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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 세신사 영애님-51화 (51/150)

51화.

따사로운 오후의 황궁 정원.

발레아나 공주가 혼자서 차를 마시며 여유를 즐기고 있었다.

그녀 앞에는 작은 쪽지가 붙어있는 화려한 쿠키 상자가 놓여있었다.

하지만 발레아나는 쪽지 따윈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상자의 뚜껑부터 열었다.

“우와아……!”

그 안에는 금가루가 뿌려진 고급 쿠키들이 한가득 들어있었다.

입이 귀에 걸린 발레아나가 서둘러 쿠키 하나를 집어 들려던 찰나.

갑자기 그녀의 뒤에서 거대한 손이 불쑥 튀어나와 상자 안의 쿠키를 한 줌 집어 사라졌다.

“!?”

발레아나는 소스라치게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거기에 서있는 사람은 역시나.

제 오라버니, 프리트였다.

프리트는 방금 전 집어간 쿠키를 대충 입 안에 넣고는 우악스럽게 씹어댔다.

맛도 음미하지 않고 모조리 목구멍으로 꿀떡 삼켜버리며 그가 생각했다.

‘딱히 독이 들은 것 같진 않군.’

그는 일전의 2황자 사건 이후 웬만한 독에 대해선 내성이 생겼다.

그래서 발레아나가 무언가 새로운 걸 먹으려 할 때면 부리나케 찾아와 제 입 안에 먼저 넣어보곤 했다.

물론 그 이유는 발레아나에게 설명해주지 않았다.

그의 어린 여동생은 그 사건의 전말에 대해선 전혀 모르고 있었으니까.

프리트의 의도를 알 리 없는 발레아나가 그를 향해 한껏 짜증을 냈다.

“아악, 내 쿠키! 오라버니, 또!”

하지만 프리트는 발레아나의 반응 따위엔 관심 없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가 제 입가에 남은 쿠키 가루를 대충 털어버리며 중얼거렸다.

“겉보기에만 번쩍거리지, 맛은 별로야. 일전에 먹은 팝콘인지 하는 게 훨씬 더 훌륭해.”

산수이가 개발한 팝콘이 값싼 식재료인 옥수수로 만든 것이란 얘길 들었을 때.

프리트는 놀란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역시 내가 선택한 여자답다니까. 재주도 많고, 현명해. 분명 훌륭한 황후가 될 거야.’

그렇게 혼자 씩 웃는 프리트에게 발레아나가 화를 냈다.

“남이 선물받은 걸 그렇게 허락도 없이 드시면 안 되죠!”

“발레아나, 내가 너한테 남이었나? 섭섭한데.”

“말 돌리지 마시고요!”

프리트는 제 앞에서 투덜거리는 발레아나를 무시한 채 쿠키 상자 앞에 붙어있는 쪽지를 떼서 읽기 시작했다.

[미모세 백작 부인]

그 이름을 본 프리트의 미간이 구겨졌다.

“발레아나, 내가 일전에 황후의 사람들하곤 어울리지 말라고 했을 텐데? 게다가 이 여잔…….”

거기까지 말하던 프리트가 입을 다물었다.

미모세 부인은 현 황후의 사촌 언니였다.

그녀가 지금과 같은 사교계의 권세를 누리고 있는 건 다 황후의 뒷배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이 미모세라는 여자는, 밤마다 남첩들을 갈아치우는 천박하기 그지없는 행동을 한다 들었다고.’

프리트는 그런 미모세가 발레아나와 교류하려는 것이 영 탐탁지 않았다.

프리트의 말에 발레아나는 입을 삐죽 내밀며 말했다.

“하지만 미모세 백작 부인께선 온갖 사교 모임의 중심에 서 계신 데다가, 어마마마의 가문 사람이기도 하시니 어쩔 수 없는걸요.”

“뭐? 어마마마……?”

그 말에 프리트가 언성을 높였다.

“대체 언제까지 그 여자를 어머니라 부를 셈이냐? 우리를 낳아주신 친어머니는……!”

“알아요. 저를 낳으시다 병을 얻어 결국 돌아가셨잖아요.”

발레아나가 침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푹 수그리며 말했다.

그 모습을 본 프리트는 하던 말을 멈칫하고는 어쩔 줄 몰랐다.

“그런 뜻은 아니었다.”

프리트는 어머니 생각에 울먹이고 있는 발레아나의 황금빛 머리를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발레아나, 어머니께서 돌아가신 것은 네 탓이 아냐. 그분은 원래도 병약하셨어.”

“…….”

프리트가 발레아나를 향해 말을 이었다.

“아무튼 미모세 같은 자 말고, 산수이 영애와 어울리도록 해라, 발레아나. 곧 너의 새로운 가족이 될지도 모르니까.”

그 말을 들은 발레아나의 눈이 커졌다.

“지금 가족이라 하셨어요? 설마.”

프리트가 씩 웃어 보였다.

“그래. 산수이 영애가 나와 결혼한다면, 너에게는 새언니가 되니까.”

“……!”

그 말을 들은 발레아나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드디어, 드디어 제 꿈이 이뤄지려는 것이었다.

“꺄악, 오라버니!”

발레아나는 의자를 박차고 일어나 프리트의 목에 대롱대롱 매달렸다.

이번에는 프리트도 미처 자신에게 안겨드는 발레아나를 피하지 못했다.

“큭. 귀찮으니까 안기지 말래도!”

“정말 산수이 언니랑 결혼하실 거예요? 정말로?”

순간 프리트는 발레아나의 입에서 튀어나온 언니라는 단어에 적잖이 놀랐다.

“산수이 언니?”

아차차.

“마, 말이 잘못 나간 거예요.”

“둘이 벌써 언니 동생 하고 지내는 사이인가 보지?”

발레아나는 프리트가 당연히 자신의 예법을 지적하며 혼을 낼 줄 알았다.

하지만 되레 프리트의 입꼬리가 씰룩거리더니,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는 것이 아닌가.

‘응……?’

발레아나는 제 눈을 의심했다.

‘우리 오라버니가 저렇게 바보 같은 표정도 지을 줄 아는 사람이었어?’

발레아나는 확신했다.

오라버니가 사랑에 빠졌구나.

‘하긴. 내가 봐도 산수이 언니는 예쁜데 성격도 좋고, 거기에다 때도 엄청 잘 밀잖아!’

제 오라버니가 저러는 것도 당연했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바로 프리트 말고도, 경쟁자가 둘이나 더 있다는 것.

‘휘온 오빠하고, 그 무서운 얀피르 경이 문제야.’

물론 신분으로 보나 힘으로 보나 제 오라비가 꿀릴 것은 하나도 없었다.

황태자 좋다는 게 뭔가.

하지만 얼굴만 놓고 보면 절대 우열을 가릴 수가 없었다.

셋이 거의 수평 저울을 이루고 있다고 해도 무방했다.

게다가 제 오라비는 핸디캡까지 가지고 있지 않은가.

핏줄인 발레아나 스스로가 생각해도 프리트의 성격은 좋다고 할 수 없었다.

아니, 미친놈이 맞았다.

저놈이 대체 연모하는 여인을 향해 제대로 된 달콤한 말을 속삭일 줄은 아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발레아나가 프리트를 향해 입을 열었다.

“네, 맞아요. 저, 산수이 언니랑 언니 동생 하고 지내기로 했어요.”

역시나 프리트는 화를 내지 않았다.

“으음, 그래. 어차피 가족이 될 사이니까. 좋은 생각이다, 발레아나. 아니, 정말 잘했다.”

프리트가 잠시 머뭇거리다 발레아나에게 물었다.

“그런데, 네가 산수이 영애와 친한 것 같아 묻는 것인데…….”

“뭐든 물어보세요, 오라버니.”

제가 도울 수 있는 것이면 뭐든 할게요. 그래야 오라버니가 경쟁에서 이기시고, 언니를 궁으로 데려오시지 않겠어요?

야망을 불태우며 발레아나는 방끗 웃어 보였다.

“산수이 그녀는 대체 뭘 좋아하지?”

“언니가 좋아하는 거요?”

발레아나는 진심으로 프리트를 도와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의 머리에 떠오르는 것이라곤—

이태리타월하고, 때밀이하고.

팝콘하고.

그리고.

일전에 산수이가 했던 그 말.

‘목욕탕 운영해서 비덴비덴 남작령을 되살리는 것 말곤 관심 없어, 난.’

발레아나는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오라버니, 사실 산수이 언니는 연애나 결혼엔 관심이 전혀 없어 보여요.”

심지어 남자 얼굴도 안 보는 것 같았어요, 라고 덧붙이려다 참는 발레아나였다.

“그럼 대체 뭐에 관심이 있는데?”

“……목욕탕이요.”

그 말을 들은 프리트가 절망적인 표정으로 머리를 흔들며, 저도 모르게 작게 내뱉었다.

“하아, 내게 했던 대답과 같군.”

그 말을 들은 발레아나의 눈이 커졌다.

그녀가 설마 하는 표정으로 프리트에게 물었다.

“오, 오라버니? 설마 벌써 언니에게 청혼이라도 하신 건…… 아니죠?”

발레아나는 굳게 믿고 있었다.

제 오라버니가 그랬을 리 없다고.

‘그래, 결혼이 얼마나 성스러운 일인데. 분명 멋진 이벤트를 신중하게 준비하고 계실 거야.’

정말 그렇게 믿었는데.

“…….”

하지만 프리트는 발레아나의 질문에 말을 잇지 못했다.

그의 표정에는 부끄러움과 당혹감, 자괴감 등의 감정이 복잡하게 뒤섞여있었다.

그런 제 오라버니의 얼굴을 본 발레아나의 눈에 한차례 지진이 일어났다.

그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이미 하셨군요, 청혼.”

“크흠……!”

하지만 아직 희망은 있었다.

분명 제가 모르는 곳에서 엄청나게 로맨틱한 청혼을 했을지도 모른다.

발레아나는 좀 더 자세하게 묻기 시작했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하셨는데요?”

“……더 이상 묻지 마라, 발레아나.”

하지만 그녀는 포기하지 않았다.

‘오라버니가 산수이 언니를 만난 게 언제였더라?’

발레아나는 빠르게 기억을 더듬었다.

그러다 문득 일전의 기억이 떠올랐다.

산수이가 황궁 정원에서 자신과 함께 차를 마시다가, 프리트를 맞닥뜨렸던 바로 그날.

……아냐, 아닐 거야.

“설마 지난번에 황궁에서 산수이 언니가 오라버니의 때를 밀어주던 날? 그날은 아니겠죠? 그쵸?!”

“…….”

당황해하는 프리트의 표정이 이미 모든 걸 말해주고 있었다.

발레아나는 그만 울분을 참지 못하고 소리를 빽 질렀다.

“오라버니이!”

그것은 그녀가 이때껏 제 오라비에게 낸 것 중 가장 큰 목소리였다.

발레아나는 제 눈앞에 있는 것이 이 광대한 제국의 황태자, 피 맛에 미친 놈이라 불리는 전장의 살인마라는 것을 믿을 수 없었다.

‘우리 오라버니께서 이럴 수가!’

분노에 가득 찬 그녀가 큰소리로 내질렀다.

“때 밀다가 청혼하는 미친놈이 세상에 어디 있어요!”

***

황궁으로 향하고 있는 비덴비덴 남작저의 마차 안.

이윽고 창문 너머로 제국의 화려한 황궁이 산수이의 눈에 들어왔다.

‘지난번 방문할 때만 해도 황가하고 함께 일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게다가 다른 일도 아닌 찜질방 건설 때문에 방문하게 되다니.

역시 인생이란 알다가도 모를 것이었다.

제 목욕탕 사업이 퍽 순조롭게 돌아가고 있다는 사실에 희열을 느끼며, 산수이는 마차에서 내릴 준비를 했다.

이윽고 마차가 완전히 정지했을 때, 차창 밖으로 익숙한 실루엣이 보였다.

산수이를 마중 나온 프리트 황태자였다.

그는 평소보다도 곱절은 더 멋지게 차려입은 모습으로, 산수이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성큼성큼 걸어왔다.

마차에서 내리는 산수이에게 프리트가 제 손을 내밀었다.

“드디어 도착했군, 영애.”

“제국의 황태자님을 뵙습니다.”

“우리 사이에 그런 깍듯한 예절은 굳이 필요 없는 것 아닌가?”

그 말에 산수이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우리 사이가 어떤 사이인데요?”

프리트가 그녀를 향해 입꼬리를 비틀며 웃어 보였다.

“그야 청혼한 자와, 거절한 자의 사이?”

“으, 으악! 저하!”

또 그때의 얘기였다.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는 산수이를 보며 프리트가 말을 이었다.

“아, 그대가 지금이라도 생각을 고쳐먹는다면 청혼한 자와 수락한 자의 사이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군.”

자신을 향해 시퍼렇게 이글거리는 프리트의 눈동자를 보며, 산수이는 이번 일정이 순탄치 않을 것임을 직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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