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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 세신사 영애님-36화 (36/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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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그날이 왔다.

사실 휘온은 아침부터 목욕재계를 한차례 마친 후였다.

그녀가 자신의 때를 밀어주기 전, 최대한 깨끗한 몸뚱이로 만들어놓고 싶었으니까.

사실 이쯤 되면 진짜 목적은 때를 미는 것이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드디어 산수이에게 또다시 세신을 받는군. 하, 생각만 해도 정말 너무 좋아서 미칠 노릇이야.’

그동안 내심 자존심이 상해 말은 못 했지만, 얀피르를 얼마나 부러워했던가.

언제라도 산수이에게 공짜로 때를 밀 수 있으니까 말이다.

밉살맞게 제 앞에서 약을 올리던 얀피르의 얼굴이 떠오르는 듯했다.

하지만 이제 그것도 다 지나간 이야기일 뿐.

마침내 자신에게도 광명이 찾아왔으니까.

이윽고 산수이가 탄 마차가 공작저 앞에 도착했다.

휘온은 이전과는 달리 한참 전부터 공작저 앞을 서성이다가, 저 멀리서 산수이의 마차가 보이기 시작할 때부터 손을 흔들어댔다.

그런 제 주인을 바라보는 사용인들은 경악했다.

‘주, 주인님께서 체면도 잊으신 채 마차를 향해 손을 흔들고 계신다!’

매일 일에만 치여 살던 휘온이 하루가 멀다고 비덴비덴 남작령으로 출퇴근하다시피 할 때부터 대충 눈치는 채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눈앞에서 제 주인이 팔불출인 걸 목격하는 건 또 다른 문제였다.

‘도대체 저 산수이라는 남작 영애님은 어떤 마성의 매력을 가진 분이시란 말인가……!’

일전의 방문에선 하도 휘온에게 천대받던 산수이라, 사용인들 역시 그녀에게 별 관심을 두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얘기가 달랐다.

스물세 해가 되도록 여자는 둘째 치고 그 누구에게도 관심을 주지 않던 휘온이었다.

그들은 제 주인의 이런 변화에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윽고 산수이가 마차에서 내리자, 휘온은 소중한 것을 대하듯 그녀의 손을 귀하게 잡고 에스코트하며 입을 맞추었다.

“먼 길 오시느라 고생했습니다, 산수이.”

“아닙니다. 기쁜 마음으로 왔는걸요.”

그 말을 들은 휘온의 입이 헤벌쭉해지며 귀에 가서 걸렸다.

그런 휘온의 모습을 본 사용인들은 모두 마음속으로 외쳤다.

‘우, 웃으셨다! 공작님께서 웃으셨어!’

자신들의 주인이 저렇게나 웃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니?

이제 사용인들의 눈에는 산수이가 강림한 천사로 보일 지경이었다.

그들은 산수이를 향해 마음속으로 경건한 기도를 올렸다.

‘제발 공작 부인이 되어주십시오, 영애님! 영애님이 나타나신 후부터 우리 공작님이 달라지셨단 말입니다!’

***

마침내 그 시간이 다가왔다.

휘온은 떨리는 마음으로 허리에 수건을 감은 채 마사지 베드에 길게 누웠다.

예전에 이곳에서 처음으로 산수이에게 때밀이를 받았던 순간이 떠오르자, 왠지 감회가 남달랐다.

‘아…… 정말로 이런 날이 올 줄 몰랐군.’

곧이어 손에 이태리타월을 감은 산수이가 욕실로 들어왔다.

“휘온, 그럼 시작할게요.”

“잘 부탁합니다, 산수이.”

곧이어 산수이의 눈앞에 뽀얗게 관리된 그의 등짝이 드러났다.

산수이는 휘온의 몸 위에 때수건이 감긴 손을 척 올려놓았다.

‘때를 밀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얀피르의 몸이 단단한 보석 같다면 휘온은 꼭 부드러운 비단결 같…….’

그녀는 이내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되뇌었다.

‘지, 집중!’

분명 도를 닦아 해탈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번뇌가 남아있던 모양이었다.

‘아직도 수행이 부족하구나. 집에 돌아가면 좀 더 명상해야겠어.’

산수이는 심호흡을 한 뒤 세차게 휘온의 등을 밀기 시작했다.

환희에 젖은 휘온이 속으로 외쳤다.

‘녹는다! 내 몸이 녹고 있어……!’

순간 휘온의 마음속에서 복잡한 감정들이 휘몰아쳤다.

귀족가 영애, 그것도 자신이 연모하는 여인에게 때를 밀어달라고 하는 것은 여전히 부끄러웠으니까.

하지만 이 제국에서 산수이만큼 때를 시원하게 미는 자는 없었다.

그렇기에, 휘온에게 있어서 산수이의 세신은 마치 달콤한 고문과도 같았다.

‘정말이지, 내가 혼자 미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아무리 부끄러워도, 도저히 끊을 수가 없어.’

게다가 일전의 사건을 해결한 이후, 정말 오랜만에 맛보는 때밀이였기 때문에 그 기쁨은 더욱 컸다.

그렇게 시원함이 궁극에 달하려던 순간.

산수이의 신비한 능력이 또다시 그에게 발동되었다.

휘온은 산수이를 향해 현재 가장 풀리지 않고 있는 의문에 대해 물어보기 시작했다.

“산수이, 그대에게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산수이는 이제 뭐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

“네에-휘온. 무엇이든 물어보세요.”

“……사우나스라는 자가 대체 누굽니까?”

“!?”

너무나 당황한 산수이는 때 밀던 손을 멈췄다.

그녀가 휘온을 바라보며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휘, 휘온이 사우나스를 어떻게 알아요?”

“얀피르가 말해줬습니다.”

휘온은 자신의 조동아리가 왜 이렇게 자꾸 멋대로 지껄이고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아무튼 멈추지 않고 계속 말했다.

반면 산수이의 마음속에선 천둥과 번개가 내리치고 있었다.

‘들었구나……! 그날 묘지 앞에서 내가 하는 말을 얀피르가 들었어! 어디까지 들은 거지? 왜 얀피르는 내게 직접 묻지 않았지? 아니 그것보다, 둘이 사이 안 좋은 거 아니었어? 왜 휘온이 알고 있는 건데?!’

산수이는 일단 조심스럽게 휘온에게 물어보았다.

“……얀피르가 어디까지 들었다던가요?”

때밀이의 마법에 취한 휘온은 역시나 물으면 묻는 대로 술술 털어놓았다.

“그대가 어디론가 돌아가고 싶어 하는데, 사우나스가 그 방법을 알고 있는 것 같다고 하더군요.”

산수이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히 산수이 영애의 몸속에 나의 영혼이 들어와 있다는 얘기는 못 들은 모양이구나.

그녀는 핑곗거리를 만들기 위해 머리를 빠르게 굴렸다.

‘아, 뭐라고 둘러대지…….’

이윽고 가짜 눈물을 짜낸 그녀는,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흐느꼈다.

“으흑…… 휘온. 사실은……!”

울먹이는 산수이를 본 휘온이 놀라 벌떡 일어났다.

“사, 산수이 왜 우는 겁니까! 괜찮으니 제게 천천히 말해 봐요.”

산수이는 계속해서 눈물을 뚝뚝 흘리며 아카데미 여우 주연상급 연기를 펼쳐나갔다.

“흑. 사실은 돌아가신 부모님이 사무치게 그리워서, 두 분이 살아계시던 때로 돌아가고 싶었답니다. 사우나스는 그러니까…… 제가 아주 어릴 때 키우던 개 이름이에요.”

이 말도 안 되는 개소리를 믿어줄까?

산수이는 조금 걱정이 되었다.

하지만 그녀의 연기는 휘온에게 제대로 먹혀들어 갔다.

휘온이 결연하게 말했다.

“전 그런 줄도 모르고……! 걱정하지 마십시오, 산수이. 부모님의 빈자리는 그 누구도 채워줄 수 없겠지만, 제가 그대를 꼭 다시 행복하게 만들어드리겠습니다!”

걱정스러운 표정의 휘온 앞에, 산수이 역시 마지막까지 혼신의 연기를 다했다.

“고마워요, 휘온.”

그러고는 속으로 기도했다.

‘사우나스 님, 용서해주세요……!’

키우던 개라고 해서 죄송해요.

***

목욕을 마친 휘온은 아까 자신이 왜 그렇게 미친놈처럼 속내를 술술 털어놓았는지 알 길이 없었다.

마치 술에 취한 듯, 모든 것이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산수이와 있다 보면 내 마음이 무장해제 되는 것만 같단 말이지.’

하지만 어쨌든 결과적으론 그의 걱정이 해소되었다.

산수이는 흑마법에 손을 대려던 것이 아니라 그저 부모님과 자신의 애완용 개, 사우나스를 그리워하던 것이 아닌가.

산수이가 남작저로 돌아간 후, 휘온은 뒷골목 조사를 마치고 돌아온 얀피르와 재회했다.

두 남자는 공작저 마당에 놓인 테이블에 마주 앉았다.

곧이어 사용인들이 고급 와인 한 병과 함께 간단한 다과를 들고 왔다.

휘온은 얀피르에게 사우나스의 정체에 대해 알려주었다.

물론 산수이가 자신의 때를 공짜로 밀어줬다는 얘기는 쏙 빼놓고 말이다.

“내가 알아본 결과, 사우나스는 그녀가 어릴 적 키우던 개 이름이라더군.”

얀피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사우나스가 개 이름이었다고? 남작저에서 개를 키웠었단 얘기는 못 들었는데…….”

“뭐, 산수이가 아주 어렸을 때 키운 모양이겠지.”

이에 얀피르가 끄덕이며 말했다.

“역시, 주인은 아직도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거야. 혹시라도 나쁜 마음을 먹지 않도록 계속 보살펴야겠어.”

“이하 동문이다.”

두 남자는 서로 와인 잔을 맞부딪치며 건배했다.

우선은 둘이 함께 합심해서 산수이 그녀를 행복하게 만들어 주는 일에만 집중하자고, 휘온과 얀피르는 다짐했다.

***

제국 변방에 위치한 한 영지.

제국의 황태자 프리트 폰 카데베르는 마지막 반란군의 두개골에 칼을 꽂아 넣었다.

반란군의 머리가 으깨어지며 새빨간 핏물이 프리트의 입가에 길게 튀었다.

그 핏줄기는 마치 미소 짓고 있는 입꼬리처럼 길게 이어졌다.

그와는 상반되게 프리트 황태자의 자태는 마치 한 마리의 거칠고 아름다운 사자 같았다.

다부진 체격에 푸른빛을 뿜어내는 눈동자.

그의 찬란한 금발 머리가 바람에 처연히 흩날렸다.

곧이어 이쪽으로 달려오던 병사 한 명이, 조금 전의 머리 없는 시체를 발견하곤 구역질을 했다.

“우, 우욱……!”

병사의 구토가 프리트의 발에 살짝 튀자, 그의 미간이 심각하게 짓구겨졌다.

프리트가 병사의 멱살을 가볍게 쥐며 으름장을 놓았다.

“네놈도 따라서 죽고 싶나? 더럽게 어디에다 구토를 하는 거야.”

“사, 살려주십시오. 저하……!”

프리트는 공포에 질린 병사의 눈동자를 빤히 바라보다, 이내 재미없다는 듯 그를 바닥으로 휙 내던지며 말했다.

“철수.”

이윽고 동료들이 달려와, 넘어져있는 병사를 부축했다.

“자네, 조심했어야지! 방금 개죽음당할 뻔하지 않았나!”

“자네들은 저 사체를 못 보았는가? 대체 왜 매번 머리를 박살 내시느냔 말일세!”

“하긴, 자네는 전장이 처음이니 모를 수도 있겠군…….”

“뭔데 그러는가? 뜸 들이지 말고 어서 말해보게!”

“그게, 적을 도륙할 때 저하의 몸으로 최대한 피가 많이 튀게 하기 위해서라더군.”

“어, 어째서?!”

“하아. 자네, 황태자 저하의 별명도 들어보지 못한 것인가? 저분은…….”

병사는 주위를 살핀 후 귓속말로 조용히 속삭였다.

“제 혈육도 죽일 정도로, 피 맛에 미친 분이 아닌가.”

“혀, 혈육을?”

그때 갑자기 돌아선 프리트와 눈이 마주친 그들은 곧바로 자리에서 흩어졌다.

“…….”

스스로 만들어 놓은 아비규환 속에 홀로 고고하게 서 있는 이 남자.

하지만 자신의 칼에 묻은 핏자국을 바라보는 프리트의 눈에 슬픔이 서려있다는 건.

아무도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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