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성교육 도중 도망쳐버린 얀피르를 쫓아갔던 산수이는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휘온이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죄송해요, 휘온. 소란스럽게 만들었네요.”
허탈한 산수이의 표정을 보자 휘온은 단박에 알 수 있었다.
‘얀피르 그놈을 놓쳤나 보군.’
휘온은 심히 불쾌했다.
다행히 산수이가 얀피르를 따라 나가주어서, 문제의 사건 현장을 엄폐할 수 있었지만.
‘그놈이 뭐라고 그리 바로 쫓아 나선단 말입니까. 나를 여기에 혼자 두고.’
그러나 산수이는 여전히 걱정스러운 얼굴이었다.
그녀가 테이블 위의 교구를 서둘러 정리하며 말했다.
“오늘 강의는 여기서 마치도록 할게요, 휘온. 부디 편하게 쉬세요.”
휘온은 산수이가 또다시 얀피르를 찾아 나서기 전, 서둘러 입을 열었다.
“쉬다뇨. 우리에겐 아직 가장 중요한 일이 남았잖습니까.”
“중요한 일이요?”
“탐폰 개발 말입니다.”
휘온이 말했다.
“그대의 말을 들어보니, 탐폰이 얼마나 상품 가치가 높은지 알겠더군요. 시간 낭비할 것 없이 지금 바로 회의를 시작하죠.”
정확히는 얀피르를 견제하기 위함이었지만 말이다.
‘저 눈을 뜬 짐승 놈에게 그대를 보낼 수야 없죠, 나의 산수이.’
이것이 휘온의 본심이었다.
***
산수이와 휘온은 우선 탐폰을 소량만 생산해 때밀이 예약 고객님들께 샘플로 나눠드려 보기로 했다.
1:1 코치로 탐폰 사용법을 알려드리고, 고객들의 반응을 확인한 뒤.
그 후 대량생산에 들어가는 안전한 방법을 선택한 것이다.
“좋은 생각이에요. 휘온의 말대로 아무래도 처음엔 적응하는 기간이 필요한 게 사실이니까요.”
산수이 역시 그랬었으니까.
몸 안에 사용해야 하는 탐폰이나 생리컵 같은 용품은 익숙해지는 데 다소 시간이 걸리기 마련이었다.
그렇게 휘온의 도움을 받아 마침내 본격적인 탐폰 생산이 시작되었다.
휘온은 연구 개발을 핑계로 며칠 동안이나 남작령에서 머물며 얀피르를 주시했다.
하지만 얀피르는 그날의 사건 이후로, 웬일인지 산수이의 곁으로 좀처럼 다가오질 않았다.
‘저 짐승 놈이 무슨 꿍꿍이지? 뭐 어쨌든, 일단은 다행이라고 봐야 하나.’
그러나 더는 공작저로의 복귀를 미룰 수 없는 순간이 다가왔다.
황제를 알현하는 귀족들의 정기 회의가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휘온은 각성한 얀피르 옆에 산수이만 남겨둔 채 떠나는 것이 영 불안했다.
하지만 더 이상 일을 지체할 수는 없었다.
그는 그렇게 울며 겨자 먹기로 남작령을 떠나야만 했다.
‘젠장. 하필 이럴 때 정기 회의라니…….’
하지만 휘온은 결코 그냥 떠날 놈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사용인 한 명을 남작가에 남겨두었다.
탐폰 개발 도중 문제가 생기면 언제든 이자를 통해 서신을 보내라는 말과 함께.
물론 휘온과 그 사용인 사이엔 둘만이 알고 있는 비밀 임무가 존재하고 있었지만 말이다.
“산수이 영애와 그녀의 호위 기사 사이에 이상한 기운이 감지되면 즉시 전서구를 날리도록.”
“알겠습니다, 공작님!”
물론 산수이가 그의 이런 시커먼 속내를 알 길은 없었다.
그러나 휘온의 걱정이 무색하게도, 그가 떠난 후 얼마 되지 않아 얀피르는 남작저 안에서 자취를 감춰버렸다.
***
“얀피르!”
산수이는 몇 시간째 얀피르를 찾아 헤매었지만, 저택 내 어디에서도 그의 모습을 볼 수 없었다.
‘아니, 얘가 도대체 어딜 갔대? 이렇게 아무 말도 없이 사라질 애가 아닌데.’
그러나 하루가 다 지나도록 얀피르의 모습을 봤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날 수업 이후부터 좀 이상했어. 계속 나를 피하는 것 같고. 설마…….’
산수이의 머릿속에 한 가지 가설이 떠올랐다.
‘떠난…… 건가?’
갑자기 자신의 앞에 나타났던 것처럼, 그렇게 또 휙 떠나 버린 걸까.
마치 보육원에서 수많은 친구들이 왔다 사라져 갔듯이.
이별에는 이제 도가 텄다 싶었는데.
여전히 가슴 한구석이 찌릿한 걸 보면 아직도 영 익숙해지지 않은 모양이었다.
사실 이제는 얀피르가 없어도 목욕탕을 운영하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연일 고수익을 올리고 있는 비덴탕에서 아궁이에 불 땔 돈이 설마 없겠는가.
하지만.
‘언제는 나한테 가족이 되어 준다며. 무슨 가족이 말도 없이 사라지냐?’
이세계라는 망망대해로 떨어져 의지할 곳 없던 산수이에게 있어서 얀피르는 맨 처음으로 나타나 준 ‘내 편’이었다.
그런 그가 이렇게 갑자기 사라지다니.
‘역시, 영원한 가족 같은 건 없다니까.’
그런데 만일, 정말로 얀피르가 그녀를 떠난 거라면 대체 어디로 갔단 말인가?
‘그때 분명 오갈 데가 없다고 했는…… 아!’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산수이는 아직 찾아보지 않은 장소가 딱 한 군데 남아있음을 깨달았다.
바로 두 사람이 처음 만났던 비덴탕의 지하실이었다.
***
별빛만이 내려앉은 늦은 밤.
산수이는 촛불 하나에 의지해 조심스럽게 비덴탕의 지하실로 내려갔다.
‘여기에도 얀피르가 없으면, 그땐 정말 어쩌지……?’
하지만 그 걱정은 기우였다.
지하실에 가까워질수록, 그르렁거리는 짐승의 소리가 들려왔으니까.
저도 모르게 안도한 산수이는 그의 이름을 나지막하게 불러보았다.
“얀피르-?”
하지만 아무런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또 아궁이 뒤에 숨어있나?”
곧이어 산수이가 지하실 문을 열었을 때.
후욱—
한 점 앞이 보이지 않는 새카만 어둠 속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무거운 기운이 산수이를 짓눌렀다.
‘흐윽…… 이 위압감은 대체 뭐야? 서 있기조차 힘들어.’
하지만 그녀는 직감으로 알 수 있었다.
바로 여기 얀피르가 있다는 사실을.
“얀피르-? 어디 있어. 얼른 나와 봐.”
산수이는 더듬거리며 앞으로 나아갔다.
그때였다.
허공에 손을 뻗자 갑자기 익숙한 감촉이 느껴졌다.
매끄럽고 따뜻한 그것은, 바로 얀피르의 드래곤 비늘이었다.
“얀피르?!”
이윽고 시야를 밝히는 황금색 빛과 함께 산수이의 눈에 들어온 것은—
그녀의 품에 쏙 안기던 작고 귀여운 아기 얀피르가 아닌.
커다랗고 낯선 성체 드래곤이었다.
“……!”
집채만 한 그의 육체는 지하실 전체를 가득 채울 정도였고.
등 위에 접혀있는 육중한 날개를 모두 펴고 나면 천장을 뚫고도 남을 것 같았다.
“크르르르르……!”
게다가 그는 발톱과 송곳니를 세운 채 산수이를 향해 성난 표정으로 그르렁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산수이는 그의 눈동자를 본 순간 알 수 있었다.
비록 모습은 변했다 할지라도, 그가 얀피르라는 걸.
이제는 몰라보게 커져버린 눈동자라 해도, 그 맑고 아름다운 황금색만큼은 여전했으니까.
“얀피르……? 너, 얀피르 맞지?”
“돌아가.”
“이게 어떻게 된 거야? 너, 모습이 왜…….”
“위험하니까 어서 돌아가라고!”
성체 드래곤으로 변한 얀피르가 크게 소리치자, 곧 지하실 전체가 쩌렁쩌렁 울렸다.
꽉 다문 그의 커다란 입 사이로 거친 숨결과 짐승의 소리가 계속해서 새어나왔다.
하지만 산수이는 전혀 겁나지 않는다는 듯 천천히 얀피르에게 다가갔다.
“이래서 여태 혼자 숨어있었던 거야? 나한테 말도 없이?”
“가……, 제발.”
“가족이라며!”
“……뭐?”
산수이가 얀피르에게 외쳤다.
“네가 처음에 그랬잖아. 내 가족이 되어준다고. 그런데 이렇게 엄청난 일을 혼자 겪고 있었으면서, 나한텐 아무 말도 안 했던 거야?”
“……주인.”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 난, 난……!”
너 역시도 다른 사람들처럼 날 떠난 줄 알고.
산수이는 그 말만은 꾹 삼켰다.
‘누구나 떠나고 싶을 땐 떠날 수 있지. 나 역시도 언젠간 너를 떠날 테니까. 하지만…….’
산수이는 얀피르의 곁으로 다가가 그의 머리를 살며시 어루만져 주었다.
“혼자 무서웠겠다.”
“…….”
“내가 다칠까 봐 내보내려 했던 거지?”
얀피르는 말없이 끄덕였다.
산수이는 그런 얀피르를 보며 생각했다.
‘우리도 언젠가는 헤어지게 되겠지. 하지만 적어도 함께 있는 동안은, 넌 내 유일한…….’
산수이는 두 손을 뻗어 온몸으로 얀피르의 목덜미를 끌어안았다.
“……!”
여전히 제 품 안에서 긴장을 풀지 못하고 있는 얀피르를 달래기 위해, 그의 비늘을 사랑스럽게 쓸어내리며 속삭였다.
“앞으론 이럴 때 혼자 있지 마. 무슨 얘기를 하든 내가 다 들어줄게. 우리는…… 가족이니까.”
“주인…….”
순간 지하실 전체를 가득 채우고 있던 사나운 기운이 안개처럼 사라졌다.
“후아-”
산수이는 이제야 숨통이 트이는 것 같았다.
이윽고 얀피르가 입을 열었다.
“크르릉……. 주인 너 지금 실수하는 거야. 엄청나게 위험해진 짐승 한 마리를 옆에 두는 거라고.”
“위험하긴 무슨. 크기가 커졌어도 넌 나한테 여전히 그대로 얀피르야. 그리고 네가 드래곤인 건 원래부터 알고 시작했거든?”
“……그런 뜻이 아닌데.”
이윽고 얀피르의 몸에서 새하얀 빛이 뿜어져 나오며, 그는 다시 인간의 모습으로 폴리모프했다.
인간인 얀피르는 예전 모습 그대로였다.
하지만 그의 눈동자를 바라본 산수이는 어쩐지 평소와는 다른 느낌을 받았다.
‘응? 얘 눈빛이 원래 이랬던가?’
자신이 알고 있던 소년 얀피르는 이제 어디에도 없다는 걸.
그녀가 깨닫는 데는 아직 시간이 조금 더 걸릴 터였다.
얀피르는 제 품 안의 산수이를 다시 한 번 꽉 끌어안으며 생각했다.
‘난 분명히 경고했다, 주인? 나 이제 위험하다고.’
***
“성장통이 왔었다고?”
“응.”
얀피르는 산수이에게 자신이 겪은 일들에 대해 상세히 설명해주었다.
“직감으로 알겠더라고. 곧 몸이 성체로 변할 거란 걸.”
“그래서 여기로 들어왔구나. 하긴, 숨기에 지하실만 한 데가 없지.”
“모습을 들키는 게 문제였다기 보단…… 혹시라도 내가 너를 다치게 할까 봐.”
그게 제일 무서웠어.
얀피르는 생각했다.
한편 지금껏 얀피르의 이야기를 듣던 산수이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그런데 왜 이제야 성체가 된 거지? 처음부터 좀 이상하긴 했어. 아기 드래곤이었을 때도, 인간으로 변신하고 나면 성인의 모습이었잖아?”
“그건…….”
산수이는 얀피르가 말끝을 흐리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어? 얀피르 너, 뭔가 기억나는 게 있구나? 대체 왜 이제야 성체가 된 거야?”
“……비밀이야.”
“뭐, 비밀? 너! 아까부터 계속 나한테 다 숨기기만 하고! 아 빨리 말해 줘!”
자신의 가슴팍을 두드리며 말해달라 조르는 산수이를 보고 얀피르는 작게 한숨 쉬었다.
‘……하아, 번식이 가능해졌을 때 성체가 되는 거라고! 이걸 어떻게 너한테 털어놓냐?’
그랬다.
얀피르의 머리가 알 거 다 아는 상태로 돌아오자.
그의 육체 역시 봉인이 풀리며 원래의 상태로 회귀한 것이다.
하지만 얀피르는 산수이한테 차마 사실대로 털어놓을 수 없었다.
너의 성교육을 받고 눈을 뜨는 바람에, 이젠 너만 보면 미치겠다고.
‘그런 얘길 어떻게 하냐고.’
얀피르는 씁쓸한 미소를 지은 채 산수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더 알려고 하지 마, 다쳐.”
‘어……?’
갑자기 얀피르의 커다랗고 따뜻한 손이 제 머리를 어루만지자, 산수이는 위화감을 느꼈다.
‘어쩐지 얀피르랑 내 포지션이 바뀐 거 같은데……? 아냐,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지.’
고민도 잠시, 산수이가 얀피르를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흠, 얀피르. 있지, 내가 너 성체 된 기념으로 오랜만에 때 밀어줄까?”
“때……? 정말?”
“그럼! 내가 이번엔 특별히 너도 오일 마사지해줄게.”
“오, 오일 마사지까지! 진짜지?!”
“그럼! 축하 기념으로 내가 특별히 다 해준다!”
얀피르는 감격에 젖은 표정이었다.
“드디어! 나 사실 그동안 때 엄청 밀고 싶었는데, 주인이 너무 바빠 보여서 말도 못 꺼내고 있었다고!”
기뻐하는 얀피르를 보고, 산수이는 승리의 미소를 씩 지었다.
‘어차피 나한테 때 한 번만 밀리고 나면 술술 불게 되겠지. 왜 네가 갑자기 성체가 된 건지를…….’
산수이는 다 계획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