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국의 세신사 영애님-65화 (65/150)

65화.

시간은 흘러 드디어 제국의 사절단이 페니아 왕국으로 떠나는 날이 다가왔다.

사절단 파견 예식은 궁 내의 대전에서 간소하게 치러졌다.

이번 사절단으로 선발된 다양한 귀족 및 학자들과 장인, 예술가들 사이에서 산수이는 가슴 벅찬 뿌듯함을 느꼈다. 모두 제국 내에서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알 수 있는 유명한 이들이었다.

‘모두 엄청 위대하신 분들이잖아? 이분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파견 가게 되다니, 장하다 나 자신.’

그간의 노력이 보상받는 듯했다. 비덴탕을 이만큼 키워오기 위해 지금껏 얼마나 부단히 상품을 개발하고, 때를 밀며 노력했던가.

이윽고 예식이 끝난 후, 사절단 및 고위 귀족들은 황궁의 정문 앞으로 이동해 페니아로 떠날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행렬의 맨 앞에는 제국의 사자 문양이 수놓아진 깃발이 휘날리고 있었으며, 화려한 안장이 얹어진 말들과 황금 마차가 그 뒤를 이었다.

제국의 황제는 그곳까지 친히 걸음 해 사절단에게 하나하나 인사를 건넸다.

황제의 얼굴을 본 산수이가 저도 모르게 감탄을 내뱉었다.

‘역시 그 아버지에 그 아들……!’

산수이는 비로소 프리트가 왜 그렇게 잘생겼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콩 심은 데 콩 나기 때문이었다.

깊게 팬 주름살에도 불구하고 제국의 황제는 젊어서 한가락 했을 것이 분명한 미중년이었으니까.

게다가 그의 바로 뒤에는 소문의 그 젊고 아름다운 황후가 함께 뒤따랐다.

그녀의 모습을 본 산수이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황후의 모습은 같은 여자인 산수이가 보기에도 넋을 잃을 정도로 매력적이었다.

‘저래서 이 제국의 황제가 황후에 미쳐있다는 소문이 들리는 거구나.’

황후는 페니아 왕족 특유의 어두운 피부색과 짙은 붉은 머리의 소유자로, 이국적이면서도 신비한 매력을 뿜어내고 있었다. 게다가 고양이처럼 치켜 올라간 눈매는 묘한 색기를 자아냈다.

삼십 대 중반의 나이였지만 산수이와 연배가 비슷하다 해도 믿을 수 있을 만큼 젊어 보이는 여인.

그런 황후를 바라보던 산수이는 문득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응……?’

황후가 걸음을 옮기며 이따금 자신의 배를 문지르는 것이 아닌가.

‘설마?’

그러나 산수이가 생각을 더 이을 새도 없이, 어느새 그녀와 눈을 마주친 황제 내외가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산수이는 서둘러 예를 다해 인사를 올렸다.

“제국의 황제 폐하와 황후 마마를 뵙니다.”

황제가 자애로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오오……! 그대가 비덴비덴 남작가의 영애로군. 나와 내 황후가 그대의 이태리타월에 걸고 있는 기대가 아주 커. 부디 페니아에 그 훌륭한 제품을 잘 전파해주길 바라네.”

“이리 믿어주시니 감읍할 따름입니다.”

하지만 황제와는 다르게, 황후는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빤히 바라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산수이는 그 묘한 시선에 불편함을 느꼈다.

‘왜 저렇게 빤히 쳐다보시지……?’

하지만 황후는 곧 다른 귀족들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내 착각이었나? 하긴, 황후마마가 나 같은 일개 영애에게 무슨 관심이 있으시겠어.’

황제 내외가 떠난 뒤, 산수이는 제 자리로 이동해 남작령에서 가져온 이태리타월들을 다시 한 번 점검했다.

일전에 보다폰 백작 사건을 겪은 터라, 좀 더 신경 써서 전 재고를 하나하나 꼼꼼하게 살핀 후였다. 혹시라도 문제가 될만한 제품이 없도록 말이다.

‘좋아, 이태리타월 쪽은 이상 무.’

이제 남은 것은 산수이 자신의 영업력이다. 그녀는 기필코 이태리타월과 바나나를 맞교역하겠다고 다짐하며, 자신이 타고 갈 마차로 향했다.

그런 산수이의 곁으로 휘온과 얀피르가 다가왔다.

이렇게 떠나고 나면 한동안 산수이를 볼 수 없을 것이기에, 마지막으로 그녀를 배웅하러 나온 것이었다.

“준비는 다 되셨습니까, 산수이?”

“네, 덕분에요. 고마워요, 휘온.”

그 옆에서 얀피르가 불만스러운 듯 중얼거렸다.

“하아…… 대체 왜 호위 기사를 못 데려가게 하는 거야?”

“걱정 마, 얀피르. 제국에서 사절단에게 황실 기사들을 따로 붙여줬으니까.”

그렇게 말하며 산수이는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 누군가를 찾았다.

혹시라도 프리트가 이번 사절단에 함께 파견되는 것인지 확인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아까 황제 내외의 옆에 프리트가 서 있지 않았던 것으로 보아, 그가 이미 사절단 일행에 합류해 있을 가능성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프리트의 모습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그녀가 휘온에게 물었다.

“황태자 저하는 결국 사절단과 함께 가지 않으시나 봐요?”

산수이가 콕 짚어 황태자를 찾자, 얀피르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불쾌한 기분은 휘온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는 전혀 티를 내지 않고 상냥하게 답했다.

“저하께옵서는 황제 폐하께서 내리신 다른 임무가 있으셔서, 부득이하게 이번 사절단에는 불참하십니다.”

역시나 예상대로였다. 정말로 이번 사절단에는 아는 이 하나 없이 오롯이 그녀 혼자만 가게 되는 것이었다.

어찌 보면 이 세계로 와서 처음으로 맞이하는 혼자만의 시간이었다. 어쩐 일인지 그녀의 곁에는 늘 누군가가 함께 있었으니까.

저도 모르게 쓸쓸한 기분에 젖어 들던 산수이는, 그런 제 자신의 모습을 깨닫곤 깜짝 놀랐다.

‘그새 정들었다고 이런 약한 생각을 하고 있다니? 애초에 이세계에 빙의되었을 때부터 난 혼자였는데. 정신 제대로 차리자.’

산수이는 다시 한 번 마음을 굳게 먹고 마차로 향했다. 휘온은 그런 그녀의 손을 잡고 에스코트해 주었다.

“그럼 부디 조심해서 다녀오시길…….”

“고마워요, 휘온.”

이어서 얀피르가 산수이에게 다가와 조용히 속삭였다.

“주인, 내가 준 거 아직 차고 있지?”

일전에 선물로 준 드래곤의 비늘 목걸이를 말하는 것이었다.

산수이는 드레스 안쪽에 감춰진 목걸이를 살짝 빼서 얀피르에게 보여주며 미소 지었다.

“그럼, 당연히 하고 왔지.”

“잘 때도 절대 빼지 마.”

산수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얀피르는 제 입술을 잘근 씹었다.

이렇게 산수이를 혼자 보내는 것이 못내 불안했다. 제아무리 황실 기사단이 동행한다 한들, 얀피르 본인 한 명이 따라가는 것만 못할 텐데.

마음 같아서는 본체로 변모해 하늘을 날아서라도 그녀를 따라가고 싶었지만, 남작령에 남아 때밀이 고객님들을 받아달라는 산수이의 부탁 때문에 어쩔 수가 없었다.

‘나한텐 때밀이보다 널 지키는 게 더 중요한데. 하아, 진짜 미치겠네.’

하지만 얀피르가 산수이의 고집을 꺾을 수 있었을 리 만무했다. 산수이의 모든 관심은 오로지 목욕탕에만 쏠려 있었으니까. 제 자신의 안위 따위엔 관심도 없는 그녀였다.

저에 대한 얀피르의 걱정을 알 길 없던 산수이는, 그저 벅찬 가슴에 부푼 채 마차에 올라탔다.

“그럼, 다녀올게요!”

두 남자는 이제 창문 너머로만 보이는 그녀의 얼굴을 하염없이 지켜보며 서 있었다.

긴 이별이 될 것이었다.

곧이어 사절단의 출발을 알리는 나팔 소리가 울렸다. 이윽고 그녀가 타고 있는 마차 역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산수이는 그들에게 손을 흔들며 페니아 왕국으로 출발했다.

창밖으로 보이는 두 남자가 그녀의 시야에서 점점 멀어져갔다.

***

페니아는 카데베르 제국과 국혼을 통해 동맹을 맺은 작은 왕국으로, 마차로만 며칠을 달려야 겨우 도착할 수 있을 정도로 멀리 떨어진 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길고 오랜 여정 끝에 마침내 제국의 사절단이 페니아의 왕궁 앞에 당도했다.

이윽고 그들을 맞이하기 위한 성대한 환영식이 거행되었다.

모두의 발걸음 아래엔 이국적인 문양이 새겨진 비단 카펫이 이어져 있었고, 하늘에서는 신비로운 색상의 꽃잎들이 눈처럼 뿌려졌다.

페니아의 이국적인 건축물도 장관이었지만, 마치 원래 세계의 열대 지방을 떠올리게 하는 각양각색의 식물들 역시 산수이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신비롭고도 흥겨운 음악 속에서, 그녀는 페니아의 이곳저곳을 바라보았다.

‘정말 제국하고는 확실히 다르네.’

곧이어 페니아의 국왕인 헤슬리히가 사절단 앞으로 다가왔다.

몇 해 전 붕어한 선왕의 자리를 물려받은 그는, 삼십 대 중반이란 비교적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성군으로 불리고 있는 자였다.

그가 사절단에게 예를 다해 환영의 인사를 건넸다.

“나 페니아의 국왕은 위대한 카데베르 제국의 사절단인 그대들을 진심으로 환영하오.”

그의 모습을 본 산수이의 입이 떡하니 벌어졌다.

절세미인으로 불리는 제국 황후의 친 오라버니라더니, 페니아의 국왕 헤슬리히는 본인 역시 빼어난 미모를 자랑했다.

제 누이와 똑같은 피부색과 붉은 머리는 마찬가지로 신비한 매력을 자아냈고, 다부진 체격은 그를 한층 더 위엄있어 보이게 했다.

그런 헤슬리히 국왕을 보며 산수이는 속으로 외쳤다.

‘도, 도대체 이 세계 남자들은 뭘 먹고 살길래 이렇게 옆 나라 국왕마저 잘생긴 건데!’

보통 한 나라의 왕이라 하면 나이 지긋한 백발인 경우가 대부분 아니었어?

산수이는 이 세계의 미남력에 다시 한번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세계관에선 얼굴로 왕을 뽑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러다 문득, 산수이는 헤슬리히 국왕에게서 낯선 점을 발견했다.

‘응? 그런데 왜 사절단을 혼자 맞이하고 있지?’

황후나 황비도 없이.

하지만 산수이는 이내 대수롭지 않게 넘겨버렸다.

‘아직 즉위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그런가 보지, 뭐.’

헤슬리히 국왕은 모든 이들에게 친히 악수를 청하며 환대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그의 걸음이 산수이 앞에 멈춰서는 순간.

산수이는 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응?’

헤슬리히 국왕이, 마치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사람을 마주한 듯한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녀는 저런 눈빛을 어디선가 본 적이 있었다.

‘그래, 맞아. 사절단 파견식에서 황후마마가 날 쳐다보시던 눈빛하고 똑같아.’

저 남매는 원래 사람을 이렇게 묘하게 쳐다보는 게 버릇인가.

‘눈빛도 유전인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던 찰나, 헤슬리히가 입가에 자애로운 미소를 띤 채 산수이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대가 소문의 이태리타월을 개발한 비덴비덴 남작 영애로군요.”

그 말을 들은 산수이는 비로소 그 묘한 시선에 담긴 의미를 알아챌 수 있었다.

‘이, 이태리타월의 인기가 이 정도였어? 한 나라의 국왕이 일개 영애의 이름을 기억할 정도였냐고!’

산수이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이런 분위기라면 교역 성공은 떼놓은 당상이었다.

그녀의 머릿속에선 이미 이태리타월이 바나나로 변하고, 그게 또 바나나우유가 되어가고 있었다.

행복한 공상 속에서 산수이는 미소를 지으며 헤슬리히 국왕에게 인사를 올렸다.

“그렇습니다, 전하. 이렇게 페니아 왕국에 이태리타월을 선보이게 되어 무한한 영광입니다. 실망하시지 않을 제품으로만 골라서 가져왔나이다.”

헤슬리히가 날카로운 눈매를 초승달 모양으로 휘어 웃으며 답했다.

“그럼,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그는 또다시 뜻 모를 묘한 미소를 짓고는 산수이를 지나쳐 계속 인사를 이어나갔다.

이윽고 모든 환영식이 끝난 뒤, 산수이는 다른 사절단 인원들과 함께 귀빈실로 향했다.

때문에 그녀는 헤슬리히가 자신을 계속해서 응시하고 있다는 것을 미처 알아채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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