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다음 날.
미모세 백작 부인은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겼다며 남작령을 떠났다.
지나칠 정도로 서두르는 모습에 산수이는 왠지 모를 위화감을 느꼈지만, 곧 쓸데없는 생각이겠거니 했다.
‘워낙 유명하신 분인데, 당연히 바쁘시겠지.’
어제 그녀에게서 들은 묘하게 불쾌했던 표현이 내내 머리에서 맴돌았지만.
제가 예민하게 반응한 것이겠거니 하고 잊어버리기로 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미모세 백작 부인이 이곳에 머무는 동안 프리트 황태자나 휘온 공작과는 마주치지 않았다는 것이다.
혹시라도 그녀가 예정대로 남작저에 조금 더 머물렀다면 우연히 두 사람과 마주치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두 남자가 산수이를 따라 국무를 내팽개치고 남작저에 짱박혀 있다는 사실을 외부인이 알아서 좋을 게 없었다.
‘사고는 쟤들이 치고 내려왔는데 왜 내가 커버해주려고 하는지 모르겠지만. 하아…….’
그들이 끌고 왔던 세상 화려한 황금 마차며 요란한 인력들까지.
미모세를 포함한 다른 손님들의 눈에 띄지 않게 하기 위해 얼마나 애를 썼는지 모른다.
그런데 아직까지도 이곳에 죽치고 머물면서 목욕을 즐기겠다는 헛소리나 해대고 있는 두 남자를 생각하면 머리가 지끈거렸다.
결국 산수이는 프리트와 휘온을 응접실로 불렀다.
“저하? 휘온? 이제 그만 수도로 돌아가셔야지요? 공사다망하신 두 분을 제가 붙잡아 두고 있는 것은 아닌지 심히 염려된답니다.”
그 말을 듣고 프리트가 되받아쳤다.
“영애, 꼭 우리를 쫓아내지 못해 안달 난 사람 같군. 제국의 황태자가 여기까지 내려온 김에 목욕 좀 하면서 피로를 풀겠다는데, 그게 그렇게 꼴 보기가 싫어?”
“그럼 목욕만 마치면 바로 돌아가시는 겁니다?”
“머리도 말리고 가야지. 귀한 내 몸에 감기라도 들면 그대가 책임질 건가?”
“……예?”
“뭐, 그것도 나쁘지 않겠군. 그런 식으로 날 책임져 준다면 감기에 걸리는 것쯤이야.”
아오, 저걸 그냥.
산수이는 주먹이 우는 걸 간신히 참으며 말했다.
“그럼 머리까지 말리시고 나선 정말로 떠나시는 겁니다?”
그때 휘온이 옆에서 거들었다.
“저하, 공복으로 출발하셨다가 옥체라도 상하시면 어쩌려고 그러십니까.”
“음, 그렇지. 역시 식사까지는 마치고 가는 게 좋겠어.”
휘온마저 저럴 줄은 몰랐던 터라 산수이는 벙찐 상태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그런 산수이를 보며 프리트가 미소 지었다.
“기왕 목욕하는 김에, 영애가 때도 좀 밀어주면 안 돼?”
“때밀이라면 뭐…….”
그때였다.
갑자기 응접실의 문이 쾅 열리며 얀피르가 난입했다.
어디서 또 귀신같이 듣고 있었던 것인지, 그가 프리트를 향해 성난 음성으로 외쳤다.
“주인한테 때를 밀겠다고? 웃기지 마.”
“네, 네놈은!”
“앞으로 수컷 놈들 때밀이는 무조건 다 내가 맡는다.”
황태자인 제게 고개를 숙이긴커녕 반말을 지껄여대는 얀피르를 보며 격분한 프리트가 말했다.
“이전부터 느꼈던 건데, 네놈은 왜 이렇게 말이 짧지? 설마 내가 누군지 몰라?”
“모르긴 왜 몰라, 황태자라며 너.”
“그걸 아는 놈이, 목숨이 아깝지도 않은가 보지?”
결국 프리트는 제 버릇 개 주지 못하고 허리춤에 차고 있던 칼을 빼 들기 위해 자세를 잡았다.
농담이 아니고 정말로 얀피르를 썰어버리려는 기세였다.
순간 얀피르의 눈이 흉흉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그의 몸이 본능적으로 위험을 감지한 것이다.
지금 눈앞에 있는 자는 정말로 저를 죽이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그의 입에서 낮은 짐승의 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크르르릉……!”
드래곤 모습으로 되돌아가려는 것이었다.
그런 두 사람을 바라보던 산수이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갔다.
‘이런 미친놈들! 저택을 다 부술 작정이냐!’
이윽고 얀피르의 피부에서 검은색 비늘이 돋아나고, 손톱이 점점 자라기 시작했다.
얼핏 봐선 눈치채지 못할 정도의 변화였다.
그러나 산수이는 바로 알 수 있었다.
일전에 눈앞에서 얀피르가 드래곤으로 변신하는 것을 직접 목격했었으니까.
새끼 드래곤이었을 때는 하얀 빛과 함께 단숨에 펑 하고 변하곤 했었다.
그러나 그가 성체로 자라난 후에는 인간의 모습에서부터 단계를 거쳐 드래곤으로 변화했다.
온몸에 비늘이 돋고, 손발톱이 자라나고, 송곳니마저 길게 자라나다 종국에는 등에서 날개가 돋았다.
그 모습을 프리트, 그것도 이 제국의 황태자가 보게 되면 그대로 끝장이었다.
‘제국령에 드래곤이 남아있었다는 걸 프리트가 알게 되면, 얀피르가 위험해질지도 몰라……!’
그때 산수이는 휘온과 눈이 마주쳤다.
그 역시도 싸움 난 두 남자를 번갈아 보며 머리 아파 뒈져버리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아, 저 둘이 결국 피를 보겠구나……!’
산수이와 휘온은 몇 초간 이심전심의 눈빛을 교환했다.
‘휘온도 참 고생이 많군요.’
‘힘내십시오, 산수이.’
그리고 누가 먼저라고 할 새도 없이 각자 한 명씩 전담 마크하여 뜯어말리기 시작했다.
“저하, 제발 고정하십시오.”
“얀피르? 착하지, 진정하자.”
휘온은 프리트의 뒤로 가서 열심히 그의 어깨를 주물렀고.
산수이는 얀피르의 넓은 등판을 어루만져주었다.
다행히 얼마 지나지 않아 두 남자는 전의를 내려놓고 안정을 되찾았다.
황태자의 칼은 칼집으로 도로 들어갔고, 얀피르의 비늘 역시 잦아들었다.
‘하아…….’
휘온과 산수이는 십년감수했다는 듯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휘온이 프리트를 곁눈질하며 생각했다.
‘정말이지, 저하와 다닐 때마다 십 년씩은 더 늙는 것 같다고.’
그래도 사람, 아니 드래곤을 썰기 직전에 말린 것이 어디냐.
프리트가 산수이를 만나고 나서 좀 유해지긴 한 모양이었다.
그렇게 상황을 잘 마무리 지었다 생각한 휘온과 산수이는 서로를 바라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그들의 바람과는 달리, 프리트의 시퍼런 눈동자는 여전히 얀피르를 향해있었다.
그가 떨리는 손으로 얀피르를 가리키며 간신히 입을 열었다.
“너, 너는 설마…… 드래곤족?!”
프리트의 시선은 미처 다 잦아들지 못한 얀피르의 손등 위 비늘에 꽂혀있었던 것이다.
그걸 본 산수이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망했다.’
산수이는 이 상황을 어떻게 타개해야 하는지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그러나 이미 얀피르는 프리트에게 대답을 내어놓은 후였다.
“그렇다, 이 멍청한 놈아.”
아니 쟨 또 왜 저러는 거야!
산수이는 제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아예 동네방네 나 드래곤입니다 하고 벽보를 붙이고 다니지 그러냐!’
그때였다.
프리트가 제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하, 이럴 수가. 그들이 정말로 존재하고 있었다니……! 그게 다 사실이었을 줄이야.”
그러고는 떨리는 몸으로 천천히 얀피르의 앞으로 다가가, 그의 앞에 무릎을 꿇는 것이 아닌가.
“……?”
예상치 못한 모습을 목도하게 된 산수이와 휘온의 입이 쩍 벌어졌다.
한 제국의 황태자가 자발적으로 누군가의 앞에 무릎을 꿇은 것이다.
그들이 이 상황을 이해할 새도 없이, 프리트가 경이로운 표정으로 얀피르를 올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설령 사실이라 해도 내 대에서 직접 보게 될 줄은…….”
그가 진지한 표정으로 얀피르를 향해 말했다.
“선대를 대신하여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드래곤의 후예여. 카데베르 황실은 항상 그대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
네 사람은 남작저에서 한참을 떨어진 초원에 당도했다.
사방은 풀과 나무뿐으로, 어디를 둘러봐도 그들을 제외하고는 지평선만 펼쳐져 있을 뿐이었다.
프리트가 얀피르를 향해 말했다.
“여기쯤이 좋겠군. 그럼 부탁한다.”
얀피르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러지 뭐.”
이윽고 얀피르는 천천히 제 몸을 성체로 변화시키기 시작했다.
프리트는 변해가는 얀피르의 모습을 감동에 젖은 눈빛으로 찬찬히 지켜보았다.
“이럴 수가……!”
이윽고 얀피르의 등에서 커다란 날개가 돋아나며, 그는 완전한 성체 드래곤의 모습으로 지상에 내려앉았다.
“크르르…….”
산수이는 뒤에서 그런 두 남자를 지켜보고 있었다.
‘서로 죽일 듯이 덤벼들 땐 언제고, 이제는 신기해 죽네.’
물론 방금 전 프리트의 설명을 들은 산수이 역시 좀 놀라긴 했다.
몇백 년 전, 마계가 인간계를 침략했을 때 드래곤족이 목숨 바쳐 인간들을 지켜냈다는 사실은 이미 들어서 알고 있었다.
하지만 카데베르 황가가 오랜 세월 동안 드래곤족의 후예를 기다려 왔다는 사실은 전혀 알지 못했다.
당연했다. 그것은 황족들만이 알고 있는 비밀 같은 것이었으니까.
전쟁 당시 모든 드래곤족이 명을 달리한 것으로 알려져 있었지만.
황족들은 분명 어디엔가 살아남은 드래곤들이 있을 것이라 믿고 기다려왔다고 했다.
그들이 그리 쉽게 멸했을 리 없다며.
그 이유는 간단했다.
오래전 종족을 희생하면서까지 인간들을 지켜준 그들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함과.
언젠가 다시 쳐들어올지도 모르는 마족들을 다시 한 번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프리트는 천천히 얀피르에게 다가가 그의 커다란 황금빛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정말로 이렇게 드래곤족을 만나게 될 줄이야…… 미처 상상도 하지 못했는데.”
그가 제 칼을 꺼내 땅속에 깊숙이 꽂아 넣으며 또다시 얀피르의 앞에 무릎 꿇었다.
“제국이 그대를 지킬 것이니, 그대 역시 제국을 지켜달라. 이것이 그대의 종족과 카데베르 황가의 오랜 동맹.”
그들 사이에 엄숙하고도 신성한 분위기가 맴돌았다.
휘온과 산수이는 왠지 모를 가슴 벅찬 감동을 느끼며 그 둘을 지켜보고 있었다.
프리트가 얀피르를 향해 몇 마디를 덧붙였다.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온 것인지 말해줄 수 있나? 혹시 생존해있는 또 다른 드래곤이 있다면, 그쪽으로 지원군을 파견하겠다.”
그러자 얀피르가 콧김을 훅 내뿜으며 말했다.
“그게 사실…… 아무것도 기억이 안 나.”
“뭐?”
그랬다. 얀피르가 기억상실증에 걸린 드래곤임을 산수이 역시 잊고 있었다.
‘아 맞다. 얀피르가 아는 거라곤, 자기 이름밖에 없었지.’
당황한 프리트가 얀피르를 다그쳐 물었다.
“기, 기억이 안 난다니? 대체 어디서부터?”
“몰라. 어디 땅속에서 기어 나왔는데, 거기엔 나 혼자뿐이었어.”
“하……?”
당황한 표정의 프리트에게 얀피르가 말을 이었다.
“뭐, 딱히 그게 중요한 건 아니잖아? 네놈이 말한 대로 카데베르 제국을 수호하는데 협조할게. 단, 한 가지 조건이 있는데.”
안 그래도 강대한 카데베르 제국이 드래곤의 수호까지 받을 수 있다니.
그렇게 된다면 이제 대륙에서 제국을 넘볼 수 있는 곳은 없을 것이다.
이보다 더 든든하고 영광스러운 일이 또 있을까.
벅찬 마음을 안고 프리트가 얀피르를 향해 입을 열었다.
“편하게 말해, 드래곤. 그게 뭐든 내가 다 들어주겠다.”
“크르르…… 정말 뭐든 상관없단 거지?”
“물론이다.”
“좋아, 그럼.”
얀피르가 프리트의 눈을 빤히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황태자 너, 앞으로 주인한테 때 밀지 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