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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 세신사 영애님-48화 (48/150)

48화.

얀피르의 첫 예약 손님이 도착하기로 한 날.

그는 산수이의 요청대로 일전에 사용했던 검은 비단 끈을 제 눈에 칭칭 동여맸다.

그러고는 하의만을 걸친 반라의 모습으로 목욕탕으로 향했다.

그렇게 얀피르가 여탕 문을 열고 입장하던 순간.

그 안에 있던 모든 여성 고객들의 시선이 그쪽으로 쏠렸다.

“……!”

물론 그건 얀피르가 남성이라 그런 것이 아니었다.

사전에 산수이의 설명이 있었기에, 안대를 쓴 남성 세신사가 들어올 거란 건 미리부터 알고 있었다.

게다가 그의 출중한 미모 역시 이미 사교계에 어느 정도 소문이 나 있던 터라 대충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실제로 보니 이건 상상 이상이잖아……!’

도대체 저게 인간에게서 나올 수 있는 몸인가? 사람이라기보단 완전 걸어 다니는 조각상이 아닌가.

그녀들은 이제 목욕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는 듯, 오로지 두 눈으로 얀피르의 움직임만을 좇을 뿐이었다.

게다가 눈을 가린 채 걸어오는 그의 모습은 고객들로 하여금 복잡 미묘한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그때였다.

누군가 벌떡 일어나 얀피르의 발 앞에 놓여있던 물바가지를 치우기 시작했다.

호다닥—

그 고객은 제 행동에 자기가 더 놀란 모습이었다.

‘엇, 나도 모르게……!’

혹시라도 그의 발이 바가지에 걸려 넘어질까 봐, 무의식중에 몸이 먼저 튀어 나가 버린 것이다.

하지만 의도치 않게도 그 때문에 얀피르를 좀 더 가까이서 볼 수 있었다.

특히 그의 탄탄하기 그지없는, 잘 관리된 복근을.

그때 갑자기 다른 고객이 어디선가 대걸레를 들고 와 때밀이실 앞에 고여있던 물기를 서둘러 닦기 시작했다.

슥삭슥삭—

그러면서 눈은 오직 얀피르를 향해있었다.

“……!”

그러자, 이제껏 온탕 안에 숨어서 얀피르를 지켜보고만 있던 고객들이, 한둘씩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그가 가려는 모든 곳을 청소하기 시작했다.

‘우리 세신사님, 부디 넘어지지 마시고 꽃길만 걸으소서……!’

그렇게 얀피르는 아무 장애물도 만나지 않고 무사히 때밀이실 앞까지 걸어갈 수 있었다.

‘뭐야, 왜 계속 청소하는 소리가 나지?’

도무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설령 걷던 도중 무언가 발에 차였다 해도 그에게는 별문제 되지 않았겠지만.

아무튼 얀피르는 때밀이실 문을 열며, 대리석 판에 엎드려 있는 고객을 향해 외쳤다.

“예약 번호 1번 맞으시죠?”

그 고객은 얀피르의 모습을 보자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당신이 그 새로운 세신사라던 얀피르 경이시군요? 제 이름은……!”

“자기소개는 안 하셔도 되고요. 1번 맞아요, 아니에요?”

“마, 맞긴 한데.”

“그럼 됐어요. 시작합니다.”

이후에도 얀피르는 일절 대화 없이 연신 때만 밀어댔다.

슥삭슥삭—

대리석 판 위의 고객은 얀피르와 대화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으나.

“저기, 혹시 답답하시면 그 비단 풀어버리셔도 되는데.”

“안 답답해요.”

어떻게 해도 한 마디 이상 이어지는 대화를 이끌어 낼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때밀이가 모두 끝날 때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오늘 때를 너무 잘 밀어주셔서 보답을 하고 싶은데, 언제 시간 되시면 저와 함께……!”

얀피르는 대답 대신 그녀를 향해 손뼉을 짝짝 쳤다.

“야, 얀피르 경?”

“2번 고객님 오실 때 다 됐으니, 그만 나가주시죠.”

그 말을 들은 고객은 너무 어이가 없어 그저 입만 쩍 벌리고 있을 뿐이었다.

“뭐 하세요? 시간 없습니다. 빨리빨리!”

그렇게, 하루의 예약이 끝날 때까지 그 누구와도 대화를 트지 않은 얀피르였다.

하지만 원래 까칠한 남자가 더 끌린다고.

그날 이후로 얀피르의 앞에 도착한 서신은 평소보다 두 배 가량 늘어났다.

심지어 그게 끝이 아니었다.

때밀이실이라는 무대 위의 얀피르에게 반한 고객들은, 이제 그의 무대 밖 모습을 궁금해하기 시작한 것이다.

평상복을 입은 얀피르 경은 어떤 모습일까?

햇빛 아래에서 그를 보면 더 멋있을까?

그리고 그들이 가장 궁금해하는 것.

비단 끈을 풀어버린 얀피르 경의 진짜 얼굴은 어떻게 생겼을까……!

자신들의 선망의 대상인 얀피르가, 바로 산수이의 호위 기사일 거라곤 전혀 예상하지 못하는 고객들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얀피르는 늘 자신의 존재감은 지운 채, 그저 산수이의 곁에서 그림자처럼 따라다녔으니까.

아무튼 얀피르에 대한 동경으로 가득 찬 수많은 영애들이 남작령으로 모여들기 시작했고.

마침내 태양 아래서 찬란하게 빛나는 그의 야성적인 황금빛 눈동자를 보자.

그만 너도나도 사랑에 빠져버리고 만 것이다.

‘세상에……! 내가 상상하던 것보다 더 멋있잖아!’

맨얼굴까지 확인했겠다.

이제 그의 폭주하는 인기를 막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녀들은 산책을 가장하여 얀피르에게 다가가 거침없이 말을 걸기 시작했다.

“야, 얀피르 경! 어쩜 이런 우연이. 저 기억하시죠? 일전에!”

하지만 얀피르는 전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누구시죠?”

“어머 맞다, 호호호. 그땐 눈을 가리고 계셨으니 제 얼굴을 기억하지 못하시겠네요. 저는 그때 예약 번호 75번이었던…….”

“아, 예, 그렇군요. 그럼 전 바빠서 이만.”

철벽도 그런 철벽이 없었다.

수많은 영애가 남작령에 출석 도장을 찍듯 다녀갔지만, 그와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눠봤다는 영애는 단 한 명도 없었다.

그 와중에 그녀들은 이제 얀피르 보다도 서로의 얼굴을 더 자주 보게 되었다.

“어머! 또 뵙네요, 영애님!”

“저 방금 광장에서 얀피르 경 마주치고 오는 길이에요! 어서 뛰어가 보세요!”

“꺄악! 귀한 정보 나눔 감사해요!”

분명 처음에는 그런 사소한 대화로 시작하던 일회성 만남들이었지만.

시간이 갈수록 그들의 모임은 점점 더 견고하게 조직화되어 갔다.

그녀들은 이제 정기적으로 남작령의 한 카페에서 모여, 자신들이 지금까지 알아낸 얀피르의 신상 정보를 공유하기 시작했다.

“얀피르 님은 육포를 좋아하시는 듯해요. 얼마 전 육포를 질겅질겅 씹으면서 돌아다니시는 모습을 제가 두 눈으로 똑똑히 봤답니다!”

“어머나, 세상에. 귀여워라!”

사각사각.

그녀들의 얀피르 노트에 ‘육포’라는 단어가 추가로 기재되었다.

게다가.

“오셨습니까, 회장님!”

카페의 문이 열리며 화려한 옷차림의 영애 한 명이 주황색 머리를 휘날리며 들어섰다.

그러자 다른 영애들이 일제히 일어나 예를 갖췄다.

그녀의 이름은 사생크 패니.

공작가 다음가는 부유한 백작가의 영애였다.

그녀가 고개를 치켜들고 걸어오자, 한 영애가 재빨리 의자를 빼 그녀의 시중을 들었다.

사생크 패니는 커다란 테이블 위에 제가 가져온 두루마리를 돌돌 풀어 보였다.

“회, 회장님. 이건……!”

사생크 패니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바로 얀피르 경의 시간표.”

그녀가 두루마리의 한 부분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곧 얀피르 님이 월차를 쓰신다 하니, 다음 소집 장소는 이쪽으로 하죠. 이곳에서 특히 산책을 많이 하신다 들었습니다.”

“역시, 우리 회장님!”

영애들은 감동의 눈물을 글썽이며 존경 어린 눈빛으로 사생크 패니를 우러러보았다.

말하자면, 제국 최초 아이돌 팬클럽의 탄생이었다.

***

이렇게 하루가 다르게 치솟는 얀피르의 인기에 대한 소문은, 얼마 지나지 않아 자연스레 산수이의 귀에도 들려오게 되었다.

제국의 소녀들을 주축으로 한 얀피르 소모임, 그러니까 한마디로 팬클럽이 생겼다는 것이다.

그 소모임 이름은 엄청나게 개성도, 성의도 뭣도 없는 ‘얀사모’였다.

그 이름을 들은 산수이가 경악하며 외쳤다.

“얀사모……? 설마 얀피르를 사랑하는 모임인가요?!”

물론 산수이는 사교 모임에 잘 참석하지 않기 때문에, 이 모든 얘기는 휘온을 통해 듣고 있었다.

남작저 응접실에서 함께 차를 마시고 있던 휘온이 산수이에게 대답했다.

“뭐, 거의 근접하게 맞히긴 했군요.”

“얀사모 뜻이 그게 아니에요? 그럼 뭔데요?”

“하아, 그것이…….”

차마 입에도 담기 싫다는 듯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휘온이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얀피르 사…… 크흠! 사, 사모합니다, 라고 하더군요.”

그게 그거잖아.

산수이가 불만스러운 듯 중얼거렸다.

“이름을 지으려면 좀 예쁘게나 짓지. 아이돌 팬클럽 이름이 얀사모가 뭐야, 얀사모가. 뭔 정치인도 아니고.”

“……예?”

휘온은 가끔씩 산수이가 알 수 없는 말들을 많이 한다고 느꼈다.

그녀가 얼른 되받아 말했다.

“아, 그냥 소모임 이름이 영 별로라고요. 나 참, 작명 센스가 없어도 너무 없어서.”

투덜거리는 산수이를 향해, 휘온이 이상한 듯 물었다.

“확실히 지나치게 투박한 이름이긴 합니다만, 이게 그렇게까지 화를 낼 일인지는 모르겠군요.”

“화를? 제가요?”

전혀 몰랐다는 듯, 눈을 크게 뜨는 산수이를 향해 휘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저는 화낸 적이 없는데요?”

“아까 산수이 그대가 소모임 이름을 들었을 때부터, 기분이 안 좋아 보였습니다만.”

“그, 그야…… 얀피르는 우리 목욕탕의 간판스타잖아요! 기왕 이름 지을 거, 세련되게 지으면 좀 좋아요? 그럼 목욕탕 홍보도 더 잘 될 거고.”

그렇게 말하면서도 산수이는 지금 제가 아무 말이나 지껄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 그러게? 나 왜 이렇게 예민하게 굴고 있지?’

하지만 그녀의 심경 변화를 먼저 알아챈 휘온이 곧바로 말을 이었다.

“그럼, 소모임 이름이 사업성이 떨어져서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겁니까.”

“마, 맞아요! 바로 그거예요.”

“……그렇군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휘온은 마음이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예감이 좋지 않은데.’

어떻게 해야 할까.

휘온은 열심히 제 머리를 굴렸다.

얀피르와의 도원결의가 자꾸 떠올랐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딴 게 아니었다.

‘앞으로 두 사람이 함께 있는 시간이 늘어나선 안 되겠는걸.’

그때였다.

응접실 문이 벌컥 열리며 들어온 건, 흐느적거리는 얀피르였다.

“……?”

평소와는 다른 그의 모습에 휘온과 산수이의 눈이 일제히 그쪽으로 쏠렸다.

저 체력 좋던 얀피르가 웬일이란 말인가.

얀피르가 낮게 신음하며 힘없이 걸어왔다.

무언가에 단단히 지친 듯한 모습이었다.

“크르르르…….”

그는 산수이 옆에 놓인 의자에 거의 쓰러지듯 철퍼덕 주저앉았다.

산수이가 놀라 물었다.

“얀피르, 너 무슨 일 있어? 상태가 왜 이래?”

그가 골골대며 산수이를 향해 말했다.

“주인, 미안하지만 나 항복이야. 내일부턴 남탕으로 보내 줘.”

그 말에 산수이는 저도 모르게 웃어버렸다.

“하긴, 여탕에 예약 명단이 좀 많긴 했지?”

하지만 얀피르는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아니, 때 미는 건 별로 안 힘들어. 문제는 그게 아니라…… 하아.”

그가 길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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