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비덴탕 로비에 나타난 수상한 사내는 계속 주위를 흘끔거렸다.
그러다 결국 판매대에서 이태리타월 한 장을 집어 들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산수이의 가슴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뭐, 뭐지? 도둑인가?! 어쩌지 지금은 얀피르도 없는데……!’
얀피르는 지금 혼자 이태리타월 공장에 가 있는 상태였다.
아침부터 공장 근처에 웬 수상한 남자가 얼쩡거리고 있다는 연락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원래는 산수이도 함께 가려고 했지만, 얀피르는 그녀를 극구 만류했다.
위험할지도 모르니 자기 혼자 다녀오겠다는 것이었다.
‘그냥 무작정 얀피르 따라갈걸. 아니다, 그럼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저 때수건 도둑을 못 잡았겠구나. 그나저나, 오늘 왜 안팎으로 이렇게 난리야?’
산수이는 떨리는 가슴을 애써 진정시키며 수상한 사내에게 다가갔다.
그런데.
그녀의 예상과는 정반대로, 그 수상한 사내는 부스에 있던 모든 종류의 이태리타월을 하나씩 집어 들고는.
카운터에 가서 정상적으로 계산하기 시작했다.
“이…… 이거 전부 주세요.”
‘엥?’
사내는 구매한 이태리타월을 모두 가방에 담고는 굉장히 수줍은 표정으로 빠르게 비덴탕을 나가버렸다.
여전히 모자를 푹 눌러쓰고 이리저리 두리번거리면서 말이다.
산수이는 조금 전까지 사내를 오해하고 있던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차림새만 보고 도둑일 거라고 생각했다니……. 하, 반성하자.’
산수이는 멀리 떠나가는 사내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아마도 남자가 이태리타월을 구입하는 게 부끄러워서 그랬던 거겠지? 그나저나, 저렇게 종류별로 하나씩 다 사신 고객님은 휘온이랑 공주님 말고는 또 처음이네. 저게 다 얼마야……?’
산수이는 매출을 크게 올려주신 고객님의 뒷모습을 향해 마음속으로 감사의 절을 백 번쯤 올리고 돌아섰다.
‘감사합니다, 고객님. 앞으로 돈 길만 걸으소서.’
앞으로는 겉모습만 보고 사람을 판단하지 말자고 다짐하면서.
게다가 드디어 비덴탕에도 첫 남성 때수건 구매 고객이 생긴 것이 아닌가!
산수이는 이날을 역사적인 날로 기념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 이제 드디어 남성 고객님들도 때밀이에 눈을 뜨기 시작한 거야! 이대로만 쭉쭉 가자! 이 제국의 모든 사람이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때를 미는 그날까지!’
그리고 아마도 그날이 목욕의 신 사우나스가 자신을 찾는 날이 되지 않을까 기대해보는 산수이였다.
***
얼마 후.
생산 라인을 모두 둘러본 얀피르가 다시 비덴탕으로 돌아왔다.
산수이는 그에게 달려가 물었다.
“얀피르! 그 수상한 사람은 잡았어?”
“내가 도착했을 땐 이미 달아난 뒤였어. 그보다 주인, 좀 이상한 게 있었는데…….”
“이상한 거?”
“당시에 총책임실 경비가 자리를 비운 상태였어. 그놈이 거길 통해 들어갔다면 공장 내부로 침입할 수도 있었을 텐데. 이상하게 그러진 않았더라고.”
총책임실이라면 우테가 있는 곳이 아닌가.
산수이 역시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따가 우테를 한번 찾아가 봐야겠다.’
근심 어린 표정의 산수이를 보며 얀피르가 안심시키듯 말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 주인. 혹시라도 그놈이 다시 나타날 때를 대비해서 경비를 더 늘리고 오는 길이야.”
이제는 자신이 따로 말하지 않아도 그와 손발이 척척 맞았다.
그런 얀피르가 기특하다고 생각한 산수이는 까치발을 들어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이제 뭐든 알아서 잘하네? 기특해, 우리 얀피르.”
“…….”
그러나, 산수이의 손길을 받은 얀피르의 표정은 예전과는 다르게 썩 밝아 보이지 않았다.
이를 눈치챈 산수이가 그의 머리를 쓰다듬던 손을 멈추고 물었다.
“표정이 왜 그래? 거기서 무슨 일 있었어?”
“……있지, 주인. 넌 나를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뭐라고 생각하냐니? 그야 너는 얀피르지?”
“아니 그런 거 말고.”
얀피르가 몸을 숙여 그녀의 얼굴 가까이로 다가와 물었다.
“이렇게 내 머리를 쓰다듬는 게, 무슨 의미냐고 묻는 거야.”
코앞까지 다가온 그의 얼굴을 보고 산수이는 당황했다.
‘뭐, 뭐야, 갑자기……. 네 얼굴은 그렇게 갑자기 들이대면 핵무기나 다름없어. 심장에 안 좋다고.’
그런 산수이의 마음을 알 길이 없는 얀피르가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재차 물었다.
“주인, 너한테 있어서 나는 혹시…….”
그러나 말을 채 잇기도 전에 갑자기 얀피르의 동공이 커졌다.
“……!”
그는 이내 자신이 두르고 있던 망토를 풀어 산수이의 허리에 감고 꽉 묶어주었다.
산수이는 얀피르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놀란 듯 물었다.
“야, 얀피르? 지금 뭐 해?”
그러나 얀피르는 아무 말이 없었다.
그에게 재차 되묻기도 전에, 산수이는 갑자기 오장육부가 뒤틀리는 것 같은 고통을 느꼈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신음을 내뱉었다.
“으윽……!”
순간 ‘그’ 감촉이 느껴졌다.
벌써 몇십 번이고 겪어와서 이제는 좀 적응될 법도 하지만, 여전히 익숙해지지 않는 그 느낌.
한 달에 한 번 마법에 걸리는 그날이 찾아온 것이다.
산수이가 고통에 배를 움켜잡으며 생각했다.
‘설마 얀피르가 내 그날이 시작될 거란 걸 미리 알고 망토로 가려준 건가?’
하지만 도대체 어떻게?
너무나 신기했던 산수이는 잠시 고통도 잊은 채 그에게 물었다.
“얀피르, 나 그날인 거 어떻게 알았어? 너 이런 마법도 쓸 줄 알아?”
하지만 얀피르는 곤란한 표정이었다.
“하아……. 주인, 그런 건 물어보지 마.”
“그렇지만 신기하잖아! 예정보다 일주일이나 빨랐는데 어떻게 알았어? 응? 응? 그럼 혹시 내 다음 생리 예정일도 알 수 있는 거야?”
안 그래도 이 세계에 떨어진 이후엔 생리 주기 어플을 쓸 수 없어서 영 불편하던 참이었다.
산수이는 얀피르를 생리 계산기로 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해보았다.
정말 정말로 궁금한 표정의 산수이를 보며 얀피르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도대체가……. 다른 인간 여자들은 이럴 때 부끄러워하는 거 같던데. 산수이 너는 내가 전혀 남자로 보이지 않는 거냐고.’
피 냄새였다.
인간보다 후각이 몇천 배나 뛰어난 그는 조금 전 산수이의 곁에 다가가는 순간 냄새로 알 수 있었다.
게다가 산수이는 보통 첫째 날에 가장 양이 많은 데다 생리통도 심했다.
이것 역시 얀피르가 지금까지 그녀와 함께 다니면서 자연스럽게 알게 된 것이었다.
자신이 망토를 둘러주지 않았다면 분명 저택으로 돌아가기도 전에 산수이의 드레스가 다 망가졌을 것이다.
게다가 지금 빨리 그녀에게 약을 먹인 후 재워야 했다.
안 그러면 한 시간 이내로 통증 때문에 데굴데굴 구르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이걸 다 사실대로 얘기할 순 없지. 분명 또 부끄럽다고 할 테니까.’
그런데 지금 자신을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는 산수이를 보자니 얀피르는 왠지 울컥하고 화가 치밀었다.
‘만약 공작 그 자식이 알아차렸어도 이렇게 태연했을까, 너는……?’
얀피르는 씁쓸한 마음으로 산수이의 허리에 둘린 자신의 망토를 한 번 더 단단하게 묶어주며 말했다.
“그냥 알아. 그러니까 일단은 빨리 저택으로 돌아가자.”
자신의 질문에 대답해주지 않는 얀피르를 보며 산수이는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왜 말 안 해주는데!”
얀피르는 한숨을 쉬며 산수이를 가볍게 안아 들었다.
“이거, 주인 네가 아끼는 드레스잖아. 투정 부리지 말고 빨리 가자.”
“칫.”
쀼루퉁한 표정으로 입을 쭉 내밀던 산수이는, 자신을 안고 걸어가는 얀피르의 목을 두 팔로 감쌌다.
아주 자연스럽게.
그런 산수이의 태연한 몸짓에 얀피르는 가슴이 두근거리면서도, 한편으로는 화가 났다.
‘예전엔 주인하고 몸이 닿기만 해도 그냥 좋았어. 너의 무릎을 베고 누울 때나, 네가 내 머릴 쓰다듬는 거 자체만으로도 그냥 행복했다고. 그런데 요새는 그렇지 않아. 네가 나를 아무렇지 않게 만질 때마다 너무…… 너무 화가 나.’
이런 감정은 분명 휘온, 그자가 나타난 후부터 점점 커져갔었다.
그리고 얼마 전, 쓰러졌던 산수이를 안아들었던 그날 이후 더더욱.
‘주인 너는 휘온 그 자식의 몸에는 쉽게 손을 대지 않잖아. 왜 나한테만 이렇게 편하게 대하는 건데?’
얀피르는 자신의 이런 감정 변화가 너무나 당혹스러웠다.
산수이에게 처음 발견됐을 때, 그의 육체와 정신은 모두 불완전했다.
그런 얀피르가 산수이에게 처음 품었던 감정은 애착 같은 거였다.
새끼 오리가 태어나서 처음 본 것을 어미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그러나 지금, 봉인되어 잊혀있던 감정들이 그의 안에서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애정, 질투, 그리고 다음엔…….
그는 곧 온전한 성인 남성으로 되돌아갈 것이다. 그녀를 탐하고 욕망하는, 정말로 위험한 짐승으로.
하지만 이건 산수이도, 그리고 얀피르 본인도 아직은 모르고 있었다.
한편 얀피르의 품에 안겨 저택으로 이동하던 산수이는 갑자기 엄청 중요한 사실 하나를 깨달았다.
‘……어? 나 그러면 오늘 목욕탕 안에 못 들어가네?’
오늘은 특히나 피곤해서 뜨거운 온수에 몸을 담그고 싶었는데.
하지만 이 세계에는 탐폰이 있기는커녕 생리대로 사용되는 천도 품질이 영 좋지 않았다.
‘흐음, 어차피 공장 시설도 들어와 있는 김에 탐폰이나 개발해볼까? 안 그래도 생리 날짜 시작됐다고 때밀이 예약 취소하시는 고객님들이 많았단 말이지.’
얀피르의 마음과는 상관없이, 산수이의 머릿속에서는 훗날 카데베르 제국사에 기록되는 최초의 탐폰 개발이 한창 진행되고 있었다.
***
한편, 비덴탕에서 이태리타월을 대량으로 구매해 갔던 사내는 부리나케 뛰어 인적이 드문 산길로 향했다.
그곳엔 마차 한 대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가문의 문양도, 흔한 장식조차 달리지 않아 한눈에 봐도 수상한 마차였다.
사내는 마차 앞에 도달해 숨을 헐떡이며 외쳤다.
“나으리-쇤네 도착했습니다요! 문 좀 열어 주십시오!”
그러자 곧바로 마차의 문이 열렸다.
그 안에 타고 있는 것은 어두운 분위기의 한 젊은 남자였다.
그가 혀를 끌끌 차며 말했다.
“늦었군.”
그는 행여나 누가 들을세라 주위를 둘러보더니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일단 타게.”
사내가 올라타자 마차는 곧바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래서, 물건은 가져왔나?”
사내는 당황한 듯 말을 더듬었다.
“어, 어찌나 경비가 삼엄하던지……. 벌레 사육장이나 고치실은 근처에도 못 갔습니다요.”
“쯧. 그럼 결국 차선책을 택했단 소리군. 일단 물건을 내놔 보게.”
“예, 여기…….”
사내는 가방을 주섬주섬 뒤져 비덴탕에서 사들인 모든 이태리타월을 꺼내 그에게 건네줬다.
이태리타월을 손에 쥐고 찬찬히 살펴보던 남자의 얼굴이 심각하게 구겨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