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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 세신사 영애님-75화 (75/150)

75화.

미모세 백작 부인이 건넨 붉은 상자 안에 들어있던 것은, 바로 화려한 장식의 머리빗이었다.

‘빗……?’

정교하게 세공된 금속 재질의 머리빗에는 온갖 보석과 크리스털들이 알알이 박혀 화려하게 빛나고 있었다.

‘백작 부인과 내가 이런 선물을 주고받을 사이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산수이는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미모세의 선물을 단칼에 거절했다.

“미모세 백작 부인, 이건 결코 작은 선물이 아닌데요? 죄송하지만 제가 받기엔 너무 과한 물건입니다.”

그러나 미모세는 계속해서 웃으며 붉은 상자를 산수이에게 내밀었다.

“과한 선물이라뇨. 그러지 말고 받아주세요. 남작님의 작위 계승을 축하드리려는 마음에서 준비했을 뿐입니다.”

“하지만…….”

곤란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산수이를 향해, 미모세가 서둘러 덧붙였다.

“빗으로 사용하실 수도 있지만, 머리에 꽂아두면 장식으로도 활용하실 수 있는 아주 실용적인 물건이에요.”

“역시 이런 고가의 선물은 받기에 좀 부담스럽습니다.”

여전히 선물 받기를 꺼리는 산수이의 모습에, 미모세 백작 부인이 또다시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렇게 값나가는 물건이 아닌데. 아! 혹시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제 머리에다 직접 시범을 보여드려도 될까요? 이 빗으로 머리를 예쁘게 틀어 올릴 수 있는, 저만이 알고 있는 비법이 하나 있어서요.”

“백작 부인께서…… 직접요?”

산수이는 미모세가 황후의 사람이라 경계를 늦출 수가 없었다.

‘쓸데없이 사람을 의심하면 안 되긴 하지만, 그래도 찜찜하잖아.’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금까지 산수이 자신에게 아무런 잘못도 저지르지 않은 미모세 백작 부인을 무턱대고 의심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다른 일도 아니고 자신의 작위 수여를 축하하기 위해 선물을 건네고 있는 사람이 아닌가.

더군다나 저 빗을 사용하는 방법을 미모세 본인의 머리에 직접 시범 보이겠다 하는데, 산수이에게는 더 이상 거절할 명분이 없었다.

‘일단 한번 지켜보기나 하자. 저게 정말 위험한 물건이라면, 저렇게 제 머리에 꽂아보겠다는 소리는 하지 않겠지.’

산수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한번 보여주시겠습니까?”

“어머, 실례라니요. 제 기쁨인걸요.”

방끗 웃던 미모세가 빗을 꺼내들어 제 머리를 하늘 높이 고정했다.

미모세의 머리 위에서 찬란하게 반짝이는 빗은 실로 아름다웠다.

“어떻습니까, 아름답지요? 처음에는 어려울 수 있는데, 매일 연습하다 보면 익숙해진답니다. 제가 얼마 전 제국 귀부인들 사이에 유행시킨 기법이기도 하고요.”

수줍게 웃던 미모세가 이내 제 머리에서 빗을 빼내어 다시 붉은 상자에 담아 산수이에게 건네주었다.

“그럼, 제 마음이라 생각하시고 부디 받아주세요. 남작님.”

***

화장실에서 나온 산수이는 제 손에 들려있는 붉은 상자를 바라보았다.

‘끙…… 이거 아무래도 찝찝한데. 일단 가져가서 다 같이 논의를 좀 해 봐야겠어.’

그렇게 산수이가 세 남자를 찾아 나서려던 찰나.

그녀는 익숙한 목소리에 발걸음을 멈췄다.

바로 얀피르와 프리트의 목소리였다.

프리트가 툴툴거리며 내뱉는 소리가 들렸다.

“아까부터 미모세 그 할망구가 안 보여. 설마 벌써 산수이 남작한테 가 있는 건 아니겠지?”

귀신이네.

‘여기서 바로 미모세 백작 부인 얘기를 꺼냈다간, 프리트가 당장이라도 칼을 빼들 기세인데……?’

어쩔 줄 몰라 하며 나갈 타이밍을 재고 있던 산수이 앞에, 이번엔 얀피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 되겠어, 황태자야. 아까 우리가 하려던 거. 그거 그냥 해버리자.”

그 말을 듣던 산수이가 숨을 죽였다.

‘아까 하려던 거? 그게 뭔데? 설마 정말로 미모세 백작 부인을 썰어버리려는 거야?’

하지만 그 두 남자의 계획은 그것보다 훨씬 더 심각한 것이었다.

“좋아, 드래곤. 그럼 지금 바로 동관으로 가서 불을 지르자고.”

‘이런 미친!’

갑자기 불은 왜 질러!

산수이가 다급히 그들의 앞에 튀어나가 저지하려던 찰나, 다행히도 이성적인 목소리 하나가 이어졌다.

휘온이었다.

“저하 제발……! 저 얀피르 놈에게 장단을 맞추지 마십시오!”

“휘온, 너 말이 좀 이상하다?”

“됐고, 다들 미모세나 좀 찾아봐. 조금이라도 수상하다 싶으면 바로 썰어버릴 테니까.”

숨어서 이 모든 대화를 들어버린 산수이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일단 연회를 무사히 끝낸 다음에 얘기하자.’

산수이는 미모세에게서 받은 붉은 상자를 다시 제 재킷 주머니 안에 넣어버렸다.

이걸 저들에게 보여주는 순간, 연회장은 불바다가 될 게 뻔했으니까.

***

다행히 연회는 누구 하나 썰리지도 않고, 드래곤 화염방사쇼를 볼 일도 없이 안전하게 마무리될 수 있었다.

그렇게 연회가 끝났지만, 산수이는 또다시 휘온과 함께 에데카나 공작저로 향할 예정이었다.

그녀의 확실한 안전이 보장될 때까지는 당분간 그곳에 머물게 하자는 게 세 남자의 공통된 의견이었다.

얀피르가 착잡한 표정으로 산수이에게 다가와 조용히 속삭였다.

“혹시라도 휘온 놈이 이상하게 굴면 바로 나를 불러야 돼. 알겠지, 주인?”

“휘온이 퍽이나 그러겠다. 걱정하지 마, 얀피르.”

“어어? 휘온 저놈이 얼마나 위험…….”

그때, 얀피르는 갑자기 제 코끝을 찌르는 강한 향수 냄새에 얼굴을 찌푸렸다.

‘응?’

이 지독한 향수 냄새, 어디선가 맡아본 적이 있는데?

분명…….

하지만 곧 황궁에서 밀려 나오는 인파들 속에, 그 냄새는 순식간에 묻혀버리고 말았다.

고개를 갸웃거리는 얀피르를 뒤로한 채, 휘온이 산수이에게 다급히 다가와 말을 건넸다.

“산수이, 서둘러야겠습니다.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어요.”

“알겠어요, 휘온.”

산수이가 에데카나 공작저로 향한다는 것을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도록, 그들은 각자 다른 마차에 올라탔다.

홀로 마차에 앉은 산수이는 자신의 주머니에서 붉은 상자를 꺼내 바라보았다.

‘으음, 대체 이 선물 얘기는 언제 꺼낸담?’

다행히도 그 기회는 두 사람이 공작저에 도착하자마자 찾아왔다.

휘온이 마차에서 내리는 산수이를 에스코트하며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저, 산수이? 혹시 괜찮으시다면, 저와 함께 정원을 산책하지 않으시겠습니까?”

***

산수이는 휘온과 함께 달빛이 내리비추는 공작저의 정원을 거닐었다.

그녀의 손이 재킷 주머니 속 상자로 향했다.

‘그래. 일단 오늘은 휘온한테만 먼저 얘기하고, 내일 얀피르와 프리트를 불러서 함께 머리를 맞대어보는 걸로 하자.’

그렇게 결심한 산수이가 휘온을 향해 입을 열었다.

“저, 휘온?”

“산수이?”

순간 동시에 입을 연 두 사람이 멋쩍은 듯 서로를 바라보며 웃었다.

“머, 먼저 말하십시오.”

“아니에요. 휘온 먼저 하세요.”

그러자 휘온이 부끄러운 듯 헛기침을 하며 말을 이었다.

“크흠! 별건 아니고, 이곳에서 지내시는 데 불편한 점은 없으신지 여쭤보려 했습니다.”

“그럴 리가요! 휘온이 얼마나 신경을 많이 써주고 계신데요.”

“그렇다면 다행이군요.”

잠시 침묵을 지키던 휘온이 떨리는 목소리로 산수이를 향해 말했다.

“그날, 그대를 보고 얼마나 가슴이 철렁했는지 모릅니다.”

그날?

‘아, 헤슬리히한테서 도망쳐 오던 날 말이구나.’

휘온이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산수이 그대를 지키지 못한 제 자신을 수없이 책망했습니다.”

“아니, 왜요! 휘온 탓도 아니잖아요.”

“제가 조금만 더 강했다면, 그날 산수이 그대에게 더 큰 힘이 되어드릴 수 있었을 텐데.”

“휘온…….”

“제가 당신을 위해 해드릴 수 있는 게 고작 이렇게 작은 거처를 내어드리는 것뿐이지만, 그래도 ‘내 집이다’ 생각하고 편히 머물다 가셨으면 좋겠습니다.”

아니, 여기가 어떻게 작은 거처야. 황궁 다음으로 큰 거처인데?

‘아, 아냐. 지금 이게 중요한 게 아니야. 빨리 이 대화를 끝내고 미모세 백작 부인의 선물 얘기로 넘어가야 돼.’

산수이가 서둘러 휘온에게 입을 열었다.

“이미 충분히 편하게 잘 지내고 있어요. 고마워요, 휘온. 저기, 근데.”

하지만 이어지는 휘온의 말에 산수이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편히 머무시다 정말 그대의 집이 되어도 좋고…….”

뭐야.

‘가, 갑자기 왜 분위기가 또 로맨스야!’

나 너한테 미모세 백작 부인이 준 선물 얘기 꺼내야 한단 말이야! 그런데 갑자기 이렇게 장르 전환을 하면 안 되지!

“저, 저기 휘온? 제가 꼭 할 말이 있는데요.”

산수이는 서둘러 제 주머니 속 상자를 꺼내 보이려 했지만, 그녀의 다급한 몸짓을 본 휘온의 얼굴이 귀 끝까지 새빨개졌다.

“아, 제가 또 그대를 부담스럽게 만들었군요.”

산수이는 강하게 손사래 쳤다.

“아,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전혀 부담스럽지 않았어요, 그보다……!”

하지만 이미 휘온은 스스로를 자책하며 저 깊은 지하 속까지 땅굴을 파서 내려간 듯 보였다.

“죄송합니다. 저도 모르게 또 제 마음이 튀어나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런 게 아니라니까요, 휘온? 그보다 정말로 제가 드릴 말씀이……!”

“부, 부디 천천히 대답해 주십시오, 산수이. 전 언제까지고 기다릴 수 있으니까요!”

이제 산수이는 거의 울 지경이 되었다.

서둘러 저택 안으로 돌아가려는 휘온을 바라보며, 산수이는 속으로 절규했다.

‘나 정말 할 얘기가 있다고오-!’

***

결국 산수이는 휘온에게 미모세에 대한 얘기는 꺼내 보지도 못한 채 자신의 방으로 들어왔다.

심신이 지칠 대로 지쳐버린 그녀는 침대 위로 벌러덩 누워버렸다.

“아 몰라! 내일 그냥 셋 다 불러놓고 얘기하면 되겠지, 뭐!”

그때, 붉은 상자가 그녀의 재킷 안에서 빠져나와 침대 밑으로 떨어졌다.

툭—

그와 함께 머리빗이 상자 밖으로 튀어나와 바닥에 나뒹굴었다.

깜짝 놀란 산수이가 서둘러 몸을 일으켜 머리빗을 주워들었다.

‘아, 안 돼! 증거 보존!’

산수이는 혹시나 빗이 망가지진 않았는지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다행히 부러진 곳은 없어 보였다.

‘후우, 보여주기도 전에 망가뜨릴 뻔했네.’

그렇게 산수이가 빗을 다시 상자 안에 집어넣으려는 순간.

달칵—

산수이는 제 손가락 끝에서 마치 무언가 버튼이 눌리는 듯한 감촉을 느꼈다.

‘응……?’

그와 동시에, 산수이의 손에서 짙은 통증이 느껴졌다.

“아야!”

놀란 그녀가 제 손에 들린 머리빗을 살펴보았다. 그 끄트머리에는 이전에는 본 적 없던 미세한 바늘이 달려있었다.

‘이건……?’

그제야 상황을 파악한 산수이가 머리빗에서 손을 뗐다.

그러자 여태껏 산수이의 손가락에 눌려있던 머리빗 정중앙의 푸른색 크리스털이 달칵거리는 소리와 함께 위로 올라오는 게 보였다.

그녀의 손에서 서서히 힘이 풀려나갔다. 그와 동시에 머리빗의 끄트머리에 달려있던 바늘이 힘없이 바닥으로 톡 떨어져 침대 아래로 굴러 들어갔다.

그 장면을 마지막으로, 산수이는 의식을 잃은 채 바닥으로 쓰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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