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보다폰 백작은 어려서부터 비덴비덴 남작에게 깊은 열등감을 가지고 있었다.
성적, 대인 관계, 영지 경영력 등. 어느 것 하나 그를 이길 수가 없었으니까.
게다가 황궁에서 무도회가 열리는 날이면, 모든 영애들의 관심은 오로지 한곳으로만 쏠렸었다.
“하아. 비덴비덴 남작님은 오늘도 너무 멋있으세요.”
“그거 알아요? 비덴비덴 남작님하고 보다폰 백작님이 동갑이래요!”
“에엑? 말도 안 돼!”
‘이, 이것들이……!’
결국 보다폰이 오랜 세월 짝사랑했던 여인마저 비덴비덴 남작 부인이 되어 영원히 떠나버린 후.
보다폰은 비덴비덴 남작저를 무너트리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유푸스 꽃을 재배했고, 비덴탕에서 청소부로 일하고 있다는 하인 놈을 꾀어냈다.
비덴비덴이란 이름을 영원히 제국에서 사라지게 만들기 위해서는 그때 그 기회를 결코 놓칠 수가 없었으니까.
자신의 서재에서 옛 생각에 잠겨있던 보다폰 백작은, 빈 잔에 붉은 와인을 따르며 되뇌었다.
“그 산수인지 뭔지 하는 계집은 얼굴만 봐도 기분이 나빠. 제 아비를 쏙 빼닮았거든…….”
그는 핏빛 와인을 들이켠 후 책상 위에 탕 내려놓았다.
이제 꿈에 그리던 비덴비덴 남작가의 진정한 몰락이 눈앞에 있는 듯했다.
그때였다.
그를 찾아 하인 한 명이 다급하게 문을 열었다.
“배, 백작님!”
백작이 미간을 찌푸리며 신경질적으로 물었다.
“웬 소란이냐!”
“큰일 났습니다, 백작님! 당장 나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보다폰은 불안한 표정으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
보다폰 백작저에 도착한 산수이 일행.
얀피르는 자신이 둘러업고 온 백작 보좌관 놈을 응접실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는 입에 거품을 물고 혼절한 채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얀피르가 그를 발로 툭툭 차며 중얼거렸다.
“쓰레기 같은 놈. 이렇게 무서워할 거면서 그걸 남한테 판매할 생각을 해?”
아까 지하실에 있을 때, 산수이가 그의 눈앞에 탐폰을 흔들며 겁박하자 그는 곧바로 기절해 버렸다.
“아저씨, 이거 무슨 용도로 쓰이는 물건인진 알고 판매한 거지? 사람 몸에 들어갔을 때 얼마나 위험할진 생각 안 해 봤어? 지금 바로 아저씨 몸 안에도 집어넣어 줄까?”
“이런 정신 나간! 나한테 무슨 짓을 하려는 거냐!”
“으음, 어디가 좋을까……?”
산수이는 탐폰 끝에 매달린 실을 붙잡고는 그의 눈앞에서 빙글빙글 돌리면서 사악하게 웃었다.
그 모습을 본 백작 보좌관은 확신했다.
‘정말…… 정말이구나! 어디일진 몰라도 정말 할 셈이야, 저 미친!’
점점 자신에게 다가오는 탐폰을 보던 그는 결국 기절해 버렸다.
“아 뭐야, 벌써 기절해버리면 어떡해? 조금 더 괴롭혀 주려고 했는데.”
산수이는 그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쪼그려 앉아 쓰러져있는 그의 귀에다 대고 말했다.
“어디 여자 몸을 가지고 장난을 쳐? 이 삐-. 너 같은 삐-는 삐삐삐-삐- 해도 모자라, 알아?”
고운 영애의 입에서 곱지 못한 단어들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이제 휘온은 그런 산수이의 모습조차 사랑스러워서, 또다시 반해버린 것만 같았다.
‘저건 제국의 어떤 영애에게서도 찾아볼 수 없는 장군의 기개. 말 한마디로 사내를 기절시키는 패기……! 대체 산수이 매력의 끝은 어디인가.’
알면 알수록 빠져나올 수 없는 여자였다.
다음엔 또 산수이의 어떤 모습을 보게 될까 생각하면 휘온은 온몸이 짜릿해지는 것만 같았다.
세상 모르는 것이 없다 자부하던 자신이 유일하게 파악하지 못한 사람이었다.
그녀를 알면 알수록 새로워서 계속 옆에 두고 알아가고 싶었다.
반면 얀피르는 그런 산수이를 보며 마음속으로 외쳤다.
‘주인 귀여워……!’
저 오밀조밀한 입으로 욕지거리를 내뱉는 것조차 사랑스러웠다.
조금만 세게 잡아도 톡, 하고 부러질 것 같은 팔목으로 탐폰을 빙빙 돌리며 적을 겁주는 것도 너무 귀여웠다.
지하실에 잡아다 놓은 백작 보좌관을 본 산수이가 신나서 방방 뛰었을 땐.
그만 참지 못하고 그대로 입을 맞춰버릴 뻔했다.
‘너 하고 싶은 거 다 해. 내가 항상 네 옆에서 지키고 있을 테니까.’
얀피르는 볼을 발갛게 물들인 채 산수이를 사랑스러운 눈으로 지켜보았다.
아무튼 그렇게 세 사람은 보다폰 백작저의 응접실에 앉아 백작이 오길 기다렸다.
그리고 얼마 후, 드디어 보다폰 백작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태연한 척 귀빈을 맞이하는 태도로 그들을 반겼다.
“아니 이게 누구십니까? 에데카나 공작님과 산수이 영애 아니십니까? 그런데 여긴 기별도 없이 어쩐 일로……?”
산수이가 웃으며 답했다.
“갑작스러운 방문에 놀라셨으리라 생각합니다만, 예의가 아닌 줄을 알면서도 백작님께 드릴 선물이 있어서 참지 못하고 이렇게 한걸음에 달려왔답니다.”
“선물이라면?”
산수이는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백작 보좌관을 가리키며 말했다.
“바로 이분입니다.”
보다폰은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그곳에는 자신의 보좌관이 입에 거품을 문 채 기절해 있었다.
순간 그의 얼굴에 불쾌한 감정이 일어났다.
‘멍청한 놈……!’
백작을 바라보며 산수이가 말을 이었다.
“그런데 백작님, 이자가 아주 재미있는 말을 하더군요. 바로 보다폰 백작님께서 가짜 이태리타월과 탐폰에 독을 섞어 판매하셨다는 이야기 말입니다.”
그때, 바닥에 쓰러져있던 보좌관이 소란스러운 주변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으, 으음…… 여기가 어디지?”
이윽고 그는 자신이 보다폰 백작가로 돌아왔다는 걸 깨달았다.
놀라서 미처 몸을 일으키기도 전에, 그는 위에서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보다폰 백작과 눈이 마주쳤다.
‘배, 백작님?!’
그는 놀라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까 자신을 협박하던 3인방이 모두 한자리에 모여 자신을 주시하고 있었다.
‘망했다…….’
상황을 빠르게 파악한 그는 백작 앞에 무릎을 조아리며 빌었다.
분명 그가 백작을 팔아넘겼다는 것이 모두 드러났을 터였다.
“보다폰 백작님, 용서해 주십시오! 저자들이 제 목숨을 가지고 협박을 했……!”
그러나 백작은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그에게 물었다.
“음? 자네는 왜 다시 이곳을 찾아온 것인가?”
“……예?”
보다폰이 산수이와 휘온을 향해 말했다.
“이자는 제가 이미 오래전 해고한 자입니다. 더는 우리 백작가의 사람이 아니지요.”
“배, 백작님……!?”
“게다가 가짜 제품에 맹독이라니……. 저는 도통 무슨 얘기인지 모르겠습니다. 다짜고짜 서신도 없이 찾아오셔서 이런 해괴망측한 이야기를 하시다니.”
보다폰은 정말로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너무나 불쾌하군요, 에데카나 공작님. 그리고 비덴비덴 영애.”
휘온이 말했다.
“보다폰 백작, 이미 백작의 영지에 유푸스 꽃이 재배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왔습니다. 얼마 전 유통된 가짜 이태리타월과 탐폰에서도 같은 성분이 추출되었고요.”
하지만 백작은 여전히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으음, 맞습니다. 제 영지에서 유푸스 꽃을 재배하고 있긴 하지요.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조경을 위해서인데요?”
그가 조소하며 말을 이었다.
“아시다시피 유푸스 꽃이 겉보기에는 아주 아름답지 않습니까. 혹시 공작께서는 양귀비를 기르는 자들이 모두 약쟁이라고 생각하시는 건 아니시겠지요.”
크게 웃음을 터트리는 그를 향해 휘온이 입을 열었다.
“이미 백작의 보좌관이 모든 증언을 마쳤으니, 발뺌할 생각은 마십시오.”
그러자 보다폰 백작이 무서운 눈으로 자신의 보좌관을 노려보며 말했다.
“저는 억울합니다. 아마도 저를 모함하려는 자가 제 예전 보좌관을 꾀어내어 저에게 누명을 씌우려는 것일 테지요!”
이 말에 백작 보좌관이 외쳤다.
“백작님! 어떻게 제게 이러실 수 있습니까?!”
서로서로 팔아넘기는 모습은 정말 가관이었다.
그 모습을 보며 휘온은 낮게 한숨을 쉬고는 보다폰 백작에게 말했다.
“보다폰 백작, 이렇게 나오실 줄 알고 미리 준비해 온 것이 있습니다.”
휘온은 품 안에서 서류를 한 장 꺼내 보다폰 백작 앞에 들이밀었다.
“이, 이것은……?”
“황실로부터 받은 수색 허가증입니다. 시작해.”
휘온의 말을 끝으로 우레와 같은 소리와 함께 치안 경비대가 백작저 안으로 밀려들어 오기 시작했다.
이윽고 경비대는 백작령에 있는 모든 건물을 샅샅이 뒤졌다.
말 그대로 숟가락 개수까지 셀 정도로 세밀한 수색이 한참 동안 진행되었다.
그러나.
백작저 내에서는 그 어떤 증거도 발견되지 않았다.
이를 지켜보고 있던 백작 보좌관은 매우 당황한 기색이었다.
‘아니, 이럴 리가 없는데? 분명 샘플과 서류들이 그곳에 남아 있었어……!’
그런 제 보좌관을 보며 보다폰 백작은 낮게 조소했다.
사실 보다폰은 그가 실종되었다는 보고를 미리 전달받은 상태였다.
‘멍청한 놈이 날 배신했군.’
이에 그는 미리 모든 증거를 인멸한 상태였다.
보다폰 백작이 휘온을 향해 크게 웃었다.
“에데카나 공작님, 이 무슨 경우 없고 황당한 일인지 모르겠군요. 뚜렷한 증거도 없으면서 무고한 사람에게 죄를 묻다니……? 내 이번 일은 황제 폐하께 고하여 확실히 짚고 넘어갈 것입니다!”
산수이는 크게 당황했다.
자칫하다간 되레 무고죄로 처벌될지도 몰랐다.
‘이럴 리가 없는데. 그럼 저 보좌관이 거짓 증언을 한 건가?’
그때 갑자기 산수이의 뒤에서 누군가 다정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산수이, 걱정하지 말아요.”
그것은 휘온이었다.
“휘온……?”
그는 놀란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산수이에게 미소 지어 보이고는, 보다폰 백작을 향해 돌아서서 말했다.
“인정합니다. 백작저 내에선 아무것도 발견되지 않았군요.”
“그것 보십시오, 에데카나 공작님! 내 정말 어이가 없어서…….”
하지만 휘온은 여유로운 모습으로 말을 이었다.
“그런데 뭐, 사실 상관없습니다. 이미 핵심적인 증거들은 제가 가지고 있거든요. 혹시나 해서 더 뒤져보았던 것일 뿐.”
“뭐…… 뭐라?”
휘온은 밖을 향해 외쳤다.
“들어오게.”
응접실 안으로 들어오는 자를 본 보다폰의 눈이 커졌다.
쭈뼛대며 들어온 사내는.
바로 우테의 전남편이었다.
“네, 네놈은……!?”
우테의 전남편은 산수이와 눈이 마주치자, 쓰고 있던 모자를 벗으며 울먹였다.
“여, 영애님……!”
산수이는 그를 한눈에 알아보았다.
그는 일전에 비덴탕에서 이태리타월을 대량으로 구매해갔던 허름한 차림의 사내였다.
산수이가 그를 향해 물었다.
“다, 당신은 일전에 비덴탕에서 이태리타월을 사 가셨던 고객님 아니신가요?”
그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산수이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저를, 저를 죽여주십시오, 영애님! 사실 비덴비덴 남작 부부께서 돌아가신 건…… 모두 제 잘못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