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황제와의 독대를 마치고 제 집무실로 돌아온 프리트는 깊은 생각에 잠겼다.
‘아무래도 이상해…….’
갑자기 왜 산수이가 사절단에 추가된 거지? 아무리 이태리타월이 유명해졌다곤 해도, 이건 너무나 갑작스러웠다.
한편 그런 황태자의 모습을 바라보는 보좌관 역시 좌불안석이었다.
‘저하의 표정이 또다시 누군가를 썰어 죽일 것만 같으시다…….’
최근 비덴비덴 남작 영애님을 만나시고 나서부턴 표정이 조금은 온화해지셨다고 생각했는데. 그의 곁으로 가까이 다가가면 풍겨오던 끔찍한 피비린내도 더는 나지 않고 말이다.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떨고 있는 보좌관을 향해 프리트가 입을 열었다.
“지금 당장 에데카나 공작을 불러 와.”
***
휘온은 산수이와 함께 남작저에 남아 비덴탕 찜질방 공사에 착수하고 있었다.
프리트도, 얀피르도 방해하지 않는 오직 두 사람만의 시간. 함께 머리를 맞대고 찜질방 인테리어에 대해 논의하던 행복한 순간.
그런데 또다시 프리트 때문에 산수이와의 소중한 시간을 방해받았다.
‘내가 이럴 줄 알았어! 웬일로 날 여기 두고 저하 혼자서만 수도로 가신다 했다고!’
결국 하릴없이 입궁한 휘온은 황태자의 집무실 문을 벌컥 열며 대충 아무렇게나 내뱉었다.
“……황태자님을 자주 뵙니다?”
그런 휘온을 보며 프리트가 미간을 찌푸렸다.
“아주 불충한 태도군, 휘온. 이 세상을 하직하고 싶어졌나 보지?”
“우리가 헤어진 지 불과 하루도 채 지나지 않았습니다, 저하. 그런데 이리 또다시 부르시다니요.”
“그러게나 말이야. 아예 이참에 궁으로 이사 오는 것은 어떤가? 특별히 내 방 바로 옆에 있는 특실을 네놈에게 내어주도록 하지. 매일 내 얼굴을 볼 수 있도록 말이야.”
“차라리 지금 저를 단칼에 썰어 죽여주십시오.”
두 남자는 이토록 우정이 가득한 인사말을 주고받으며 마주 앉았다.
프리트가 휘온을 향해 입을 열었다.
“페니아 왕국의 사절단 말이야. 산수이 영애가 추가로 파견될 예정이다.”
황태자의 입에서 예상외의 이름이 튀어나오자 휘온은 크게 당황했다.
“예?! 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폐하를 독대하고 왔다. 페니아 왕국과 이태리타월을 교역할 예정이라더군.”
“그게 정말이십니까?!”
황제 폐하께서 직접 명하셨다니!
안 그래도 일전에 산수이가 페니아와 이태리타월을 교역하고 싶다 하지 않았나.
그런데 황제의 명으로 사절단에 파견될 수 있다니, 이보다 더 좋은 기회는 없을 것이었다.
‘산수이, 역시 하늘은 준비하는 자를 돕나 봅니다!’
휘온은 머릿속으로 빠르게 계산을 돌렸다.
이번 교역이 성공한다면 벌어들일 수 있는 수익은 상상을 초월할 것이다. 산수이가 부재중일지라도 찜질방 공사야 제가 도맡아서 진두지휘하면 될 것이고.
그가 대뇌 행복 회로를 돌리며 입을 열었다.
“드디어 황제 폐하께서도 이태리타월의 진가를 알아보셨군요. 감읍할 따름입니다.”
하지만 프리트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내가 자넬 부른 이유는 그런 게 아니라고.”
“그럼?”
“그 사절단에서, 나는 빠지게 되었단 말이다.”
“……아.”
휘온은 저도 모르게 납득이 간다는 듯 끄덕이고 말았다.
그런 휘온을 보며 프리트가 분개했다.
“설마 너마저 그 영감탱이와 똑같은 말을 하려는 건 아니겠지, 휘온.”
“여, 영감탱이라뇨! 저하, 그런 불충한 단어는 제발…….”
“불충은 얼어 죽을. 효심도 없는데 뭔 놈의 충성심.”
“저하, 이런 말씀들 모두 제 앞에서만 하시는 거, 맞죠? 밖에 나가선 제발 그 입을 잠그십시오.”
프리트는 휘온의 말을 개무시한 채 말을 이어나갔다.
“아무튼 이상하다고. 갑자기 나를 배제하고 영애만 사절단으로 보내는 것이.”
“그러기에 평소 행실을 잘하고 다니셨어야죠.”
“휘온, 넌 어째 점점 더 겁을 상실하는 것 같아?”
휘온이 크게 헛기침을 하며 말을 돌렸다.
“흠흠. 그나저나 산수이 영애가 페니아로 간다면, 거기서 영애 몰래 사우나스에 대해 조사하는 건 쉽지 않겠네요.”
“그것만 문제야? 대체 다른 외교관 놈들은 입이 없어, 손이 없어? 이태리타월 교역이야 그놈들 보내다가 진행하면 될 것을, 왜 굳이 산수이 영애까지 보내느냔 말이야. 뭔가 느낌이 안 좋아.”
이런 프리트와는 달리, 휘온의 입장에선 황제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할 것도 없었다.
지금 제국에서 가장 핫한 제품을 수출하려는 것이 아닌가. 당연히 소문의 제작자가 직접 페니아 왕국의 국왕을 알현해 제품에 관해 설명하고, 때밀이 시연을 해 보이는 것이 더 효과적일 것이었다.
황제가 프리트 황태자의 파견을 거부하는 건 보나 마나 일전의 2황자 사건 때문에 피차 시끄러워질 일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함일 테고.
그래서 지금 이 상황에서 석연찮음을 느낄 수 있는 건 오로지 프리트뿐이었다.
평생을 전장에서 굴러온 자만이 느낄 수 있는 촉 같은 것. 어디선가 비릿한 피 냄새가 나는 것만 같은 안 좋은 예감.
그가 제 앞에 앉은 친우를 향해 입을 열었다.
“휘온, 날 좀 도와줘야겠어.”
***
한편 비덴탕 2층에 자리할 찜질방 공사는 예정대로 진행되고 있었다.
휘온이 제가 가진 자본과 인력을 아낌없이 탈탈 털어 넣어준 것도 모자라, 온갖 마도구까지 구해 와 현장에 모조리 풀어놓은 덕택에 공사 기간은 엄청나게 줄어들었다.
그런 고로 산수이가 해야 할 일은 오직 앉아서 아이디어를 내는 것뿐이었다. 그녀가 의견을 내놓는 족족 휘온이 고용한 전문가들이 수준급의 결과물을 내놓았기 때문이다.
‘휘온 재력의 한계는 대체 어디까지야……? 이건 뭐 원래 세상에서 짓는 것보다도 더 빨리 완공되겠는데?’
아무리 빨라도 몇 달 이상은 걸릴 거로 생각했었는데, 예상외로 공사가 순조롭게 진행되자 산수이는 한가지 근심을 덜었다.
찜질방까지 들어서면 이제 비덴탕은 정말 원래 세상에 있는 목욕탕과 크게 다를 바가 없어질 것이었다. 분명 목욕의 신이 자신에게서 기대했던 것도 이런 것이었으리라.
이 세계에는 없는 최첨단 목욕 문화를 들여오는 것. 그래서 이 영지를 목욕계의 톱 오브 톱으로 만들어 내는 것!
‘그냥 찜질방만 만들면 재미없으니까, 내가 좋아하는 거 모조리 다 집어넣어야지! 어차피 휘온이 투자금 많이 줬는데 아깝잖아!’
산수이는 최고급 자재로만 이루어진 찜질방을 설계했을 뿐 아니라, 그 안에 제 모든 목욕 판타지를 모조리 때려 박았다.
처음 산수이의 설계도를 본 건축가들은 그 낯섦에 적응하질 못했다.
“영애님? 여기 표기를 잘못하신 것 같은데요. 목욕탕 안에 웬 레스토랑과 매점이……?”
“잘못 적은 게 아니니, 그대로 공사 진행해주세요.”
“하지만, 몸을 씻으러 오는 곳에서 사람들이 과연 뭘 사 먹을까요……?”
“네. 아마 찜질방 입장료보다 매점에서 나오는 매출이 더 클걸요? 아, 음료수는 차가운 게 생명이니까 냉장 시설 빵빵하게 부탁드려요.”
찜질방 입장료는 단돈 10에우로, 한화로 약 만 원만 받을 생각이었다.
찜질방 순이익의 대부분을 매점과 식당에서 낼 생각이니까.
‘역시 먹는장사가 남는 장사지.’
기존에 개발해 둔 맥반석 계란과 식혜, 매실주스뿐 아니라.
항구 마을에서 공수해 온 해초로 미역국도 끓여 판매할 생각이었다.
‘제국에도 미역과 비슷한 맛이 나는 해초가 있었다니! 벌써부터 예감이 좋아.’
그뿐만이 아니었다. 제육볶음, 김밥, 치킨, 비빔밥 등. 이곳에서 나는 채소와 육류만 가지고도 만들 수 있는 한식이란 한식은 모조리 판매할 생각이었다.
‘돈도 벌고, 나도 먹고 싶은 거 원 없이 먹고. 일석이조!’
그렇게 흡족해하는 산수이를 향해 건축가가 이어서 질문했다.
“저 그런데 영애님, 식당도 식당이지만, 이 찜질복 창고라는 건 대체……?”
건축사와 인테리어 디자이너가 보기엔 이 설계도 안에 적힌 것들은 온갖 해괴한 것투성이었다.
옷을 입고 땀을 뺀다는 괴상한 발상에서부터.
찜질방 바닥에서 잠을 잘 수 있도록 매트에 베개를 준비하라고 하질 않나.
게다가 ‘코노’라고 적힌 정체 모를 방엔 마도구를 이용해 벽면에 반주뿐 아니라 노래 가사가 재생되도록 설계해 달라고 쓰여 있었다.
방마다 탬버린을 한두 개씩 놓아달라는 추신 문구와 함께.
특히나 이 코노가 언급될 때 산수이 영애는 매우 아쉬워하며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렸다.
“하아, 마이크가 없는 게 천추의 한이야…….”
그들이 산수이의 말을 100% 모두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것만큼은 확실했다.
이 제국 어디에서도 이렇게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가지고 일할 수 있는 곳은 없을 거라는 것.
‘이태리타월과 탐폰을 개발한 영애님이라더니, 역시 남들과는 다른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시는 게 틀림없다……! 분명히 이 기괴한 설계 역시 지금 보기엔 이해할 수 없지만, 결국 제국의 역사에 기록될 위대한 건축물이 될 터!’
그들은 서로 고개를 끄덕이곤, 함께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해보자며 의지를 불태웠다.
그렇게 산수이는 찜질방 공사에 착수하며 정신없는 나날을 보냈다.
***
얀피르는 이따금 식당으로 불려가 산수이가 테스트 중인 온갖 음식들의 맛을 봐야 했다.
산수이가 방금 막 끓여낸 따뜻한 미역국과 맥반석 달걀을 얀피르의 앞에 놓으며 물었다.
“아무래도 간이 잘 안 맞는 거 같은데, 한번 먹어봐 줄래?”
“나야 좋지!”
신난 얀피르는 우선 제 앞에 있는 미역국을 원샷 드링킹하기 시작했다.
분명 산수이는 맛만 봐 달라고 한 것이었지만, 그의 손에 들린 그릇은 이미 설거지라도 한 양 깨끗하게 비어 있었다.
얀피르는 난생처음 먹어보는 미역국의 맛에 크게 감탄했다.
‘원기가 보충되는 느낌인데.’
배가 부른 얀피르가 그르렁 소리를 내며 제 배를 쓰다듬었다.
그를 향해 산수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때? 간 맞아?”
“당연하지. 주인, 네가 만든 건 전부 다 맛있어.”
“정말? 짜지 않았어?”
“응, 정말로. 그리고 이렇게 네가 해준 음식을 먹고 있으니까…….”
얀피르가 산수이를 향해 씩 미소 지으며 말했다.
“우리 꼭 신혼부부가 된 것 같지 않…… 아야야.”
산수이는 얀피르의 입을 다물게 하기 위해 그의 이마에 대고 맥반석 계란 껍데기를 부쉈다.
“아 또 왜 때려!”
제 이마를 부여잡고 있는 얀피르를 무시한 채, 산수이는 계란 껍데기를 모조리 벗겨내 그에게 내밀며 말했다.
“신혼부부 같은 소리 하고 앉았네. 자 얼른 이거나 먹어봐.”
“쳇.”
얀피르는 구시렁대면서도 산수이가 주는 계란을 순순히 받아들어 한입에 삼켰다.
“……!”
맥반석 계란 맛을 본 그의 눈이 번쩍 뜨였다.
“맛있어?”
그가 세차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하, 한 개만 더 먹어도 돼?”
산수이가 웃으며 미리 껍데기를 까둔 계란을 내밀었다.
“얼마든지.”
그는 신나게 두 번째 계란을 베어 물었다.
정신없이 먹던 그의 입가엔 어느새 노른자 부스러기가 묻어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웃던 산수이가 얀피르에게 손을 뻗었다.
“으이구, 이렇게 다 묻히고 먹으면 어떡해.”
그때였다.
얀피르가 제 입술을 닦는 산수이의 손을 덥석 잡았다.
“어……?!”
그는 말없이 자신의 입 안으로 산수이의 손가락을 가져가, 그대로 빨기 시작했다.
쪼옥 쪽-
“으, 으아아! 얀피르, 지금 뭐 하는 거야!”
손가락 끝을 타고 올라오는 찌릿한 감각에 얼굴이 새빨개진 산수이가 서둘러 자신의 손을 빼내려 했지만, 얀피르는 계속해서 그녀의 손가락을 핥아대며 중얼거렸다.
“아깝게 왜 닦고 그래? 내가 다 먹을 거야, 하나도 남김없이.”
“다, 다른 거 먹으면 되잖아! 내가 또 까줄게!”
“싫어, 이렇게 먹는 게 더 맛있어.”
그렇게 황금색 눈동자로 저를 응시하며 제 손가락을 빨아대고 있는 얀피르를 보자 산수이는 잠시 정신줄을 놓을 뻔했지만.
“크, 크흠. 아가씨……?”
“으커헉!”
갑작스럽게 뒤에서 들려온 집사의 목소리에 산수이는 재빨리 제 손가락을 얀피르의 입에서 빼냈다.
“아, 아하하! 무슨 일이에요?”
집사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태연하게 행동하며 산수이에게 서신을 건넸다.
“다름이 아니라, 황궁으로부터 서신이 도착했습니다.”
“황궁에서요?”
자신에게 올 서신이야 뻔했다.
‘프리트가 그새를 못 참고 또 때밀이 예약을 또 넣었나 보고만…….’
산수이는 익숙하단 표정으로 편지를 받아들었다.
그러나 그곳에 찍혀있는 인장은 프리트의 것이 아닌.
카데베르 제국 황제의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