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
얀피르를 제외한 세 사람은 모두 할 말을 잃었다.
산수이는 머리가 또다시 아파졌다.
‘저, 저 멍멍이가 뭐……? 제국과의 쌍방 수호를 맹세하는 이 엄숙한 자리에서, 고작 소원한다는 게 뭐?!’
슬쩍 곁눈질로 옆을 보자, 휘온 역시 정말 경멸스럽고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얀피르를 보며 낮게 혀를 차고 있었다.
산수이는 제가 다 부끄러웠다.
‘대체 왜! 말은 얀피르가 했는데 부끄러움은 왜 내 몫인 건데!’
잠시 말문이 막혀있던 프리트가 이내 정신을 차리곤 물었다.
“이봐, 드래곤. 지금 그거, 농담이지?”
“왜? 아, 조건이 너무 약했나?”
얀피르가 끄덕이며 덧붙였다.
“그럼 휘온 저놈까지 포함시키지 뭐. 너희 둘 다 앞으론 주인한테 때를 밀지 않는 걸로.”
가만히 있다가 날벼락을 맞게 된 휘온의 얼굴이 새하얘졌다.
“나, 나는 갑자기 왜!”
“몰라서 물어?”
그렇게 서로를 노려보는 얀피르와 휘온 앞에, 프리트가 근엄한 표정을 지으며 다가섰다.
“그래, 드래곤. 네놈 마음은 충분히 알겠어. 나와 휘온이 이곳에 자주 드나드는 게 불편했을 수 있지.”
그 말에 얀피르가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알긴 아네.”
“하지만 이것은 두 종족 간의 신성한 서약. 그러니 상호 관계를 굳건히 할 수 있는 조건으로 다시 생각해 보는 게 어떨까 싶은데?”
“음…….”
그 말을 듣고 얀피르가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부디 진지하게 고민해줬으면 좋겠어. 난 이 제국을 대표하여 얀피르 자네를 지킬 준비가 되어있거든.”
프리트가 흔들림 없는 눈동자로 얀피르를 바라보았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황태자는 황태자였다.
거대한 드래곤 앞에서도 전혀 기죽지 않고 당당하게 선 프리트의 모습에선, 장차 이 거대한 제국을 호령할 왕의 기개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그런 제 주군을 바라보는 휘온의 가슴 역시 웅장해졌다.
‘역시, 황태자 저하……!’
태양 빛에 반사된 프리트의 금빛 머리카락은 그에게 후광을 한층 더해주었다.
프리트가 얀피르에게 손을 내밀며 물었다.
“자, 그럼 이제 말해봐.”
잠시 고민하던 얀피르는, 이내 제 손가락을 하나 내밀어 프리트와 뜨겁게 악수하며 말했다.
“그럼 휘온은 불쌍하니까 봐주고, 원래대로 네놈만 주인한테 때를 밀지 않는 걸로 조건을 수정할게.”
“야 이 자식아!”
광분한 프리트가 얀피르를 향해 소리를 질렀다.
“네놈한테는 천년의 동맹이 장난이야? 어? 애들 장난이냐고!”
“애들 장난이냐니! 애초에 네놈들이 애들이었으면, 이런 조건은 내걸지도 않았어!”
“양자 수호에 무슨 때밀이를 조건으로 걸어-!”
“황태자 넌 때밀이가 우습냐? 그럼 여기 때 밀러 오질 말든가!”
“누가 우습다고 했어?!”
씩씩대던 프리트는 이내 한숨을 푹 내쉬곤, 제 황금빛 머리칼을 손으로 쓸어올렸다.
“좋아, 정 그렇다면 할 수 없지.”
“그래? 잘 생각했어, 황태자야. 앞으로는 내가 대신 때를 밀어줄…….”
하지만 프리트는 시퍼런 눈을 부라리며 얀피르를 노려보았다.
“아니? 네놈이 뭐라고 해도, 난 산수이 영애에게 때를 밀러 올 건데?”
“하……?”
“우리의 동맹이 깨졌다는 소리였다, 이 멍청한 드래곤 놈아.”
“저, 저하?!”
프리트의 단호한 결정에, 사색이 된 휘온이 앞으로 달려 나왔다.
“저하, 왜 이러십니까? 제국의 안위를 생각하셔야죠!”
“카데베르 제국은 여태껏 그래왔던 것처럼, 드래곤의 수호 없이도 잘 굴러갈 수 있다.”
“아니 그래도……!”
그가 매서운 눈으로 휘온을 노려보았다.
“같은 말을 두 번 반복하게 하지 마라, 휘온.”
그 말에 얀피르가 코웃음을 쳤다.
“때밀이 때문에 제국을 저버리다니, 이 나라의 미래가 암담하구만. 맨날 국정은 팽개치고 여기로 내려올 때부터 알아봤다니까.”
프리트 역시 지지 않고 맞받아쳤다.
“그럼 때밀이를 조건으로 내세운 네놈은 대체 뭐지? 전설 속의 드래곤 종족도 정말이지 별 볼 일 없어.”
“크르르……! 지금 우리 종족을 모욕하는 거냐, 황태자?”
“네놈이 동족들을 욕먹게 하고 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나 보지?”
“이 자식이……!”
두 남자가 서로를 향해 언성을 높일수록, 하필 그사이에 끼어있던 휘온의 심장도 작게 쪼그라들어갔다.
그는 가엾은 종이 인형처럼 팔랑거리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다.
결국 그는 산수이를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구조를 요청했다.
‘도와…… 도와주십시오, 산수이!’
휘온과 눈이 마주치자, 산수이는 마치 그의 마음속 절규가 생생히 들리는 듯했다.
‘하아, 결국 또 내가 해결해야 하는 건가.’
도대체 그놈의 때밀이가 뭐길래, 이런 꼴까지 봐야 한단 말인가.
한숨을 푹 내쉬며, 산수이가 모두를 향해 박수를 쳤다.
짝짝—
대치하여 서 있던 두 남자가 그녀를 돌아봤다.
“주인?”
“산수이 영애?”
“자, 이렇게 합시다. 우선 얀피르?”
“응?”
“지금 바로 저하와 동맹을 맺지 않으면, 앞으로 네 때는 밀어주지 않을 거야.”
“주, 주인?!”
그 말을 들은 얀피르의 눈이 사정없이 흔들렸다.
이내 그의 몸에서 빛이 뿜어져 나오더니, 거대한 날개가 서서히 작아지고 비늘이 옅어지면서.
그는 다시 인간의 모습으로 변해 그녀의 앞에 섰다.
얀피르가 산수이를 향해 억울하단 표정으로 외쳤다.
“그런 게 어딨어!”
“너야말로! 지금 네 안위와 한 제국의 존망이 걸린 이런 중대한 일에 그런 어린애 같은 조건을 거는 게 어딨어!”
“어, 어린애라니…….”
그 말을 들은 얀피르의 어깨가 축 처졌다.
프리트는 그 모습을 보며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음을 터트려버렸다.
“풉.”
하지만 산수이가 그를 돌아보며 매섭게 내뱉었다.
“저하도 마찬가지예요! 아까 하신 말씀을 제국민들이 들었을까 겁이 나네요. 한 제국의 황태자가 기껏 때밀이 때문에 드래곤과의 동맹을 깨요? 곧 황제가 되실 분 맞아요?”
“…….”
프리트 역시 할 말이 없었다.
산수이가 두 남자를 향해 마지막으로 선포했다.
“자 그럼 제 뜻은 충분히 전했으니까, 둘이 빨리 서로 손 잡아요.”
“뭐?!”
프리트와 얀피르는 그 말을 듣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온몸에 닭살이 돋는 것만 같았다.
“이 드래곤 놈과 손을 잡으라고? 불쾌해.”
“그러니까. 내가 이놈이랑 손을 왜 잡아. 기분 더럽게.”
“악수하고 화해해요. 그리고 빨리 동맹 다시 맺고.”
“…….”
“둘 다, 평생 저한테 때밀이를 받지 못해도 상관없나 보죠?”
“아, 아니! 그건 절대 아니야!”
“그건 안 돼, 주인!”
두 남자는 결국 마지못해 서로에게 다가가 손을 맞잡았다.
덥석—
산수이가 재빨리 휘온을 불렀다.
“휘온, 이제 당신이 증인이 되어줘요.”
“무슨 증인 말입니까?”
“오늘 이후부터 둘이 한 번만 더 싸우면, 내가 다시는 때를 밀어주지 않겠다고.”
“영애!”
“주인!”
두 남자의 항의가 빗발쳤지만, 산수이의 태도는 단호했다.
“휘온, 어서요.”
결국 프리트와 얀피르는 휘온이 증인을 서는 아래 쌍방 수호를 맹세하며, 앞으로 다시는 애새끼처럼 싸우지 않겠다는 서약을 나눠야만 했다.
“프, 프리트 폰 카데베르 황태자 저하와 얀피르 경은, 다시는 서로 싸우지 않겠다고 맹세합니까?”
“매, 맹세한다.”
“맹세…… 할게.”
물론 두 남자의 표정은 마치 똥이라도 씹은 양 더러웠다.
하지만 그 모습을 보며 산수이는 안심이 되었다.
‘이렇게 하면 내가 여길 떠나고 나서도 모두가 안전할 수 있을 거야.’
요새 부쩍 그런 생각에 잠기곤 하는 산수이였다.
제가 이 세계를 떠나고 나면, 남겨진 자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세 남자가 저에게 마음이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이러다 어느 날 그녀가 갑자기 원래의 세계로 돌아가게 되면 그들이 받을 마음의 상처는 안 봐도 뻔했다.
그렇다면 저들 셋이라도 서로 의지하게 만들어 놔야 할 것이 아닌가.
드래곤과 제국이 쌍방으로 서로를 수호하고, 그 가운데 공작가가 맹약의 증인으로 설 수 있게 된다면.
서로서로 지탱하며 조금이라도 힘이 되어주지 않을까.
그리고 언젠가 또 아름다운 아가씨를 만나 다시 한 번 사랑에 빠지게 된다면.
저를 잊고 다들 행복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미래를 생각하며 산수이는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분명 입꼬리는 웃고 있는데, 그녀의 눈은 그렇지 못하다는 걸.
산수이 자신만이 모르고 있었다.
***
카데베르 황궁 안.
미모세 백작 부인이 황후가 머무는 별궁으로 비밀스럽게 향하고 있었다.
별궁은 사치를 즐기는 황후의 취향을 반영하여 온갖 황금과 보석으로 꾸며져 있는, 호화롭기 짝이 없는 곳이었다.
미모세는 인적이 드문 어느 한 방으로 향했다.
황후와 만날 때면 으레 찾아가던 곳이었다.
이윽고 어둠 속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이 제국의 황후이자 제 사촌 동생의 모습이 보였다.
“제국의 어머니를 뵙니다.”
곧이어 어둠 속에서 황후가 걸어 나왔다.
커튼을 쳐 둔 창 사이로 살짝 들어온 빛줄기에 그녀의 얼굴이 드러났다.
피처럼 붉고 긴 머리카락에 짙은 피부색을 가진, 이국적인 분위기의 여인.
삼십 대 중반의 그녀는 숨 막히게 아름다운 미모를 자랑하고 있었다.
“오랜만이군요, 미모세 백작 부인. 물론 이번에는 제가 기뻐할 만한 소식을 들고 오셨겠죠?”
미모세는 그런 황후를 보며 속으로 아니꼽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신분이 달라졌다지만, 그렇다고 해도 매번 저를 아랫사람 대하듯 부리는 제 사촌 동생이 얄미워 죽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어찌 됐건 미모세 역시도 황후가 없으면 이 제국 내에서 지금과 같은 권세를 누릴 수는 없을 것이었다.
제 남편인 백작을 죽음에 이르게 해서 저를 자유롭게 만들어 준 것도 황후 아니었던가.
그 덕에 백작의 모든 재산을 물려받고 지금처럼 남첩들을 거느리며 살 수 있게 된 것이었다.
게다가 이번 방문은 비단 황후의 심부름만을 해주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주는 것이 있으면 받는 것도 있어야 하는 법.
오늘 미모세는 황후가 가장 원하는 것을 미끼로 던져준 후, 제가 욕망하는 것을 얻을 초석을 다질 생각이었으니까.
미모세가 그녀를 향해 고개를 조아리며 입을 열었다.
“말씀드렸다시피 발레아나 공주는 어떤 방법을 써도 회유가 되지 않습니다.”
“그런 말이나 듣자고 미모세 그대를 부른 것은 아니란 걸 잘 아실 텐데요?”
“하지만, 의외로 다른 곳에서 마마께서 원하시는 답을 찾았답니다?”
그 말에 황후는 구미가 당긴다는 듯, 대답을 재촉했다.
“계속 말해보세요.”
“프리트 황태자에게 여자가 생긴 모양입니다.”
여자?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다른 약점이라면 몰라도, 황태자에게 정인이 생겼을 줄이야.
하지만.
“어떻게 확신할 수 있죠? 비록 그가 소문이 안 좋긴 해도, 황태자비가 되고 싶어 그의 주위를 맴도는 영애들이 많지 않습니까.”
“확실합니다. 제가 황태자의 입에서 직접 들은 것이니까요.”
“!”
그 말을 들은 황후의 눈이 형형하게 빛났다.
“대체 어떤 영애입니까.”
“비덴비덴 남작가의 산수이 영애입니다.”
“산수이……? 설마, 그 이태리타월을 개발했다던?”
산수이라면 기행으로 소문난 영애 아니던가.
귀족 영애가 평민의 때를 밀어준다는.
물론 귀부인들 사이에서도 그 때밀이라는 게 유행이라고는 들었지만, 황후는 천한 자들과 함께 몸을 씻고 싶지 않았다.
생각만 해도 몸서리치게 싫었다.
그런데 황태자가 선택한 게 바로 그 산수이라니, 왠지 납득이 잘 가지 않았다.
‘그 잔인한 프리트가, 대체 왜?’
하지만 미모세의 눈에는 확신이 가득했다.
“얼마 전 제가 비덴탕을 방문했다가, 우연히 황태자와 에데카나 공작의 대화를 엿들었습니다.”
황후가 깜짝 놀라 말했다.
“프리트 황태자가 직접 남작저까지 걸음을 했단 말입니까?!”
최근 황태자가 갑자기 목욕탕을 리모델링하겠다 했을 때부터 이상하긴 했다.
그것 때문에 황궁을 자주 비우는가 싶었는데.
그게 아니라 변방의 비덴비덴 남작령에 내려가 있는 것이었다니.
이번에야말로 프리트의 진짜 약점을 잡은 것이었다.
황후의 얼굴이 환희로 물들며, 입가가 사악하게 비틀어졌다.
그녀가 반실성한 사람처럼 웃어젖히며 중얼거렸다.
“아아, 이제야 찾았어……!”
그녀는 자신의 배를 쓰다듬었다.
“네가 가장 사랑하는 걸 빼앗겼을 때의 고통을, 너도 한번 느껴봐. 프리트 폰 카데베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