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국의 세신사 영애님-45화 (45/150)

45화.

산수이에게 갑작스럽게 전해진 소식은 바로 뉴텔 자작 부인에 관한 것이었다.

유모의 말에 의하면, 이제는 비덴탕의 단골 고객이 된 그녀가, 근처를 지나던 도중 여독을 풀고 싶어 예약 없이 때를 밀러 왔다는 것이었다.

“이미 오전에 황태자 저하의 예약이 있다 말씀드렸더니 바로 수긍하시긴 했습니다만, 매우 아쉬워하시는 눈치셨습니다.”

산수이가 난감한 표정으로 말했다.

“하는 수 없네요. 제가 가서 직접 인사라도 드리는 수밖에요.”

그때, 곤란해하는 산수이의 뒤로 갑자기 얀피르가 나타났다.

“주인.”

얀피르는 산수이의 눈앞에 자신의 얼굴을 최대한 가까이 들이댔다.

그가 얼굴을 흔들자 칠흑 같은 머리카락이 함께 따라서 살랑살랑 움직였다.

“곤란한 상황인 거야?”

눈웃음을 살살 치며 자신에게 자꾸만 가까이 다가오는 얀피르를 보자 산수이는 어쩐지 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분하면서도 잘생긴 건 잘생긴 거였다.

‘진짜 이 자식이……! 아, 난 왜 얼굴이 취향이라는 소릴 해 가지고!’

동요하는 산수이를 보고 얀피르가 미소 지었다.

“나 시키면 되잖아. 내가 대신 고객님의 때를 밀어드리면 되지.”

“갑작스럽게 잡힌 일정인데, 괜찮겠어?”

“널 도와주려고 배운 기술인데, 당연한 거 아냐?”

산수이는 얀피르의 손을 덥석 잡으며 환하게 웃었다.

“진짜 고마워! 그럼 일단 나랑 같이 가서 부인께 여쭤보자. 남성 세신사를 불편해하실 수도 있으니까.”

“그래.”

두 사람은 몰랐다.

뉴텔 자작 부인에게 얀피르를 보내는 것이 향후 귀족 사회 부인들 사이에서 어떤 파급효과를 불러일으키게 될지 말이다.

산수이는 자작 부인에게 양해를 구했다.

“뉴텔 자작 부인. 혹시 남성 세신사도 괜찮으시다면 지금 바로 때를 미실 수 있는데, 어떠실까요……?”

그 말을 들은 자작 부인은 크게 당황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남성 세신사라니.

하지만.

“저희 비덴탕의 새로운 남성 세신사, 얀피르 경입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부인.”

그 남성 세신사의 모습을 본 뉴텔 자작 부인은 모든 불만이 눈 녹듯 사라졌다.

넓은 어깨와 탄탄한 근육, 게다가 저 굵은 팔로 때를 민다면.

분명 산수이에게 세신을 받는 것보다 더 시원할 게 틀림없었다.

게다가 그의 용모는…….

‘저, 정말 고운 사내로구나!’

그렇게 만족해하는 고객님의 모습을 보며, 산수이는 얀피르에게 신신당부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얀피르, 여성 고객님은 지난번 휘온 때처럼 아프게 밀어드리면 안 돼. 알았지? 섬세하게.”

“걱정 마, 대신…….”

얀피르가 산수이에게 또다시 제 얼굴을 들이댔다.

“주인 너도, 나랑 한 약속 지켜.”

“약속?”

얀피르가 단호하게 말했다.

“혹시라도 황태자 놈이라고 공짜로 때 밀어주거나 그러기만 해봐?”

“어…… 어?!”

산수이는 당황했다.

그 순간 일전에 공작저에 가서 휘온의 때를 공짜로 밀어준 일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뭐지……? 왜 바람피우다 걸린 듯한 기분이 드는 거지?!’

하지만 그 사실은 절대로 얀피르가 알게 해서는 안 된다.

아니, 프리트까지 그냥 셋 다 몰라야 한다.

또다시 세 남자가 싸웠다간 정말 전쟁이라도 날지 몰랐다.

그러나 심하게 동요하는 산수이의 눈을 본 얀피르는 이미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후였다.

“설마 너…… 오늘 황태자 놈한테 무료 서비스 해주려고 했던 거야?”

“아니야! 아니! 저, 절대 안 그럴 거야! 네버!”

“네버는 또 무슨 소리야……. 아무튼, 약속했다?”

“응응.”

그렇게 뉴텔 자작 부인과 함께 떠나가는 얀피르를 보며 산수이는 뒤늦게 정신이 들었다.

“근데 내가 왜 남의 때 미는 걸 가지고 얀피르 허락을 받고 있어……?”

아니, 내가 이 목욕탕 주인인데.

공짜로 밀어주든 아니든 내가 정하는 거지, 왜?

산수이는 또다시 저 잔망스러운 드래곤에게 말려들었다는 기분이 들었다.

***

산수이는 탈의실에서 미리 준비해 둔 때밀이 전용복으로 갈아입었다.

그것은 100% 순면으로 제작된 반팔 티셔츠와 반바지, 상하의 세트였다.

사실 마음 같아서는 답답한 소맷단을 모두 잘라버리고, 민소매에 핫팬츠로 만들고 싶었다.

하지만 그랬다가는 유모가 목이라도 맬 기세였다.

어디 결혼도 안 한 처녀가 그런 남세스러운 옷을 입고 활보하냐고 혼났다.

‘아니 혼탕 문화도 있었으면서 왜 그건 안 되는데.’

아무튼 간에 결혼하지 않은 여성들에겐 참으로 각박한 세상이었다.

그래도 아쉬운 대로 바지라도 만들어 입을 수 있으니 한결 편했다.

무릎까지의 길이라 조금 답답하긴 했지만, 원피스보다야 나았다.

‘원피스는 정말…… 때 밀기에 최악의 옷이었거든.’

그렇게 생각하며 산수이는 거울 앞에서 한 바퀴 돌아보았다.

연분홍색 상하의가 꼭 찜질복 같아 보이기도 했다.

그때였다. 그녀의 머릿속에 또다시 새로운 사업 아이템이 떠오른 것은.

‘응……? 내가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자신의 옷을 바라보던 산수이가 눈을 번쩍였다.

이따가 슬쩍 황태자한테 말을 꺼내봐야겠다고 생각하며, 그녀는 탈의실을 나섰다.

***

한편, 프리트는 비덴탕 내의 대리석 판에 누워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흐음.”

무언가 불만스러웠는지, 그의 미간은 잔뜩 찌푸려져 있었다.

사실 프리트는 비덴탕의 때밀이 요금표를 보고 한차례 경악한 상태였다.

‘화, 황족 1만 에우로?!’

물론 결코 돈이 없어서 놀란 게 아니었다.

카데베르 제국은 매우 부유했으니.

다만 그는 이 불합리한 가격이 꼭 산수이가 저에게 긋는 선 같다고 느껴졌다.

마치 산수이가 제 앞에 서서 철벽을 치며 ‘너 이래도 나한테 때 밀러 올래?’라고 말하는 것만 같았다.

물론 산수이가 때밀이 요금표를 작성한 것은 그를 만나기도 훨씬 전의 일이었고.

딱히 프리트를 저격해서 책정한 금액도 아니었다.

그저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고자 했을 뿐.

하지만 어찌 됐건 결과론적으로 프리트에겐 저 금액이 마치 ‘네 때는 밀어 주기 싫어.’라는 뜻인 것처럼 느껴졌다.

게다가.

‘그럼 대체 그 얀 뭐시기라는 짐승 놈한테는 얼마를 받고 때를 밀어주는 거지?’

그자는 귀족이 아닌 듯했으니, 설마 고작 10에우로?!

이럴 수는 없었다.

안 그래도 두 남자가 신경 쓰여 죽겠는데.

프리트에게는 마치 때밀이 가격이 산수이의 마음과 반비례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렇게 상념에 잠겨있던 찰나, 산수이가 때밀이실로 들어왔다.

“황태자 저하, 때를 밀어드리러 왔습니……?”

하지만 프리트는 다른 고객들과는 다르게 마사지 베드에 엎드려있지 않았다.

잔뜩 불만스러운 표정의 그가 베드 위에 걸터앉은 채 산수이를 바라보았다.

“저하, 어디 불편하신 데라도 있으신지요?”

혹시 일전의 불면증이 다시 재발되기라도 한 걸까.

그렇게 산수이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에게 다가가던 찰나.

마침내 프리트가 입을 열었다.

“산수이 남작 영애.”

“예, 저하.”

“해도 너무하는 거 아닌가?”

“무엇이 말씀이십니까?”

프리트가 무언가를 고갯짓으로 가리켰다.

그가 가리킨 벽면에는 때밀이 요금표가 붙어있었다.

하지만 산수이는 고개를 갸웃할 뿐이었다.

“요금표에 무슨 문제라도……?”

“정말로 몰라서 물어?”

그가 억울하다는 듯 외쳤다.

“어째서 황족에게는 때밀이 요금을 1만 에우로나 받는 거지?”

“예에?”

산수이는 크게 당황했다.

“다른 분도 아니고, 제국의 황태자님께 요금 타령을 듣게 될 줄은 몰랐네요.”

“내가 지금 고작 때밀이 요금이 비싸다고 불평하는 걸로 보여?”

“네, 그렇게 보이는데요.”

“어째서 나와 휘온의 요금 차이가 두 배나 되냔 말이야!”

산수이는 머리가 지끈거렸다.

“진정하세요, 저하. 황족이 저하 한 분만은 아니지 않습니까?”

“발레아나는 무료로 밀어준다고 들었는데.”

“그, 그야 그렇지만.”

“게다가 황제 폐하께선 황실 목욕탕 외엔 출입하지 않으시고.”

물론 그들 말고도 공식적으로 황족은 한 명이 더 있었지만.

돌아가신 자신의 모친 대신 황후의 자리에 오른, 그 끔찍한 여자 말이다.

하지만 그녀는 허영심이 강해 이런 대중목욕탕에 출입할 리 만무했다.

그러니 결국 저 미친 금액을 지불하고 때를 밀어야 하는 사람은.

“이 제국에 공작 작위를 가진 자라곤 휘온 놈 하나뿐이고, 남은 황족이라곤 나 하나란 걸 정말 몰랐다고 하지는 않겠지?”

저게 실명만 거론되지 않았을 뿐이지, 대놓고 저격한 거랑 뭐가 달라!

그 말을 듣던 산수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 그러게요?”

“알았다면 당장 수정…….”

“하지만요, 저하. 그렇다 해도 저하의 때밀이 요금만 할인해드릴 순 없습니다. 저도 먹고살아야지요.”

“그게 무슨 소리야, 영애. 내 때밀이 요금을 깎아달라 할 생각은 애초부터 없었어.”

“그러면요?”

“휘온 놈 가격표를 올려.”

“예에?!”

너무나 졸렬한 방안에 산수이는 할 말을 잃었다.

하지만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그리고 아까 그 세신사 놈 말이야.”

“얀피르 말씀이세요?”

“그래, 얀피른지 뭔지 하는 그놈. 그놈한테는 설마 정말 10에우로만 받고 있는 거야?”

“아뇨, 얀피르를 포함한 남작저 식구들은 모두 무료로 때를 밀어드리고 있는데요?”

“뭐, 무료로?!”

프리트의 얼굴이 잔뜩 구겨졌다.

“그럼 당장 그놈 요금부터 올려!”

“예? 아니 뭐 대체 얼마나 올리란 말씀이세요?”

“휘온과 그 얀피르란 놈, 둘 다 나와 동일한 가격으로 올리라고.”

“황족 요금을 적용하라고요?!”

황족의 때밀이 값 1만 에우로.

한마디로 둘 다 때 한 번 미는 데 코리안 머니 천만 원을 내게 하라는 소리였다.

산수이가 소리쳤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말씀이세요!”

“황태자의 명령이다.”

“아니, 이러시는 법이 어디 있어요?”

하지만 그는 막무가내였다.

산수이는 프리트를 달래기 시작했다.

“자, 저하. 노여움을 푸시고 일단은 여기 엎드려 보실까요?”

“어디서 대충 얼렁뚱땅 넘어가려고 해?”

“저한테 때 밀고 싶으시다면서요?”

“대답부터 해, 영애. 저 두 놈들 요금 올릴 거야, 말 거야?!”

“올리긴 뭘 올려요!”

그렇게 때를 밀려는 자와, 버티려는 자 사이에 실랑이가 벌어졌다.

“아, 일단 빨리 누우시라니까요!”

결국 산수이는 참지 못하고 마사지 베드를 향해 프리트를 살짝 밀었다.

그때였다.

“크윽……!”

“?!”

산수이는 그만 실수로 프리트의 등에 작은 생채기를 내고 만 것이다.

산수이의 눈앞이 새하얘졌다.

지금 내가 무슨 짓을?

그녀의 손톱에 긁힌 프리트의 피부에 작은 핏방울이 맺혔다.

‘화, 황족 상해죄!’

끝났다. 다 끝났어.

결국 이렇게 사우나스는 만나보지도 못하고 형장의 이슬이 되는구나.

그렇게 눈을 질끈 감은 산수이를 향해, 갑자기 프리트의 커다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영애.”

그 웃음소리에 산수이가 조심스레 실눈을 떴다.

“방금 황족을 죽일 뻔했어.”

“드, 등짝에 피 좀 났다고 안 죽어요.”

“그래서 지금 잘했다는 거야?”

“……아니요.”

“그래서, 영애의 선택은 뭐지? 황태자 상해 혐의로 재판을 받을지, 아니면 내 요구사항을 들어주고 합의를 볼지 골라야 할 것 같은데?”

“…….”

프리트의 승리였다.

그가 씩 웃으며 말했다.

“그럼 말한 대로 그 두 놈의 요금을…….”

“공짜로 밀어드릴게요.”

“뭐?”

“오늘 저하의 때도 공짜로 밀어드리겠다고요.”

“!”

프리트의 눈이 커졌다.

산수이는 그 찰나를 놓치지 않고 한마디를 더 얹었다.

“원래 이런 예외는 잘 두지 않는데 특별히 해드리는 거니까, 대신…….”

그녀가 프리트를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어디 가서 절대 말씀하시면 안 돼요. 아셨죠? 때밀이 값 안 받는다는 거 소문나면, 저 여기서 장사 못 해요.”

특별히 해 주는 거라니.

둘만의 비밀이라니!

물론 산수이는 둘만의 비밀이란 말을 붙인 적이 없었지만 말이다.

“크, 크흠. 하는 수 없지. 이 일은 눈감아 주도록 하겠어.”

“감사드립니다, 저하.”

“그럼 어디 밀어보라고.”

그렇게, 프리트는 결국 마사지 베드에 순순히 엎드렸다.

그렇게 또다시 기적의 때밀이 시간이 시작되었다.

‘크윽…… 역시 놀라운 기술이다!’

한동안 무아지경에 빠져있던 프리트는, 결국 참지 못하고 자신의 마음속에서 계속 맴도는 그 질문을 던져버리고야 말았다.

“영애, 궁금한 게 있어.”

“예, 저하 말씀하시옵소서.”

산수이를 향해 프리트가 눈을 부라리며 물었다.

“혹시, 휘온 놈도 공짜로 때를 밀어준 적이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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