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국의 세신사 영애님-39화 (39/150)

39화.

산수이 앞에 도착한 또 다른 서신 한 통은 바로 발레아나 황녀로부터 온 것이었다.

산수이는 황가의 인장이 찍힌 서신을 뜯어보며 생각했다.

‘발레아나가 또 때를 밀러 오려나?’

그러나 산수이의 예상과는 달리, 편지의 내용은 황실 마차를 보낼 테니 하루속히 황궁으로 와 달라는 것이었다.

단, 산수이 혼자서만 말이다.

그 외에는 별다른 이유도 쓰여 있지 않았다.

“황궁으로?”

게다가 왜 굳이 혼자 오라고 콕 집어 언급했을까?

산수이는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되었지만, 일단은 공주의 명령이니 황궁으로 가 보는 수밖에 없었다.

***

황실에서 직접 보내온 황금 마차를 타고 한참을 달려, 드디어 황궁을 목도한 산수이는 자신도 모르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과연 강대한 카데베르 제국답게 압도적인 규모를 자랑하는 황궁은 눈이 부실 정도로 화려했다.

“우와아…….”

생각해보니 황궁에 방문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간 발레아나 공주와 자주 교류하긴 했지만 보통 그녀가 때를 밀러 비덴탕에 놀러 오곤 했으니까.

‘다음엔 얀피르도 꼭 데려와야지. 나 혼자 보기 아까울 정도로 멋지다.’

화려한 꽃들이 피어있는 정원 안을 걸으며, 어느덧 산수이는 발레아나가 있는 곳에 도착했다.

공주는 화원 안 테이블 앞에 앉아 차를 마시며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산수이는 발레아나 황녀 앞으로 다가가 예를 다해 인사를 올렸다.

“제국의 황녀님을 뵈옵…….”

하지만 산수이가 인사를 채 마치기도 전에, 그녀를 본 발레아나 공주가 화색을 띠며 산수이를 향해 달려왔다.

“언니이이이!”

그렇게 멀리서부터 강아지처럼 달려온 발레아나는 산수이에게 폭 안겨서 제 얼굴을 비비며 웅얼거렸다.

“왜 이렇게 얼굴 보기가 힘들어, 언닝! 보고 싶었단 말이양!”

‘언니’라는 호칭에다 혀 짧은 소리까지.

주위의 시녀들이 경악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어, 언니라니? 황녀님께서 일개 남작가 영애에게 이 무슨!’

‘게다가 궁중 예법도 싹 무시하시고 저렇게 막무가내로 달려들어 안기시다니……!’

발레아나는 마치 강아지가 꼬리 흔들 듯 산수이의 품에서 비비적거렸다.

산수이의 가슴속에서 하트가 샘솟으며 벅찬 감동이 피어올랐다.

‘귀, 귀여워! 역시 언제 봐도 발레아나는 정말 왕 귀여워!’

그래도 주위에 보는 눈들이 너무 많아서, 일단은 공주를 향해 속삭였다.

“고, 공주님? 보는 눈이 너무 많습니다. 언니라고 부르는 것은 둘이 있을 때만 하시지요.”

“아차차. 너무 반가워서 그만…….”

발레아나는 재빨리 산수이의 몸에서 떨어져 헛기침을 두어 번 하고는 다시 근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여, 여기까지 먼 길 오느라 고단하진 않았느냐, 남작 영애.”

“황송하옵게도 마차를 보내주신 덕에 편안하게 올 수 있었습니다, 공주마마.”

이윽고 두 사람은 함께 테이블에 앉아 차를 마시며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곧이어 황실 주방장이 트레이를 밀며 다과를 가져왔다.

일전에 먹었던 팝콘을 포함해 진귀한 케이크들이 차례차례로 테이블 위에 올랐다.

공주는 손으로 팝콘을 한 줌 크게 집으려 했지만.

시녀들의 눈치를 보곤 어쩔 수 없이 포크로 팝콘 한 알을 우아하게 콕 집어 접시로 가져왔다.

하지만 팝콘을 한 알씩만 씹어대자니 감질 나서 영 참을 수가 없었다.

한편 산수이는 팝콘을 한 알씩 집어먹는 공주를 보며, 저건 아니다 싶어 그냥 케이크를 한 조각 접시에 옮겨 담았다.

‘이럴 때 아니면 황실 수제 케이크를 언제 먹어보냐.’

산수이는 행복한 듯 케이크를 한 입 베어 물었다.

결국 발레아나는 팝콘을 먹던 포크를 내려놓고, 산수이를 향해 본론을 꺼냈다.

“그런데, 산수이 남작 영애. 우리 오라버니께서 곧 비덴탕을 방문해 때를 밀 예정이시라고 들었네만.”

“예, 다음 주에 방문하시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내가 오라버니로부터 이상한 얘기를 들었네. 내가 알기로는 비덴탕에 세신사는 그대 하나뿐인데, 웬 남성이 오라버니의 때를 밀어드리기로 했다는군……?”

“아! 얼마 전부터 얀피르 경이 저에게 때밀이를 배웠습니다. 이제부터 그가 비덴탕의 남성 세신사로 일하게 될 예정입니다.”

그 말에 발레아나 공주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외쳤다.

“뭐, 뭐라고?! 얀피르 경이 오라버니의 때를 민다고? 안 돼, 절대 안 된다고!”

“고, 공주님?!”

발레아나 공주는 마음이 다급해졌다.

얀피르 경이 오라버니의 때를 밀게 해선 절대 안 된다. 왜냐하면, 왜냐하면……!

‘산수이 언니는 울 오라버니랑 결혼해야 한단 말이야!’

산수이 황태자비 만들기 프로젝트.

이것은 발레아나가 산수이를 언니라고 부르던 순간부터 지금까지 계속해서 진행되고 있는 초대형 프로젝트였다.

공주가 계획하고 있는 것은 다음과 같았다.

1. 오라버니가 산수이 언니한테 때를 밀러 간다.

2. 오라버니가 언니에게 반한다.

3. 청혼한다.

4. 결혼한다.

아직 어린 공주는 이 2번과 3번, 그리고 4번 사이에 얼마나 수많은 과정이 생략되었는지를 알지 못했다.

그냥 우리 오라버니 왕 잘생겼고, 산수이 언니 여신이고, 언니가 때 밀어주면 살살 녹고, 제국의 황태자가 청혼하면 만사 오케이라고 단순하게 생각했다.

그런데 얀피르 경이 오라버니의 때를 밀기로 되어있다니.

이래서야 계획 1번부터 어긋나는 꼴이 아닌가.

고뇌에 잠긴 공주를 보며 산수이가 당황하여 물었다.

“공주님, 얀피르 경이 때를 밀면 안 되는 이유라도 있나요? 혹시 그가 일전에 무슨 잘못이라도……?”

“아니, 그런 건 아니지만……!”

그때였다.

맞은편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리며 인기척이 났다.

공주와 산수이는 소리가 들려오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 서 있는 건.

두 사람을 매서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프리트 황태자였다.

산수이는 그와 눈이 마주치자 오싹한 한기를 느꼈다.

‘허억, 사람한테서 무슨 살기가 저렇게……!’

그가 시퍼런 눈을 부라리며 이쪽으로 다가왔다.

다른 사내들의 곱절은 될 듯한 거대한 체격에.

제복으로도 가려지지 않는 근육질의 몸은 보기만 해도 주위를 압도해 주눅 들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가 다가올수록 주위의 시녀들이 겁을 먹고 움츠리는 것이 보였다.

‘아, 맞다. 소문을 들은 적 있어. 저 황태자, 인성 쓰레기에…… 이상한 취미를 가지고 있다고.’

그 이상한 취미란, 바로 황태자가 피를 뒤집어쓰고 다닌다는 것이었다.

보통 그런 소문을 전하는 자들의 눈에는 황태자에 대한 공포심이 서려 있었다.

하지만 그 얘기를 들을 때마다 산수이는 전혀 다른 생각을 했다.

‘아니, 황실 전용 목욕탕이 그렇게 좋다던데 대체 왜 안 씻지……? 비덴탕 저리 가라 할 수준의 크기와 화려함을 자랑한다던데! 나라면 진짜 1일 1목욕 한다. 하여간 있는 놈들이 목욕탕 고마운 줄 몰라!’

다행히도 오늘 황태자의 모습은 매우 멀끔해 보였다.

자신의 앞에서도 피에 절은 모습이었다면 아마도 산수이는 못 참고 그의 멱살을 잡아 목욕탕으로 끌고 갔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어느새 두 사람의 앞으로 다가온 프리트는 말없이 산수이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 모습에 아차 싶었던 산수이가 재빨리 일어나 예를 갖추어 인사를 올렸다.

“제국의 황태자 저하를 뵙니다.”

하지만 프리트는 산수이의 인사를 건성으로 받으며, 테이블 위에 오른 팝콘을 쳐다보았다.

그것은 프리트가 태어나서 처음 보는 종류의 간식거리였다.

‘대체 이건 또 뭐……?’

프리트가 말없이 팝콘을 가리키며 산수이에게 물었다.

“이 괴상한 음식의 출처는, 혹시 영애인가?”

“예? 아, 그게 제가 개발한 것이긴 합니다만.”

그러자 프리트는 산수이의 대답이 채 끝나기도 전에 팝콘을 한 줌 집어 자신의 입으로 쑤셔 넣었다.

“……독은 타지 않은 것 같군.”

이에 발레아나가 화가 난 듯 테이블을 탕 치며 일어섰다.

“오라버니! 이건 산수이 언니…… 아니, 산수이 영애를 대접하기 위해 황실 요리사가 직접 만든 거라고요! 그리고 독이라뇨! 제 손님에게 그게 무슨 실례되는 말씀이십니까?!”

산수이라는 이름을 들은 프리트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산수이……? 그럼 그대가 비덴비덴 남작 영애인가? 비덴탕에서 세신사를 한다는?”

“예, 그렇습니다.”

프리트는 산수이를 위아래로 훑어보다, 이어서 그녀의 주위를 살펴보곤 물었다.

“……내 때를 밀어줄 예정이라는 그자는 오늘 함께 오지 않은 건가?”

“오늘은 공주님을 뵈러 온 것이라서요. 저 혼자만 왔습니다.”

프리트가 산수이를 못마땅하게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귀족 영애답지 않게 참 이상한 일들을 벌이고 다니더군. 이 알 수 없는 과자도 그렇지만, 그 이태리타월이라는 물건 말이야. 꼭 고문 도구 같던데.”

그 말을 들은 산수이의 표정이 미묘하게 구겨졌다.

그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되물었다.

“고문…… 도구요?”

하지만 프리트는 산수이의 표정 변화를 눈치채지 못한 채 계속해서 지껄여댔다.

“에데카나 공작의 추천이니 그 때밀이라는 걸 한번 받아는 보겠지만 말이야. 날 실망하게 해서는 안 될 거야. 영애가 자꾸만 요상한 것들을 유행시키고 있는 게 이 제국에 해가 될지 득이 될지, 아직 난 판단이 안 섰거든.”

이어서 프리트는 해서는 안 될 마지막 말까지 지껄이고 말았다.

“게다가 얼마 전에 불미스러운 사건도 있었다고 들어서 말이지.”

가짜 이태리타월 유통 사건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그런 제 오라버니를 본 발레아나는 속으로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제발…… 제발 그 입을 다물어요, 오라버니!’

하지만 이미 산수이의 얼굴은 붉으락푸르락해졌다.

그녀가 주먹을 꽉 쥐곤 황태자를 향해 외쳤다.

“고문 도구라니요? 요상한 유행이라니요! 당치 않으십니다. 그것은 모두 제국민들에게 행복한 목욕 문화를 전파하기 위한 것들이었다고요! 괴상하다고 치부할 것들이 아니란 말입니다. 게다가 얼마 전 있었던 사건은 진범이 잡힌 걸 잘 알고 계실 텐데요, 황태자 저하?”

“하? 지금 감히 제국의 황태자 앞에서 목에 핏대를 세우고 덤벼드는 것이냐? 정녕 죽고 싶어 환장을 했구나……!”

황태자는 허리춤에 차고 있던 칼을 당장이라도 꺼내 들 기세였다.

그 모습을 본 발레아나는 자리를 박차고 나가 제 오라버니의 팔에 매달려 상황을 진정시킬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런 황태자를 향해 산수이가 먼저 외쳤다.

“저하께서 그토록 멸시하시는 그 때밀이를 한번 경험해 보기나 하시고 말씀해주시겠습니까? 어디 저에게 때를 밀리고 나서도 그렇게 말씀하실 수 있는지 보겠습니다!”

“하, 이 발칙한……! 이제 보니 겁을 상실한 영애로군. 그래, 좋아. 그 때밀이라는 게 얼마나 대단한지 내 몸소 체험해 봐야겠다!”

그가 주변 시녀들을 향해 외쳤다.

“여봐라, 당장 가서 목욕할 채비를 해라! 내 오늘 여기 계신 남작 영애에게서 그 잘난 때밀이라는 걸 좀 받아봐야겠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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