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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 세신사 영애님-40화 (40/150)

40화.

황궁 목욕탕 안에 딸린 사용인 대기실 안.

각종 목욕용품과 탈의 시설이 구비되어 있는 이곳에서.

산수이는 이를 바득바득 갈며 이태리타월을 손에 감고 있었다.

만일을 대비해서 항상 여분의 이태리타월을 소지하고 다니던 게 이렇게 쓰이게 될 줄은 몰랐다.

‘하필 쓰여도 저렇게 때밀이를 우습게 아는 놈을 위해서 쓰게 되다니. 제가 제국의 황태자면 다야? 너 오늘 어디 두고 보자. 나한테 때를 밀리고 나서 어떤 속 얘기를 털어놓는지 똑똑히 다 들어놨다가, 두고두고 놀려먹어 줄 거라고.’

발레아나 공주를 만나기 위해 신경 써서 입고 왔던 연보라색의 화려한 드레스는 일찌감치 벗어 던진 지 오래였다.

그래도 첫 황궁 방문이라고 유모와 하녀들이 오랜 시간 공을 들여준 작품이었는데.

옷걸이에 축 처진 채 걸려있는 드레스를 보니 조금 아깝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산수이는 이미 망설임 없이 자신을 옭매던 코르셋을 풀어버린 후였다.

곧이어 달고 왔던 각종 장신구 역시 풀어버리고.

자신의 길고 탐스러운 물빛 머리카락도 모두 하늘 높이 묶어 올렸다.

오로지 때밀이에만 집중할 수 있는 모든 준비가 끝났다.

한 가지 아쉬운 건, 때밀이를 위해서 새롭게 주문해 둔 맞춤 제작 의상을 들고 오지 못했다는 것인데.

‘에라이…… 알 게 뭐야.’

산수이는 그냥 또다시 속옷 차림으로 나가서 때를 밀기로 했다.

뭐, 이 세계의 속옷이라 봤자 21세기에서 온 그녀의 눈에는 어차피 다 똑같은 원피스로 보이니까.

그렇게 산수이는 대기실 문을 열고 나섰다.

끼익—

문이 열리자, 그녀의 눈앞엔 자욱한 수증기가 가득했다.

이윽고 시야가 걷히며 황실 목욕탕의 전경이 산수이의 눈에 들어왔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대리석과 황금을 깡그리 긁어모아 이곳의 벽과 기둥에 쏟아부은 듯한.

화려하기 짝이 없는 대형 목욕탕이었다.

고풍스러운 조각상에선 뜨거운 온수가 쏟아져 나오고 있었고.

욕실 바닥엔 모자이크된 라피스라줄리 타일이 번쩍였다.

게다가 온탕 위의 천장은 유리로 되어있어 물에 몸을 담근 채 누우면 밤하늘의 별을 볼 수 있을 터였다.

산수이는 이 호화스러운 목욕탕을 바라보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와…… 내가 황태자였으면 매일 여기서 목욕한다 진짜.’

하지만 그중에서 그녀의 시선을 가장 끌어당긴 것은, 바로 한가운데 위치한 대형 온탕이었다.

그 초대형 온탕은 어찌나 컸던지, 그 안에서 수영을 해도 몇 바퀴는 돌 수 있을 것 같았다.

산수이는 자신이 황태자의 때를 밀러 왔다는 사실도 잠시 잊어버린 채, 홀린 듯 온탕 가까이 다가갔다.

그때 갑자기 그 안에서 부글부글하며 거품이 일었다.

그걸 본 산수이는 신기하다는 듯 혼잣말을 했다.

“오, 설마 탕 안에서 버블 마사지도 할 수 있는 건가? 황실 목욕탕 쩌네…….”

거품이 나오는 곳을 좀 더 자세히 보기 위해 산수이가 온탕 안쪽으로 몸을 기울였을 때였다.

갑자기 예고도 없이 거품 아래에서 커다란 몸체가 탕 위로 솟구쳐 올라왔다.

“꺄아악!”

산수이는 깜짝 놀라 주저앉은 채 뒷걸음질 쳤다.

온탕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건, 이때까지 물속에서 잠수하고 있던 프리트였다.

‘화, 황태자?!’

프리트는 하반신에만 수건을 묶은 반라의 모습으로, 자신의 황금빛 머리칼을 쓸어 올렸다.

그러자 산수이의 눈앞에 프리트의 넓고 탄탄한 근육질 가슴이 훤히 드러났다.

그의 흉부를 따라 흘러내린 물방울들은 복근 사이사이에 고이기까지 했다.

하지만 정작 산수이의 눈에 들어온 것은, 그의 몸 위에 아로새겨진 수많은 흉터들이었다.

‘……무슨 흉터가 저렇게 많아.’

프리트는 그런 산수이를 보며 어이없다는 듯 웃음을 지었다.

“아까의 그 패기는 다 어디 가고, 지금은 왜 토끼처럼 바들바들 떨고 있는 거지, 남작 영애?”

“그, 그렇게 갑자기 물속에서 나오시는데 놀라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가 들어가 있던 온탕에선 아직도 더운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고 있었다.

대체 저 뜨거운 물속에 어떻게 그리 오랫동안 잠수해서 들어가 있었는지 모를 일이었다.

산수이는 몰래 속으로만 생각했다.

‘성격이 X랄 맞더니…… 피부도 아주 질긴가 보네.’

온탕 밖으로 나오려던 프리트는, 그제야 산수이가 속옷 차림으로 주저앉아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가 눈을 가늘게 뜨곤 산수이에게 말했다.

“아무래도 영애는 나의 때를 밀어주러 온 것이 아니라, 다른 꿍꿍이가 있었던 모양이군 그래.”

“예? 그게 무슨…….”

대체 뭔 꿍꿍이?

영문을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산수이가 몸을 일으켜 세웠다.

프리트가 그녀를 혐오스럽다는 듯 바라보며 말했다.

“처음 보는 사내 앞에 속옷 차림으로 나타났다면 말 다 한 것 아닌가? 육탄전 같은 건 내겐 통하지 않을 텐데, 영애.”

유, 육탄전?!

그 말을 들은 산수이의 얼굴 역시 잔뜩 찌푸려졌다.

‘하…… 누가 너 같은 거랑? 이 황태자 놈이 착각을 해도 아주 단단히 하고 있네.’

산수이는 프리트를 노려보며 맞받아쳤다.

“육탄전이라뇨, 저하? 저에게도 취. 향. 이라는 게 있습니다.”

“뭣……?”

산수이의 말을 들은 프리트는 크게 당황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제국에서 발레아나와 휘온을 제외하면, 여태껏 자신의 앞에서 겁을 먹지 않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모자라 자신이 취향이 아니라는 소릴 저리 당당하게 하다니.

까놓고 말해서 얼굴만 보더라도 이 제국에 자신만 한 용모를 가진 사내가 어디 있단 말이냐.

거기다 지금은 이 잘빠진 반라까지 보여주고 있는데.

그는 왠지 자존심이 확 상했다.

“하……?”

그런데, 기가 막혀 말도 채 잇지 못하고 서 있는 프리트에게 산수이가 다가와 더 경악할 만한 행동을 해 보였다.

“자, 황태자 저하.”

그녀가 손바닥으로 짝짝 손뼉을 치며 말했다.

“이제 때를 밀어드릴 테니 마사지 베드로 가셔서 좀 엎드리시죠?”

***

그렇게 함께 황궁 마사지실로 향한 두 사람.

그녀는 제 눈앞에 엎드려있는 이 집채만 한 사내의 등판을 바라보았다.

산수이 역시 황태자가 무섭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사람 썰어 죽일 때 눈 하나 깜짝 안 한다는 얘기도 익히 들었고……. 게다가 그게 제 혈육이었다는 소문도 있었지, 아마.’

하지만 그녀에게는 최고의 무기가 있었다.

바로.

이태리타월.

‘설령 황태자가 칼을 꺼내 든다 하더라도, 어떻게든 저놈 몸의 아무 곳이나 한번 때수건으로 슥 밀어버리면 그만이지. 그러면 마음속의 봉인이 해제되면서, 안 하던 얘기도 술술…….’

다행히 산수이가 생각한 최악의 상황은 면한 것 같았다.

칼부림이 나기 전에 프리트는 순순히 마사지 베드에 엎드렸으니까.

어찌 됐건 때를 한번 밀어볼 생각이긴 한 모양이었다.

산수이는 마사지 베드에 엎어져 있는 프리트의 몸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거대한 근육질의 몸도 무시무시했지만, 그보다 더 놀라운 건 수많은 흉터였다.

그것은 한두 개의 흉터가 아니었다.

흉터 위에 새로운 흉이 덮인 곳도 있었고, 그중 몇 개는 다친 지 얼마 되지 않아 보이기도 했다.

‘도대체 전쟁터를 얼마나 자주 나다니는 거야? 원래 이렇게 상처 난 몸은 때를 밀면 안 된다고.’

그녀가 작게 한숨 쉬었다.

쉽지 않은 때밀이가 될 터였다.

최대한 상처 난 곳을 피하되, 시원함은 그대로 느낄 수 있게 기술적으로 밀어야 할 테니까.

그때였다.

엎드려있던 프리트가 산수이를 향해 말했다.

“잠깐.”

“뭐 불편하신 거라도 있으십니까, 저하?”

“때를 밀기 전에, 그대가 손에 감고 있는 그 이태리타월이라는 것을 내가 먼저 한번 봐야겠다.”

이건 또 무슨 소리지.

하지만 고객님이 원하신다니 하는 수 없지.

산수이는 순순히 손에 감았던 이태리타월을 풀어서 프리트에게 건네주었다.

“여기 있습니다, 저하.”

프리트는 엎드려 있던 몸을 다시 일으켜 마사지 베드에 걸터앉았다.

곧이어 산수이에게서 이태리타월을 받아들고 찬찬히 살피던 그는, 갑자기 그녀를 향해 팔을 쭉 뻗더니.

파바박—

손에 들려있던 이태리타월로 산수이의 팔을 박박 문질러댔다.

“아얏!”

그 손길이 얼마나 거칠었는지, 산수이는 그만 너무 아파서 외마디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저, 저하?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하지만 그 모습을 본 프리트는 안심한 표정으로 끄덕였다.

“음. 딱히 독을 발라놓진 않은 모양이군.”

‘아니 이 자식이?’

아까 팝콘을 봤을 때도 그렇고, 왜 이렇게 계속 독극물 타령이야?

물론 얼마 전 보다폰 백작 사건 때문에 이러한 의심을 할 수는 있었다.

충분히 이해할 만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사전 동의도 없이 나를 희생양으로 삼아?’

원래 황태자의 자리란 항상 암살 위험에 둘러싸여 있다고 듣긴 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건 너무하잖아!

산수이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 분노가 타올랐다.

프리트는 의심스러운 부분을 모두 확인했는지, 다시 산수이에게 이태리타월을 대충 건네주며 말했다.

“그럼, 이제 때를 밀어보도록.”

산수이는 끓어오르는 화를 억누르기 위해 마음속으로 심호흡을 했다.

‘후, 하…… 침착해. 이분은 나의 고객님이다. 고객님…….’

게다가 휘온을 제외하면, 비덴탕을 오픈한 이래로 처음 맞이하는 최초의 남성 때밀이 고객님이 아닌가.

게다가 황태자다.

혹시라도 비덴탕의 단골이 된다면 엄청난 파급효과를 가져올 수 있는 거물이다.

드디어 마인드 컨트롤을 마친 산수이가 프리트의 몸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어느 결을 따라서 때를 밀 것인지 다시 한 번 확인해 보기 위해서였다.

‘최대한 상처 난 곳을 피해서 밀어야 해. 하지만 빠트리는 곳이 많지 않도록, 섬세하게.’

드디어 산수이는 이태리타월을 감은 손을 프리트의 등 위에 올려놓고, 미끄러지듯 때를 밀기 시작했다.

“크…… 크윽……!”

프리트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산수이는 이것이 좋아서 내는 소리인지, 괴로워서 나는 소리인지 알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프리트의 몸엔 굳은살과 상처가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산수이는 그의 뭉쳐있는 근육들을 눌러보았다.

‘고생을 많이 한 몸이야. 얼핏 보면 잘 관리된 근육으로만 보일 수도 있겠지. 하지만 이렇게 눌러보면 알 수 있어. 전신이 팽팽하게 긴장되어있다는 걸. 마치 무언가에 쫓기는 사람처럼…….’

산수이는 그가 들려줄 속 이야기가 어떤 것일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이 남자는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살기에 피 맛에 미쳤다는 소문이 날 정도로 기괴한 행동들을 하고 다니는 걸까.

한편 프리트 역시 다른 남자들과 마찬가지로 때밀이의 천국에서 헤어 나오질 못하고 있었다.

‘휘, 휘온이 나에게 추천하려던 이유가 있었군. 마치 단도로 전신의 포를 뜨는 것 같으면서도 아프지 않고, 도리어 시원해. 게다가…….’

게다가 이 때밀이는, 그의 오랜 고민을 해결해주는 것만 같았다.

지난 세월 동안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이유.

그가 왜 그토록 전장에서 피를 뒤집어쓰며 살아가는지.

“크으으…… 하, 하아악……!”

계속해서 신음을 내던 프리트는 결국 산수이에게 입을 열어 자신의 비밀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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