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예정대로였다면 비덴탕에서 탐폰 판매가 시작되었을 날이었다.
하지만 탐폰을 구매하러 온 행상들과 일부 고객들은 크게 당황했다.
그 어떤 사전 공지도 없었는데 탐폰 판매가 무기한 연기되었다는 것이었다.
그들 중에는 일부러 먼 곳에서까지 걸음을 한 이들도 적지 않았다.
“아니, 제품이 오늘 나온다고 해서 일부러 새벽부터 여기까지 온 건데, 이러는 법이 어디 있습니까?”
“죄송합니다! 안전성 테스트를 하느라 판매를 며칠 미뤄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럼 미리 공지를 했어야죠!”
고객들 사이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저번 이태리타월 사건 때문에 그런 거 아냐? 설마, 탐폰에서도 뭔가 문제가 발견된 건가?”
“갈수록 실망스럽네. 앞으로 여길 어떻게 믿고 물건을 구매해?”
산수이는 계속해서 고객들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사죄했다.
투덜대고 욕지거리를 하며 떠나가는 고객들을 보면서 가슴이 쓰라렸지만.
지금으로선 이것이 최선의 방법이었다.
‘지금 잠깐의 손해로 앞으로 있을 피해를 막을 수 있다면, 이런 건 아무것도 아니야.’
그녀는 제국의 수도가 위치한 방향 끝으로 시선을 던지며 생각했다.
‘지금쯤 둘 다 잘 도착했겠지?’
***
얀피르는 제국 행상협회 근처 나무 위에서 잠복 중이었다.
그는 몇 시간 전 산수이가 자신에게 부탁했던 것을 다시 한 번 상기했다.
“행상 중 탐폰을 소지하고 있는 자가 분명 있을 거야. 그를 잡아와 줘.”
얀피르는 주머니에서 가짜 이태리타월을 꺼내 코에 가져다 대고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유푸스 독의 냄새를 기억하기 위해서.
보다폰 백작이 간과한 것이 있다면, 비덴비덴 남작령에는 냄새를 잘 맡는 개……, 아니 드래곤이 있다는 것이었다.
곧이어 협회 건물 안에서 행상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럼 가 볼까.”
얀피르는 목 아래의 검은 복면을 추켜올려 제 얼굴을 가렸다.
복면 위로 드러난 그의 황금색 눈동자가 번쩍이는가 싶더니.
그는 이내 한 마리 유려한 고양이처럼 나무 위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탁—
그가 긴 다리로 땅 위에 사뿐히 내려앉았을 때, 그의 짙은 머리칼이 바람에 살짝 나부꼈다.
하지만 주위에 얀피르의 기척을 느낄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이윽고 그는 골목 사이 그림자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가 행상들의 뒤를 밟았다.
그의 전신을 감싸는 검은 의상은 얀피르의 탄탄한 근육을 여실히 드러내며, 그를 완벽히 어둠 속으로 녹아들게 해 주었다.
***
산수이가 여성 고객들에게 탐폰 샘플을 나눠주던 당시, 그중에는 보다폰 백작의 끄나풀이 한 명 있었다.
이를 통해 보다폰 백작은 산수이의 탐폰 생산 계획 및 론칭 날짜를 미리 알 수 있었다.
그리고 탐폰 판매 예정일 하루 전날.
한 행상이 수도 외곽의 숲속에서 백작 보좌관과 비밀리에 접선했다.
보좌관은 행상에게 유푸스 꽃 성분이 들어간 탐폰을 건네주며, 이를 수도 내 귀부인들에게 비밀리에 판매해 달라고 했다.
“한 개 판매될 때마다 내 후하게 쳐줌세.”
그러나 백작 보좌관은 행상에게 탐폰이 무엇에 쓰는 물건인지, 이것이 여성들의 몸에 들어가면 얼마나 위험해지는지에 대해선 제대로 알려주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
그 행상은 탐폰을 한 보따리 가득 담은 채 귀족 저택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곳에 사는 건 평소 산수이에게 때를 즐겨 미는 한 귀부인이었다.
골목 끝을 지나고 있던 그 행상의 앞에 갑자기 검은 복면을 쓴 사내가 하늘로부터 날아 내려왔다.
바로 얀피르였다.
“으, 으악!”
주저앉은 행상을 보며 얀피르가 살벌한 눈빛과는 전혀 다른 해맑은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안녕?”
“누, 누구냐!”
“음? 되게 이상한 질문을 하네. 누군지 가르쳐 줄 거였음 왜 복면을 쓰고 왔겠어?”
또라이한테 걸렸다고, 행상은 생각했다.
그는 죽을힘을 다해 일어나 반대쪽으로 달렸다.
그러나 달아날 수 있을 리 없었다.
얀피르가 다시금 뒤에서부터 그의 앞으로 날아내려 왔으니까.
“마, 말도 안 돼!”
“말도 안 되는 건 너지. 가짜 탐폰을 팔려고 하고 있잖아. 그게 얼마나 위험한 건지 알기나 해?”
“탐폰이라니, 그게 뭡니까?”
얀피르가 코를 킁킁거리며 말했다.
“응? 이렇게 냄새가 진동하는데 왜 모르는 척을 하지? 보따리에 솜뭉치 같은 거 없어?”
“솜뭉치? ……아!”
사색이 된 행상은 보따리를 뒤져 탐폰을 모두 꺼내 보였다.
“이, 이걸 전부 드리면 살려주시는 겁니까……?”
“에이, 설마 그렇게 쉽게 살려줄 리가 없잖아.”
얀피르가 웃으며 행상의 어깨를 탁 잡았다.
그것만으로도 그는 탈골될 것 같은 극한의 고통을 느꼈다.
“끄, 끄아아악!”
얀피르가 싱긋 웃으며 물었다.
“너한테 이거 시킨 놈 누구야?”
***
휘온은 황실 도서관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그가 앉은 책상 위로 각종 식물학 도감과 제국사, 지리학, 무역학 등 수많은 책이 드높게 쌓여갔다.
이곳 황실 도서관은 황족과 황실 공무원 이외에는 출입이 불가능한 곳이었다.
하지만 휘온이 누구인가.
위로는 황태자의 권세를 누리고, 아래로는 발레아나 공주의 신뢰를 받는 자였다.
게다가 이 도서관 문을 여는 데는 한마디면 족했다.
“누군가 산수이 영애를 해하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습니다, 발레아나 공주님.”
“뭐라고요? 대체 어떤 놈들이 울 언니…… 아니 산수이 영애를 건드린단 말입니까?”
“황실 도서관 출입을 허가해 주신다면 지금부터 제가 성심을 다해 알아보겠습니다.”
“물론이죠. 당장 그자들을 찾아내 엄벌을 내려주세요, 휘온 공작! 하아, 오라버니가 계셨다면 그놈들을 모조리 없애버리셨을 텐데, 왜 하필 이럴 때 자리를 비우셔 가지고!”
그렇게 휘온은 손쉽게 발레아나 공주에게서 황실 도서관 열쇠를 받아냈다.
휘온은 속독으로 수많은 책을 샅샅이 살폈다.
일전의 유푸스 꽃에 대해 뭔가 빠트린 듯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유푸스 꽃…….”
본디 유푸스 꽃은 제국에서 자라는 식물이 아니었다.
인근의 페니아 왕국에서만 자라는 희귀한 독초였기 때문이다.
그런 유푸스 꽃의 성분이 제국 안에서 발견되었다는 것이 좀 이상했다.
페니아 왕국에서 일개 남작가의 영애를 노리고 이런 일을 벌일 근거가 없지 않은가.
한참이나 기록을 뒤지던 그는 마침내 기쁨의 외마디를 내질렀다.
“찾았어!”
책상 위에 펼쳐져 있는 건 제국의 사절단 명단과, 귀족 가문의 수입통관사유서 기록본, 두 가지였다.
한참 전의 기록까지 추적해 올라가서야 그는 겨우 단서를 찾아낼 수 있었다.
‘페니아 왕국 사절단으로 방문했던 자들 중, 돌아와서 곧바로 수입통관 허가를 요청해 유푸스 꽃 씨앗을 들여온 자는…… 이자 하나뿐이군.’
휘온의 입가에 살벌한 미소가 번졌다.
‘보다폰 백작, 넌 사람을 잘못 건드렸어.’
***
백작 보좌관은 지금 자신이 왜 이런 상황에 부닥쳐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분명 그 행상 놈과 만나기로 한 장소에 서 있었는데……?’
탐폰을 모두 팔고 나면 행상이 인근 숲으로 찾아오기로 되어있었다.
그러면 그자를 죽여 깔끔하게 일을 처리할 셈이었다.
저 멀리서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행상을 봤던 것까지는 기억이 나는 듯도 했다.
그런데 그 이후부터의 기억이 전혀 없었다.
눈을 뜨고 보니 이렇게 얼굴이 가려진 채 손발이 모두 묶여 있는 것이었다.
“읍! 으읍!”
“어? 정신이 들었나 봐.”
맞은편에서 한 여인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싶더니, 이내 누군가 그의 얼굴에서 거칠게 천을 들춰냈다.
“푸하-!”
거센 숨을 몰아쉬던 그는 자신이 어떤 지하실에 갇혀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곧이어 들려오는 목소리는.
“아저씨, 안녕?”
그는 목소리의 주인공을 보며 깜짝 놀라 외쳤다.
“네, 네년은? 산수이 영애?!”
“네년이라니. 말 똑바로 안 하면 죽여버리는 수가 있어.”
검은 옷을 입은 사내가 황금색 눈동자를 번뜩이며 저를 향해 그르렁거리고 있었다.
“네놈은 또 누구냐!”
그러자 저 너머에서 누군가 대신 대답하는 소리가 들렸다.
“음…… 뭐, 그자는 놈이라고 불러도 괜찮다.”
어둡고 축축한 지하실과는 영 어울리지 않는 호화 티 테이블을 갖춰놓고, 고급 찻잔을 들어 올린 그는 바로.
“에, 에데카나 공작?!”
“쯧. 교양은 없어도 정신은 있는 모양이군.”
이 세 명의 얼굴을 확인한 백작 보좌관의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이들이 왜 여기에 있지……? 설마 벌써 들킨 건가? 대체 어떻게?
탐폰이 판매되고 몇 시간도 지나지 않았을 터였다.
설령 이들이 자신의 계략을 알아챘다 하더라도.
그 많은 행상 중 어떻게 가짜 탐폰을 가지고 있는 자를 한 번에 찾아냈단 말인가.
패닉에 빠진 그를 향해 산수이가 다가와 날 선 목소리로 말했다.
“아저씨, 용건만 간단히 말할게. 그 탐폰 판매하라고 시킨 사람이 누구야? 뭐, 대충은 알고 있지만.”
“탐폰? 그, 그게 무엇이냐?”
그 말에 산수이가 애처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흐음, 얀피르. 아까 이 아저씨 머리를 너무 세게 때린 거 아냐? 기억상실증이라도 걸렸나 봐.”
“그럼 다시 기억나게 해 줘야겠네.”
얀피르는 사악한 미소를 지으며 미리 준비해 둔 수많은 이태리타월 중 하나를 집어 흔들어 보였다.
그 모습을 본 백작 보좌관의 표정이 새하얗게 질렸다.
‘서, 설마 저 이태리타월…… 내가 만든 그건 아니겠지?’
산수이가 보좌관을 향해 물었다.
“어라, 아저씨. 이게 뭔지 아는 표정이다?”
“이, 이태리타월이 아니냐! 그걸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어!”
“그런데 왜 이렇게 겁에 질린 표정일까? 그냥 내 호위 기사가 때 좀 밀어드리려는 것뿐인데.”
“그래, 내가 시원하게 밀어줄게.”
얀피르는 이태리타월을 손에 끼우며 그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한 걸음씩 다가갈수록 백작 보좌관의 얼굴은 더 사색이 되어 질려갔다.
그때였다.
“워, 잠깐.”
테이블 위에 찻잔을 내려놓은 휘온이 그게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때만 밀어서는 부족하지. 하는 김에 면도까지 시원하게 해드리는 것이 좋을 것 같은데.”
그러고는 얀피르에게 다가와 단도를 건네주었다.
“면도라……. 그것참 좋은 생각이네.”
단도를 건네받은 얀피르는 백작 보좌관을 향해 몸을 돌렸다.
그러고는 제 혀로 단도 날을 슥 핥으며, 마치 맛있는 먹잇감을 바라보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칼날이 아주 잘 서있네. 그런데 이거 어쩌지? 사실, 나 오늘 면도 처음 해 봐.”
“뭐?!”
몸에 상처가 났을 때 저 맹독 이태리타월이 닿는다면 어떻게 되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그였다.
얀피르가 그를 향해 싱긋 웃어 보이며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래서 밀어주다가 피가 좀 날지도 몰라. 그래도 괜찮지?”
백작 보좌관은 결국 이성을 잃고 소리 질렀다.
“으아아악! 사, 사람 살려……!”
산수이는 그를 향해 천연덕스럽게 물었다.
“으응? 우리가 좀 챙겨드리려는 것뿐인데, 왜 이렇게 무서워하실까?”
“그, 그건……!”
“대답이 없다면 뭐, 시원하게 밀어드려야지. 얀피르, 부탁해!”
“맡겨둬.”
이제 얀피르는 한 손에는 단도, 한 손에는 때수건을 끼운 채 그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짐승의 눈빛과 날카로운 송곳니까지 더해진 얀피르의 모습은 백작 보좌관의 눈엔 마치 광기에 어린 살인마처럼 보였다.
그는 거의 거품을 물고 지리기 직전에 이르렀다.
‘고, 공갈 협박단이다……! 이들이 정녕 귀족이 맞는가! 협잡배들도 이렇게 막무가내는 아닐 것이야!’
어느새 곁으로 다가온 얀피르는 그의 얼굴에 면도날을 가져다 대며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그럼 어디 콧수염부터 밀어볼까아?”
“아냐, 얀피르. 목부터 밀어.”
“아예 이발까지 싹 다 해 주는 것은 어떤가? 머리부터 시작하자고.”
제 눈앞에서 왔다 갔다 하는 시퍼런 칼날을 본 그는 결국 백기를 들고 말았다.
“마, 말할게! 말하겠습니다!”
“진작 그렇게 나왔어야지.”
그는 결국 보다폰이 계획한 모든 것들을 털어놓았다.
드디어 결정적 증인이 확보된 순간이었다.
하지만 산수이 일행은 모르고 있었다.
그가 모든 것을 털어놓은 건 아니었다는 걸.
산수이가 알아야 할, 가장 중요한 일에 대해선 함구했다는 사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