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산수이가 황궁에 도착하기 한 시간 전.
제 오라버니에게 실망을 금치 못한 발레아나는 어떻게 해서든 자신이 나서서 산수이와 프리트 간의 관계를 회복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나에게 내려진 사명……!’
청혼을 벌써 멋대가리 없게 해버렸다고 하니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어차피 되돌릴 수 없는 일이라면.
‘그러면 차라리 정공법으로 간다.’
게다가 제 오라버니 말고도 쟁쟁한 경쟁자가 두 명이나 더 있는 상황이었다.
그렇다면 머뭇거리느니 대놓고 들이대는 편이 더 나았다.
한 명은 산수이와 한집에 살면서 그녀의 곁에 항상 상주하고 있고.
다른 한 놈은 사업을 도와준다는 구실로 허구한 날 남작저로 내려가질 않는가.
이대로라면 밀린다고 생각한 발레아나는 제 오빠를 향해 진지한 표정으로 조언했다.
“오라버니, 어차피 이렇게 된 거 이판사판입니다. 앞으로 그냥 뚝심 있게 밀어붙이세요!”
“뭘 밀어붙이라는 거냐, 대체.”
“산수이 언니한테 그냥 아주 막 들이대세요! 매일같이 청혼하란 말이에요, 올가미처럼 빠져나올 수 없게. 그거 오라버니 특기잖아요!”
“……하?”
“그리고 목욕 관련 얘기를 하면서 언니랑 좀 친해지세요. 상대의 관심사에 대해 얘기하는 건 연애의 기본 중의 기본!”
프리트가 제 관자놀이를 누르며 물었다.
“발레아나, 너 지금 나에게 연애 조언을 하고 있는 거냐?”
“네, 그런데요?”
프리트는 발레아나를 향해 역정을 냈다.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네가 무슨 연애 조언을! 아니, 애초에 연애 경험이 있기는 해?”
“오라버니……? 오라버니도 없으시잖아요.”
“……나에게는 지난 세월 동안 쌓아온 연륜이라는 것이 있다.”
“아, 그래서 그렇게 대차게 까이셨구나.”
“…….”
프리트는 할 말이 없었다.
사실 저 자신도 어찌해야 할지 모르고 있던 건 사실이다.
워낙에 모두가 그를 경외시하는 분위기 속에서만 살아왔기에.
그렇게 단박에 거절당했을 때의 대처법은 머릿속에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 막 데뷔탕트를 마친 젖비린내 나는 여동생에게 연애 코치를 받아야 하다니.
프리트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자존심이 구겨질 대로 구겨진 기분이었다.
프리트의 손을 꼬옥 붙잡으며 발레아나가 애원하듯 말했다.
“오라버니, 부디 힘을 내 주세요. 저 진짜 산수이 언니 너무 좋단 말이에요. 꼭 언니를 황궁으로 데려와 주세요!”
“발레아나, 너…….”
“제발요. 저 오라버니만 믿을게요.”
저를 간절하게 바라보는 여동생을 보며, 프리트는 역시나 자신이 황태자비 감으로 제대로 된 여자를 골랐구나 싶었다.
저에게만 필요한 사람인 줄 알았더니, 외로움을 타는 제 여동생에게도 좋은 가족이 되어줄 여인이 아닌가.
이렇게 된 거 어떤 수를 써서라도 그녀를 황태자비로 만들고 말겠다고 프리트는 다시 한 번 다짐했다.
***
그렇게.
[결혼하자고 뻔뻔하게 계속해서 들이댄다] 노선을 타기로 한 프리트는 음흉한 미소를 지은 채 산수이와 마주 보고 서 있었다.
산수이는 방금 전 프리트의 입에서 또다시 나온 청혼이라는 단어에 정신이 아찔하였다.
‘아, 님아 제발, 다시 그 얘기를 꺼내지 마오!’
하지만 황태자에게 무례하게 그 입 다물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 게다가 저를 바라보는 프리트의 눈빛은 이글이글 불타오르고 있었다.
당황하는 산수이를 보며 프리트가 씩 웃었다.
“그 얘긴 이제 그만두도록 하지. 그대가 곤란해하는 것 같으니.”
산수이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황태자가 눈치는 있는 모양이었다.
“감사합니다, 저하.”
“그런데 영애, 이 황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지?”
갑자기 웬 황궁 타령?
하지만 원래부터 황궁의 화려함에 압도되어 있던 산수이라, 그저 별생각 없이 느낀 점을 그대로 이야기했다.
“정말 아름답다고 생각합니다. 뛰어난 건축양식 하며, 잘 관리된 정원까지. 베르사유도 이보다는 아름답지 않을…….”
“베르사유?”
아, 또 헛소릴 내뱉어버렸다.
“아, 아닙니다. 그저 제가 꿈에서 본 궁전 이름이에요.”
“흐음, 꿈에 나올 정도로 아름다운 궁이란 소리인가.”
“예, 그렇죠. 그렇습니다, 저하.”
프리트가 당황해하는 산수이를 빤히 바라보다 말을 이었다.
“그런데 영애, 그대가 잘 모르는 것 같아서 말해주는 건데 말이야.”
프리트가 그녀를 향해 눈웃음쳤다.
“나와 결혼하면, 이 황궁이 모두 그대의 것이야.”
“…….”
“어때, 꿈에서도 보일 정도라면서. 이 정도면 구미가 확 당기지 않나?”
그 이후로도 프리트의 들이댐은 끊이질 않았다.
“어이쿠, 전 대륙을 통틀어 이 황궁 안에서만 볼 수 있다는 희귀한 꽃 아냐? 이것 역시 영애의 것이 될 수 있는데. 물론 그대가 나의 비가 되어준다면 말이지.”
“…….”
“방금 먹은 과일 파이가 영애의 입맛에 맞나 봐? 두 접시째 먹는 걸 보니. 나와 결혼하면 그걸 매일 먹을 수 있을 텐데, 참 아쉽게 됐어.”
결국 산수이는 참다못해 프리트에게 한마디 하고 말았다.
“저하, 다시 말씀드리지만 저는 저하와 결혼할 생각이 추호도 없습니다. 죄송하지만 이제 그 얘기는 그만해주셨으면 합니…….”
“산수이 영애, 그대는 내가 왜 미친놈이라 불리는지 몰라?”
프리트의 눈이 희뜩였다.
그 눈을 본 산수이가 저도 모르게 움찔하며 답했다.
“그, 그야 피를 뒤집어쓰시는 이유에 대해선 일전에 이미 저에게 설명해 주셨고…….”
그러나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니, 아니야. 고작 그런 이유만 가지고 생긴 별명이 아니지.”
프리트는 산수이 쪽으로 의자를 당겨 앉았다.
산수이가 놀라 제 의자를 뒤로 뺐지만, 프리트는 다시금 그녀의 옆으로 다가오며 말했다.
“나는 말이야, 영애. 이때까지.”
“저, 저하?”
“내가 노린 상대를 단 한 번도 놓쳐본 적이 없어.”
그가 씩 웃어 보이며 말했다.
“그래서 내가 미친놈이라고 불리는 거야, 영애. 그리고…….”
프리트는 산수이를 향해 손으로 턱을 괴곤 싱긋 웃어 보였다.
“지금은 영애에게 미쳐있는 것 같군.”
‘허억…….’
산수이는 자신의 앞에 앉은 이 한 마리 사자 같은 사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프리트의 얼굴은, 말하자면.
‘완전 상남자.’
그의 짙은 눈썹은 꼭 그린 것처럼 가지런했고, 굵은 턱선과 베일 듯 날카로운 콧날은 마치 고전 영화 속 배우들을 보는 듯 또렷했다.
그런 비주얼로 호탕하게 웃기까지 하니, 이건 뭐 보고만 있어도 시원한 쿨워터 향이 나는 것만 같았다.
게다가 몸은 또 얼마나 크고 단단해 보이는지.
구릿빛 피부에 웬만한 수영 선수들보다 넓은 어깨와 등판은 타고난 그의 위압감을 한층 더 강조해주었다.
게다가 저 굵은 팔뚝과 가슴은 정말…….
두근두근.
산수이의 마음속에서 경보음이 울렸다.
‘경보, 존잘 경보-! 존잘남이 나에게 미쳐있다고 말했다, 위험!’
안 그래도 프리트가 잘생긴 건 알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바로 코앞에서 턱을 괴고 제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기까지 하고 있다.
‘정말이지, 화면 뚫고 나왔냐고요!’
현실 세계에선 연애 한 번 못 해봤던 그녀인지라, 이런 동화 속 왕자님 같은 남자가 저 좋다며 결혼해 달라고 하는 게 퍽 싫은 것만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습게도 산수이는 여전히 원래의 세계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것은 비단 그 세상이 그립기만 해서가 아니었다.
이세계의 제국이란 곳도 낯선데, 심지어 타인의 몸에 빙의해 있다.
그것은 꼭 남의 인생을 훔쳐서 살아가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주기 때문에 마음 한구석이 불편했다.
‘아무리 좋아도 이건 내 것이 아니야.’
목욕의 신이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을 선택한 건, 아마도 제가 가지고 있던 현대의 목욕 기술과 지식 때문이 아니었을까?
‘이 세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생각해낼 수 없는, 그런 지식과 노하우들이 필요했던 거겠지.’
그렇다면 제가 원래의 세계로 돌아가고 난 후, 이 육신 역시 본래의 영혼을 되찾게 되는 건 아닐까?
그렇게 된다면 지금의 자신은 이 세계의 그 어느 누구와도 사랑에 빠져선 안 될 것이었다.
나중에 몸의 원래 주인이 돌아왔을 때 얼마나 많은 혼란이 야기되겠는가.
그게 아니라 해도 자신이 누구를 선택하든, 제가 떠나곤 난 뒤 당사자들이 입을 마음의 상처는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제국의 황태자가 아니라 누가 와서 그녀를 흔들어대도 산수이의 생각은 항상 같았다.
‘요 근래 점점 강해지는 존잘남들의 공격에 마음이 너무 약해졌어. 잘생긴 얼굴에 혹해서 본래의 대업을 잊어서는 안 된다, 나 자신……!’
산수이는 마음을 다잡고 눈을 부릅떴다.
그러나 이미 동요하는 산수이를 지켜보고 있던 프리트의 얼굴엔 화색이 돌았다.
그는 눈치가 빠른 자였다.
산수이가 왜 저런 변화를 보이는지 그는 대충 예상할 수 있었다.
씰룩이는 자신의 입술을 애써 억누른 채, 프리트가 산수이에게 말했다.
“영애, 그렇게 억지로 참을 것 없어.”
“네?”
“원한다면 한번 만져봐도 좋아. 영애에게만 특별히 허락하겠다.”
산수이는 전혀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저하, 대체 뭘…… 말씀이신지요?”
프리트가 피식 웃으며 뇌까렸다.
“뭐겠어? 당연히 내 잘생긴 얼굴이지. 아까부터 내 얼굴이 뚫리도록 쳐다보고 있잖아. 아파서 죽을 지경이라고.”
프리트의 말을 들은 산수이의 얼굴이 화악 달아올랐다.
‘내, 내가 그렇게 티 나게 쳐다봤나?’
아니, 그렇다고 또 뚫리도록 쳐다봤다고 표현할 건 뭐란 말인가.
산수이가 불만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이, 이렇게 자꾸 제게 가까이 다가오시는데 어떻게 쳐다보지 않을 수가 있습니까, 저하?”
그는 산수이의 표정이 퍽 재미있었는지 낮게 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이런, 내가 착각을 했나 보군. 날 바라보는 영애의 시선이 너무 뜨거워서, 내 얼굴에 반한 줄 알았어. 아니었다면 진심으로 사과하지.”
그는 의자에서 일어나 산수이에게 몸을 굽히며 예를 다해 사과했다.
프리트가 오버하는 모습을 본 산수이는 한층 더 부끄러워졌다.
“아악, 저하! 이러지 마세요!”
하지만 프리트는 곧바로 무릎을 꿇곤 산수이의 손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
“내가 오해를 한 거라면 부디 용서해 줘, 영애.”
그렇게 말하며 그가 산수이의 시선 아래에서 그녀를 올려다보며 씨익 웃었다.
저를 놀리고 있는 프리트를 바라보던 산수이의 속이 부글부글 끓기 시작했다.
‘내가 잘생긴 놈들 얼굴 보고 다시 한 번 넋 놓으면 사람도 아니다 진짜…….’
산수이는 스스로 깊이 반성했다.
남자 얼굴에 넘어가면 패가망신하는 건 한순간이다. 앞으로는 제 마음에 이중, 삼중으로 철창을 쳐야겠다고 다짐하면서.
때를 밀면서 남정네들의 벗은 몸과 다부진 근육에는 어느 정도 적응이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얼굴에는 내공이 한참 부족한 모양이었다.
프리트는 혼자 동요하고 있는 산수이를 바라보며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이어 그녀에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자, 그럼 이제 나와 함께 찜질방 공사 현장으로 가 보실까, 산수이 영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