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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 세신사 영애님-70화 (70/150)

70화.

페니아 왕궁 지하 깊은 곳에 위치한 감옥 안.

산수이는 그중에서도 대역 죄인들만이 향하는 가장 어둡고 음습한 곳에 감금되어있었다.

이윽고 천장에 고여있던 물방울이 그녀의 얼굴 위로 떨어졌다.

“으으…….”

힘겹게 눈을 뜬 산수이가 숨을 들이마시자, 감옥 안의 눅눅하고 습한 공기가 코로 밀려들어 왔다.

몇 번인가 눈을 깜빡이던 그녀가 천천히 자신의 몸을 일으켰다.

찬 바닥에 아무렇게나 내던져져 있던 터라, 온몸에서 극심한 통증이 느껴졌다.

“흐윽, 아파죽겠네. 헤슬리히 이 자식을 그냥.”

산수이는 가까스로 몸을 벽에 기댄 채, 지금 자신이 처한 상황을 하나둘씩 정리해보기 시작했다.

그녀가 도망갈 수 없을 거라 생각했던 것인지, 다행히 손발에는 별다른 포박이 되어있지 않았다.

‘불행 중 다행이네.’

하지만 그 말인즉슨, 이 감옥은 그만큼 빠져나가기가 힘들다는 뜻도 될 터였다.

그때, 산수이의 머리에 중요한 사실이 하나 떠올랐다.

‘어, 잠깐? 내 손이 풀려있다는 건.’

아까까지만 해도 자신의 손에 감겨있던 기다란 이태리타월 역시,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것이다.

‘큰일인데. 그 국왕 놈이 이태리타월을 압수해 간 모양이야.’

난감했다. 이야말로 전쟁터에서 무기를 빼앗긴 꼴이 아닌가.

그녀가 이 사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잠시 고뇌하던 찰나.

‘맞다……!’

산수이는 근처에 아무도 없는지를 재차 확인한 후, 바로 제 옷 속으로 손을 집어넣어 무언가를 찾기 시작했다.

그것은 산수이가 미리 자신의 속옷 안에 숨겨둔 조그마한 이태리타월 조각이었다.

‘다행이다.’

전쟁터에서 인질로 잡혀 총은 다 빼앗겼지만, 품에 숨겨둔 단도는 들키지 않은 그런 상황이랄까.

산수이는 벽에 기대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시간이 얼마나 흐른 거지?’

산수이는 철창 밖으로 고개를 빼서 무언가 확인할 만한 것이 없는지 두리번거렸다.

그때, 갑자기 자신에게로 가까워지는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저벅저벅—

그것은 누군가 아래로 내려오고 있는 소리였다.

‘누구지? 간수? 아니면 그 망할 놈의 국왕?’

둘 다 정답이었다.

헤슬리히는 제 뒤를 따르는 두 명의 수하와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

어느새 멀쩡히 깨어나 바닥에 정자세로 앉아있는 산수이를 본 헤슬리히가 조소했다.

“호오, 벌써 일어난 건가. 역시 마녀라 그런지 정신력이 제법이구나.”

그런 헤슬리히에게 산수이가 잔뜩 짜증을 내며 응수했다.

“마녀 아니라니까?”

그러자 헤슬리히의 뒤에 있던 험악한 인상의 간수가 산수이에게 엄포를 놓았다.

“네 이년!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국왕 전하께 그딴 식으로 말을 하느냐!?”

“됐다.”

헤슬리히는 그에게 저리 물러가 있으라 손짓했다. 간수는 씩씩거리면서 그에게 묵례 후 자리를 비켰다.

헤슬리히가 철창문을 열고 들어가 산수이를 향해 말했다.

“네가 차고 있는 그 재미있는 물건을 좀 살펴봐야겠다.”

헤슬리히가 손짓하자, 그의 뒤에 서 있던 노파가 산수이에게로 다가왔다.

산수이의 목걸이를 유심히 살피던 노파가 깜짝 놀라며 중얼거렸다.

“이, 이것은……!”

노파의 표정을 본 헤슬리히가 흥미롭다는 듯 물었다.

“그래, 이 물건이 대체 무엇이냐?”

“이 목걸이는 고대 드래곤의 비늘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전하!”

“뭐라고?”

그 말을 들은 산수이가 눈을 질끈 감았다.

‘망했다.’

그때, 노파의 입에서 더욱더 놀라운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하오나, 이것은 우려하셨던 저주 같은 게 걸려있는 마도구가 아니라…….”

뭔가 이상하다는 표정을 짓던 노파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이것은 드래곤의 반려를 위한 장신구입니다, 전하.”

그 말을 들은 산수이가 저도 모르게 버럭 소리쳐버렸다.

“네? 뭐라고요?!”

드래곤의 반려라니, 대체 이게 무슨 소리야!

그런 산수이의 반응을 본 헤슬리히는 오히려 제가 더 놀란 표정을 지었다.

“하……? 설마 넌 자기가 차고 있는 목걸이의 정체가 뭔지도 몰랐단 말이냐?”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헤슬리히는 노파에게 목걸이에 대한 좀 더 자세한 설명을 요구했다.

“……전설에 따르면, 드래곤 종족에게는 평생의 반려로 삼고 싶은 이에게 제 비늘로 만든 장신구를 선물하는 풍습이 있다고 합니다.”

산수이는 일순 정신이 멍해졌다.

그러니까, 얀피르가 자신에게 준 목걸이는 그저 단순한 선물이 아니라.

‘프러포즈한 거였냐!’

어쩐지 얀피르가 갑자기 저에게 액세서리를 줄 때부터 이상하긴 했다.

추근거림의 대가 얀피르 선생이 아무 생각 없이 저런 빛나는 걸 줄 리가 없지 않은가.

그런 것도 모르고 순진하게 덥석 받았으니.

‘잠깐, 그럼 난 얀피르의 프러포즈를 받아들인 게 된 건가?!’

멘붕에 빠진 산수이를 뒤로한 채, 노파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장신구에는, 보통 그 반려를 보호하는 마법이 걸려있곤 합니다.”

그 말을 들은 헤슬리히는 기가 막혔다.

“그럼 저 계집이 드래곤의 반려란 말이냐?”

노파가 고개를 저었다.

“전설은 전설일 뿐. 아시다시피 드래곤 제국은 이미 몇백 년 전 멸망하지 않았습니까, 전하. 아마도 이 목걸이 주인의 신변이 보호되는 마법 정도가 발동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뭐야, 그럼 고작 호신용 목걸이였다는 소리군.”

헤슬리히는 큰 소리로 웃으며, 노파를 향해 손을 저었다.

“그만 가 봐도 좋다.”

그렇게 노파가 사라지고, 이제 철창 안엔 산수이와 헤슬리히 단둘만이 남게 되었다.

헤슬리히가 산수이를 향해 웃었다.

“날 깜찍하게도 속였겠다?”

“속이긴 누가 속였다고 그래?”

그렇게 말하며, 산수이는 몰래 이태리타월 조각을 꺼내기 위해 손을 움직였지만.

이미 수상한 움직임을 눈치챈 헤슬리히가 그녀의 손목을 낚아채 강하게 비틀었다.

“같은 수작에 두 번 당할 줄 알고?”

“아악!”

산수이의 손에서 이태리타월 조각이 툭 하고 떨어졌다.

헤슬리히가 타월 조각을 주워들며 중얼거렸다.

“역시 이게 마녀의 물건이었군.”

“아, 안 돼……!”

그가 조소하며 천천히 산수이에게로 다가왔다.

“이제 이것만 빼앗으면 넌 죽은 목숨이다.”

그렇게 헤슬리히가 산수이에게 손을 뻗어 목걸이를 빼앗으려던 순간.

“전하!”

갑자기 다급한 목소리와 함께 계단에서 병사 하나가 내려왔다.

“긴급 상황입니다, 전하!”

“뭐?”

병사로부터 자초지종을 전해 듣던 헤슬리히의 눈이 점점 커졌다. 이윽고 그가 천천히 산수이에게로 몸을 돌리며 입을 열었다.

“그깟 목걸이를 벗겨내 널 죽이는 것보다, 원래 계획대로 하는 편이 훨씬 더 재미있겠는데?”

“뭐……?”

그녀를 바라보는 헤슬리히의 얼굴에는 섬뜩하면서도 비릿한 미소가 번져나가고 있었다.

***

페니아 왕궁의 성벽 위.

보초들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페니아 왕국이 카데베르 제국과 결혼 동맹을 맺은 후, 아주 오랜 시간 동안 평화로운 날들이 계속 이어졌기 때문이었다.

이따금 하늘 위를 날아다니는 전령구를 제외하면, 이곳 성벽엔 정말 개미 새끼 한 마리조차 보이지 않는 게 보통이었다.

그래서 보초들은 지금 자신들이 꿈을 꾸고 있는 게 아닌가 생각했다.

그렇지 않다면 피 맛에 미친 놈이라 불리는 프리트 폰 카데베르 황태자가, 갑자기 하늘에서부터 날아 내려오는 일 따윈 일어날 리 없을 테니까.

콰아앙!

“제, 제국의 황태자?!”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태양처럼 빛나는 황금색 머리와, 새파란 눈동자는 제국 황족의 증거나 다름없었으니까.

“으아아악! 황태자가 왜 저기서 나와!”

시퍼런 눈알을 유성처럼 빛내며 날아온 프리트가 그들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너희랑 놀아 줄 시간 없어. 비켜!”

몇몇 병사들이 그를 막아내려 했지만 헛수고였다. 프리트가 가는 걸음마다 그들은 외마디 비명을 지른 채 속수무책으로 쓰러져갔다.

“크윽!”

프리트는 왕궁 안을 향해 질주했다.

‘제발, 제발 살아만 있어 줘!’

페니아 왕궁 안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 되었다.

평화 협정을 맺은 동맹국의 황태자가 대낮부터 칼을 차고 쳐들어오다니, 상상도 못 할 상황이었다.

“산수이 영애!”

그녀를 찾아 한 마리 사자처럼 포효하는 프리트의 뒤로, 곧이어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비덴비덴 남작 영애를 찾는 겁니까, 프리트 황태자 저하?”

프리트가 돌아본 곳엔, 얇은 가운 차림의 헤슬리히가 서 있었다.

“헤슬리히 국왕……?”

대체 무얼 하다 나타난 것인지, 헤슬리히의 얼굴은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가 나른한 표정으로 프리트를 향해 중얼거렸다.

“제국의 황태자가 왕궁에 쳐들어왔다는 게 정말 사실이었을 줄이야.”

방금 전까지만 해도 산수이를 찾느라 미쳐 날뛰던 프리트는, 제 앞에 선 헤슬리히의 모습을 보고 멈칫했다.

“……!”

불길한 예감이 프리트의 머릿속을 꽉 채웠다.

‘저 차림은…… 설마.’

자신을 바라보는 프리트의 표정이 서서히 굳어져가고 있다는 걸 눈치챈 헤슬리히가 조소하듯 뇌까렸다.

“당신이 방해하지만 않았어도, 그녀와 좀 더 즐길 수 있었는데.”

“!”

그 말에 눈이 뒤집힌 프리트가 단숨에 헤슬리히에게로 달려가 그의 멱살을 잡았다.

“이 자식! 감히 그녀에게 무슨 짓을 한 거야-!”

헤슬리히가 빠짝 약을 올리며 프리트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이런, 뭔가 착각하신 것 같은데. 제게 먼저 안겨 온 것은 그 영애 쪽이었습니다.”

“닥쳐!”

광분한 프리트가 제 주먹으로 헤슬리히의 얼굴을 거세게 내리쳤다.

콰당-!

하지만 헤슬리히는 바닥에 처박히면서도 계속해서 히죽히죽 웃어댔다.

‘뭐야, 서신으로 읽은 것 이상이잖아? 프리트 황태자, 그 세신사 영애에게 미쳐도 단단히 미쳐있군.’

프리트가 그를 향해 소리쳤다.

“헛소리 집어치워! 대체 그녀는 지금 어디에 있지?”

“그야 당연히 제 침소에…….”

“웃기지 마!”

프리트가 헤슬리히의 목을 검으로 겨누었다.

“산수이 영애가 절대 먼저 그랬을 리 없어. 만에 하나 네놈이 강제로 그녀에게 손을 댔다면…….”

프리트가 고통스러운 얼굴로 입술을 짓씹으며 말을 이었다.

“여기서 당장 네놈을 죽여버리고, 그녀를 데려가겠다.”

“뭐? 으하하하-!”

헤슬리히가 미친 듯 웃어젖혔다.

“다른 사내가 품에 안았던 여자라도 상관없다 이겁니까? 아아, 이런 순애보라니.”

“닥쳐!”

프리트는 제 손에 들린 장검을 헤슬리히의 목에 더 가까이 들이밀었다. 그의 목에서 배어 나온 핏방울이 칼날을 타고 조금씩 흘러내렸다.

하지만 헤슬리히는 웃음을 멈추질 않았다.

“동맹국 국왕인 나를 공격한 네놈이 무사할 것 같아? 카데베르 황태자, 이제 넌 끝장…….”

그때였다.

갑자기 지진이라도 난 듯 천장과 바닥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잠시 동안 흔들렸다.

당황한 헤슬리히는 주위를 두리번거렸지만, 이상한 점이라곤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었다.

‘방금 뭐였지……?’

하지만 그것도 잠시, 헤슬리히는 자신을 향해있던 프리트의 검 끝에 힘이 빠져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이때다 싶었던 그가 조심스럽게 뒷걸음질 쳤다.

그렇게 몸을 일으켜 달아나려던 찰나, 헤슬리히는 창밖에 있던 무언가와 눈이 마주쳤다.

‘어……?’

그것은 온통 황금빛으로 빛나는 커다란 반구였다.

헤슬리히를 뚫어져라 응시하던 그 섬뜩한 무언가는, 이내 새카만 비늘에 뒤덮였다.

순간 그것의 정체를 깨달은 헤슬리히의 팔에 소름이 돋았다.

‘저건 누, 눈알이잖아?’

저 말도 안 되는 크기, 그리고 비늘 덮인 피부는, 설마.

콰쾅-!

곧이어 우레와 같은 폭파음과 함께, 집채만 한 드래곤의 머리가 왕궁의 벽을 뚫고 들어왔다.

“으아아악-!”

이를 본 헤슬리히는 또다시 풀썩 주저앉고 말았다.

“드, 드래곤?!”

몸을 일으켜보려 했지만 허사였다. 제 눈앞의 검은 드래곤이 내뿜는 살기에, 온몸이 공포로 마비되어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프리트는 이 말도 안 되는 상황 속에서 놀라긴커녕, 드래곤을 향해 태연히 말을 건넬 뿐이었다.

“늦었잖아.”

그 드래곤은 프리트를 한 번 흘끔 쳐다보고는, 이내 다시 헤슬리히에게 고개를 돌려 사납게 그르렁거렸다.

“너, 내 주인한테 뭘 어쨌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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