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얀피르는 산수이와 함께 하늘을 날며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아까 주인이 묘비에 대고 했던 얘기들은 다 뭐지? 대체 어디로 돌아가고 싶다는 거야? 게다가 얼핏 들렸던 그 이름…….’
얀피르는 비덴비덴 남작 부부의 묘지 앞에서 산수이가 울며 내뱉은 ‘사우나스’라는 이름을 떠올렸다.
도대체 사우나스가 누구지?
아무리 기억을 되짚어 봐도 마땅히 떠오르는 이가 없었다.
산수이에게 직접 물어볼까도 싶었지만.
아까 묘지에서 자신을 마주치자 크게 허둥대던 산수이의 모습이 떠올랐다.
‘어차피 주인은 대답해주지 않을 것 같은데. 어디 대신 물어볼 만한 인간 없나……?’
순간 얀피르의 머릿속에 재수 없는 얼굴이 떠올랐다.
산수이에 관한 일은 웬만해선 휘온에겐 물어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제국 땅에 그놈보다 똑똑한 자는 없는 것 같았다.
‘하는 수 없지. 휘온한테 가서 도대체 사우나스라는 놈이 누군지 황실 도서관을 다 뒤져보라고 해야겠다.’
그렇게 생각하며 얀피르는 지상을 향해 하강했다.
***
모두가 잠든 새벽.
성체가 된 후 원하는 크기로 자유자재 변신이 가능하게 된 얀피르는, 다시금 작은 새끼 드래곤의 모습으로 되돌아갔다.
그러고는 하늘 높이 날아올라 구름 사이로 제 모습을 감췄다.
그가 향하는 곳은 바로 수도에 있는 에데카나 공작저였다.
얀피르는 숨을 크게 들이쉬며 공기 중에 흩어져있는 휘온의 냄새를 추적하기 시작했다.
이윽고 공작저 내에서 휘온의 침실 위치를 찾아낸 그는 창문으로 다가가 앞발로 유리를 톡톡 두드렸다.
“으음…….”
하지만 휘온은 일어날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성가시게 하는군.”
얀피르는 자신의 앞발에서 발톱을 꺼내 들었다.
달빛에 반사된 그의 발톱이 날카롭게 빛났다.
그는 곧 휘온 침실의 창문 유리를 천천히 긁기 시작했다.
끼기기기긱-
“으아아악……!”
유리 긁는 소리에 화들짝 놀라 깨어나는 휘온을 보며, 얀피르가 코웃음을 쳤다.
“하여간 예민한 놈 같으니라고…… 크릉.”
아직 잠에서 덜 깬 휘온은 이윽고 창문 너머에서 자신을 응시하고 있는 작은 드래곤을 발견했다.
“너, 너는? 설마 얀피르……?”
“알아봤으면 빨리 문 열어.”
***
휘온은 제 침실로 날아 들어온 한 마리의 작은 드래곤을 보곤 참을 수 없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얀피르 너 그 모습은…… 푸흡! 정말 앙증맞군!”
그 말에 오만상을 찌푸린 얀피르가 휘온을 향해 차갑게 내뱉었다.
“죽고 싶냐?”
“그 귀여운 크기로 날 어떻게 죽일 수 있을지 기대되는데?”
“그게 소원이라면 보여줘야지.”
순간 얀피르의 눈이 번쩍 빛나더니, 이내 그의 몸이 몇 배로 불어나기 시작했다.
“으, 으아악!?”
침실을 가득 채울 만큼 커져버린 얀피르가 자신의 꼬리로 휘온을 돌돌 말아 제 눈앞으로 들어 올렸다.
“어디 또 귀엽다고 말해보시지?”
“사, 사람 살려!”
하지만 곧이어 침실의 문이 벌컥 열리며, 공작저의 집사가 방 안으로 들이닥쳤다.
“공작님, 무슨 일이십니까!”
그러나 집사의 눈앞에 놓인 건, 그저 흐트러진 옷차림새로 바닥에 널브러져있는 휘온 단 한 사람이었다.
“공작님……?”
“크, 크흠! 아무것도 아니다.”
얀피르는 어느새 다시 새끼 드래곤으로 돌아가 휘온의 등짝에 찰싹 달라붙어 있었기에 집사에게 들키지 않을 수 있었다.
“아니 그런데 왜 바닥에 그러고 계신…….”
“나, 나쁜 꿈을 꾸었다! 그만 나가봐도 좋다.”
집사가 방을 나선 후에야 얀피르는 인간의 모습으로 변해 의자에 걸터앉았다.
“영광인 줄 알아. 주인을 제외하면 내 본체를 본 건 네놈이 유일하니까.”
휘온은 비틀거리며 벽에 걸려있던 군청색의 가운을 몸에 걸쳤다.
그러고는 얀피르의 맞은편에 털썩 주저앉으며 중얼거렸다.
“영광 같은 소리 하네. 자는 사람에게 이게 얼마나 무례한 행동인 줄 모르는 건가? 대체 지금이 몇 신 줄은 아느냐?”
“응. 새벽 3시.”
“시간을 몰라서 물어본 게 아니다!”
“주인한테 안 들키려면 이 시간밖엔 안 돼.”
“대체 산수이 몰래 여기까지 온 이유가 뭔데? 너, 설마…….”
갑자기 휘온의 팔에 소름이 돋았다.
혹시 자신을 죽이기 전에 마지막으로 정체를 보여주러 온 건가.
“네놈…… 설마 날 죽이러 온 거냐?!”
하지만 그런 휘온의 말에 얀피르는 크게 웃었다.
“에이, 죽일 거였음 벌써 손가락 하나만 튕겨서도 죽일 수 있었지. 굳이 뭐 하러 여기까지 날아오냐? 날개만 아프게.”
“이 자식이……!”
한동안 두 남자의 만담이 이어지다, 이윽고 얀피르가 휘온을 향해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너 말이야, 황실 도서관 출입할 수 있지? 가서 뭐 하나만 조사 좀 해 줘.”
“내가 왜 그래 줘야 하지?”
“……산수이에 관한 일이니까.”
산수이라는 이름을 들은 휘온이 움찔했다.
대체 무슨 일이기에 이렇게 새벽부터 자신을 몰래 찾아와 의뢰를 한단 말인가.
“그녀에게 혹시 무슨 일이 생겼나?”
“그런 건 아닌데, 주인이 좀 이상해.”
“이상하다고? 자세히 좀 말해봐라.”
얀피르는 참담한 표정으로 미간을 찌푸리며 말을 이었다.
“주인이 제 부모 비석을 향해 돌아가고 싶다…… 라고 했어.”
그 말에 휘온이 의자를 박차고 일어났다.
“뭐, 뭐? 그녀가 설마 부모를 따라 죽기라도 하려는 것이냐?!”
“나도 그게 걱정돼서 널 찾아온 거다.”
휘온은 자신의 머리를 쥐어뜯으며 방안을 미친 듯이 맴돌았다.
‘미치겠군! 안 그래도 비덴비덴 남작 부부가 살해당했다는 건 나에게도 충격적인 일이었는데. 영애의 상태가 당연히 정상은 아닐 거라고 짐작은 했지만……!’
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었다.
왜 산수이는 죽고 싶다거나, 부모를 따라가고 싶다는 표현이 아닌, ‘돌아가고 싶다’고 말했을까?
게다가.
휘온이 얀피르를 향해 물었다.
“……그런데 내게 왜 하필 황실 도서관에 가 보라는 것이지?”
“사실 주인이 또 하나 알 수 없는 말을 했거든. 돌아가고 싶은데 방법을 모르겠다고. 사우나스라는 자가 대체 언제 자신에게 오느냐고 말이야.”
얀피르가 휘온에게 부탁하며 말했다.
“뒷골목 정보망은 내가 직접 조사할 테니까, 넌 황실 도서관에 가서 사우나스라는 놈이 누군지 알아봐 줘.”
휘온의 눈이 커졌다.
그가 불안한 목소리로 말했다.
“설마 그녀가 흑마법에 손을 대려는 것은 아니겠지? 과거로 돌아가고 싶다거나?”
얀피르 역시 끄덕였다.
“가능성 있지. 혹은 죽은 부모를 되살리려 하는 것일지도.”
“그럼 역시, 사우나스는 흑마법사인가……?”
두 남자는 심각한 오해 속에 빠져있었다.
어찌 됐건 흑마법은 제국에서 금지되어 있었다.
만에 하나라도 산수이가 흑마법에 손을 댄다면 큰 처벌을 면치 못할 것이었다.
한참을 고민에 잠겨있던 휘온이 얀피르를 향해 말했다.
“내일 아침 당장 황실 도서관으로 가서 해당 분야의 모든 서적을 독파하겠다. 사우나스란 자 역시 제국 전체를 뒤져서라도 찾아내겠어. 대신…….”
휘온이 비장한 각오로 말했다.
“당분간은 너와 내가…… 동맹을 맺어야겠다.”
“동맹? 내가 왜 너랑 그딴 걸 맺어야 하는데?”
얀피르는 어이없다는 듯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휘온이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그를 향해 물었다.
“너 산수이를 좋아하지? 주인으로서, 친구로서 말고. 이성으로서 말이다.”
“당연한 걸 뭘 물어.”
“나 역시 그렇다. 하지만…….”
휘온이 결심한 듯 말했다.
“지금은 누가 그녀의 마음을 얻는지가 중요한 게 아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게 우선이야. 만일 산수이가 잘못된다면 너와 내가 이렇게 다투는 것이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이냐.”
그렇게 말하며 휘온은 얀피르에게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얀피르 역시 고민 끝에 고개를 끄덕이며 휘온의 손을 잡았다.
“좋아, 그럼 아주 잠깐만 너와 같은 편이 되도록 하지. 물론 사우나스란 놈을 찾아낼 때까지만이야.”
“그건 내가 하고 싶은 말이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얀피르와 휘온은 굳게 악수하며 동맹을 맺었다.
그렇게 두 남자의 착각이 깊어지며 밤도 함께 깊어져만 갔다.
***
휘온은 아침 댓바람부터 황실 도서관에 출입했다.
일전에 이미 한 번 들어가 본 터라 이젠 뭐 거칠 것이 없었다.
하지만 도서관에 있는 모든 서적을 뒤져도 사우나스라는 이름에 대한 단서는 코빼기도 찾을 수 없었다.
그나마 찾아낸 거라곤 사우나스라는 이름이 고대 신들의 이름과 그 표기법이 유사하다는 것뿐.
그는 제국 신화론의 첫 장을 펼쳤다.
“태초에 모든 존재는 하나의 뿌리에서 출발해 무수한 별들처럼 태어나고, 또 소멸하였다…….”
휘온은 계속해서 신화론을 읽어 내려갔다.
[몇백 년 전, 마왕이 이끄는 마계 군단이 인간계를 침략했다.
당시 인간들과 동맹을 맺고 있던 드래곤 제국은 이 전투에서 크게 패하여 멸망했다.
그렇게 마족이 온 세상을 삼키려던 순간, 천족의 참전으로 전세는 뒤바뀌었다.
결국 마왕은 죽고 남겨진 마족들은 지하로 쫓겨 갔다.]
하지만 이런 과거의 기록까지 모조리 뒤져봐도 사우나스라는 이름은 찾아볼 수 없었다.
제국 내에 거주하는 모든 이들의 명단을 구해 읽어도 봤지만 역시나 그런 이름은 존재하지 않았다.
‘이건 뭐, 황실 도서관이라면서 도움 되는 정보는 하나도 없군. 이곳에서는 더 얻을 게 없겠어. 일단은 얀피르의 답을 기다리는 수밖에…….’
지금쯤 얀피르가 정보를 캐기 위해 제국의 모든 뒷골목을 뒤지고 있을 터였다.
휘온은 책을 정리하고 도서관 문을 나섰다.
그때였다.
밖에서 휘온을 기다리고 있던 그의 호위 기사가 다급히 달려왔다.
“공작님!”
“음? 무슨 일이지?”
그가 휘온에게 서신 하나를 다급히 건네며 말했다.
“산수이 남작 영애님으로부터 온 서신입니다! 일전에 명하신 대로 수령한 즉시 지체 없이 가져왔습니다.”
산수이가?!
휘온은 다급한 마음을 부여잡고 서신을 빠르게 펼쳐보았다.
[휘온, 일전에 약속한 것을 지키려고 합니다. 편하신 시간에 공작저로 방문하도록 하겠습니다.]
일전에 약속한 것이라면 그거 하나뿐이었다.
‘때, 때밀이……!’
휘온의 심장이 요동쳤다.
드디어 산수이에게 또다시 무료로 세신을 받는 것이다!
그간 얀피르가 자신을 약 올릴 때마다 얼마나 울화가 치밀었는지 모른다.
보다폰 백작 사건 이후 황실에서 내려준 표창을 받을 때도 이보다 기쁘진 않았다.
‘그래, 백작 검거에 혁혁한 공을 세운 내게 주어지는 상이 고작 제국의 황제께서 하사한 표창 따위라니! 이 정도는 되어야지!’
휘온은 스스로 생각해도 자기 자신이 너무 기특하고 뿌듯했다.
‘잘했다, 휘온! 너무 잘했어……!’
그런데 갑자기 휘온의 머릿속에 얀피르가 떠올랐다.
어젯밤 그와 나누었던 뜨거운 악수가 머릿속을 가득 메우며, 휘온은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으, 으음. 그자와 동맹을 맺자마자 배신을 하는 듯한 기분이 들긴 하지만……. 이 때밀이는 그전에 산수이와 먼저 약속했던 것! 난 결코 동맹을 깨는 것이 아니다!’
스스로를 합리화하며, 휘온은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원래대로라면 먼 걸음 해야 할 산수이를 위해 내가 직접 남작저를 방문하겠지만, 그랬다가는 드래곤 놈에게 들킬 위험이 있다. 어쩔 수 없이 그녀를 공작저로 모시는 수밖에.’
휘온이 사용인에게 명했다.
“당장 가서 산수이 영애에게 전해라. 마차를 보낼 테니 내일 당장 오셔도 괜찮다고. 아니, 오늘이라도 좋다! 최대한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