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몇 해 전.
비덴비덴의 온천수가 끊긴 이후 남작령의 몰락만을 기다리던 보다폰 백작.
하지만 그는 남작이 새로운 사업을 구상해 다시 영지를 재건하려고 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안 돼! 이번 기회를 놓치면 영원히 비덴비덴을 이길 수 없을 거야……!”
그래서 꾀어냈다. 비덴탕에서 청소부로 근무하던 그의 사용인을.
온천수가 고갈되어 일자리를 잃은 후, 매일같이 술에 찌들어 살던 자라 포섭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남작이 수도로 출발하는 날짜와 시간을 알려주면 큰돈을 쥐여주겠다고 했다.
“정말로 금화를 주시는 겁니까?”
그랬더니 그 멍청한 놈은 저 때문에 주인이 죽게 되리란 것도 모른 채 그저 돈이 좋다며 정보를 술술 말해주었다.
보다폰에게 속아 사료로 위장한 유푸스 꽃을 남작저의 말들에게 먹인 것도 바로 그였다.
결국 보다폰의 계획대로 수도로 향하던 비덴비덴 남작의 마차는 말들이 쓰러지며 전복되었다.
그 마차 안에 남작 부인과 딸까지 함께 타고 있었다는 걸 깨달은 건 이미 사건이 벌어진 후였지만 말이다.
“안 돼! 산수이, 내 딸아!”
남작 부인은 추락 직전 온 몸을 던져 딸을 지켜내느라 가장 먼저 사망했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까지도 남작 부인의 품 안에 있던 산수이 영애는 가까스로 목숨만은 건질 수 있었다.
그렇게 한 평생을 시기와 질투에 눈이 멀었던 보다폰 백작은, 결국 제 손으로 자신의 첫사랑인 비덴비덴 남작 부인을 죽게 만든 것이다.
“그녀가 죽다니……! 이게 다 그 멍청한 청소부 놈과 비덴비덴 남작 때문이야!”
한편 그 청소부는 자신의 과오가 탄로 날까 두려워 처자식도 버린 채 보다폰 백작령으로 야반도주해 왔다.
“이 멍청한 놈! 마차 안에 남작 부인도 함께 타고 있었다는 얘길 왜 진작 하지 않은 것이냐!”
“저는 몰랐습니다, 정말입니다!”
“앞으로도 계속 입단속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 모든 게 밝혀지는 날엔, 네놈 역시 목숨을 부지하기 힘들 테니까.”
그는 부리기에 아주 좋은 말이었다.
말을 잘 들으면 언젠가 남작령에서 처자식을 데려와 주겠다고 했더니 무슨 명령이든 곧잘 따랐다.
물론 보다폰 백작은 그의 처자식이 누군지 관심도 없었다.
대충 그들이 가난에 쫓겨 실종되었다며, 자신이 열심히 수색 중이라고 거짓말로 둘러댔다.
그리고 긴 세월 동안 그를 부려왔다.
그렇게 비덴비덴 남작가 비극의 진실은 영원히 세상 속에서 묻힐 뻔하였다.
그의 마지막 양심 고백이 아니었다면 말이다.
***
우테의 전남편을 본 보다폰 백작은 격노하여 소리 질렀다.
“자네, 처자식을 다시 만나고 싶지 않은 것인가? 내 겨우 그들이 어디에 살고 있는지 찾았는데, 이젠 알고 싶지 않은가 보지?”
“예, 백작님께는 더 이상 들을 얘기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제 처는 비덴비덴 남작령에서 이태리타월 공장 총책임자가 되어 행복하게 잘살고 있었으니까요.”
“뭐, 뭐라고?!”
기겁하는 보다폰의 뒤로 산수이 역시 매우 놀란 모습이었다.
“그럼 당신이……?”
“예, 맞습니다. 제가 우테의 남편입니다. 아니, 이젠 전남편이라고 말해야겠지요.”
그는 산수이를 향해 무릎을 꿇고 오열했다.
“제 잘못을 조금이나마 씻을 수 있을까 하여 보다폰 백작의 증좌를 몰래 숨겨 에데카나 공작님을 찾아뵈었습니다.”
휘온이 그를 보며 말했다.
“자네가 없었다면 큰일 날 뻔했어. 고맙네.”
우테의 남편은 산수이를 향해 오열하며 외쳤다.
“돌아가신 남작 부부 어르신들을 생각하며 하루도 후회하지 않은 날이 없습니다. 이제 저를 죽여주십시오, 영애님……!”
***
보다폰 백작과 그 보좌관의 말로는 그야말로 끔찍했다.
수입법 및 유통법 위반에, 귀족 시해까지 저지른 그였으니 당연한 결말이었다.
다행히 크랑크 자작 부인은 황실 주치의들의 보살핌 아래 기적적으로 목숨을 건졌다.
그러나 제국민들을 가장 충격에 빠트린 건 바로 보다폰 백작이 비덴비덴 남작 부부 살해를 교사했다는 사실이었다.
이에 합당한 처벌로 그에게는 참수형이 내려졌다.
그러나.
형 집행을 불과 며칠 앞두고, 그는 유푸스 독 발진으로 인해 숨진 채 발견됐다.
“평소 원한을 가진 자가 많았는지 감옥으로 자객을 보낸 모양이더군요. 얼마나 고통에 몸부림쳤는지 옥사 내벽이 온통 손톱자국과 피로 범벅이 되어있었습니다. 차라리 예정대로 참수형을 당하는 게 고통은 덜했을 텐데.”
사건 현장을 둘러보고 온 휘온이 산수이에게 전해주었다.
우테의 전남편은 사건에 함께 가담하긴 했으나 살인 교사 및 독극물 유통에 대해서는 자세하게 알지 못했다는 점이 정상참작 되었다.
결정적으로 증거를 미리 빼돌려 범인 검거에 협조한 점 역시 고려되어 결국 참수를 면하고 무기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마지막으로 우테에게 그동안 미안했다는 말을 남긴 채 그는 떠나갔다.
산수이는 비덴비덴 남작령 내 모든 이태리타월과 탐폰 재고를 전수 조사하여 제품의 안전성을 재확인하였다.
이에 많은 이들이 다시 산수이를 믿고 제품을 구매하기 시작했다.
모든 것이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그러나 남작저에 드리워진 슬픔의 그림자는 쉽게 떨쳐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주인 내외께서 살해당하신 거였다고……?”
하지만 사용인들은 마음껏 소리 내어 울 수도 없었다.
산수이가 염려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산수이 역시 이 비극적인 사건에 대해 크나큰 애도의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진짜 자신의 부모를 잃은 것 같은 마음은 들 수 없는 게 당연했다.
지금 그녀의 몸속에 있는 건 산수이가 아닌 안수희의 영혼이니까.
며칠 후, 산수이는 흰 국화 두 다발을 품에 안고 홀로 가족 묘지로 향했다.
비덴비덴 남작 부부의 묘비에 헌화한 그녀는 무릎 꿇고 앉아 마음속으로 기도를 올렸다.
‘범인이 처형되었으니 부디 한을 푸시고 그곳에선 산수이 영애님과 함께 행복하게 살아가시길…….’
산수이는 남작 부부 내외의 비석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사실 여기 산수이 비덴비덴 남작 영애님의 비석도 함께 있어야 맞는 건데……. 이 몸을 멋대로 써서 죄송해요.”
그녀의 눈가가 붉게 번졌다.
산수이가 비석을 향해 말을 이었다.
“저도 이제 그만 돌아가고 싶은데 도저히 방법을 모르겠어요. 사우나스 님은 대체 언제쯤 제게 오실까요?”
그녀의 눈에서 눈물방울이 후드득 떨어졌다.
이런 자신이 끔찍하다고 산수이는 생각했다.
누군가는 죽고, 다쳤는데 나는 내 생각뿐이라니.
하지만 이제는 정말 원래의 세계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러나 방법이 보이지 않았다.
결국 산수이는 주저앉아 흐느끼기 시작했다.
뒤이어 무기력감, 자기혐오, 다시 돌아갈 수 없을 거란 불안감 등이 뒤섞이며 그녀의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때였다.
등 뒤로 누군가의 온기가 전해졌다.
단단한 두 팔이 뒤에서부터 그녀의 몸을 감싸 안았고, 이어서 익숙한 감각이 그녀의 볼에 닿아왔다.
어느새 그녀의 옆에 와 앉은 얀피르가 산수이의 볼에 흘러내리는 눈물을 핥고 있던 것이다.
“얀피르?”
“울고 싶으면 계속 울어도 돼. 내가 옆에 있을 테니까.”
산수이는 놀라 그를 바라보았다.
얀피르를 이렇게 가까이서 보는 건 실로 오랜만이었다.
그녀는 얼른 소매로 눈물을 훔치곤 물었다.
“어, 언제 왔어?”
설마 내가 하는 말을 모두 들은 건 아니겠지?
산수이는 아까 자신이 비석에 대고 뭐라고 지껄였는지 다시 기억해내기 위해 애썼다.
분명 사우나스의 얘기도 했던 것 같은데.
얀피르는 그런 산수이를 안심시키려는 듯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다 울었으면…… 내가 기분 전환 시켜줄까?”
***
성체 드래곤의 모습이 된 얀피르가 산수이의 앞에 내려앉았다.
그가 자신의 목을 바닥으로 낮게 내려주며 그녀에게 말했다.
“여기 올라타, 주인.”
산수이는 그의 목덜미 비늘을 쓰다듬어보았다.
부드럽고 따뜻한 감촉이 손에 와 닿자 응어리졌던 마음이 녹아내리는 듯했다.
그녀는 얀피르의 거대한 목덜미에 말을 타듯 올라앉았다.
얀피르는 그녀의 안전을 확인한 후, 날개를 펄럭이며 외쳤다.
“꽉 잡아.”
이윽고 산수이를 태운 얀피르가 지축을 박차고 새파란 하늘 위로 날아올랐다.
“우와아-!”
기분 좋은 바람이 두 사람의 얼굴을 스쳤다.
산수이의 시야 아래로 비덴비덴 남작령이 점점 작아져 갔다.
꼭 장난감 집들을 보는 것 같았다.
이윽고 제국 전체가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수도의 거대한 광장도, 드넓었던 휘온의 공작저도.
그리고 화려하게 빛나는 황궁 또한 점차 작아져 보이지 않게 되었다.
지금껏 자신을 괴롭히던 모든 문제들 역시 작은 점이 되어 멀어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얀피르가 구름 위로 더 높이 날아오르며 물었다.
“어지럽진 않아?”
“응! 신나! 너무 기분 좋아!”
활짝 웃는 산수이를 보며 얀피르 역시 기분 좋게 그르렁거렸다.
그렇게 둘은 오랜 시간 동안 구름 사이를 날아다녔다.
한참의 시간이 지났다.
산수이는 얀피르의 목에 늘어지게 엎드린 채 이 꿈같은 비행을 즐기고 있었다.
뺨에 닿는 그의 비늘 감촉이 참 좋다는 생각이 들어, 그녀는 얀피르의 목덜미에 자신의 볼을 마구 비벼댔다.
“그런데 말이야, 얀피르. 그동안 왜 날 피해 다닌 거야?”
“아…….”
얀피르는 잠깐 동안 말이 없었다.
“말하기 싫으면 할 수 없고. 그래도 이렇게 다시 내 옆으로 와 줘서 난 너무 좋아.”
이 말을 들은 얀피르는 고민했다.
사실대로 털어놓지 않으면 그녀가 오해하겠지.
그가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내가 성체가 된 탓에, 혹시라도 널 다치게 할까 봐 겁이 났어.”
“뭐어!?”
그럼 지난번 그 번식기가 해소되었던 게 아니라, 몇 날 며칠이고 계속되었단 얘긴가?
산수이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한편 얀피르는 자신의 목덜미에 닿는 그녀의 체온이 상승하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바보 주인.’
분명 또 혼자서 오해를 하고 있는게 분명했다.
얀피르가 산수이를 향해 말했다.
“주인.”
“으응?”
“지난번에 내가 널 원한다는 게 무슨 뜻이냐고 물었지?”
“어…… 그, 그랬었지?”
“나, 네가 좋아.”
“!”
여태껏 그에게서 좋아한다는 말은 수도 없이 들어왔었다.
항상 애처럼 안겨들고, 핥아대며 좋아한다고 치근댔었지.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자신을 돌아본 얀피르의 눈빛이 전에 없이 깊었으니까.
“내가 널 원한다는 건 그런 뜻이야. 널 좋아해. 참을 수 없을 만큼 많이.”
분명 매일같이 듣던 익숙한 말인데.
하지만 지금 이 순간부터는 더 이상 예전과 같은 느낌으로는 들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야, 얀피르. 저기, 난…….”
“물론 넌 아니란 거 알아.”
너, 나 남자로도 안 보잖아.
얀피르가 말을 이었다.
“천천히 기다릴 테니까, 그때가 되면 말해 줘.”
“그때?”
“너도 날 원하게 될 때 말이야.”
“워, 원…… 뭐?!”
얀피르가 씩 웃었다.
“기다릴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