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국의 세신사 영애님-54화 (54/150)

54화.

“산수이 영애, 나도 그대에게 제안하고 싶은 음료가 생각났어.”

마침내 프리트가 산수이를 향해 입을 열었다.

“그게 무엇입니까, 저하?”

“제국 옆에 위치한 페니아 왕국에서만 나는 희귀한 과일이 있다. 그걸로 음료를 만들어 보는 건 어떨까 싶은데.”

“희귀한 과일이요?”

“그래. 노랗고 기다란 과일이야. 크림같이 부드러우면서도 특유의 달콤한 향을 내지.”

그 말을 들은 산수이의 동공이 커다래졌다.

“설마, 그 과일의 이름이…… 바나나입니까?”

“음? 영애도 이미 알고 있었나? 맞아, 바나나.”

바나나라는 단어를 듣자 벅찬 마음을 감출 수 없던 산수이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외쳤다.

“저하! 정말로 이 세계에 바나나가 있습니까?!”

산수이는 흥분해서 콧김을 내뿜었다.

‘바나나가 있다고?! 그럼 드디어 바나나우유를 마실 수 있는 건가!’

그때 휘온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하지만 저하, 페니아 왕국은 오랜 세월 동안 바나나 교역을 금지하고 있지 않습니까.”

“곧 사절단 파견 시기가 다가오지 않나. 그때 내가 직접 방문하여 바나나 교역 허가를 따내겠다.”

그 말을 들은 휘온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갔다.

황태자가 직접 이웃 나라로 향하겠다니.

그의 흉흉한 피 칠갑 소문 때문에 온 나라가 그의 방문을 꺼려 하고 있는데.

페니아 왕국에서 이를 전쟁 선포로 받아들이지나 않으면 다행일 것이었다.

“저, 저하께서 직접 페니아로 가시겠단 말씀이십니까?”

“왜, 못 갈 이유라도 있나?”

옆에서 대충 돌아가는 분위기를 파악한 산수이는 한숨을 쉬었다.

‘들어보니 바나나우유는 또다시 헛된 꿈으로만 남겠구나, 하아.’

그때였다.

갑자기 방문을 두드리는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응? 이제 더 찾아올 사람이 없는데?’

이윽고 사용인 하나가 손에 서신을 든 채 급히 방 안으로 들어섰다.

“남작 영애님, 비덴비덴 남작저로부터 급한 전갈이 도착했습니다!”

“남작저에서?”

산수이는 서둘러 서신을 뜯어보았다.

***

오늘은 얀피르의 마지막 여성 고객 예약이 있는 날이었다.

예약 확인증에 따르면, 그녀는 제국 변방에 위치한 귀족 가문의 영애라고 했다.

얀피르를 포함한 사용인 여럿은 저택 앞에서 이 마지막 손님이 도착하시길 기다리고 있었다.

보통 때밀이 예약을 한 귀족 고객들은 으레 예정 시간보다 조금 더 일찍 방문해 남작저 응접실에서 휴식을 취하곤 했기 때문이다.

이윽고 고객이 탄 마차가 남작저 앞에 도착했다.

그런데, 예상보다 크고 화려한 마차의 등장에 그들은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다.

‘변방 귀족의 마차라고 하기엔, 금장이 너무 많은데?’

이윽고 마차가 정지하자, 문틈 사이로 화려한 크리스털로 세공된 비단 구두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은 분명 한미한 가문에서는 절대 사들일 수 없는 최고급 제품이었다.

모두가 의아해하던 찰나, 곧이어 마차 문 너머에서 한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 앞에 선 건, 원래의 예약 손님이 아닌 바로 미모세 백작 부인이었다.

지체 높은 백작 부인의 모습을 알아본 집사와 유모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미, 미모세 백작 부인님?!’

제국 사교계의 중추이자, 뒤로는 황후가 뒷배를 봐주고 있다는 미모세의 얼굴을 모르는 자는 제국 내에 거의 없었다.

오로지 얀피르만이 그녀를 낯설게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미모세는 마차에서 내리며 제 주위의 사용인들을 죽 훑어보았다.

그리고 그들 사이에서 가장 훤칠한 얀피르를 단박에 찾아내었다.

‘저 아이로구나!’

이름을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저 사내가 얀피르라는 이름의 세신사라는 걸.

미모세는 입맛을 다셨다.

여태껏 제 첩으로 들였던 그 어떤 아이들보다도 더 탐이 나는 자였다.

한 점 두려움 없다는 듯 자신을 향해 있는 저 당당한 시선을 보고 있자니 왠지 모를 정복욕마저 들었다.

그녀는 입꼬리를 씩 올리며 얀피르 쪽으로 걸어갔다.

그렇게 미모세가 얀피르에게 말을 걸려던 찰나.

집사가 재빨리 튀어나와 예를 다해 미모세에게 인사를 건넸다.

“미모세 백작 부인님, 저희 비덴비덴 남작저를 찾아주시어 큰 영광입니다! 외람되게도 현재 이 저택의 주인이 잠시 자리를 비우신지라…….”

얀피르에게 향하던 발걸음을 저지당한 미모세는, 경멸스러운 눈빛으로 집사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됐어, 난 여기 남작 영애를 만나러 온 것이 아니니까.”

미모세는 품 안에서 때밀이 예약 확인증을 꺼내 보였다.

“보다시피 내 친우가 개인 사정으로 때를 밀러 올 수 없게 되어서 말이야. 하는 수 없이 내가 대신 왔지. 예약을 그냥 날리기엔 너무 아깝잖아?”

그러자 지금까지 잠자코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얀피르가 한마디 거들었다.

“때밀이 예약은 타인 양도가 불가능한데요?”

팔짱을 끼고 삐딱하게 서서 미모세를 노려보는 얀피르의 시선에, 집사와 유모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미모세 백작 부인의 심기를 건드려서 좋을 게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필 산수이 아가씨가 없을 때 이런 일이 생기다니!’

집사는 서둘러 상황을 무마시키려 했다.

“뭐, 뭔가 착오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얀피르 경, 잠시 저와 대화를…….”

“잠깐.”

미모세는 손을 들어 올려 집사의 행동을 저지한 후, 얀피르에게 물었다.

“네가 그 얀피르라는 세신사니?”

“언제 봤다고 초면부터 반말이시죠? 실례되게.”

“뭐? 아하하……!”

미모세는 간드러지게 웃었다.

그 모습을 뒤에서 지켜보고 있는 사용인들은 딱 죽을 맛이었다.

공작님도 모자라 황태자 저하까지 휘두르시던 제 아가씨가 자리를 비우고 나자.

이제는 얀피르 경 마저 백작 부인 무서운 줄 모르고 저리 행동하다니.

이러다 언제 한 번 큰 사달이 나는 건 아닌지, 그들은 심장이 떨려서 미칠 노릇이었다.

‘제발, 두 다리 뻗고 편히 잠 좀 잘 수 있게 해주세요!’

하지만 미모세는 얀피르가 퍽 마음에 들었는지, 그에게 좀 더 가까이 다가갔다.

그녀의 높은 구두 굽 소리만이 정적을 채웠다.

얀피르 앞에 멈춰선 미모세가 그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며 말했다.

“재밌네, 너.”

얀피르를 향해 묘한 미소를 짓던 미모세가 돌아서서 집사를 향해 말했다.

“이봐, 집사. 예약 시간 될 때까지 좀 쉴 수 있게 조치해 줘.”

“예! 지금 바로 모시겠습니다, 백작 부인.”

미모세는 제가 가지고 온 가방을 집사에게 아무렇게나 휙 던져주곤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그 모습을 못마땅하게 바라보던 얀피르가 뭐라고 한마디 지껄이기 위해 미모세를 따라가려던 찰나.

재빠르게 유모가 그를 막아섰다.

“얀피르 경……! 저와 잠시 얘기 좀 하실까요?”

***

남작저로부터 도착한 서신을 읽은 산수이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짤막한 그 편지에는 미모세 백작 부인이 갑작스럽게 비덴탕을 방문했으니, 하루속히 남작저로 와 달라는 내용이 적혀있었다.

‘드디어 사교계의 꽃이라 불리는 미모세 백작 부인께서 우리 비덴탕을 찾아주셨다!’

산수이는 뛸 듯이 기뻤다.

그간 아무리 홍보를 해도 비덴탕에 걸음하지 않던 그녀였다.

심지어 제국의 귀족들이라면 누구나 한 번씩은 다 받아봤다는 그 흔한 때밀이 예약조차 넣지 않았었다.

‘어, 잠깐. 예약 없이 때를 밀러 오신 거라면.’

지금 자신이 이곳 황궁에 와 있는데, 대체 누가 백작 부인의 때를 밀어드리지?

얀피르는 이제 더 이상 여성 고객님은 받지 않기로 했고.

세신 전문학교에서 실습받은 학생들이 있긴 했지만.

그들은 아직 까탈스럽기로 유명한 미모세 백작 부인을 밀어드릴 만큼의 실력은 쌓지 못했을 터였다.

산수이의 마음이 다급해졌다.

서둘러 남작저로 돌아와 달라는 건, 분명 이런 이유에서였을 것이었다.

산수이가 프리트에게 양해를 구했다.

“저하, 이제 찜질방 공사도 어느 정도 진행되었으니, 저는 다시 남작령으로 내려가 있을까 합니다.”

그 말에 프리트의 심기가 불편해졌다.

그가 얼굴을 구기며 물었다.

“남작저에 뭐 꿀단지라도 숨겨놨어, 영애?”

물론 그 꿀단지는 얀피르를 말하는 거였다.

고작 서신 하나에 저를 내버려 두고 쪼르르 달려갈 생각을 하다니.

혹시 그 짐승 세신사 놈 때문이 아닌지 프리트는 영 신경이 쓰였다.

휘온 역시 귀를 쫑긋하며 둘의 대화에 집중했다.

그 역시도 혹시나 산수이가 얀피르 때문에 저러는 것인지 걱정이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산수이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답했다.

“꿀단지라니요? 정말로 긴급한 일이 생겨서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그 긴급한 일이 뭐냐고.”

“지금 남작저에 귀한 손님이 와 계셔서, 제가 직접 때를 밀어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그 말을 들은 휘온의 눈이 커졌다.

“혹시, 그 귀한 고객님이 미모세 백작 부인입니까?”

“어? 어떻게 알았어요, 휘온?”

그 이름을 들은 프리트의 얼굴이 순간 험악해졌다.

“미모세……?”

잠시 침묵하던 그는 갑자기 손을 들어 자리에 있던 모든 시녀들에게 명을 내렸다.

“다들 발레아나 데리고 당장 나가.”

“오, 오라버니?”

“발레아나, 잠자코 방으로 가 있어라.”

발레아나는 가고 싶지 않은 눈치였지만.

저희를 잡아먹을 듯 노려보는 프리트의 눈빛을 본 시녀들이 서둘러 공주를 데리고 나갔다.

이제 방 안에는 산수이와 프리트, 그리고 휘온만이 남아있었다.

프리트는 깊게 한숨을 내쉰 후, 산수이를 향해 뇌까렸다.

“산수이 영애, 그대가 황후의 사람이 되려 하는지는 미처 몰랐군?”

“예? 황후의 사람이요?”

“설마 미모세 백작 부인이 황후의 사촌이라는 걸 몰랐다고 하진 않겠지.”

알고는 있었다.

목욕탕에서 고객들의 때를 밀어주며 이 얘기 저 얘기 주워들은 게 워낙 많았었기 때문에.

하지만 그녀가 황후의 사람이든 아니든, 그런 정치 싸움은 산수이가 알 바 아니었다.

어쨌든 중요한 건 미모세 백작 부인이 비덴탕을 방문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엄청난 홍보 효과가 있을 거란 것뿐이니까.

둘 사이의 살벌한 분위기를 감지한 휘온이 다급하게 프리트에게 말했다.

“저하, 그것이 아니오라. 미모세 백작 부인은 비덴탕에서 예전부터 모시려고 했던 고객입니다. 아무래도 그녀가 사교계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건 사실이니까요.”

“휘온, 자네에게 묻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본 산수이가 분개하여 프리트를 향해 말했다.

“저하, 뭘 오해하고 계신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누구의 사람도 아닙니다. 그저 목욕탕을 운영하는 일개 영애일 뿐. 게다가 저에게는 나름의 사업 철학이 있다고요.”

“대체 어떤 사업 철학인지 한번 들어나 보지.”

산수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프리트를 쳐다보며 내뱉었다.

“목욕탕 안에서 옷 벗으면 다 똑같다.”

“뭐?”

당황한 프리트를 향해 산수이가 말을 이었다.

“미모세 백작 부인이 황후마마의 사람인지 아닌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분의 방문으로 비덴탕이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질 수 있다면, 저는 설령 마왕이 온다고 해도 손님으로 모실 거예요.”

“하……!”

프리트는 자리에서 일어나 산수이에게로 다가갔다.

그가 산수이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말했다.

“산수이 영애, 그대는 황후가 어떤 사람인진 알기나 해? 그 미친X의 패거리와 어울려봤자 득이 될 게 하나 없다고. 아니, 되려 독을 처먹고 뒈지지나 않으면 다행이게.”

프리트의 입에서 나오는 온갖 상스러운 소리를 들으며, 휘온은 사색이 되었다.

‘이래서 아까 다 내보내신 거였군.’

하지만 산수이는 당돌하게 맞대응했다.

“설령 미친X이라 하셔도 비덴탕 운영에 도움이 되시는 분이라면 저는 기꺼이 손님으로 맞이할 건데요.”

이젠 산수이의 입에서도 그 소리가 나왔다.

휘온은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지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저하의 말투를 따라 했다간 황족 모독죄로 잡혀간단 말입니다, 산수이…….’

산수이의 말에 마침내 프리트가 말했다.

“좋아. 영애가 죽어도 그 미모세를 모시러 가야겠다면 말이야, 나도 함께 가야겠어. 그게 아니라면 절대 보내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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