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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거.”
산수이 역시 문제의 그 소문을 알고 있었다. 제가 불임일 수도 있다는.
하지만 영 현실감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본인 자신은 그 사고를 전혀 기억하지 못하고, 소문이 진짜인지 확인할 길도 없을뿐더러.
어차피 미션 클리어하면 이 육신을 떠날 것이기 때문에.
그래서 산수이는 별 대수롭지 않다는 듯 얀피르에게 말했다.
“내가 예전에 마차 전복 사고를 당해서 불임이 되었다는 소문이 떠돌던 모양이야. 그래도 전에 한번 휘온이 막아준 덕에 이젠 거의 잠잠해졌…….”
“뭐?!”
그 말을 들은 얀피르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 모습을 본 산수이가 생각했다.
‘역시, 미혼의 영애가 불임일지도 모른다는 말엔 보통 저런 반응을 보이겠지.’
분명 별 상관 없다고 생각했는데.
산수이는 왠지 모르게 씁쓸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곧 얀피르가 손을 뻗어 산수이를 제 품에 와락 끌어안았다.
그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까지 주인 너 혼자 그런 소문들을 견디고 있었던 거야……? 왜, 왜 나한텐 말 안 했어!”
얀피르의 그런 반응에 산수이는 묘하게도 안도감이 들었다.
“뭐 좋은 일이라고 떠들고 다녀. 소문인지 아닌지 딱히 확인할 방법도 없고.”
얀피르가 단호하게 외쳤다.
“괜찮아!”
“뭐, 뭐가?”
얀피르가 산수이의 눈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녀의 어깨를 잡은 얀피르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주인 네가 설령 아이를 갖지 못한다 해도, 난 괜찮다고! 우리 둘만 있어도 충분히 행복하고 재밌게 살아갈 수 있…… 아야.”
산수이가 그의 등짝을 후려 팼다.
“얘가 진짜 보자 보자 하니까. 누가 너하고 결혼한대?”
“그건 모르는 거지.”
얀피르가 눈을 빛냈다.
도대체 이놈이나 저놈이나 왜 이렇게 결혼하자고 난리야.
얀피르가 다시 한 번 덧붙였다.
“아무튼, 난 전혀 상관없으니까 안심하고 나한테 와. 난 너만 있으면 돼.”
얀피르가 그녀를 향해 두 팔을 벌리며 웃어 보였다.
그 모습에 산수이의 가슴이 미묘하게 떨려왔다.
하지만 그녀의 대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난 결혼 같은 거 할 생각 없어. 너 아니라 누구하고도.”
그 말을 하는 산수이의 표정을 본 얀피르는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또 저런 표정…….’
산수이는 가끔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을 때가 있었다.
어딘가 먼 곳을 바라보는 시선.
무언가 고뇌하고 있는 듯한 느낌.
그리고, 언젠가 그녀가 저 멀리 사라져버릴 것만 같은 아찔한 예감.
‘아직도 제 부모님을 따라가고 싶은 걸까?’
‘사우나스’가 산수이가 기르던 개 이름이 아니라는 것은 집사와 유모를 통해서 이미 확인했었다.
‘도대체 사우나스가 누군데.’
그게 누군데 널 이렇게 힘들게 할까. 넌 어디로 돌아가고 싶다는 걸까.
그리고 어느 날 정말 네가 갑자기 사라지면…….
‘그럼 나는 어떻게 해야 하지?’
여기까지 생각하던 얀피르가 산수이에게 넌지시 물어보았다.
“결혼이 왜 하기 싫은데?”
산수이가 잠시 머뭇거리다 말했다.
“난 그냥 일만 할 거야. 그러다 이 세계에서 죽게 되더라도, 계속.”
“뭐? 대체 그렇게까지 일하는 이유가 뭔데?”
저를 빤히 바라보는 얀피르의 시선에 산수이는 잠시 움찔했지만, 이어 아무렇지 않은 척 내뱉었다.
“그야 도…….”
“돈 벌 생각이라는 대답 말고. 주인 넌 이미 충분히 많이 벌고 있어.”
그랬다.
이제는 휘온의 투자가 없이도 새로운 사업을 시도해 볼 수 있을 만큼 그녀가 내는 수익은 실로 어마어마했다.
잠시 고민하던 산수이는 적당히 거짓과 진실을 섞어서 대답하기로 했다.
“나는 말이야, 얀피르. 꿈이 있어.”
“무슨 꿈인데.”
“이 비덴비덴 영지를, 대륙 최고의 목욕 관광 명소로 만드는 거야. 세상 누구나 꼭 한번 와보고 싶을 만큼.”
그래서, 천상에 있는 신들마저 강림할 정도로.
“그게 돌아가신 남작…… 아니, 우리 아버지의 뜻을 잇는 걸 테니까!”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대답이었다.
저런 원대한 꿈을 안고 작고하신 부모님을 기리고 있는 것이라면, 그녀가 이렇게 미친 듯이 일만 하는 것도 설명이 됐다.
아직 그 정체불명의 사우나스라는 놈이 누군지는 밝혀내지 못했지만.
‘뭐, 차차 알아보면 되겠지.’
얀피르가 그녀를 향해 말했다.
“그럼 내가 옆에서 도울게. 네가 꿈을 이룰 수 있도록.”
“고마워, 얀피르.”
‘그러니까 날 떠나지만 마.’
‘그 꿈이 이뤄지는 날 나는 너를 떠나게 되겠지만 말이야.’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 보며 각기 다른 생각을 속으로만 되뇌었다.
***
휘온과 프리트는 응접실 안에서 서로 마주 앉은 채 대화를 이어나가고 있었다.
프리트가 못마땅한 시선으로 휘온을 보며 말했다.
“그런데 휘온, 내가 지시한 건 모두 처리하고 내려온 거겠지?”
“구체적으로 뭘 말씀하시는 것인지요? 저에게 지시하신 게 워낙 많아서 말입니다.”
“페니아 왕국 사절단 말이야. 명단에 내 이름을 올렸냐고.”
그 말을 들은 휘온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이었다.
“……그건 남작저로 향하기 불과 30분 전에 말씀하신 게 아닙니까, 저하.”
그러자 프리트가 제 이마를 탁 쳤다.
“어이쿠, 휘온. 그 중요한 걸 빼먹고 왔단 말이야? 지금 당장 혼자 황궁으로 돌아가야겠는데?”
하지만 휘온은 씩 웃으며 맞받아쳤다.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미 저하의 존함은 사절단 명단에 올라가 있으니까요. 페니아 왕국에서 딱히 저하의 방문을 반겨줄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아니 대체 어떻게……?
그 짧은 시간에, 그새 일 처리를 해놓고 내려온 휘온의 치밀함에 프리트는 혀를 내둘렀다.
‘휘온을 얕보고 있었군.’
제 친우지만 휘온은 참으로 대단하면서도, 인간미가 없어서 징그러웠다.
저런 차가운 놈이 사랑에 빠졌다는 것도 믿기지 않았다.
그것도 하필 제가 마음에 둔 여자에게.
‘휘온 저놈이 여자에게 절절매는 걸 볼 일은 내가 죽기 전엔 없을 줄 알았는데. 하필 그게 산수이 영애라니.’
저를 보며 불만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프리트를 향해 이번에는 휘온이 입을 열었다.
“저하께서야 말로 어서 황궁으로 돌아가 보셔야 하는 게 아닙니까? 황궁 찜질방이 황제 폐하께 바치는 탄신 선물이라면서요. 이렇게 방치하고 오시면 어떡합니까?”
그 말에 놀란 프리트가 물었다.
“휘온 자네가 그걸 어떻게?!”
“산수이 영애가 황제 폐하의 취향에 관해 물어보더군요. 찜질방 내부 디자인에 관해 자문하고 싶다면서.”
휘온의 입가에 승리의 미소가 번졌다.
산수이가 폐하의 취향을 나한테 물어봤어.
프리트는 분한 듯 이를 갈았다.
저한테 직접 물어봐도 됐을 텐데.
그랬다면 제가 벌써 시아버지 챙기는 거냐고 농을 던졌을…….
‘아 맞다, 발레아나가 그랬지. 제국 영애들이 가장 싫어하는 말 첫 번째가 시어머니, 두 번째가 시아버지라고…….’
복잡한 표정의 프리트를 보며 휘온이 되물었다.
“그런데 찜질방은 저하의 숙면을 위해 짓던 것이 아닙니까? 그게 왜 갑자기 황제 폐하의 선물로 탈바꿈된 건지……. 설마?”
휘온이 짐작 간다는 듯 말을 이었다.
“산수이 영애가 공을 쌓을 수 있도록 하시려는 거군요? 가령, 폐하로부터 직접 남작위를 물려받을 수 있도록.”
그 말에 프리트는 다시 한 번 혀를 내둘렀다.
“이젠 하다 하다 독심술까지 배운 거야? 하여간 휘온 네놈 앞에선 뭘 숨길 수가 없다니까.”
“하지만 아무리 찜질방이 혁신적이라고는 해도, 과연 폐하께서 그런 일로 전례 없이 여성에게 작위를 내리실지는…….”
프리트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지껄였다.
“찜질방이 정력에 좋다고 소문을 내면 되잖아. 그 양반 그 나이 먹고도 아직 후사를 보려고 혈안이니 말이야.”
멀쩡히 장성한 황태자가 건재하고 있는데도 말이다.
“아…….”
어쩔 줄 몰라 하는 휘온 앞에, 미간을 찌푸리던 프리트가 이내 다시 웃으며 말했다.
“뭐, 찜질방만으론 부족하다 해도 상관없어. 앞으로 공을 세우는 족족 산수이 영애에게 다 얹어 줄 생각이니까.”
“영애를 마음에 두고 계신 건 알고 있지만, 왜 그렇게까지 하시는 겁니까?”
“내 여자가 직접 가문을 이어 가주가 되고 싶다잖아. 그럼 소원을 들어줘야지. 황태자씩이나 돼서 그런 것 하나 못 들어줘서 되겠어?”
“가주…… 말입니까?”
휘온은 몰랐다. 산수이가 그런 생각을 하는 줄은.
휘온이 그녀를 위해서 계획하고 있는 것은 전연 다른 것이었다.
만일 산수이가 자신과 결혼하게 된다면, 그녀는 권세 등등한 에데카나 가문의 이름을 얻게 될 것이었다.
그러면 산수이는 휘온이 축적해 둔 부와 공작가의 위상에 힘입어 그녀가 원하는 목욕탕 사업을 원 없이 할 수 있을 거라고 휘온은 생각해왔다.
게다가 저 자신도 그녀에게 좋은 남편이자 사업 파트너가 되어줄 수 있을 거라고.
하지만 그녀가 원하는 것은 그런 게 아니었다.
‘항상 산수이는 내가 생각한 것보다 더 큰 여자야.’
휘온은 다시금 올라가는 제 입꼬리를 내릴 수가 없었다.
그는 이렇게 산수이가 제 예측과는 다르게 튀어 오를수록 그녀가 점점 더 사랑스러웠다.
프리트는 이제 대화에도 흥미를 잃었는지 더는 참을 수 없다는 듯 툭 내뱉었다.
“그나저나 산수이 영애는 대체 왜 아직도 안 오는 거야?”
***
미모세 백작 부인은 비덴탕을 나와 남작저 귀빈실로 향하고 있었다.
원래부터 이곳에서 며칠 묵어가기로 계획한 일정이었다.
제 새로운 남첩으로 삼을 얀피르를 좀 더 오래 지켜보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지금 예상외의 복병이 나타났다.
아름다운데 젊기까지 한 산수이 비덴비덴.
미모세의 속에서 부아가 치밀었다.
‘얀피르 그자가 내 제안을 단박에 거절한 건, 다 산수이 영애 때문이겠지.’
대체 그자를 가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돈도 싫다, 권력도 싫다 하는데.
여기까지 생각하던 찰나, 응접실을 지나치던 미모세는 그 안에서 들려오는 귀에 익은 목소리에 발걸음을 멈췄다.
‘응? 이 목소리는 분명…….’
미모세는 응접실로 다가가 몰래 귀를 기울였다.
그 안에서 한 사내의 낮은 음성이 흘러나왔다.
“그나저나 산수이 영애는 대체 왜 아직도 안 오는 거야?”
‘프리트 황태자?’
그 목소리는 분명 황태자의 것이었다.
그런데 대체 그가 왜 이 남작저에 있단 말인가?
곧이어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래 기다려온 귀빈을 만나고 있다지 않습니까. 조금만 참으십시오, 저하.”
‘게다가 저 목소리는, 분명 에데카나 공작!’
예상치도 못한 두 사람이 이 비덴비덴 남작저에 있었다.
미모세는 숨을 죽인 채 좀 더 가까이 귀를 기울였다.
계속해서 프리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그 정도의 참을성이 있었다면, 애초에 산수이 영애에게 그렇게 들이대지도 않았겠지.”
그 말을 들은 미모세 백작 부인은 경악했다.
‘화, 황태자가 산수이 영애를?!’
그것은 미모세가 비덴비덴 남작저에서 건진 최고의 수확이었다.
‘산수이가 얀피르의 눈앞에서 사라지면, 그도 더는 이 촌구석에서 세신사로 남을 이유가 없겠지?’
음흉한 계획을 떠올린 미모세가 섬뜩한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