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국의 세신사 영애님-61화 (61/150)

61화.

자신의 갑작스런 고백에 정신없이 흔들리는 산수이의 눈을 바라보며, 휘온이 말을 이었다.

“제 마음을 몰랐다고는 하지 않으시겠죠, 산수이.”

“……!”

“저는 우리가 정말 잘 어울리는 한 쌍이라고 생각합니다. 서로 말하지 않아도 통할 때가 많지 않습니까.”

그건 사실이었다. 휘온은 제가 만난 중 가장 잘 맞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휘온, 전…….”

“지금 당장 답을 달라는 것이 아닙니다.”

휘온이 그녀를 향해 흔들림 없이 올곧은 눈으로 말했다.

“그저 제 마음을 알고 계셔 달라는 것입니다. 이대로 가다간 당신을 빼앗길 것 같아서요.”

“뭐…… 대체 누구에게 말이에요?”

휘온이 저 멀리 하늘을 향해 눈짓했다.

“누구겠습니까. 저기 구름 사이로 사라진 두 남자 말입니다. 둘 다 벌써 당신에게 골백번도 더 들이대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저도 이렇게 어물쩍거리면 안 될 것 같아서요.”

하긴 저 불도저 같은 두 남자가 그렇게나 노골적으로 들이대는데, 지나가던 개도 내가 쟤들한테 고백받은 걸 알 거라고 산수이는 생각했다.

생각에 잠긴 그녀를 보며 휘온이 말을 이었다.

“그대가 지금 사업 이외에는 어떤 것에도 관심이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 그대가 하고 싶은 대로 하십시오. 그저 제가 당신 곁에 있다는 사실만 잊지 말아 주셨으면 합니다.”

그의 따뜻한 목소리에 산수이는 마음이 복잡해졌다.

지금껏 자신의 목욕탕 경영을 위해 제가 가진 것을 아낌없이 쏟아부어 도와준 이 남자.

그런데 이젠 자신의 마음마저 내어주겠단다. 언제 이곳을 떠나 없어져 버릴지 모르는 자신을 위해서.

저를 향해 맑게 웃는 휘온의 얼굴을 보며 산수이는 가슴이 아렸다.

‘이대로 괜찮은 걸까……?’

이렇게, 산수이 비덴비덴 영애의 아름다운 육신을 뒤집어쓰고 세 남자에게 사랑받으며 갖은 도움을 받다가.

그러다가 어느 날 돌연 이 세계에서 영영 사라져버려도 괜찮은 걸까?

산수이의 몸속에 있는 작은 영혼은 죄책감을 느꼈다. 그녀는 어찌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휘온은 이런 그녀의 속내를 알 길 없이, 그저 산수이가 자신의 고백을 받고 곤란해하는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이번에도 역시 성급했나? 아니, 아니야.’

지금이 아니면 안 된다.

휘온이 산수이를 보며 말을 이었다.

“저는 언제까지나 당신의 곁에서, 그대가 하고자 하는 모든 일을 돕겠습니다.”

“……휘온.”

“부디 거절의 말은 지금 하지 말아 주십시오. 저는 아직 당신에게 보여드릴 것이 많이 남아있으니까요.”

자신을 향해 웃는 아름다운 휘온의 얼굴을 보면서, 산수이는 고마움과 미안함을 동시에 느꼈다.

곧이어 이쪽을 향해 내려오는 얀피르와 프리트가 보였다.

그들은 지상에 착지한 후, 산수이에게 손을 흔들며 달려오고 있었다.

세 남자를 보며 산수이는 생각했다.

나는 이들을 속이고 있어, 라고.

목욕의 신이 내린 미션을 마무리하고 하루빨리 원래 세계로 돌아가기 위해 그들이 자신을 사랑하는 마음을 이용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산수이는 그런 제 자신이 끔찍해졌다.

‘좀 더 서둘러야겠어. 정이 더 들어버리기 전에 빨리 이곳을 떠날 수 있도록…….’

***

나들이하러 다녀온 후 산수이에게 뭔가 변화가 생겼다는 건 누구든 눈치챌 수 있었다.

원래도 일에 매달려 살던 그녀였지만, 이상하리만큼 평소보다도 더 사업에 집착하기 시작했다.

“휘온, 찜질방 공사를 빨리 시작하도록 하죠.”

휴게실로 사용되던 비덴탕 2층을 허물고 찜질방을 짓겠다는 건 애초부터 계획되어 있던 거였다.

하지만 휘온은 어쩐 일인지 그녀가 평소보다 더 일을 서두른다는 느낌을 떨칠 수가 없었다.

그런 산수이의 모습에 위화감을 느낀 것은 비단 휘온뿐이 아니었다.

사우나스라는 이름에 대한 수수께끼가 풀리지 않는 한 언제까지고 불안할 세 남자.

얀피르, 휘온, 프리트.

그들은 늦은 시각, 남작저 내의 모든 사람이 잠든 후 몰래 접선하였다.

바로 비덴탕 안에서.

얀피르의 주도하에 그들은 새벽녘 몰래 비덴탕 문을 열고 들어갔다. 기왕 이렇게 모이기로 한 김에 세 남자는 목욕을 즐기며 회담을 하기로 한 것이다.

모든 준비를 끝낸 세 남자는 함께 탈의실로 향했다.

얀피르는 프리트의 상반신에 가득 새겨진 참혹한 흉터들을 보고 깜짝 놀랐다. 전장에서 자주 굴렀다더니 괜한 말이 아닌 듯싶었다.

‘역시나, 제 성미답게 아주 호전적인 놈이야.’

안 그래도 잘생긴 거 좋아하는 산수이 때문에 예쁘장한 휘온의 얼굴이 영 거슬리던 참이었다.

그런데 이젠 저렇게 이목구비 뚜렷한 근육 바보까지 산수이를 노리고 있다고 생각하니 정말이지 끔찍했다.

산수이가 저 두 사람의 얼굴을 볼 때마다 움찔하고 반응해 왔던 걸 얀피르가 놓쳤을 리 없었다.

‘나한테는 내 얼굴이 취향이라고 했었으면서……!’

어쩌면 산수이는 지상에 있는 모든 잘생긴 것들을 사랑하는지도 몰랐다. 그 생각을 할 때면 얀피르는 긴 한숨이 나왔다.

휘온 역시 가끔 프리트와 함께 목욕할 때마다 보아왔던 상처였지만, 역시나 볼 때마다 놀랍긴 매한가지였다. 하지만 왠지 프리트의 피부 자체는 예전보다 좀 더 고와진 듯한 착각이 들었다.

‘산수이가 때를 밀어줘서 그런가? 뭔가 저하의 등짝이 예전과는 좀 다른 느낌이 드는데.’

그때, 지금껏 자신의 등 뒤에서 따가운 시선을 느끼고 있던 프리트가 뒤를 돌아보았다.

“음?”

그리고, 휘온과 프리트 두 사람의 시선은 동시에 정확히 한곳에 가서 내리꽂히고 말았다.

얀피르에게로.

“……!”

프리트는 얀피르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충격에 빠져 입만 빵끗거렸다.

휘온은 그런 프리트를 보곤 대충 짐작이 간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저 역시도 일전에 얀피르와 함께 목욕할 때 같은 생각을 했으니까.

프리트가 말을 더듬었다.

“저, 저……!?”

하지만 얀피르는 탈의실에 제 옷을 집어넣느라 그들의 표정을 보지 못했다.

그는 제 로커를 잠그고는 손가락에 열쇠고리를 끼워 빙 돌리면서 두 사람을 향해 말했다.

“나 먼저 들어간다?”

그러고는 온탕을 향해 사라졌다.

프리트는 한참이나 얀피르가 사라진 쪽을 바라보다, 이내 휘온에게 고개를 돌려 입을 열었다.

얀피르를 가리키고 있는 프리트의 검지손가락에서 떨림이 느껴졌다.

“저, 저자는 대체! 인간이 아니란 건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대체……!”

프리트의 쩍 벌어진 입은 다물어질 줄 몰랐다.

휘온은 다 이해한다는 듯 끄덕이며, 프리트의 등을 토닥여주었다.

***

세 남자는 다 함께 온탕에 들어가 몸을 녹였다.

따뜻한 물 안에 들어가자 여태껏 날이 서 있던 긴장도, 머릿속을 떠나지 않던 걱정들도 모두 녹아내리는 것만 같았다.

“하아. 확실히 비덴비덴 남작령의 수질은 따라올 데가 없어. 황궁 목욕탕보다도 여기가 더 좋단 말이지.”

“수도에 있는 어느 대중목욕탕도 이보다는 못합니다.”

“그렇다고 너무 자주 오진 마.”

그렇게 한참 동안 몸을 풀다, 드디어 프리트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런데 휘온, 낮에 초원에서 산수이 영애와 대체 무슨 이야길 나눈 거지? 혹시 네놈이 뭔가 이상한 소리라도 한 거 아냐?”

그 질문에 휘온은 잠시 잊고 있었던 아까의 제 두 번째 고백 타임을 떠올렸다. 제 목에 칼이 들어온다 해도 그 사실에 대해선 곧이곧대로 털어놓을 수 없었다.

“사, 산수이 영애의 사업을 전폭적으로 지원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녀가 가주가 되고 싶다고 했다기에.”

살짝 말을 더듬는 휘온을 보며 프리트가 의심의 눈초리로 물었다.

“흐음. 정말 그 얘기밖에 안 했어?”

“정녕 듣고 싶으신 겁니까? 아주아주 길고 복잡한 사업 얘기가 될 텐데요.”

프리트가 손을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아니 됐어.”

프리트는 어렸을 적 휘온에게 숙제를 물어봤다가 천일야화를 들을 뻔했던 기억을 떠올렸다. 그가 뭔가에 꽂혀서 설명을 시작하면 끝이 나지 않을 터였다.

두 사람을 향해 얀피르도 입을 열었다.

“하지만 주인이 좀 이상하긴 해. 갑자기 말수도 확 줄어든 데다가, 꼭 우리를 피하는 것 같기도 하고.”

휘온 역시 심각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산수이가 내게 거짓말을 해 가면서까지 숨기고 싶었던 게, 대체 뭘까.”

사우나스가 어릴 적 키우던 멍멍이 이름이 아니었다니. 그럼 그녀는 왜 그런 거짓말을 한 것일까.

그야 당연히 사우나스가 누구인지 휘온과 얀피르가 모르게 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그럼 도대체 목욕탕을 연상시키는 ‘사우나스’란 이름의 정체는 무엇이란 말인가. 그리고 산수이는 왜 그자를 찾는 걸까.

잠시 생각에 잠겨있던 프리트가 입을 열었다.

“이번엔 내가 한번 알아보도록 하지.”

얀피르가 물었다.

“제국 쥐구멍까지 다 뒤졌는데도 못 찾았는데, 대체 무슨 수로?”

“아직 한 군데 뒤져보지 않은 곳이 있잖아.”

“한 군데……?”

그 말을 들은 휘온이 반색했다.

“그렇군요! 저하께서 페니아 왕국 사절단으로 가셨을 때 알아보시는 방법이……!”

처음 듣는 낯선 이름에 얀피르가 물었다.

“페니아 왕국?”

프리트가 답했다.

“이 제국의 황후가 페니아의 황녀 출신이다. 오랜 시간 제국과 동맹 관계인 나라지. 곧 사절단이 파견될 시기라, 내가 대표로 그곳에 다녀오려고 한다.”

얀피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웃 나라라, 괜찮은 생각이네.”

“아무튼 내가 다녀올 때까지, 드래곤 넌 혹시라도 그녀에게 무슨 일이 생기지 않게 잘 지켜보도록.”

“황태자 네놈이 말 안 해도, 주인은 목숨 걸고 지켜.”

그 말에 프리트가 웃으며 답했다.

“같은 여인을 마음에 두고 있다는 게 좋은 점도 있는 줄은 미처 몰랐군. 휘온, 자네는 영애가 준비하는 찜질방 사업에 차질이 가지 않도록 각별히 신경 쓰도록 하고.”

“이미 저는 산수이에게 탈탈 털릴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저하.”

그 모습을 못마땅하게 지켜보던 얀피르가 입을 열었다.

“그런데 말이야 저하 놈아, 왜 네가 우리에게 명령을 내리고 있다는 듯한 느낌이 들까……?”

“그야 산수이 영애는 나와 혼인하여 황태자비가 될 여인이니까.”

“하! 누구 맘대로?!”

아까의 화기애애했던 분위기는 온데간데없고, 두 남자는 또다시 서로를 향해 그르렁거리기 시작했다.

가운데에 앉은 휘온의 머리만 터져나갈 지경이었다.

‘두 사람이 그렇게 싸워 봤자, 결정은 산수이가 내리는 거라고요!’

휘온은 낮게 한숨 쉬며, 두 남자를 깡그리 무시한 채 얼굴에 수건을 올리고는 그저 명상에 잠겼다. 이제는 저 둘을 상대하기도 귀찮았던 탓이었다.

한참 후 프리트와의 신경전을 마친 얀피르는 다시 온탕에 몸을 푹 담근 채 생각에 잠겼다.

페니아 왕국.

아직 휘온과 그곳까지는 조사해보지 않았었다. 그렇다면 사우나스에 대한 단서가 정말 그곳에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왜 이렇게 불안한 예감이 들지……?’

그는 짐승의 본능으로 위험한 냄새를 감지했다. 하지만 그 불안감이 어디에서 오는지는 그도 설명할 수 없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