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
다음 날, 프리트는 곧바로 수도로 복귀해야만 했다. 그의 보좌관이 급한 전달 사항을 가지고 찾아왔기 때문이다.
“저하, 황제 폐하께서 뵙길 청하십니다. 어서 황궁으로 돌아가시지요.”
황제가 저를 찾는다는 말에 프리트의 눈이 커졌다.
매일 황후와 노닥거리느라 저와 발레아나는 쳐다도 보지 않던 황제가, 갑자기 무슨 일로 저를 찾는단 말인가.
“우리 정력왕께서 웬일로 황후가 아닌 제 아들을 찾으시지?”
그 말에 휘온의 표정이 하얗게 질려갔다.
“저하, 제발 말 좀…….”
“이렇게 겁이 많은데, 대체 어떻게 산수이 영애를 놓고 나와 싸우고 있는지 모르겠단 말이야, 휘온.”
“그건 다른 문제지요, 저하.”
아무튼 황제의 부름은 예상외의 일이었다. 여태 제 아들이 전쟁터에 나가든 변방에 시찰을 나가든 관심조차 없던 양반이 말이다.
과거에 그런 깜찍한 짓을 저지른 황후를 결국엔 눈감아주고, 지금까지도 그녀의 치마폭에서 벗어나질 못하고 있는 자신의 아버지란 인간.
그가 당시 황후를 처형하지 않았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프리트는 제 아비에 대한 배신감을 느끼며 살아왔던 터였다.
그렇게 다시 수도로 복귀한 프리트가 황제의 거처로 발걸음을 옮겼다.
황궁 내에서 황후의 별궁 다음으로 호화로운 황제의 집무실.
그곳에는 프리트와 꼭 닮은 황금빛 머리에 푸른 눈을 가진, 미중년의 황제가 책상 앞에 앉아 서류를 확인하고 있었다.
프리트가 그의 집무실로 들어서며 깍듯이 예를 올렸다.
“……제국의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황제가 손을 멈추곤 프리트를 바라보았다.
“왔느냐.”
황제는 자리에서 일어나 프리트와 함께 테이블에 마주 앉았다. 그곳 테이블에는 이미 간단한 다과가 준비되어 있었다.
“어서 들자꾸나.”
하지만 프리트는 테이블 위에 차려진 그 어떠한 것에도 손을 대지 않았다.
황제가 제 찻잔을 입에 가져다 대며 프리트에게도 다과를 권했다.
“차가 식겠구나. 어서 들지 않고? 내 너를 위해 일부러 페니아 왕국으로부터 들여온 귀한 찻잎이다. 향이 아주 좋…….”
하지만 프리트는 자조적인 웃음을 지으며 황제를 향해 말했다.
“소인이 겁이 많아, 또 독극물을 먹게 될까 저어되어 차마 입에 대질 못하겠나이다. 부디 무례를 용서하시길.”
여느 때처럼 프리트는 황제와 저 사이에 거리를 두며 말하고 있었다.
황제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화를 냈다.
“그 일은 그만 잊으라 하지 않았어!”
“어이쿠, 제가 또 입 밖으로 내뱉는 실수를 저질렀군요. 워낙에 깊은 상처로 남은 터라.”
“하아…… 그만 됐다. 내 오늘 너를 부른 것은 다른 일이 있어서다.”
“말씀하시지요, 황제 폐하.”
프리트의 입에서 튀어나온 황제 폐하라는 표현에 황제는 제 아들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가 자신을 아바마마라 부르지 않은 지 벌써 오랜 세월이 지났다.
그 역시 아들을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프리트를 보면 그날의 끔찍한 기억들이 되살아났다.
제 사랑하는 둘째 아들을 첫째 아들의 손에 잃고, 그 남은 아들마저 떠나보낼 뻔했던 그 지옥 같던 밤.
게다가 제가 사랑하는 여인이 밤마다 제 아들을 그리워하며 울어 대는 걸 봐야 했던 날들.
그런 황후를 탓하기에는 이미 그녀가 겪고 있는 아픔이 너무 컸고, 그렇다고 책임을 묻기에는 황제 자신이 그녀를 너무 사랑했다.
그렇게 황제의 우유부단했던 태도는 이제 하나밖에 남지 않은 아들과 감정의 골을 더욱더 깊게 만들어왔다.
그가 짐짓 태연한 척 프리트를 향해 물었다.
“……페니아 왕국 사절단을 신청했더구나. 어째서지?”
프리트가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말했다.
“왜, 사돈지간인 나라에 가서도 피바람을 일으킬까 걱정되십니까?”
“프리트!”
“걱정하지 마십시오, 황제 폐하. 그저 이제야 제대로 된 황태자 노릇을 해 보려고 그럽니다. 혹시라도 잉태될지 모르는 미래의 아우에게 제 자리를 뺏길 순 없지 않습니까?”
“내 항상 말하지 않았느냐. 설령 황후에게서 또다시 후사를 본다고 하더라도, 그 아이를 황태자 자리에 책봉할 생각은 없어!”
“그것 역시 제가 목숨을 부지하고 있는 동안에나 해당하는 이야기겠지요, 황제 폐하.”
“하아…….”
황제는 피곤한지 제 미간을 손으로 눌러댔다. 그래도 제가 지은 죄가 있어서인지 더는 프리트를 다그칠 의지도 없어 보였다.
“그 얘긴 이제 그쯤하고. 요새 목욕탕 확장 공사를 한다고 들었는데. 비덴비덴 남작 영애와 함께 말이다.”
갑작스럽게 산수이의 이름이 화제에 오르자 놀란 프리트가 되물었다.
“그렇습니다만……?”
“그 아이가 이태리타월이라는 걸 개발했다고 들었다.”
프리트는 순간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하필 이런 시기에 갑자기 황제의 입에서 산수이가 언급되다니. 대체 왜.
“맞습니다. 한데 그것은 왜.”
“이번 사절단에, 프리트 너 대신 비덴비덴 남작 영애를 파견하도록 하겠다.”
***
한편 비덴비덴 남작저에 홀로 남겨진 휘온은 산수이와 차를 마시며 페니아 왕국 사절단에 대한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었다.
산수이가 휘온에게 물었다.
“그런데 휘온, 일전에 황태자 저하께서 말씀하신 그 바나나 말이에요. 저하께서 무역 협상에 성공하실 가능성이 얼마나 될까요?”
그 말에 차를 마시던 휘온의 손이 순간 멈칫했다.
분명, 그때 바나나라는 말을 듣던 산수이의 눈이 별처럼 빛나지 않았었나. 만일 정말로 프리트가 이번 협상에 성공해서 바나나를 수입하게 된다면, 산수이한테서 큰 점수를 따게 될 텐데.
하지만 휘온이 아는 한, 그럴 일은 절대 없었다.
“……황태자 저하께 페니아 입국 허가가 떨어지기만 해도 기적일 겁니다.”
“윽, 저하의 악명이 그 정도였어요?”
“그런 것도 있지만…….”
망설이는 휘온을 향해 산수이가 물었다.
“대체 무슨 일인데 그래요, 휘온?”
“지금의 황후마마께서, 페니아의 황녀 출신이시기 때문입니다.”
“아…….”
산수이가 조용히 말을 거두었다.
‘맞다, 황후의 오라버니가 현 페니아 국왕이라 했지. 그럼 죽은 2황자는 그 국왕에게도 귀한 조카였겠네.’
어쩔 줄 몰라 하는 산수이를 보며, 휘온이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그, 그래도 방법이 전혀 없는 건 아닙니다! 저하께서 가지 못하시더라도, 교역 제안은 넣을 수 있으니까요.”
“……잘됐으면 좋겠네요.”
잠시 침묵이 이어지다, 산수이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데, 페니아는 어떤 나라인가요? 바나나가 열리는 걸 보면, 열대 기후일 거 같은데.”
휘온이 끄덕였다.
“맞습니다. 그래서 바나나뿐 아니라, 온갖 신비한 동식물들이 가득하죠.”
“그럼 혹시, 거기도 목욕 문화가 발달했나요?”
“목욕탕이 있긴 하지만, 제국만큼 목욕 문화가 발달하지는 않았습니다.”
어쨌든 목욕탕이 있긴 하다는 거 아냐. 날씨가 더우니까 자주 씻고 싶을 테고.
산수이의 머릿속엔 이미 바나나를 뛰어넘은 그다음 플랜이 설계되고 있었다.
그 맹수의 눈빛을 읽어낸 휘온이 물었다.
“산수이, 설마 지금 생각하고 있는 게……?”
“맞아요, 휘온.”
산수이가 해맑게 웃었다.
“저, 페니아 왕국에도 이태리타월을 팔아보고 싶어졌어요.”
***
황제의 말을 들은 프리트의 눈이 커졌다.
사절단 명단은 이미 결정되었는데, 갑자기 자신을 제외하겠다니?
게다가 저 대신 사절단으로 보내겠다는 사람이 왜 하필 그 많고 많은 이들 중 산수이 영애인가.
프리트는 혹시나 황제가 산수이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눈치챈 것인가 싶어, 침착하게 제 아비의 반응을 살폈다.
하지만 황제는 아들의 표정 변화를 눈치채지 못한 채,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페니아 왕국에서 이태리타월에 관심을 보인 모양이더구나. 그러니 아무래도 원개발자가 직접 회의에 참석하는 편이 낫겠지.”
불행 중 다행인지 황제는 그가 산수이를 마음에 두고 있다는 사실은 모르는 것 같았다. 오로지 이태리타월을 염두에 두고 산수이가 선정된 듯했다.
찜질방 공사야 어차피 막바지 작업만 남았기 때문에 산수이의 부재는 큰 문제가 되지 않을 터였다.
하지만 프리트는 여전히 뭔가 석연찮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어, 황제에게 큰 목소리로 항의했다.
“하오나 폐하, 그렇다면 두 사람 모두 가면 되지 않습니까. 왜 저를 명단에서 제외하시는 겁니까.”
“네놈이 거기에 가서 대체 뭘 어쩌자는 것이냐.”
“왜요, 페니아의 국왕이 제 조카의 목을 썰어버린 살인귀와는 한 공간에서 숨조차 쉬고 싶지 않답니까?”
“프리트……!”
“애초에 그 검에 묻어 있던 독극물이, 페니아로부터 온 것인지도 모르잖습니까? 성분을 알 수 없는 독이었다고 하던데. 페니아 그곳이야 워낙 희귀한 식물들이 많이 자라기로 유명…….”
“말조심하거라!”
황제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는지 주먹으로 테이블을 쾅 내리쳤다. 그러자 잔에 담겨있던 찻물이 테이블 위로 주룩 넘쳐흘렀다.
새빨간 찻물이 꼭 피를 흘리는 것처럼 바닥으로 툭툭 떨어졌다.
“하아…… 세월이 지났어도 넌 변한 게 없구나, 프리트. 그때와 달라진 게 하나도 없어!”
“지옥 문턱을 넘었다가 다시 돌아왔는데, 어찌 달라진 게 없겠습니까? 그러니 이렇게 피에 미쳐 살아가는 것이겠지요.”
그가 제 아버지를 원망스러운 듯 바라보며 뇌까렸다.
“폐하야말로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사랑꾼이십니다. 그 사건의 배후일지도 모르는 여인을 여전히 아끼시는 걸 보면.”
“함부로 의심하지 말아라, 프리트. 당시 황후에게선 결국 아무런 증좌도 발견되지 않았다는 걸, 너 역시 잘 알지 않느냐.”
“하긴 그렇죠. 특수한 독약 정도는 열 살짜리 어린애라도 어디서나 손쉽게 구할 수 있는 거니까요, 예.”
“너……!”
프리트의 빈정거리는 말투에 황제가 제 지끈거리는 머리를 연신 짓누르며 말했다.
“하아. 증좌 없이는 이 아비도 어쩔 수 없단 말이다, 프리트.”
그 말을 들은 프리트가 속으로 되뇌었다.
‘아비라…….’
그가 형형한 눈으로 제 아버지를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그럼 부디 저를 페니아로 보내주십시오.”
“안 된다고 하지 않았느냐. 평소엔 관심조차 없던 일에 왜 갑자기 이리 집착을 하는 게야!”
그야 산수이가 이 일에 얽혀 있기 때문이었다.
원래는 그저 앞뒤 안 가리고 바나나 때문에 가려는 거였다.
산수이가 그렇게나 눈을 반짝이며 좋아하던 그 과일을 제 손으로 따내서, 그녀의 앞에 갖다 바치고 싶었으니까. 휘온 녀석에게 그깟 음료수 때문에 질 순 없지 않은가.
그런데 이제는 사우나스라는 자에 대해서 조사해야 하는 것도 모자라, 사절단 명단에 산수이가 포함되어 있기까지 한 상황.
그렇다면 더더욱 가지 않을 수가 없었다.
혹여나 그 먼 길 나서다 영애가 골병이라도 들면 어쩔 것인가. 습격이라도 받으면 또 어떡할 거고.
그러니 제가 옆에서 산수이를 엄호하며 수상한 놈들을 다 썰어버리는 수밖에.
프리트는 저의 이런 마음을 꾹 누른 채, 간절한 눈빛으로 황제를 향해 다시 한번 청했다.
“제발 보내주십시오, 폐하.”
황제는 제 아들의 낯선 표정을 보며 의아함을 느꼈다. 하지만 당최 그 이유를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황제가 프리트를 달래듯 말했다.
“미안하지만 사절단에는 인원 제한이 있다. 물론 네가 황태자로서 소임을 다 하려는 것임을 나도 안다. 그러니 대신 이곳에 남아 나와 정기 회의에 함께 참석하자꾸나.”
그간 프리트가 전쟁터를 싸돌아다니며 적군들을 썰고 다니느라, 참석률이 거의 0에 수렴했던 정기 회의였다. 프리트는 제가 빼도 박도 못할 처지에 놓였다는 걸 깨달았다.
하필 이번 정기 회의는 사절단이 파견되는 날짜와 겹쳐있었기 때문이다.
‘제기랄…….’
프리트는 이를 갈며 제 아비라는 작자를 바라보았지만, 그가 결정을 번복할 생각은 전혀 없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