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
남작령 근처에 드넓게 펼쳐진 초원 위엔 산수이와 휘온, 오직 두 사람만이 남아있었다.
조금 전, 프리트가 얀피르를 타고 날아보고 싶다며 부득부득 졸라댔기 때문이다.
그 요청을 들은 얀피르가 송곳니를 드러내며 프리트를 노려보았다.
“내가 왜? 싫어.”
하지만 프리트는 막무가내였다.
“동맹을 맺었으니, 네놈의 전투 비행력이 어느 정도 되는지 직접 확인해 볼 필요가 있어서다.”
그 말을 들은 산수이가 속으로 생각했다.
‘저하, 그냥 솔직하게 용 한번 타 보고 싶었다고 하세요…….’
얀피르는 프리트를 향해 불평하면서도 결국 못 이기고 그를 태워주기로 했다.
그 역시도 최근 습기 가득한 목욕탕 안에 갇혀 때만 미느라 온몸이 근질거리던 참이었기 때문이다.
얀피르가 산수이에게 말했다.
“주인, 너도 같이 가.”
“난 됐어. 둘만의 시간을 방해하고 싶지 않아.”
그러자 얀피르와 프리트가 발끈했다.
“주인? 둘만의 시간이라니!”
“말이 조금 이상한데, 영애?”
“아무튼 난 여기 있을래. 잘 놀고 와.”
그때 휘온이 중간에 불쑥 끼어들며 얀피르를 향해 불만을 터뜨렸다.
“이 자식, 나한텐 타 보라는 말도 안 하는 거냐.”
그런 휘온을 보며 얀피르가 혀를 끌끌 찼다.
“나라고 주인 옆에 네놈을 두고 가는 게 마음 편한 줄 알아? 하지만 주인이 안 가겠다는데, 한 사람은 여기 남아야지.”
생각해보니 휘온에겐 남는 장사였다.
저 방해되는 두 남자가 한꺼번에 사라져 줄 절호의 찬스니까.
이렇게 생각지도 못하게 산수이와 단둘이서만 남아있게 되다니.
휘온이 서둘러 답했다.
“여, 역시 그렇지? 여긴 걱정 말고, 저하를 잘 부탁한다.”
그렇게 얀피르는 휘온을 뒤로한 채 다시 드래곤 성체의 모습으로 변해 프리트를 제 등에 태웠고.
“으, 으하하하하-!”
프리트의 웃음소리와 함께 그들은 하늘 높이 멀리 사라졌다.
***
얀피르는 제 등에 프리트를 태우고 푸른 하늘을 마음껏 날아다녔다.
신이 난 것은 비단 프리트뿐만이 아니었다.
오랜만의 비행으로 얀피르 역시도 격앙된 상태였다.
그는 조금 더 속력을 내어 빠르게 구름 사이를 헤집고 다녔다.
그 속도감에 프리트는 연신 짜릿한 비명을 질렀다.
“으하하-! 이렇게 재미있는 건 난생처음인데!”
“유치하긴.”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얀피르는 입가에 지어진 미소를 숨길 수가 없었다.
저 역시도 이 비행이 무척 마음에 들었으니까.
이윽고 얀피르는 프리트에게 자신을 꽉 잡으라고 주의를 준 후, 하늘 위에서 빙글빙글 돌아 보이기까지 했다.
난생처음 타보는 짜릿한 놀이기구…… 아니 드래곤에 프리트는 쾌감을 느꼈다.
얀피르 역시 제 과격한 비행에 장단을 맞춰줄 수 있는 프리트가 썩 마음에 들었다.
“이봐, 얀피르. 이대로 한 바퀴 더 돌아보는 게 어때?”
“저하 너, 좀 날 줄 아는데?”
그렇게 둘은 한참이나 철없는 아이들처럼 하늘 위에서 마음껏 날아 놀았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후, 얀피르는 다시 아까의 초원으로 돌아가기 위해 몸을 돌렸다.
얀피르의 비행 속도가 잦아들자, 프리트가 입을 열었다.
“너, 휘온과 무척 각별해 보이던데.”
사실 제 절친과 얀피르가 부쩍 가까워진 것을 본 프리트는 왠지 모르게 속이 복잡했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서로 산수이를 놓고 경계하던 사이가 아니었던가.
‘성격 까칠한 두 놈이 대체 언제 친해진 거지? 특히나 휘온은 아무나 곁에 두는 타입이 아닌데.’
게다가 아까 휘온이 보인 반응으로 짐작건대, 그는 얀피르가 드래곤인 것 역시 이미 알고 있던 눈치였다.
‘감히 나에게는 일언반구도 없었고 말이지…….’
살짝 토라진 프리트는 저도 모르게 이를 갈았다.
하지만 얀피르는 그런 프리트의 질문에 세상 끔찍하단 표정으로 정색했다.
“휘온하고 내가 각별?! 끔찍한 소리 하지 마, 저하 놈아.”
“저하 놈이 뭐냐, 저하 놈이. 차라리 그냥 욕을 해. ”
“아 진짜? 욕해도 돼?”
“이 드래곤 놈이 보자 보자 하니까 어디서 자꾸 기어올라?”
“하여간 성질 더러운 건 휘온이나 너나…….”
“휘온을 다 안다는 듯 말하지 마라. 이 제국에서 나보다 그 녀석을 잘 아는 사람은 없어.”
그러자 얀피르가 코웃음을 쳤다.
“휘온한테 뭐 알 게 더 있다고? 까칠하고 예민한 거, 그게 다지 뭐.”
그 말에 놀란 프리트가 물었다.
“휘온이 예민한 걸 어떻게 알았지? 겉으론 티를 내지 않았을 텐데?”
“그야 내가 휘온 놈 때를 밀어줘 봤으니까 알지.”
“뭐라고-!”
그 말에 프리트가 분개하여 소리쳤다.
“대체 휘온의 때는 언제 또 밀어준 거냐!”
“그야 예전에 휘온이 비덴탕에 처음 왔을 때…….”
“나는?”
“뭐?”
“휘온은 밀어줬으면서, 나는 왜 빼놓았냔 말이다!”
“하……?”
얀피르가 어이없다는 듯 프리트를 돌아보았지만, 프리트의 표정은 진지했다.
“다음번엔 내 등도 한 번 밀어라. 명령이다.”
“그렇게 말하니까 갑자기 밀어주기 싫어지는데……?”
“정말 이럴 거야, 얀피르?”
“왜, 질투 나?”
그 말에 프리트의 얼굴이 잔뜩 구겨졌다.
“질투라니, 드래곤 너 정말 나한테 썰리고 싶냐?”
“그럼 왜 이제 와서 갑자기 밀어달래?”
“그야 제국의 황태자로서 마땅히 공작 이상의 대우를 받아야 하기 때문이지.”
그러나 얀피르에겐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말 같지도 않은 소리 하네.”
그렇게 두 남자 사이에 유치한 설전이 이어졌다.
하지만 얀피르는 이 대화를 통해 다시금 깨달은 바가 있었다.
프리트와 휘온은 단순한 군신 관계를 넘어선 친우 사이라는 것.
그리고 당연한 얘기지만 프리트 역시 산수이에게 마음을 두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그것에 대해 황태자도 알아둘 필요가 있겠군.’
여기까지 생각한 얀피르가 프리트를 향해 입을 열었다.
“알았어, 알았어. 다음에 밀어줄게.”
“약속한 거다, 얀피르? 반드시 휘온에게 해준 것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잘…….”
“알았다니까. 대신 물어볼 게 있는데.”
“뭔데?”
“저하 너, 그동안 전쟁 때문에 온갖 곳을 쏘다녔다고 들었는데. 혹시 그때 사우나스라는 놈에 대해 들어본 적 있어?”
사우나스?
프리트는 곰곰이 생각해보았지만, 그건 전혀 들어본 적 없는 생소한 이름이었다.
“사우나스라, 전혀 모르는 이름이야. 한데 그건 왜?”
“역시 너도 모르는군. 아냐, 됐다.”
제가 먼저 물어놓곤 말을 하다 마는 얀피르에게 프리트는 깊은 빡침을 느꼈다.
“야 이 드래곤 놈아! 말을 꺼냈으면 끝을 맺어야지!”
격분한 프리트가 얀피르의 목을 조르며 이리저리 흔들었다.
순간 날고 있던 얀피르의 몸이 잠시 옆으로 기울었다.
“켁…… 이 미친놈이! 같이 추락해서 죽기라도 하고 싶은 거냐?”
얀피르는 재빨리 몸의 수평을 잡았다.
그런 얀피르를 향해 프리트가 미간을 찌푸렸다.
“사우나스라는 놈이 대체 누군진 모르겠지만, 휘온에겐 이미 물어본 눈치로군. 천하의 휘온도 모르는 걸 내가 알 리가 있나.”
“하아…… 그놈을 대체 어디 가서 찾아야 하지?”
“어디까지 알아봤는데?”
“그야 제국의 온갖 뒷골목하고, 황실 도…….”
그 말을 들은 프리트의 눈이 가늘어지며 얀피르를 향했다.
“황실 도서관?”
“아, 맞다. 휘온이 그거 비밀이랬는데.”
“이 자식들이……!”
프리트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도대체 자신에게 말하지 않은 게 얼마나 더 있는 건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이따 지상으로 내려가면 휘온을 가만두지 않겠다고 프리트는 다짐했다.
‘황궁 도서관 문은 분명 발레아나가 열어줬을 테지.’
그렇다는 건.
프리트가 얀피르를 향해 물었다.
“사우나스라는 자, 혹시 산수이 영애와 관련된 놈이냐?”
“그래도 제국의 황태자라더니, 눈치는 있네.”
“그놈이 대체 뭔데? 설마, 영애가 연모하는 놈이라도 되는 거냐?”
“……차라리 연모하는 놈이면 그게 더 나을지도.”
“뭣? 대체 그게 무슨 소리야, 좀 더 자세히 말해 봐!”
얀피르는 그간 휘온과 논의했던 것에 대해 프리트에게 설명했다.
이야기를 듣는 내내 프리트의 표정이 굳어져 갔다.
얀피르가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처음엔 주인이 제 부모를 따라 죽겠다고 할까 봐 걱정됐어.”
“처음엔……? 그럼 지금은?”
“얼마 전엔 갑자기 작고한 남작의 뜻을 이어 여길 최고의 목욕 관광 명소로 만들겠단 소리를 하잖아. 도대체가 주인의 속을 알 수가 없어.”
“흠…….”
프리트 역시 심각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겼다.
“산수이 영애가 일전에 마차 사고로 사경을 헤맸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혹시 돌아가고 싶다는 게 그 전을 의미하는 거라면.”
그가 심각한 표정으로 내뱉었다.
“사우나스라는 자는, 둘 중 하나겠군.”
“둘 중 하나……?”
프리트가 끄덕이며 말했다.
“비덴비덴 남작령이 과거의 명성을 되찾도록 도와줄 수 있는 자거나, 그게 아니라면…….”
그는 잠시 망설이다 말했다.
“영애에게 죽음을 선사할 수 있는 자.”
굳은 표정으로 저를 바라보는 얀피르를 향해 프리트가 말을 이었다.
“어느 쪽이든 좀 더 알아볼 필요가 있겠는데.”
***
한편, 휘온은 구름 사이로 사라져간 둘을 바라보며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다시 봐도 신기하다니까…….”
그 말에 산수이가 의아한 듯 물었다.
“응? 얀피르가 드래곤 되는 거, 휘온도 이번에 처음 보는 거 아니었어요?”
아뿔싸.
산수이는 자신이 얀피르와 몰래 동맹을 맺은 걸 모르고 있다.
일전에 얀피르가 사우나스에 대한 논의를 하기 위해 드래곤의 모습으로 공작저를 찾아왔던 날.
그날에 대해 산수이가 알면 절대 안 됐다.
휘온이 진땀을 빼며 열심히 둘러대기 시작했다.
“하하…… 오늘만 해도 벌써 두 번째 본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도 영 적응이 되질 않는군요.”
다행히 산수이는 쉽게 수긍했다.
“하긴 그렇죠. 저도 볼 때마다 놀랍다고 생각하는걸요.”
잠시 얼마간의 정적이 흘렀다.
마침내 휘온이 산수이를 향해 입을 열었다.
“산수이, 저하로부터 그대가 가주가 되고 싶어 한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응? 내가 언제?’
곧 산수이의 머릿속에 황궁 목욕탕에서 프리트의 때를 밀어주던 날이 떠올랐다.
그때 갑작스럽게 청혼하는 프리트를 거절하기 위해 대충 아무 핑계나 댔던 것 중 하나가, 가문을 잇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걸 프리트가 그렇게 해석했나 보구만…….’
나쁘지 않은 오해였다.
모두들 그렇게 알고 있다면 더는 자신에게 청혼 같은 건 하지 않을 것이었다.
자신은 누군가를 데릴사위로 들이거나 다른 가문에 시집가기보다는, 직접 남작이 되겠다고 말한 것이나 진배없으니까.
산수이가 휘온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아요, 휘온. 저는 스스로가 비덴비덴 남작이 되고 싶답니다.”
흔들림 없는 산수이의 눈동자를 본 휘온의 가슴에 또다시 사랑의 화살이 가서 팍 하고 꽂혔다.
‘이 여자…… 정말 멋있어서 미쳐버리겠네.’
도대체 어떻게 이리 사랑스러울 수가 있단 말인가.
저 똑 부러지는 말투 하며 항상 틀을 깨는 생각.
정말이지, 자신의 반려가 되기에 이보다 더 적합한 여인은 없을 것인데.
휘온이 산수이를 보며 입을 열었다.
“그래서 저하의 청혼을 거절하신 것입니까?”
“아…… 그건.”
“저하가 마음에 들지 않으신 겁니까? 아니면, 혹 그대 마음에 다른 사람이 있는 겁니까?”
산수이는 당황했다.
마음에 있긴 누가 있단 말이냐.
산수이 그녀가 자나 깨나 생각하는 것은 오로지 한 명.
‘사우나스뿐이라고!’
아무리 애타게 기다려도 오지 않는 목욕의 신 때문에 매일 아침 눈을 뜰 때마다 실망을 금치 못하고 있을 뿐이었다.
하루, 이틀, 사흘…….
혹시라도 오늘은 눈을 뜨면 익숙한 한국의 대중목욕탕 천장이 보일까 기대해 보지만.
아침마다 쏟아지는 햇살을 받으며 눈을 떴을 때, 여전히 그녀의 앞에 보이는 것은 천장의 앤티크 꽃무늬 벽지와 샹들리에뿐.
산수이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휘온에게 답했다.
“마음에 누가 있긴요. 그저 갑작스러운 청혼이라 거절한 것뿐입니다.”
“……그렇다면 저는 어떻습니까?”
“네에?!”
“물론 지금 당장 청혼을 하겠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저 당신을 향한 저의 마음을, 이번에는 제대로 전하고 싶었습니다.”
휘온이 그녀의 앞에 무릎 꿇고 손등에 키스하며 말했다.
“연모합니다, 산수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