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산수이에게 때를 밀어달라는 프리트의 말에,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이들이 놀라 두 사람을 쳐다보았다.
산수이 역시 갑작스레 자신에게 쏟아지는 시선에 적잖이 당황한 표정이었다.
‘하아…… 이 황태자 놈 설마 여기서 갑자기 또 청혼 얘길 꺼내는 건 아니겠지?’
그녀는 일단 사용인들을 모두 물러가게 했다.
혹시라도 있을 머리 아픈 상황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이제 그 자리에는 산수이와 얀피르, 그리고 프리트와 휘온만이 남아있었다.
산수이가 프리트에게 입을 열었다.
“저하, 오늘 저의 때밀이 예약은 이미 꽉 차 있습니다. 다른 날짜에 다시 예약을 잡으시면 제가 성심을 다해 밀어드릴…….”
프리트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제국의 황태자보다 우선시되는 그 겁대가리 없는 고객이 누군지, 한번 만나보고 싶어지는데.”
“저, 저하! 하지만.”
“정 그렇다면, 그대의 일정과 저 세신사의 일정을 바꾸면 되잖아.”
그가 얀피르를 가리키며 말했다.
하지만 산수이는 단호했다.
“아무리 저하라 해도 저에게는 먼저 예약하신 고객님이 우선입니다.”
“산수이 그대는 참으로 겁이 없어. 대체 내 명을 몇 번이나 거역하는 거지? 일전의 청……!”
“으, 으아악, 저하!”
프리트의 입에서 청혼이라는 단어가 튀어나오기 직전이었다.
산수이는 그의 입을 틀어막기 위해 앞으로 나섰다.
“그, 그럼 내일 어떠십니까? 내일 오전이라면 예약이 없어 제가 저하의 때를 밀어드릴 수 있습니다.”
“흠…… 내일이라.”
자신이 우선순위가 아니라는 사실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 프리트였지만, 그래도 썩 나쁘진 않은 제안이었다.
어차피 이곳에서 며칠은 더 머물다 갈 생각이었으니까.
그렇게 산수이의 제안을 수락하려던 찰나.
갑자기 프리트의 앞에 얀피르가 나서며 말했다.
“그냥 예정대로 오늘 저에게 때를 미시지요, 황태자 나으리?”
얀피르가 황금빛 눈동자를 이글거리며 프리트를 노려봤다.
그러자 이제야 처음으로 얀피르를 제대로 마주한 프리트의 눈에 놀라움이 번졌다.
‘이 위압감은 대체……? 이자, 평범한 세신사가 아니로군?’
그것은 전장에서 구르던 자의 본능 같은 직감이었다.
그는 얀피르에게 자신과 같은 전사의 피가 흐르고 있다는 것을 육감으로 파악했다.
‘여태 숱한 전장에 나가봤지만, 이렇게 강한 자는 난생처음 본다.’
한편, 얀피르 역시 흠칫 놀랐다.
‘황태자가 미친놈이라더니, 이래서 하는 말이었군.’
그것은 보통의 인간에게선 나올 수 없는 기운이었다.
아마도 이자가 전력을 다해 싸운다면, 그건 분명 탈 인간급이리라.
‘이런 위험한 놈을 주인에게 맡길 수는 없겠는데.’
그렇게 두 남자는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잠시 동안 기 싸움을 해 댔다.
그때였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파악한 산수이가 두 사람 사이를 막아서며 다급히 말했다.
“저, 저하. 아무래도 갑작스런 예약 날짜 변경이다 보니…… 저희끼리 논의를 좀 하고 와도 될까요?”
프리트가 여전히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얀피르를 바라보다 조용히 답했다.
“그리하도록.”
산수이가 재빠르게 얀피르를 데리고 남작저 입구에서 조금 떨어진 테라스로 향했다.
얀피르는 기분이 몹시 언짢아졌다.
정확한 건 모르겠지만 산수이와 황태자가 서로 만났던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지금 이렇게 동요하고 있는 그녀를 보는 것만으로도 짜증이 치밀었다.
그가 그르렁거리며 산수이에게 말했다.
“예정대로 내가 저 황태자 놈의 때를 밀겠어, 주인.”
“괜찮아. 그냥 내가 내일…….”
“상처 하나 없이 제대로 밀어줄 테니까, 원래대로 나한테 맡겨.”
그가 거센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자신도 모르게 목에서는 그르렁거리는 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얀피르? 내 말 좀 들어봐.”
“주인, 너한텐 절대 못 맡기겠어. 저놈한테서 엄청 위험한 기운이……!”
하지만 얀피르가 말을 다 잇기도 전에, 산수이가 그의 뺨을 두 손으로 감싸 안았다.
“…….”
그러자 씩씩대던 그의 숨소리가 점점 잦아들었다.
산수이가 얀피르를 천천히 진정시키며 말을 이었다.
“쉬-옳지, 착하다.”
“……애 취급하지 마.”
“애 취급하는 거 아닌데.”
그렇게 말하며, 갑자기 산수이가 자신의 입술을 얀피르에게 가까이 가져다 대는 것이 아닌가.
“주, 주인?”
예상치 못한 그녀의 행동에 놀란 얀피르는 가슴이 마구 뛰었다.
설마, 지금 나에게 입이라도 맞추려는 걸까?
얀피르는 저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얀피르의 바람과는 다르게, 산수이는 그저 그의 귀에다 대고 이렇게 속삭일 뿐이었다.
“저 황태자 완전…… X라이거든. 내가 때 안 밀어주면 또 어떤 헛소리를 할지 몰라.”
예를 들면 청혼이라든가, 결혼하자는 소리를 하거나, 혹은 갑작스런 프러포즈라든가.
‘그러면 그렇지.’
세차게 뛰던 얀피르의 가슴이 이내 짜게 식었다.
그가 한숨을 내쉬곤 물었다.
“하나만 묻자, 주인.”
“응, 뭔데 얀피르?”
“지난번 황궁에 갔을 때 혹시 저 황태자 놈과 마주쳤…….”
그때였다. 갑자기 그들의 등 뒤에서 저음의 목소리가 들려온 건.
“지금 두 사람 뭐 하는 거지?”
참지 못하고 두 사람을 따라서 테라스까지 온 프리트가 방금 전의 모습을 목격해버린 것이다.
얀피르의 뺨에 두 손을 올린 채, 그의 귀에 대고 무어라 사랑스럽게 속삭이고 있는 산수이를.
프리트의 뒤에서 서류 뭉치를 잔뜩 들고 함께 따라오던 휘온 역시 이 광경을 보게 되었다.
“…….”
하지만 휘온은 프리트와는 다르게 이 상황을 1도 오해하고 있지 않았다.
‘보나 마나 저 드래곤 놈이 미쳐 날뛰는 걸 산수이가 진정시키고 있던 거겠지.’
하지만 그런 이해와는 별개로, 휘온의 기분은 몹시 더러웠다.
‘나도 저렇게 떼쓰고 날뛰면, 산수이가 얼굴을 감싸 안아줄까……?’
상상만 해도 좋았다. 그럼 못 이기는 척, 화를 풀며 산수이에게 키…….
여기까지 생각하던 휘온은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아니다, 공작으로서의 체면이 있지! 내가 저 힘만 센 드래곤 놈과 같아질 순 없다!’
하지만 휘온과는 다르게 프리트는 분노에 타오르는 제 가슴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감히 황태자를 두고 다른 놈에게 저런 표정을 지어?
게다가 대체 저놈의 귓가엔 뭐라고 속삭인 건데?
흥분한 프리트가 산수이와 얀피르에게 씩씩대며 다가와 외쳤다.
“산수이 영애, 일전에 나의 청혼을 거절했을 땐 분명 마음에 둔 놈이 없다더니……!”
파국이다.
“아악! 저하!”
산수이가 그의 입을 틀어막으려 절규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프리트가 얀피르를 가리키며, 마지막 그 말까지 지껄여버렸으니까.
“영애가 말한 그대의 취향이라는 그 조신남이…… 바로 이 자식이었나 보군?!”
프리트의 입에서 터져 나온 충격 고백에 그 자리에 있던 모두는 경악했다.
얀피르가 살기 어린 눈을 빛내며 프리트를 향해 외쳤다.
“너, 너 이 자식…… 주인한테 청혼했어?!”
한편 휘온은 들고 있던 서류뭉치를 모두 바닥에 떨어트리곤 휘청거렸다.
‘청혼? 게다가 산수이의 취향이…… 뭐?’
그는 이젠 체면도 잊은 채, 떨리는 목소리로 산수이를 향해 외쳐댔다.
“산수이! 정말로 얀피르를 좋아하고 있었던 겁니까? 예?!”
그사이 정신없이 바람에 휘날려버린 서류들 사이로, 경악스런 표정의 프리트가 휘온을 향해 외쳤다.
“휘온, 설마 네놈도 산수이를……?”
이 파국의 한가운데서 산수이는 거의 울어버릴 지경이었다.
‘으악! 이게 뭐야! 왜 일이 이렇게 되어가는 건데……!’
그녀를 가운데 두고, 수컷 세 마리가 대치해서 서로를 노려보고 있었다.
이 숨 막히는 상황 속에서 산수이는 빠져나올 수 없는 버뮤다 삼각지대에 갇혀 끝없이 침몰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
아수라장이 되어버린 테라스.
세 남자는 서로를 향해 각자 제 하고 싶은 얘기만 떠들어대고 있었다.
그 와중에 온갖 억측들이 난무했다.
“말해! 너, 영애와 무슨 사이지?”
“주인하고 네놈 사이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저하, 정말로 산수이에게 청혼하신 겁니까?!”
그 혼돈 속에서 결국 산수이가 세 남자를 향해 소리쳤다.
“아, 진짜! 조용!”
그 목소리에 얀피르와 프리트가 붙잡고 있던 서로의 멱살을 놓고 산수이를 바라보았다.
“세 분, 소설 그만 쓰시고. 궁금한 게 있으시면 저한테 직접 물어보세요!”
그 말과 동시에 얀피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주인, 황태자가 정말 너한테 청혼했어?”
“하아…… 응.”
“이 자식이 진짜……!”
또다시 프리트의 멱살을 잡으려는 얀피르를 향해, 산수이가 말을 이었다.
“거절했어! 자, 다음 질문!”
“……거절했어?”
순간 얀피르와 휘온의 얼굴엔 동시에 화색이 돌았다.
이어서 프리트가 얀피르를 가리키며 물었다.
“영애, 이자와 대체 무슨 사이지? 설마 그대의 정인인가?”
산수이가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아무 사이도 아니고요, 전 결혼은 둘째 치고, 그 누구와도 교제할 생각이 없습니다.”
아무 사이도 아니라니.
그 말에 나라 잃은 표정이 된 얀피르를 뒤로한 채, 휘온이 앞으로 튀어나와 물었다.
“겨, 결혼도 교제도 할 생각이 없다니요? 그게 정말입니까, 산수이?”
산수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죠. 연애할 시간이 어디 있어요? 돈 벌기도 바쁜데.”
“아니, 돈이라면 제가…….”
휘온이 서둘러 말을 얹었지만, 산수이는 여전히 고개를 저었다.
“저는 일하는 게 제일 재밌어서, 데이트하는 시간도 아까워요. 이제 질문 다 끝났죠?”
산수이가 박수를 짝짝 치며 마무리를 지었다.
“자, 그럼. 황태자 저하 때밀이는 내일 오전 8시. 그럼 이만 다들 해산!”
그렇게 산수이는 멍청한 표정의 세 남자만을 남겨둔 채, 서둘러 자리를 떠나며 생각했다.
세 남자가 아무리 저렇게 제가 좋다고 난리 법석을 떨어도, 별 감흥이 들지 않는다고.
‘이게 다 내가 좋아서가 아니라, 이 산수이 영애의 육신이 너무 예뻐서 그런 거잖아.’
그렇게 그녀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사라져갔다.
***
남작저의 응접실.
서로를 마주 보고 앉아있는 프리트와 휘온의 사이로 깊은 적막이 흘렀다.
가까스로 분노를 가라앉힌 프리트가 마침내 휘온에게 입을 열었다.
“휘온, 혹시 네놈도 산수이 영애에게 때를 밀었나?”
휘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와 저하께 뭘 숨기겠습니까? 예, 그렇습니다. 산수이에게 때를 밀었고, 그녀를 진심으로 연모하고 있습니다.”
“하아…….”
프리트에게 있어서 휘온이라는 벗의 의미는 매우 컸다.
모두가 자신을 2황자의 살해범이라 손가락질해댈 때, 유일하게 자신을 믿고 옆에 있어줬던 친우였으니까.
그런 휘온과 같은 여인을 마음에 품게 되다니.
한참을 고민하던 프리트가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