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얀피르에게서 가까스로 도망친 헤슬리히는 지하 감옥을 향해 미친 듯이 달렸다.
‘분명 그 여자가 저들의 약점이야!’
하지만 그곳으로 향하는 길목엔 이미 여기저기에 병사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이런 멍청한 놈들!’
텅 비어버린 철창을 발견한 헤슬리히는 망연자실했다.
“젠장!”
이미 그 둘은 드래곤을 타고 이곳을 빠져나갔으리라.
하지만.
크르르르-!
이상하게도 성 밖에선 여전히 그 끔찍한 드래곤의 포효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뭐야? 왜 아직도 여기에……?’
순간 그의 머릿속에 무언가 떠올랐다.
설마.
그렇게 서둘러 달려온 자신의 집무실 안에서, 헤슬리히는 제 방을 뒤지고 있던 두 사람과 딱 마주치게 된 것이다.
“헉!”
헤슬리히의 서랍장을 신나게 뒤지던 산수이는, 그와 눈이 마주치자 깜짝 놀라 중얼거렸다.
“아, 왜 이렇게 빨리 왔대…….”
“지, 지금 여기서 뭣들 하고 있는 거냐!”
그때, 프리트가 분노에 가득 찬 표정으로 헤슬리히를 향해 달려들었다.
“너 이 자식 잘 만났다!”
“!”
이대로 프리트와 붙게 되면 그 결과야 불 보듯 뻔했다.
헤슬리히는 재빨리 산수이가 서 있는 쪽을 향해 몸을 피했다.
프리트가 눈에 시퍼런 불을 켜고 그를 쫓으며 외쳤다.
“치사하게 여인을 방패 삼으려는 거냐, 헤슬리히!”
프리트의 비난에도 아랑곳 않고 헤슬리히는 서둘러 벽에 장식되어 있던 검을 꺼내들었다.
프리트가 이를 갈았다.
‘저런 놈의 머리쯤이야 마음만 먹으면 단칼에 딸 수 있어. 하지만…….’
프리트는 산수이를 흘끔 바라보았다.
우선은 그녀를 이곳에서 안전하게 탈출시키는 게 중요했다.
‘젠장. 지켜야 할 게 생기니 쓸데없이 생각이 많아지는군.’
프리트가 산수이를 향해 나지막이 말했다.
“영애, 지금 바로 드래곤 놈을 불러.”
“예? 하지만 아직 증거를……!”
“나한텐 그대의 안전이 더 중요해. 어서!”
결국 산수이는 창문을 활짝 열었다.
바람결에 산수이의 긴 머리카락이 흩날리자, 성 주위를 배회하며 날고 있던 얀피르가 그녀의 향기를 맡고는 빠르게 날아왔다.
“주인! 어서 나한테 올라타!”
산수이는 순식간에 얀피르의 목덜미에 올라탔다.
이어서 프리트도 창문 밖으로 뛰어내리자 헤슬리히가 외쳤다.
“비겁하게 도망치는 거냐, 프리트 황태자!”
“시끄러워! 한 번 더 그녀에게 손을 댔다간, 네놈의 사지를 절단해버리겠어!”
그러자 얀피르가 말을 얹었다.
“그러지 말고 지금 잘라버려, 저하야. 내가 그 절단면을 아주 다 지져버릴 테니까.”
“좋은 생각인데? 그럼 나만 잠깐 다시 내려 줘, 드래곤. 내가 저놈 오늘 아주 포를 떠 버릴 테니까!”
하지만 산수이가 프리트의 옷깃을 꽉 붙잡고는 소리쳤다.
“저하, 미쳤어요? 어딜 다시 들어가시려는 거예요? 얀피르, 빨리 출발해!”
“그럼 출발하기 전에 불꽃이라도 한번 쏘…….”
“아 빨리!”
그렇게 얀피르는 두 사람을 태운 채 제국을 향해 날아올랐다.
헤슬리히는 잠시 넋을 잃은 채 구름 속으로 멀어져가는 그들을 바라보았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이제야 모든 퍼즐이 맞아떨어졌다.
전설 속의 드래곤이 어찌 이곳에 존재하고 있는 것인지 연유야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저 드래곤은 프리트가 부리는 마물임이 틀림없었다.
아마도 제 여인을 지키기 위해 프리트가 드래곤의 비늘을 뽑아내 목걸이를 만들어 준 것이리라.
‘이제 어쩐다?’
헤슬리히는 서둘러 제 집무실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만일 산수이가 이 방에서 그 증좌까지 찾아냈다면 그땐 정말 끝장이었다.
주위를 살피던 그는 책상 밑 나무 바닥을 조심스럽게 들어냈다.
비밀의 공간 속 물건이 안전하다는 것을 확인한 그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바닥으로 털썩 주저앉았다.
“하아…….”
그곳엔 헤슬리히와 제국의 황후가 서로 주고받았던 사랑의 증표뿐만이 아니라.
그가 자신의 아들인 제국의 2황자와 주고받은 서신도 들어 있었다.
***
제국을 향해 날아가는 내내, 프리트는 산수이의 뒤에서 그녀를 꽉 끌어안고 있었다.
“저하……? 이제 안전하니 놓아주셔도 되는데.”
하지만 프리트는 전혀 놓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대체 헤슬리히 그자의 때는 왜 밀어준 거야? 내가 황후의 사람들은 모두 위험하다고 했잖아!”
“이태리타월 교역을 성공시키려면 하는 수 없었다고요!”
“대체 영애는!”
크게 한숨을 내쉬던 그가 산수이의 어깨에 제 이마를 기대고는 낮게 속삭였다.
“왜 이렇게 사람을 걱정시켜, 응?”
“저하…….”
두 사람은 잠시 동안 말이 없었다.
그 묘한 분위기에 얀피르가 잔뜩 신경질 난 목소리로 그르렁거렸다.
“저하 너, 당장 주인한테서 떨어져.”
“싫다면?”
“그럼 내 꼬리로 정확히 네놈만 쳐서 추락시켜 버리겠어.”
그 말에 프리트가 산수이를 더 세게 끌어안고는 응수했다.
“어디 한번 해 보시지.”
“내가 못 할 것 같냐?”
그렇게 창공 위에서 난동을 부리는 두 사내를 향해 산수이가 큰소리를 냈다.
“아 좀! 지금 둘이 싸울 때냐고요!”
결국 그녀에게 혼쭐이 난 프리트는 산수이를 품에서 놓고 한 발짝 떨어져 앉았고.
얀피르는 얌전히 안전 비행을 계속했다.
깊은 한숨을 내쉬는 산수이에게 프리트가 물었다.
“그러고 보니 영애, 아까 헤슬리히의 집무실에서 대체 뭘 찾으려던 거야?”
“그건…….”
프리트의 물음에 산수이는 잠시 망설였다.
‘그 얘길 어떻게 꺼내야 프리트가 조금이라도 마음의 상처를 덜 받을 수 있을까?’
잠시간의 고민 끝에 산수이가 입을 열었다.
“사실은요, 저하.”
이야기가 길어질수록 프리트의 표정 역시 서서히 구겨져갔다. 그가 당장이라도 무너져버릴 것 같은 고통스러운 모습으로 중얼거렸다.
“그러니까…… 죽은 내 아우가, 나의 친형제가 아니었을 수도 있다는 소리인가.”
“물론 제 추측일 뿐입니다, 저하. 결국 아무런 증좌도 찾지 못했으니까요.”
프리트가 제 일그러진 얼굴을 천천히 손으로 감쌌다.
산수이의 말대로 아직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리트의 머릿속은 복잡한 실타래처럼 엉켜갔다.
자신이 죽게 만든 아우에 대한 죄책감과.
그와 동시에 어쩔 수 없이 밀려드는 배신감 때문에.
한참을 상념에 잠겨있던 프리트가 입을 열었다.
“만일 이 모든 게 사실이라면 나에게 있어서 지금 가장 문제가 되는 건, 황후 배 속에 있는 아이가 아냐.”
“그럼요?”
“진실을 알고 있는 그대의 안위지. 황후가 결코 그대를 가만 놔둘 리 없어.”
***
제국으로 돌아온 그들이 맨 처음 향한 곳은 황궁도, 비덴비덴 남작저도 아닌 바로 에데카나 공작저였다.
그들에게서 모든 자초지종을 들은 휘온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이럴 수가……!”
휘온 역시 깊은 충격을 받은 모습이었다.
프리트가 휘온에게 부탁했다.
“그러니 잠시 동안만 산수이 영애를 이곳에 숨겨 줘, 휘온. 여기가 지금 제국 땅에서 가장 안전하니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하. 제 목숨을 걸고 그녀를 지키겠습니다.”
프리트는 이어서 산수이에게 고개를 돌렸다.
“부디 사절단 파견 기간이 끝날 때까지만 이곳에 머물러 줘, 영애. 일이 끝나면 얀피르와 함께 다시 그대를 데리러 올 테니.”
“무슨 일이요?”
“곧 알게 될 거야.”
어느새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온 얀피르의 어깨에, 프리트가 자신의 팔을 휙 하고 걸쳤다.
얼굴을 잔뜩 찡그린 얀피르가 그의 팔을 툭 쳐서 떨어트렸지만, 프리트는 냉큼 다시 그의 목에 팔을 되감았다.
“이봐, 드래곤. 슬슬 공표하러 가자고. 페니아에서 함부로 움직이지 못하도록.”
얀피르가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입을 내밀었다.
“하아…… 어쩔 수 없지.”
그 역시도 산수이를 지키기 위해선 이게 최선의 방법이란 걸 잘 알고 있었다.
“주인 덕에 협력해 주는 줄 알아.”
그리고 다음 날.
카데베르 제국 황궁의 하늘 위로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
“드, 드래곤이 나타났다!”
전설 속의 동물로만 여겨지던 드래곤이 나타났다는 것만으로도 온 제국이 발칵 뒤집힐 노릇이었는데, 그 드래곤의 등 위에 올라타 있는 한 사내의 모습이 제국민들을 더욱더 놀라게 만들었다.
“저 위에 타고 계신 분…… 설마 황태자 저하셔?!”
제국의 황태자가 어둠처럼 짙고 거대한 드래곤의 등에 올라탄 채 날아 내려오는 모습은 실로 장관이었다.
황궁뿐 아니라 수도에 거주하는 모든 이들이 이 말도 안 되는 광경을 지켜보기 위해 몰려들었다.
이윽고 얀피르가 비행 고도를 낮춰 지상과 가깝게 날기 시작했다.
그때, 지금껏 얀피르의 등 위에 앉아만 있던 프리트가 갑자기 몸을 일으켰다.
“!”
그는 얀피르의 등 위에서도 한 점 흔들림 없이 꼿꼿함을 유지한 채, 찬란한 금발을 휘날리며 제국민들 사이를 날아다녔다.
마치 말을 타듯 자연스럽게 드래곤을 부리며 날아다니는 프리트 황태자의 모습에, 제국민들은 말로 다 할 수 없는 벅찬 감동을 느꼈다.
“화, 황태자 저하 만세!”
“만세!”
순식간에 온 거리는 그의 이름을 부르짖는 소리로 가득 찼다.
그 함성을 듣고 있던 얀피르가 불만스러운 듯 프리트를 향해 뇌까렸다.
“저하 너, 똥폼 잡기 전에 미리 언질 좀 해 달랬잖아! 그렇게 갑자기 일어나면 어떡해?”
“굳이 말 안 해도 네놈이 알아서 잘만 날아주던데 뭐.”
“그러다 언제 한번 고꾸라져 떨어져 봐야 정신을 차리지.”
“드래곤 네놈은 날 너무 우습게 보는 경향이 있어.”
하지만 그들의 대화는 곧 프리트를 향한 함성에 파묻혀버렸다.
한편, 드래곤을 타고 황궁을 향해 날아오는 황태자의 모습을 보고 놀란 건 귀족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저, 저 드래곤 위에 타고 있는 게 정녕 그 망나니 황태자란 말인가?!’
하지만 그 누구보다 가장 놀란 것은 바로 황제 내외였다.
‘에데카나 공작이 말했던 위대한 발견이라는 게 설마 드래곤이었을 줄은……!’
드래곤의 등에 늠름하게 앉아있는 제 아들의 모습을 본 황제는 저도 모르게 울컥했다.
하나밖에 안 남은 아들놈이 평생 사고만 치며 부모 속 다 썩이고 다니더니, 드디어 제대로 된 건수 하나를 물어온 것이었다.
여태까지의 모든 망나니짓을 다 없던 일로 해버릴 정도의 강력한 한 방을.
하지만 그 옆에 선 황후의 심경은 정반대였다.
‘드래곤이 정말로 실재했다니!’
이로 인해 올라간 프리트의 지지율을 떨어트리기란 쉽지 않을 터였다. 제 배 속의 아이가 아들이라 한들, 드래곤을 부리는 황자를 이길 방도는 없었다.
게다가 어제저녁에 헤슬리히로부터 받았던 그 밀서의 내용.
‘산수이 영애가 우리의 비밀을 눈치채기까지 했다고……?’
설상가상으로 모든 상황이 최악으로 치닫는 중이었다.
이제 더는 산수이를 이용할 수도 없을 노릇이었다. 그랬다간 저 미친 황태자 놈이 드래곤을 끌고 가서 페니아를 불바다로 만들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저놈 눈이 뒤집히면 그러고도 남을 터.’
하지만 그렇다고 산수이 영애가 멀쩡히 제국 땅을 헤집고 다니도록 둘 수도 없는 일이었다.
말하자면 시한폭탄이 아닌가.
저와 헤슬리히 사이의 은밀한 관계를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니까.
‘그럼 다른 방법을 써서 없애는 수밖에.’
황후가 프리트를 노려보며 마음속으로 말했다.
‘세상이 다 네 것 같지? 그 잘난 미소가 언제까지 가나 보자꾸나. 곧 그 위에서 고꾸라져 바닥으로 처박히게 해 주마.’
한편 황제는 제 아들의 늠름한 모습을 보고 벅찬 마음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곧이어 얀피르가 황궁 정원에 살며시 내려앉아, 프리트를 지상에 착지시켜주었다.
황제는 서둘러 프리트에게로 달려가 그를 꽉 끌어안으며 울먹였다.
“아들, 내 아들 프리트! 네가 우리 황가의 오랜 염원을 이뤄주었구나! 내 세대에서 드래곤 일족을 만나게 될 줄은……!”
“그저 소자가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이어서 황제가 얀피르를 향해 한쪽 무릎을 꿇고 말을 이었다.
“카데베르 황가의 핏줄이 오랜 친우를 다시 뵈옵니다.”
얀피르가 고개를 끄덕이며 제 커다란 한쪽 발을 황제의 어깨에 떡하니 올려놓고는 말했다.
“응, 알았으니까 그 쓸데없는 무릎은 그만 꿇고. 가서 인근 국가들에게 전해, 황제야. 이 제국은 내가 수호할 예정이니까 건드리면 다 뒈질 줄 알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