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프리트가 휘온을 향해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휘온, 넌 내 소중한 벗이야. 무얼 내줘도 아깝지 않다고 생각했었지. 하지만 영애만큼은…… 도저히 양보할 수가 없어.”
휘온 역시 받아쳤다.
“저 역시 저하에게 충성을 약속한 몸. 하지만 산수이 그녀만큼은 포기할 수 없습니다.”
휘온이 잠시 망설이다 말을 이었다.
“그렇지만 어차피 선택은 그녀에게 달린 것 아니겠습니까, 저하.”
그런 휘온을 향해 프리트가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제국 유일의 공작이 이렇게 패기가 없어서야. 사랑은 쟁취하는 거야, 휘온.”
“그러다 제가 정말 그녀를 쟁취하면 어쩌려고 절 도발하십니까, 저하? 전 제가 이길 것이라 확신하는 것뿐입니다.”
“하! 그렇게 나오겠다……?”
그 말을 들은 프리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휘온에게 선전포고를 날렸다.
“좋아. 누가 영애의 마음을 얻을지, 어디 한번 겨뤄보자고.”
휘온 역시 벌떡 일어나 프리트를 향해 당당하게 외쳤다.
“바라던 바입니다.”
그때, 무언가 휘온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가 프리트를 향해 물었다.
“그런데 말입니다, 저하. 여쭤보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만.”
“뭔데?”
“산수이가 자신의 취향이 조신남이라고 했습니까?”
프리트의 얼굴이 일순 굳어버렸다.
저도 모르게 가장 중요한 정보를 내뱉어버리고 만 것이다.
아니, 어차피 휘온이나 저나 조신하기와는 거리가 먼 것 같으니 별 상관없으려나.
“크흠…….”
“어서 말씀해주시지요, 저하. 정정당당히 승부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아.”
프리트는 한숨을 길게 내쉬곤 의자에 풀썩 주저앉았다.
그러고는 기운 빠지게 읊조렸다.
“말 그대로야. 착하고, 순하고, 요리도 잘하는데 제 말까지 잘 듣는 조신한 남자가 이상형이라더군.”
“예?!”
휘온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참으로 산수이 그녀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간 얀피르와 자신에게 철벽같은 방어막을 세우던 그녀가 아닌가.
분명 좋아하는 남자 취향 역시 까다로울 거라 예상은 한 바였다.
‘그래. 산수이 그녀라면 그렇게 말했을 것 같다. 하지만 조신한 남자라니, 이건 참…….’
프리트를 한번 흘끔 바라보던 휘온은, 이어 얀피르를 떠올려보았다.
크르릉.
짐승의 소리를 내는 그의 사나운 얼굴이 떠올랐다.
‘일단은 우리 세 명 다 가망이 전혀…… 없어 보이는데?’
내적 고뇌에 빠진 휘온에게 프리트가 되물었다.
“나도 하나 묻지, 휘온.”
“말씀하십시오, 저하.”
프리트가 미간을 험악하게 찌푸린 채 물었다.
“아까 영애와 함께 있던 그 세신사놈은, 조신한 편인가?”
그 질문에 휘온이 조소하며 답했다.
“걱정 마십시오, 저하. 조신은커녕 아주 짐승같이 위험한 놈입니다.”
그래도 얀피르와의 의리를 생각해서, 휘온은 그의 정체가 드래곤이라는 사실은 함구하기로 했다.
그런데 휘온은 방금 제가 말한 것이 매우 모순적인 것임을 뒤늦게 깨달았다.
‘엇, 잠깐…… 뭔가 이상한데.’
하지만 그가 뭐라 다시 언급하기도 전에.
프리트가 먼저 휘온에게 그 이상한 점을 되짚어 물어봤다.
“짐승같이 위험한 놈이라고? 그럼 조신한 놈보다 더 문제잖아!”
***
한편.
얀피르 역시 아까 프리트에게 얼핏 들었던 말 때문에 영 신경이 쓰이던 터였다.
‘조신남……?’
그는 재빠르게 뛰어가 방 안으로 들어가려는 산수이를 붙잡았다.
“주인, 잠깐만.”
산수이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손으로 부여잡으며 말했다.
“얀피르, 미안한데 나 지금 머리가 너무 복잡…….”
“너 내가 취향이야?”
“……?!”
갑자기 직구로 던져 지르는 얀피르의 말에 산수이가 놀라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갑자기.”
“아까 황태자 놈이 그랬잖아. 내가 네 취향의 남자냐고.”
‘아, 얘는 왜 이렇게 쓸데없는 걸 잘 알아듣고 기억하는 거야……!’
당황한 산수이는 얼른 대충 대답하고 이 상황을 모면하려고 했다.
“아, 아니야 그런 거. 그냥 너랑 내가 붙어있으니까 황태자님이 오해하신 거겠지.”
“정말 아니야?”
얀피르가 산수이의 앞에 바짝 붙어 되물었다.
올려다본 시선 끝으로 얀피르의 입술이 보였다.
그에게서 청량한 향기가 났다.
산수이는 저도 모르게 가슴이 두근거렸다.
동물적인 감각을 가진 얀피르가 이를 놓칠 리가 없었다.
산수이의 뺨이 붉게 물들어가는 것을 확인한 그는, 그녀의 손을 자신의 가슴 위에 얹으며 되물었다.
“나 정말 네 취향 아니야?”
“……아니라니까.”
“대놓고 아니라고 하면 상처받는데. 내가 그렇게 별로야?”
아차, 너무 기분 나빴으려나.
미안한 마음이 든 산수이는 말을 주워 담으려 횡설수설했지만.
“아, 그게. 아주 취향이 아닌 건 아니고…… 사실 얀피르 네 얼굴은 완전 내 취향이긴 한데…….”
사실은 셋 다 산수이의 취향이었다.
미남은 어떻게 생겨도 미남이니까.
‘정확히 말하면 세 명 다 저마다의 매력이 있지. 섹시한 얀피르냐, 냉미남 휘온이냐, 상남자 프리트냐…….’
이 중 하나만 고르는 것은 너무나 어려운 일이었다.
여기까지 생각하던 산수이는 방금 전 제가 실언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네 얼굴이 취향이라니!
머릿속으로만 몰래 생각하던 그 얘기를 지금 입 밖으로, 그것도 당사자 앞에서 내뱉어 버린 것이었다.
‘으아아아!’
그렇게 산수이가 서둘러 내뱉은 말을 수습하려 했지만.
이미 얀피르의 입꼬리는 점점 귀에 걸리고 있었다.
“내 얼굴이, 주인 네 취향이었어……?”
산수이는 제 손끝에서 얀피르의 심장이 요동치는 것을 느꼈다.
그녀가 서둘러 손을 빼서 방 안으로 도망가 버리려고 하던 찰나.
얀피르가 그 홀릴 것 같은 얼굴을 그녀에게 좀 더 가까이 들이대며 말했다.
“그럼 내가 이렇게 하면, 너 더 떨리겠네.”
‘으…… 으아아악!’
산수이의 머릿속에서 미남 경보가 울렸다.
좌심방 우심실이 뛰다 못해 터져나갈 지경에 이르면서, 이제 산수이는 붉어지는 제 얼굴을 다 숨길 수도 없었다.
어차피 얀피르는 이미 그녀의 숨소리, 높아지는 체온, 그리고 긴장한 나머지 짙어진 그녀의 체향에서 모든 것을 눈치챈 후였다.
기분 좋게 씩 웃으며, 얀피르는 자신의 가슴 위에 올려져있던 산수이의 손을 들어 그녀의 손바닥을 살짝 핥았다.
“얼굴만 네 취향인 게 아니라, 나 성격도 엄청 조신해. 아까 들어보니 조신한 남자를 좋아한다는 것 같길래 말해주는 거야.”
그가 산수이를 향해 싱긋 웃어 보이며 덧붙였다.
“나 네 말 잘 듣잖아.”
그런 얀피르를 보며 산수이는 저도 모르게 외쳤다.
“조, 조신하긴 무슨! 얀피르 너 야해. 엄청 야하다고……!”
하지만 그는 잡고 있는 그녀의 손을 놓아주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의 손목을 타고 내려가 계속 입을 맞추며 말했다.
“음…… 취향인 얼굴에, 성격도 조신한데, 야하기까지 하면 최고 아니야?”
“……!”
산수이는 이제 제 얼굴에 있는 모든 핏줄이 다 터져나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러다 심장 과부하로 죽지 싶었다.
얀피르는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은 채, 그녀를 순순히 놓아주곤 방으로 들여보내 주었다.
그러나 방문이 닫히기 전, 마지막 말을 빼놓지 않았다.
“그럼 푹 쉬어, 주인. 그리고, 앞으로 매일 가까이서 볼 수 있게 해 줄게.”
“……뭘?”
얀피르가 산수이에게 다가가 작게 귓속말로 속삭였다.
“내 얼굴 말이야.”
“나가!”
빨개진 얼굴로 화를 내는 산수이를 보며, 얀피르는 키득거린 채 방문을 닫았다.
한편, 계단 아래에서는 집사와 유모가 그들의 모습을 보고 놀란 표정으로 서 있었다.
***
사실 집사와 유모는 아까 응접실에서부터 몰래 프리트와 휘온의 대화를 엿듣고 있던 터였다.
그렇게 휘온과 프리트, 두 사람 모두 산수이에게 마음이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게다가 방금 전 산수이와 얀피르가 꽁냥대던 모습까지 목격하게 된 두 사람은 흥분되는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지, 집사님?”
“……그곳으로 가시죠, 유모.”
그렇게 두 사람은 언제나처럼 자신들의 비밀 아지트인 사용인 휴게실로 들어가 굳게 문을 잠그고 마주 앉았다.
요새 두 사람에게 있어서 이 남작저에서 가장 재미있는 일을 꼽으라 하면.
단연코 산수이의 썸 구경하기였다.
목욕 말고는 할 거 없는 시골 영지에서, 눈앞에 생생하게 펼쳐지는 제 주인의 로맨스는 그들의 무료함을 달래주기에 안성맞춤이었다.
남주가 두 명일 때도 꿀잼이었는데, 한 명 더 늘어나자 그들은 이 무료 드라마를 끊으려야 끊을 수가 없어졌다.
게다가 어려서부터 애지중지 키워온 산수이는 그들에게 있어서 제 딸이나 다름없었다.
따라서 이 두 사람의 관심사는 오로지 그녀를 ‘누구한테 시집보내느냐’뿐이었다.
흥분되는 모습으로 유모가 내뱉었다.
“역시. 세 분 모두 아가씨에게 마음을 두고 계셨군요.”
집사 역시 유모에게 대답했다.
“하지만 아가씨는 아직도 세 분 중 어느 누구에게도 별 마음이 없어 보이시는군요.”
“하긴, 세 분 다 조신남과는 거리가 먼 분들이니. 그나저나, 우리 아가씨 이상형이 조신남이었을 줄이야…….”
“우리 아가씨의 기개에 걸맞을 남성이라면 무릇 조신해야 하겠지요.”
그들은 세 명의 후보를 차근차근 곱씹어보았다.
짐승 같지만 산수이의 앞에선 순하게 말 잘 듣는 얀피르 경.
영민하지만 산수이 앞에선 맥을 못 추는 휘온 에데카나 공작.
살인광이라 불리지만 때밀이 날짜조차 제 맘대로 못 정하고 있는 프리트 폰 카데베르 황태자.
“음?”
세 남자를 모두 되짚어 본 집사와 유모가 동시에 외쳤다.
“세 사람 모두…….”
“매우 조신하지 않습니까……?”
그렇다.
사실은 세 남자 모두 산수이가 내던진 조신남 카테고리에 들어가고 있던 것이었다.
물론 산수이는 아무 말이나 내던진 거였지만.
어쨌든 세 명 다 조신남이 될 가능성이 충분하다는 건 오로지 집사와 유모만이 파악했을 뿐이었다.
두 사람은 기쁨에 젖어 서로를 바라보며 외쳤다.
“이거, 희망이 있겠는데요?!”
***
다음 날 아침.
산수이는 예정대로 프리트 황태자의 때를 밀어주기 위해 비덴탕으로 향하고 있었다.
미리 주문해 둔 때밀이를 위한 특수 의상까지 제대로 준비해 둔 후였다.
‘이번엔 육탄전이니 뭐니 하는 개소리를 들을 일이 없도록 만전을 기했다.’
그렇게 모든 준비가 갖춰졌다.
이제 저 황태자의 때를 잘 밀어주고, 조용히 돌려보내는 일만 남았다고 생각하며 산수이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렇게 비덴탕으로 향하고 있던 찰나, 산수이는 예정에 없던 갑작스런 소식을 전달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