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국의 세신사 영애님-47화 (47/150)

47화.

제국 사교계의 핵심인 미모세 백작 부인이 주최하는 귀부인들만의 티 파티.

그곳에 참석한 수많은 귀부인들 중에는 일전에 얀피르에게서 때를 밀고 간 뉴텔 자작 부인도 포함되어 있었다.

기다란 테이블에서 여러 귀부인들과 함께 앉아 차를 마시던 그녀가 모두를 향해 차분한 목소리로 화두를 던졌다.

“제가 얼마 전 비덴탕에 방문해 때를 밀었는데 말입니다. 글쎄, 그곳에 새로운 세신사가 들어왔더군요.”

“어머, 어떤 사람이던가요?”

“정말이지, 너무나 아름다웠습니다. 물론 때밀이 실력도 뛰어났고요.”

그 말을 들은 귀부인들이 놀라 답했다.

“어머, 비덴비덴 영애도 미모로는 빠지지 않잖아요? 대체 어떤 영애가 새로운 세신사가 되었길래, 자작 부인께서 이리 극찬을 하시는지 궁금하군요.”

하지만 뉴텔 자작 부인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그 세신사는 영애가 아닙니다.”

“그럼 평민 출신의 세신사인가 보죠?”

“아니, 그것도 아닙니다. 그 세신사는…… 남성입니다.”

그 말을 들은 모든 귀부인들이 충격에 빠져 술렁였다.

“나, 남성 세신사라니요……! 어, 어찌 귀부인께서 남성에게 때를 미셨단 말입니까?!”

“어머, 듣기 부끄러워라……!”

남성 세신사라니.

귀부인들은 저마다 벌게진 얼굴을 부채로 가리며 연신 부채질을 해 댔다.

뉴텔 자작 부인이 서둘러 대답했다.

“저 역시도 처음엔 당황스러웠죠. 하지만 사내라 그런지 역시 힘이 장사라, 산수이 영애가 밀어주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시원함이 있었답니다.”

“그, 그래요……?”

귀부인들은 침을 꿀꺽 삼켰다.

하지만 그 와중에 유독 눈을 빛내는 자가 있었다.

바로 테이블의 가장 상석에 앉은 미모세 백작 부인이었다.

‘남성 세신사가 들어왔다고?’

그녀는 방금 전의 이야기를 듣곤 깜짝 놀랐다.

분명 비덴탕은 혼탕을 금지했다 들었는데.

그래서 도통 흥미가 생기지 않아 여태껏 일절 방문하지 않고 있었던 거였다.

하지만 이러면 얘기가 달랐다.

‘그러니까, 그곳에 가면 사내놈이 때밀이를 해 준단 말이지……?’

게다가 그냥 일반 남성도 아니고, 너무나 아름다운 자라고 하지 않나.

미모세 백작 부인은 그 말의 진위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서라도 조만간 비덴탕에 방문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한편 티 파티장에선 남성 세신사라는 말에 얼굴을 붉히며 체면을 내세우던 귀부인들이.

자신들의 저택으로 돌아가서는 급하게 사용인들을 불러 명을 내렸다.

“빨리, 지금 당장 비덴탕에 최대한 빨리 때밀이 예약을 넣어라! 무엇 하고 있느냐……!”

당연히 얀피르를 세신사로 콕 집어 지명해서 말이다.

***

밀려드는 때밀이 예약에 산수이는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이제는 황태자가 굳이 근위병들을 억지로 보내주지 않아도 남성 고객들이 줄을 서고 있었다.

기존에 때를 밀고 간 사람들이 알아서 입소문을 내준 덕분이었다.

그런데 이 와중에 귀부인들의 때밀이 예약까지 폭발적으로 늘어나 버렸다.

흥미로운 건, 대다수의 부인들이 공통적인 요청을 해 왔다는 거였다.

산수이가 아닌, 새로운 세신사에게 때를 밀어보고 싶다고.

집무실에서 예약자 명단을 작성하고 있던 산수이는, 같은 요구 사항이 적힌 서신들이 계속해서 쏟아지자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새로운 세신사라면 설마 얀피르를 말하는 건가?’

지난번 뉴텔 자작 부인이 비덴탕을 방문했을 때, 얀피르가 그녀의 때를 퍽 잘 밀어드렸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날 얀피르가 일일 대타로 뛰었던 게 이렇게 파격적인 고객 끌어오기로 이어질 줄은 몰랐다.

예약 리스트에 끝없이 적혀있는 얀피르에 대한 언급을 보며, 산수이는 묘하게 불편한 감정이 일렁임을 느꼈다.

“근데 내 기분이 왜 이렇게 더럽지……?”

산수이가 손톱을 잘근 씹으며 되뇌었다.

‘고객 뺏기는 기분 같은 건가? 아, 몰라. 그만 생각할래.’

이런 유치한 생각을 할 시간에 가서 때밀이 연습이나 하자며, 그녀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집중이 잘 안 돼. 남은 서신들은 집사한테 회신해달라고 하자.’

하지만 방문을 나서면서도 생각이 끊이질 않았다.

여성 고객님들이 불편하시지만 않다면 얀피르를 세신사로 배정해 드리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제 불편한 감정은 둘째 치더라도, 정작 문제는 따로 있었다.

현재 비덴탕은 남탕과 여탕으로 분리된 상태라 각각의 구역은 이성 간의 출입이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었다.

그런데 지금처럼 고객님들이 특정 세신사를 지목하게 되면 문제가 발생할 터였다.

산수이가 남탕을 가로질러 들어가야 하거나.

반대로 얀피르가 여탕을 들어가야 한다거나.

‘내 실수다. 이렇게 갑자기 고객이 늘어날 경우도 대비했어야 했는데. 조만간 휘온을 만나서 상의를 좀 해봐야겠는걸.’

하지만 일단 급한 불은 끄고 봐야 했다.

얀피르가 예약 고객님들의 때를 밀어드리면서도, 목욕만 즐기시는 다른 여성 손님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게 할 방법이 뭐가 있을까.

그때 산수이의 머릿속을 번뜩 스쳐 가는 아이디어가 있었다.

‘이거다!’

***

산수이가 손에 무언가를 감싸 쥔 채, 얀피르의 방 앞을 찾아갔다.

하지만 그녀가 방문을 두드리기도 전에, 빠른 속도로 문이 벌컥 열리며 얀피르가 모습을 드러냈다.

“주인!”

저를 찾아온 산수이를 본 얀피르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녀가 이렇게 얀피르의 방에 찾아온 건 실로 드문 일이었다.

보통은 그가 먼저 산수이를 찾아다니는 편이었고.

대체로 산수이는 일을 하느라 저택에 머물지 않을 때가 더 많았으니까.

한눈에 딱 봐도 티가 날 정도로 기뻐하는 얀피르를 향해, 산수이가 다짜고짜 물었다.

“얀피르, 드래곤은 인간과는 다르게 오감이 뛰어나겠지?”

“오감? 그렇긴 하지.”

“그럼 그중 하나쯤 차단되어도, 나머지 감각들이 알아서 잘 대체해 줄 거야, 그치?”

얀피르가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당연하지. 근데 갑자기 그건 왜?”

“그럼 나, 한번 실험해 봐도 돼?”

“실험……?”

아까부터 도통 알 수 없는 말만 늘어놓는 산수이였다.

하지만 그녀의 표정이 평소보다 더 심각해 보여서, 얀피르는 기꺼이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든지.”

그러자 여태껏 뒷짐을 지고 있던 산수이의 손에서 갑자기 검은색 비단 끈이 튀어나오는 것이 아닌가.

“……?”

얀피르가 그 물건의 용도를 채 묻기도 전에, 산수이는 재빨리 얀피르의 등 뒤로 다가가 그의 눈을 끈으로 가려버렸다.

“주, 주인? 지금 뭐 하는……!”

얀피르의 뒤통수에서부터 미끈한 목을 타고 어깨까지 하늘하늘하게 내려오는 비단 끈을 보는 순간.

산수이는 저도 모르게 제 입을 틀어막았다.

‘으악. 얜 가려놨는데 왜 더 야한 거야!’

하지만 이건 일이다. 일을 해야 한다.

‘정신을 집중하자.’

산수이가 심호흡을 한 후 얀피르에게 말했다.

“얀피르, 우선 청력을 실험해 볼 거야. 내가 박수를 치는 쪽으로 찾아와 봐.”

얀피르가 허공에 대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알겠어.”

산수이가 빠르게 자리를 옮기며 생각했다.

‘잘 찾아올 수 있으려나……?’

그렇게 산수이는 방의 한쪽 구석으로 향했다.

그리고 마침내 멈춰 선 그녀가 박수를 치기 위해 뒤돌아보던 순간.

“!”

산수이는 어느새 제 코앞까지 와 있는 얀피르를 보고 깜짝 놀랐다.

“으, 으악!”

눈을 가린 얀피르가 그녀를 향해 씩 미소지었다.

“찾았다.”

“아, 아직 박수는 치지도 않았는데!”

“주인 숨소리만 들어도 어디 있는지 알겠던데?”

이런 미친 청력을 봤나!

놀라는 산수이를 향해 얀피르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산수이가 쿵쾅거리는 가슴을 애써 진정시키며 말을 이었다.

“그, 그럼 이번엔 후각 실험이야. 향수 냄새만 맡고 날 찾아와야 돼, 얀피르. 그러니까 귀도 막아 줄래?”

그가 또다시 끄덕이며 제 손으로 귀를 막았다.

산수이가 방 안을 두리번거렸다.

이번엔 진짜 어려운 문제를 내고 말겠다는 다짐을 하면서.

‘바로 저기다.’

산수이는 최대한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숨소리도 안 나게 어디론가 걸어갔다.

휙.

그녀는 혹시 몰라 얀피르가 있는 곳을 뒤돌아보았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엉뚱한 곳을 향해 서 있을 뿐이었다.

살금살금.

그렇게 산수이가 멈춰선 곳은, 바로 커튼의 뒤쪽.

열려있는 창문 사이로 불어오는 서늘한 바람에, 새하얀 커튼이 하늘거리며 나부끼고 있었다.

‘후후후. 향수는 창밖에다 대고 뿌릴 거고, 커튼으로 한 겹 가려져 있기까지 하니까 이번엔 좀 어려울걸?’

그렇게 산수이가 속으로 킥킥대면서, 창밖을 향해 향수를 분사하려던 순간.

꽈악—

갑자기 그녀의 등 뒤에서 굵은 팔뚝이 튀어나왔다.

“잡았다.”

“꺄, 꺄악!!”

어느새 그녀의 뒤에 선 얀피르가, 커튼 속 산수이를 와락 끌어안았다.

산수이가 그의 품에서 벗어나려고 하면 할수록, 커튼에 몸이 더욱더 엉켜갔다.

그가 쯧쯧거리며 말했다.

“주인 안 되겠네. 창밖에다 뿌리는 건 반칙이지.”

“그, 그런데 어떻게 찾았어?”

“그야…….”

얀피르가 커튼 너머의 그녀에게 속삭였다.

“이쪽에서 네 살냄새가 나니까.”

으아아악!

산수이는 뒤늦게 깨달았다.

지금 자기가 얼마나 위험한 실험을 하고 있는 거였는지.

하지만 뭐라 대꾸하기도 전에, 얀피르가 커튼을 확 젖히고는 그 안쪽으로 들어왔다.

‘허, 허억!’

어디론가 피해 보려 해도, 창문이 열려있는 탓에 더는 뒷걸음질 칠 수도 없었다.

그때 얀피르가 재빨리 한 팔을 뻗어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이리 가까이 와, 주인. 창문 열려있어서 위험해.”

그렇게 산수이는 졸지에 얀피르와 얇은 커튼을 함께 뒤집어쓴 채, 꼼짝없이 그의 품 안에 갇힌 꼴이 되었다.

두 사람의 가슴이 동시에 뛰었다.

쿵쾅쿵쾅.

얀피르가 그녀에게 얼굴을 가까이 들이댔다.

분명 가려져 있는데도, 그의 황금색 눈동자가 천 너머를 꿰뚫어 그녀를 응시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게다가 안대 아래로 높게 솟아오른 얀피르의 콧대와 붉은 입술이 저와 가까워지자 산수이는 자신도 모르게 침을 꼴깍 삼켰다.

‘미, 미쳤나 봐!’

그때 얀피르의 입술이 헤벌어지며 조금씩 달싹였다.

“그런데 주인.”

“으, 응?!”

“이거 왜 하는 거야? 설마, 이런 취향이었어……?”

무슨 취향?

산수이의 과부하 걸린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기도 전에, 얀피르가 난감하단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으음. 물론 난 보면서 하는 게 더 좋지만, 그래도 주인이 원한다면 뭐든 맞춰 줄 수 있…… 아야.”

그제야 정신 차린 산수이가 정색하며 그의 등짝을 때렸다.

“취향은 무슨 취향! 하여간 이 변태!”

“내가 왜 변태야! 먼저 내 눈 가린 건 주인이잖아!”

“그건! 네가 여탕에 때 밀러 들어갈 때 필요하니까 실험해 본 거고!”

“뭐야, 그런 거였어?”

얀피르가 실망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쳇, 좋다 말았네.”

“좋긴 뭐가 좋아! 아무튼, 눈 가려도 별문제 없는 거 같으니까 됐어.”

그렇게 제 품에서 빠져나가는 산수이를 향해, 얀피르가 아쉬운 듯 물었다.

“……벌써 가게?”

“응. 실험은 다 끝났으니까.”

어느새 저만치 떨어진 산수이가 그를 향해 빠르게 말했다.

“아무튼, 오늘 고생 많았어. 도와줘서 고마워.”

그렇게 얀피르에게 한번 웃어주고는, 방문을 닫고 나간 게 전부였다.

혼자 남겨진 얀피르는 비단 끈을 풀어버리곤, 답답한 듯 제 머리를 마구 헝클어뜨렸다.

‘도대체가, 저 여자는 목욕탕 말고는 나한테 관심도 없지.’

얀피르는 그 자리에서 주르륵 미끄러져 주저앉아 버렸다.

교제도, 결혼도 싫다는 그녀의 곁에 머물 수 있는 방법이, 지금은 이런 것밖엔 떠오르질 않았다.

산수이를 위해, 그녀가 지고 있는 짐을 나눠서 들어주는 것.

그게 얀피르가 산수이를 사랑하는 방식이었다.

그는 산수이가 떠나간 쪽을 바라보며 혼자 한숨 쉬었다.

‘하는 수 없지. 그래도 네가 좋아 죽겠는 걸 어떡해.’

결국 더 좋아하는 쪽이 져 줘야지, 별수 있나.

얀피르는 저 문 너머로 산수이의 심장이 저 때문에 얼마나 쿵쾅거리는지는 미처 알아채지 못한 채, 그렇게 투덜거리고만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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