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프리트 황태자에게 피 맛에 미친 놈이라는 수식어가 붙은 건 지금으로부터 9년 전.
카데베르 제국의 제2황자가 세상을 뜬 직후였다.
공식적으로는 그가 불의의 사고로 인해 사망한 것으로 공표되었지만, 이미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한 가지 소문이 있었다.
바로 프리트 황태자가 그를 살해했다는 것이었다.
두 황자가 매일 함께 검술 연습을 하던 황족 전용 연무장.
갑자기 이어진 끔찍한 비명을 듣고 하인들이 달려갔을 땐.
이미 깔끔하게 잘려나간 제2황자의 머리통이 새파란 잔디 위에 이리저리 피를 묻히며 굴러다니고 있었다.
“저, 저하……?”
그 붉은 핏자국은 마치 범인이 누구인지 증명이라도 하듯, 프리트 황태자의 장검으로 길게 이어져있었다.
“…….”
당시 고작 14살이었던 프리트는, 제 손으로 베어낸 아우의 머리를 그저 영혼 없는 눈동자로 지켜보고 있었다는 것이 소문의 전말이었다.
그저 떠도는 유언비어로만 끝났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마치 그 풍문을 몸소 증명이라도 하듯.
그날 이후 프리트는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전쟁에 참전하며 미친 듯이 적군의 목을 베어냈다.
피를 흠뻑 뒤집어쓰고도 소름 끼치게 미소 짓는 그의 모습은 마치 자신이 죽인 적군의 피로 샤워하는 것을 즐기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결국 그는 오늘날까지도 피 맛에 미친 황태자라는 수식어를 떼어낼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런 그가.
지금 자신의 손에 끼워진 정체불명의 초록색 물건을 이리저리 앞뒤로 살피고 있었다.
***
변방 시찰 도중 반란군을 진압하고 돌아온 프리트는, 발레아나 공주를 보기 위해 잠시 그녀의 방에 들렀다.
공주의 부재를 확인하고 돌아서려던 찰나.
프리트는 발레아나의 침대 위에 올려져있던 물건에 그만 호기심이 생기고 말았다.
그건 난생처음 보는 성질의 것이었다.
‘대체 이 꺼끌꺼끌한 초록색 괴주머니의 정체가 뭐지?’
제국의 수도로 돌아오던 날, 광장을 행차하면서도 얼핏 보았던 물건이었다.
광장 한복판에 새로 오픈한 가게 앞에 이 요사스러운 물건이 형형색색으로 진열되어 있었다.
‘저런 물건은 난생처음 보는군.’
게다가 가게 앞에는 커다랗게 안내문이 붙어있기까지 했다.
[물량 부족으로 인해 구매를 1인당 한 장으로 제한합니다.]
대관절 저게 무엇에 쓰는 물건이기에, 이 부유한 제국에서 물량 부족 사태가 일어났단 말인가?
그렇게 황궁으로 돌아왔을 때, 프리트는 제 방 안에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선물 더미를 보고 또다시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대부분의 선물 상자 안에서 아까 본 그 물건들이 쏟아져 나왔으니까.
‘물량 부족이라더니……?’
프리트는 제 발밑에 어지럽게 흩어져있는 물건들을 내려다보았다.
디자인은 각기 달랐지만, 모두 광장에서 봤던 천 조각과 같은 물건이었다.
심지어 여기엔 프리트의 이름이 금사로 수놓아져 있기까지 했다.
‘이름까지……! 확실해, 이건 나를 저주하려는 물건이군.’
분노한 프리트는 그중 가장 기다란 디자인을 집어 들고 온 힘을 다해 양옆으로 잡아당겼다.
“그깟 저주 따위, 찢어발겨 주마!”
그의 구릿빛 팔뚝 위로 힘줄이 툭툭 불거져 나왔다.
하지만 그 정체불명의 천 조각은 늘어날 기미조차 보이질 않았다.
‘설마.’
프리트는 이번엔 천 조각을 동그랗게 묶어 에반스 매듭을 만들어보았다.
하지만 끈이 짧아 목을 매달기엔 길이가 충분치 않아 보였다.
‘……살해 협박으로 보낸 물건은 아닌가?’
그럼 대체 이 천 조각의 용도는 뭐란 말인가?
그렇게 프리트에게 깊은 의문만 남겼던 이 물건이, 제 하나뿐인 여동생인 발레아나의 방에서까지 발견되고 만 것이다.
그는 발레아나의 침대에 걸터앉은 채 이 까칠한 주머니를 벌려도 보고, 뒤집어도 보다가.
마침내 손에 끼워보았다.
자신이 잠시 떠나있던 사이, 제국에 무슨 일이 있던 게 분명했다.
아무튼 이 괴상한 물건이 프리트가 가는 곳마다 눈에 띄었으니까.
프리트는 손에 끼워진 그 물건으로 자신의 손바닥을 비벼보았다.
따가운 감촉이 느껴지자 그는 미간을 찌푸렸다.
‘설마 신종 고문 도구인가!’
그렇다면 다들 제게 이 물건을 선물한 것도 이해가 되었다.
하지만 감히 어떤 놈이 제국 황녀의 방에도 이런 위험한 물건을 갖다 놓았단 말인가.
분노한 프리트가 때수건을 손에서 빼려던 찰나, 그는 수건 위에 새겨져있는 이름을 읽고야 말았다.
-발레아나♡-
“!”
그는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이게 대체……?”
그때 마침 제 방으로 돌아온 발레아나 공주는 그를 발견하자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오, 오라버니!”
그녀는 반가운 마음에 부리나케 달려와 프리트의 품에 안기려 하였다.
하지만 프리트는 팔을 뻗어 공주의 이마를 손바닥으로 막아냈다.
파닥파닥.
제 오빠에게 팔이 닿지 않아 버둥거리던 발레아나는 이내 몸을 축 늘어트리곤 안기기를 포기했다.
“쳇……. 이리 오랜만에 뵈었는데도 반겨주지 않으시다니요.”
“귀찮게 하지 마라. 내가 없는 사이에 날파리 같은 놈들은 없었고?”
“날파리……?”
“없었군. 됐다.”
프리트는 공주의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방을 나가려다, 자신의 손에 그 요사스런 물건이 여전히 끼워져있음을 깨달았다.
“하아…….”
그는 제 손에 있던 것을 거칠게 잡아 빼서 침대 위에 툭 던져버렸다.
그리고 발레아나에게 그 물건의 정체에 대해 물으려 하던 찰나.
때수건을 발견한 발레아나가 잔뜩 신난 표정으로 먼저 말했다.
“오라버니! 드디어 휘온 공작에게 그걸 받으셨…… 흡!”
발레아나는 순간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휘, 휘온 오빠가 절대 사내의 때밀이에 대해선 아는 척하지 말랬는데!’
하지만 그녀의 입에서 예상외의 이름을 들은 프리트가 매서운 눈으로 발레아나를 보며 물었다.
“휘온? 갑자기 그 이름이 왜 나오는 거지, 발레아나? 설마.”
딱 봐도 수상한 이 물건을, 설마 휘온이 발레아나에게 선물한 것인가!
하지만 그가 뭐라 화를 내기도 전에, 얼굴이 붉어진 발레아나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에이 오라버니, 저에게는 부끄러워하지 않으셔도 돼요. 남자라고 그러지 말라는 법 있나요? 이 발레아나는 그런 것에 편견을 가지지 않아요.”
“그건 대체 또 무슨 소리냐!”
***
그렇게 해서.
업무 때문에 오전에 이미 황궁을 한차례 다녀갔던 휘온 에데카나는, 지금 또다시 프리트 황태자와 대면하게 된 것이었다.
프리트가 눈에 불을 켠 채 그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휘온은 그저 태연하게 입을 열었다.
“……제국의 황태자님을 또 뵈옵니다?”
무슨 일로 귀찮게 황궁에 두 번씩이나 걸음 하게 하냐는 소리였다.
그것도 황태자 개인 침실로.
프리트가 시퍼렇게 눈을 빛내며 입을 열었다.
“설마 두 시간 만에 다시 불렀다고 시위하는 건가, 지금? 잠시 못 본 사이에 매우 건방져졌군, 휘온.”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저하? 그저 이렇게 저를 자꾸만 은밀히 침소로 부르시니, 흉흉한 소문이라도 날까 염려되어 그러는 것이지요.”
“하기사 휘온 그대가 황태자비가 되는 것도 썩 나쁘진 않겠군. 여자라면 발레아나 하나만으로도 귀찮아 죽겠으니까 말이야.”
“제발 농담이라도 그런 끔찍한 소리는 하지 마십시오.”
자신을 향해 손사래 치며 질색하는 휘온에게, 프리트가 눈을 가늘게 뜨고는 물었다.
“오늘 발레아나가 재미있는 얘길 하더군. 휘온 네가 나한테 무슨 초대권을 줄 예정이었다지?”
“초대권? 그게 뭔……?”
거기까지 말하던 휘온의 눈이 별안간 크게 확장됐다.
휘온은 잊고 있었다.
프리트 황태자를 팔아넘겨 발레아나 공주에게 때밀이 문화를 전파했던 것을.
‘아악, 공주님……! 제가 그렇게 모른척해 달라고 말씀드렸는데!’
프리트가 휘온을 향해 미소 지으며 물었다.
“그 때밀이라는 것이, 이 제국 내에서 아주 유행하고 있는 모양이야?”
휘온은 침을 꿀꺽 삼켰다.
자칫했다간 프리트가 산수이에 대해서 알게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는 서둘러 이 대화를 끝내야겠다는 마음뿐이었다.
“아하하……. 귀부인들 사이에서는 인기가 좀 있는 모양이더군요.”
“그렇다기엔 발레아나가 아주 극찬을 하던데.”
휘온이 슬쩍 시선을 피했다.
“그야 공주님께서 요새 피부 미용에 관심이 지대하시다 보니.”
“게다가 휘온 네놈이 비덴탕이란 곳의 최대 투자자라지, 아마?”
꿀꺽.
휘온의 등줄기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그런데 말이야. 왜 아침에 나와 만났을 땐 때밀이에 대해 일언반구도 없었지, 휘온? 혹시 나에게 뭐 숨기는 거라도 있나?”
“숨기는 거라뇨. 무슨 그런 섭섭한 말씀을, 하하…….”
“하긴, 우리 사이에 무슨 비밀이 있겠어.”
프리트가 휘온의 어깨를 손바닥으로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
“휘온 네가 나를 그토록 생각하며 준비해두었다는, 그 유명한 비덴탕의 때밀이를 하루빨리 받아보았으면 좋겠군.”
그렇게 말하며 프리트가 호쾌한 웃음을 터뜨렸다.
그런 프리트를 바라보며 망했다고, 휘온은 생각했다.
이제 황태자가 산수이와 만나게 되는 상황을 피할 수 없게 되어버린 것이다.
휘온은 스스로 제 무덤을 판 듯한 기분이 들었다.
***
에데카나 공작저의 새벽녘.
휘온은 조용히 침상에서 일어나 방문을 살짝 열어 복도를 살펴보았다.
다행히 모두가 잠든 복도엔 정적만이 가득했다.
휘온은 소리가 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문을 닫고는, 책상 위에 놓여있는 편지를 전령조의 다리에 묶어 창문 밖으로 날려 보냈다.
“빨리 와라, 빨리…….”
휘온이 자신의 손톱을 잘근잘근 깨물며 침실에서 맴돌기를 몇 시간.
이윽고 창문 너머에 검은 짐승이 나타났다.
드래곤 모습의 얀피르가 다시금 휘온의 창가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순간 얼굴이 밝아진 휘온이 창문을 거침없이 열어젖히며 말했다.
“얀피르! 대체 왜 이렇게 늦은 거냐! 어서 들어와라.”
“너 이 자식, 지금이 몇 신줄 알고 오라 가라 하는 거야.”
“겨우 새벽 3시인데.”
“하…….”
사람의 모습으로 돌아온 얀피르가 휘온의 침실 안으로 가볍게 착지해 들어오며 말했다.
“그래서 주인에 대한 아주 중요한 얘기라는 게 뭔데?”
휘온이 얀피르를 향해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너, 산수이가 다른 사내의 때를 밀어주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지?”
얀피르가 송곳니를 드러내고는 그르렁거렸다.
“그야 그 자식의 뼈와 살을 분리하고 싶을 만큼 싫지.”
“그럼 그자가 제국 최고의 권력을 가진 자라면?”
“권력이고 나발이고 주인을 위협하는 놈들은 다 찢어 죽여야지. 근데 왜 자꾸 그런 걸 물어? 네놈도 주인한테 때 밀었었잖아? 왜, 이제라도 죽여줄까?”
원래 인간은 자기 허물을 보지 못하는 법이었다.
휘온은 일전에 얀피르 몰래 산수이에게 때를 밀었던 일을 떠올리며 헛기침을 한 후 말을 이었다.
“그럼 산수이에게 때를 밀려는 자가 제국의 황태자 저하라면?”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