작해!”

황실 주치의는 서둘러 산수이의 맥을 짚었다.

모두가 긴장된 모습으로 그를 지켜보고 선 가운데, 프리트가 주치의를 다그쳐 물었다.

“어서 말해 봐. 남작이 죽을병에 걸린 것은 아니지?”

“질병을 앓고 계신 것은 아닙니다. 다만…….”

하지만 황실 주치의는 바로 말을 잇지 못하고 한참을 망설였다.

결국 프리트가 참다못해 그를 향해 소리쳤다.

“뭔데 이렇게 뜸을 들여! 어서 말하지 못해?”

“화, 확실한 것은 아니나, 한 가지 의심되는 바는 있습니다!”

“말해.”

“……9년 전, 황태자 저하께서 독에 감염되셨을 때 말입니다.”

프리트의 얼굴이 일순 창백해졌다.

“그때 저하께서 보이셨던 증상과 지금 남작의 상태가 매우 비슷합니다.”

그 말을 들은 프리트가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럼 산수이 남작의 몸에 독이 퍼져있다는 소리인가……?”

“송구하지만, 그렇게 사료되옵니다. 황태자 저하.”

주치의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프리트는 제자리에서 비틀거렸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지금 내가 무슨 말을 들은 거지?

“이건…… 이럴 수는 없어.”

그 누구보다 사랑하고 있는 여인이, 자신 때문에 죽게 생겼다.

그것도 과거 자신이 당했던 것과 똑같은 방법으로.

분노한 프리트가 울부짖었다.

“이럴 순 없다고! 황후, 죽여버리겠어!”

옆에서 이 모든 이야기를 듣고 있던 휘온과 얀피르의 얼굴 역시 새하얗게 질려갔다. 산수이의 손을 맞잡은 그들의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그녀가 독에 중독되었다니, 대체 어떤 경로로 말인가?

분명, 아무 일 없이 그날의 연회를 무사히 마쳤다고 생각했는데. 대체 언제?

휘온이 떨리는 목소리로 황실 주치의를 향해 물었다.

“해독제는요? 증상의 원인을 알고 계시니, 해독제 역시 만드실 수 있겠죠?”

하지만 황실 주치의는 고개를 저었다.

“당시에도 이 독약의 정확한 성분을 밝혀내지 못했었습니다. 따라서 해독제 역시…….”

그러자 여태 제 머리를 쥐어뜯으며 울부짖던 프리트가 주치의를 향해 돌아서서 애원하기 시작했다.

“이봐, 의사 양반. 그때 나도 아무 문제 없이 살아났었잖아, 응? 이번에도 분명 그럴 거야, 그렇지?”

하지만 주치의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당시 저하께서는 도복을 걸치고 계셨던데다가, 원래 체력이 강인하셨던 덕에 쉽게 이겨내셨던 겁니다. 하지만…….”

그가 머뭇거리다 말을 이었다.

“남작은 어떤 경로를 통해 독에 노출된 건지 전혀 알 수 없을뿐더러, 저 작은 몸으로 얼마나 버텨낼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습니다.”

프리트가 주치의의 멱살을 잡고 흔들며 울부짖었다.

“너 이 자식, 오진을 하면 죽여버리겠다 했잖아! 살려내, 그녀를 살려내라고!”

주치의가 어두운 표정으로 답했다.

“저 역시 최선을 다해보겠으나…… 송구하지만 아마 오늘 밤이 고비이실 겁니다, 저하.”

***

‘여기가 어디지……?’

산수이는 알 수 없는 공간에서 눈을 떴다.

짙은 어둠으로 드리워진 그곳엔 마치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듯 고요와 적막만이 가득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이질적이라거나 무섭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오히려 편안했다.

마치 언젠가 한번 와봤던 곳인 것처럼.

그렇게 산수이는 점차 제 마음이 고요히 진정되어가는 것을 느꼈다.

방금 전까지 제 머릿속을 꽉 채우고 있던 고민들이 무엇이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그때, 저 멀리서 누군가 울먹이며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한없이 사랑스럽고, 그리운 기분이 드는 한 사내의 음성.

하지만.

‘저건 누구의 목소리지……? 이름이 기억나질 않아.’

이윽고 산수이는 자신의 몸이 점점 나른해지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시간이 지날수록 뭐든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기분이 들었다.

‘좋다. 이대로 계속 잠이 들었으면.’

그렇게 이곳의 정적 속에서 조용히 눈을 감으려던 찰나.

갑자기 맞은편에서 새하얀 빛이 뿜어져 나오는 것이 보였다.

‘응?’

강렬한 빛에 다시 눈을 뜬 산수이는, 마치 홀린 듯 빛이 있는 방향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이 빛은? 분명 전에도 본 적이 있어.’

낯설지 않은 느낌이었다.

그 감각을 따라 걸어간 곳의 끝에 서 있던 것은.

[안녕, 나의 사도님?]

“다, 당신은?!”

여전히 새하얀 빛에 가려진 그녀의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저 어딘가 나사 빠진 듯한 말투만큼은 분명했다.

“사우나스 님?!”

바로, 목욕의 신 사우나스였다.

그제야 산수이는 자신이 어디에 와 있는 것인지 뒤늦게 깨달을 수 있었다.

신이 존재하는 곳이라면, 뻔하지 않은가.

‘여긴 천국?! 그럼 나 그 독침 맞고 결국 죽은 거야?’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서 있는 산수이를 향해, 사우나스가 다가와 말을 건넸다.

[이제야 눈치챘나 보네요. 당신이 지금 어디에 와 있는 건지.]

산수이가 절망한 표정으로 외쳤다.

“서, 설마 저 또 죽은 건가요, 사우나스 님?”

[에이, 그럴 리가요.]

사우나스가 손가락을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렇게 쉽게 죽으면 안 되죠. 아직 제가 내린 임무도 다 완수하지 못했는데요.]

그렇게 말하며 사우나스는 산수이의 몸 이곳저곳을 살피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만족한 듯 박수를 짝 쳤다.

[다행히 죽지는 않겠네요. 그 독바늘에 찔린 부위가 머리가 아닌 손이라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요. 하지만 다음에도 이러면 곤란하다구요, 나의 사도님?]

그러자 산수이가 어이없다는 듯 받아쳤다.

“아니, 곤란하다뇨? 죽을뻔한 건 저라고요, 사우나스 님! 저한테 위험수당 따로 챙겨주셔야 되는 거 아니에요?!”

분명 목욕탕만 잘 경영하면 되는 거라며! 이렇게 목숨까지 걸어야 할 일인 줄 알았냐고!

[위험수당……?]

사우나스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그게 뭘까나아?]

저, 저거 알면서 일부러 모른 척하는 거야!

부글부글 끓고 있는 산수이를 향해 사우나스가 다시 한 번 싱긋 웃어 보였다.

[아무튼, 그대는 아직 이곳에 올 때가 되지 않았으니, 그만 돌아가서 제가 내린 임무를 마저 수행하도록 하세요.]

그렇게 말하며 자신을 향해 손을 내뻗는 사우나스를 향해, 산수이가 다급히 외쳤다.

“잠깐만요. 도대체 그 임무 완수의 기준이 뭐예요, 사우나스 님?”

[기준?]

“네. 사실 이만하면 사우나스 님이 내리신 임무를 훌륭하게 잘 수행해내지 않았나요?”

비덴탕도 예전의 명성을 되찾았고, 찜질방 건설로 이뤄낸 수익 창출도 어마어마한 데다가, 이태리타월로 해외 수출까지 달성했다고요!

그렇게 잠시간 산수이의 프레젠테이션이 이어졌다.

그녀의 말을 잠자코 듣고 있던 사우나스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음음. 알죠, 알죠. 내가 다 지켜보고 있었는걸요. 실로 놀라운 성과였어요, 나의 사도님.]

사우나스가 다시금 해맑게 웃으며 산수이를 향해 박수를 짝짝짝 쳐 줬다.

하지만 산수이는 박수 따위 필요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재차 되물었다.

“그러면 이미 충분히 임무를 완수했다고 봐도 되지 않나요?”

[음, 하지만…….]

잠시 망설이던 사우나스가 입을 열었다.

[아직, 가장 중요한 딱 한 가지가 부족한걸요.]

“한…… 가지요?”

대체 뭐가 부족하다는 것인가.

‘한 가지라고? 내가 뭘 놓쳤지?’

그녀가 다급히 사우나스를 향해 물었다.

“한 가지라뇨, 사우나스 님? 그게 무엇인지 말씀해주시면 제가 돌아가는 즉시 바로……!”

[흐아암, 아아. 대화가 너무 길어져버렸네? 역시 나의 사도님과 있으면 너어무 즐거워서, 시간 가는 줄 모르겠다니까요?]

어디가 즐거웠는데!

산수이는 계속해서 사우나스의 대답을 이끌어내려고 노력했지만, 이 목욕의 신은 쉽게 답을 내어줄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사우나스가 산수이를 향해 싱긋 웃었다.

[자아 그럼 이만 돌아가 볼까요, 나의 사도님? 여기서 더 지체했다간, 정말로 천국에 가게 될지도 모르니까요!]

“아니 잠깐만요, 사우나스 님? 부족한 게 딱 한 개라면서요. 그것만 빨리 말해주시면-!”

[자아, 미끈미끈 뽀송뽀송~]

“아니 그 이상한 주문 좀 그만 외우시고요!”

[헹궈서~ 이얍☆]

“사우나스 님? 아 진짜!”

하지만 산수이의 외침은 곧 허공 속으로 속절없이 흩어져버렸고.

그렇게 산수이는 다시 에데카나 공작저의 침상에서 눈을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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