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비덴비덴 남작가를 방문한 휘온은 산수이의 제안에 깜짝 놀랐다.
“이태리타월을 대량 생산해서 비덴비덴 남작령의 특산품으로 판매하잔 말씀이십니까?”
“네. 바로 그거예요, 휘온.”
“그러면 때밀이의 희소가치가 떨어질 텐데……. 혹시 지금의 일정이 너무 힘드시다면 VVIP 고객만 받는 것은 어떻습니까?”
산수이가 마시던 찻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하지만 그러면 원래 우리가 계획했던 때밀이의 대중화를 이룰 수 없잖아요, 휘온.”
‘뭐? 방금 산수이가 우리…… 라고 한 건가!’
산수이의 입에서 ‘우리’라는 단어도 모자라 자신의 이름이 흘러나오자, 휘온의 입꼬리가 실실 옆으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산수이는 차를 마시느라 이를 미처 눈치채지 못했다.
하지만 그녀의 뒤에 서서 호위하던 얀피르는 누구보다 빠르게 휘온의 심경 변화를 눈치챘다.
그가 휘온을 향해 작게 그르렁거렸다.
휘온 역시 그런 얀피르를 의식한 듯, 우리라는 단어를 좀 더 또박또박 힘을 줘서 말하기 시작했다.
“그랬었죠, 분명 ‘우.리.’가 함께 그렇게 얘기했었죠, 산수이.”
휘온은 얀피르를 향해 썩소를 날려 보냈고, 얀피르는 송곳니를 드러내 보이며 맞받아쳤다.
산수이만 모르는 두 남자 간의 유치한 경쟁이 오늘도 이어지고 있었다.
휘온이 산수이를 향해 말을 이었다.
“좋습니다. 그대를 믿고 일을 진행해 보도록 하죠. 그럼 판매가는 어느 정도로 생각하고 계십니까?”
지금까진 우테가 일일이 손으로 물레와 재봉틀을 돌려 이태리타월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하지만 휘온의 투자로 대량생산 라인이 구축된다면 제작 단가가 대폭 낮아질 것이다.
산수이가 입을 열었다.
“생산 라인을 구축한다면 타월 1장당 제작 단가가 1에우로 정도 예상되니까, 소매가는…….”
그 말을 들은 휘온이 머릿속으로 빠르게 계산을 돌렸다.
‘음. 그럼 한 5에우로 정도에 팔면 적당하겠군.’
수도 의상실에서도 보통 제작이나 유통, 홍보비를 모두 고려하여 5배 정도의 이윤을 남기니까.
하지만 산수이가 내놓은 답변은 그의 예상을 훨씬 더 뛰어넘는 것이었다.
“음…… 9.99에우로가 어떨까요?”
그러니까 코리안 머니로 따지면 때수건 한 장당 무려 9,990원에 팔자는 소리나 다름없었다.
휘온이 놀라 물었다.
“지, 지금 열 배 치기를 하자는 겁니까?!”
악마다, 악마야.
휘온은 생각했다.
이 여자는 자신보다도 더 지독한 장사꾼이었다.
그런데 열 배 치기를 할 거면 깔끔하게 10에우로를 하면 될 일이지.
애매하게 9.99에우로는 또 뭐란 말인가.
그런 휘온의 생각을 읽은 산수이가 말을 이었다.
“휘온, 물건을 흥정할 때 말이에요. 0.01에우로를 깎아준다고 하면 무슨 생각이 들어요?”
“음…… 저는 한 번도 물건값을 깎아본 적이 없어서 모르겠습니다만? 그거 깎아서 어디에다 씁니까.”
와, 그래 너 돈 많아서 좋겠다.
산수이는 갑자기 머리뿐만 아니라 배도 아파지는 것 같았다.
“으, 으음. 그럼 다른 예를 들어볼게요. 비슷한 물건이 두 개 있는데 하나는 10에우로, 다른 하나는 9.99에우로예요. 그럼 소비자는 어떤 생각을 할까요?”
“……아!”
휘온은 이제야 산수이가 말하려는 바를 알아차렸다.
산수이가 이어서 설명했다.
“이건 왼쪽 자릿수 효과라는 거예요. 사람들은 항상 오른쪽에 표기된 숫자보다 왼쪽에 표기된 것에 더 초점을 맞추기 마련이죠.”
“사실은 1첸트……, 그러니까 0.01에우로밖엔 차이가 안 나지만 소비자는 그게 10에우로보다 훨씬 더 저렴한 물건이라고 착각하겠군요!”
“바로 그거예요. 그러면 사람들은 그 물건이 더 미치도록 갖고 싶어질 거예요. 얼핏 보기엔 가격표가 한 자릿수밖에 안 되는, 저렴한데 좋은 상품으로 느껴지니까.”
산수이의 설명을 들으며 휘온은 짜릿함을 느꼈다.
이 영애는 정말로 장사의 신이요, 마케팅의 천재다.
자신의 이상형이 함께 대화하기 즐거운 똑똑한 여자였다는 걸, 휘온은 산수이를 통해 처음 알게 되었다.
사실 산수이의 입장에선 원래 세계에서 흔히 통용되는 지식을 줄줄이 열거한 것밖에 안 되지만.
그걸 알 길 없는 휘온의 눈엔 그저 이렇게 산수이가 새로운 아이디어를 내놓을 때마다 그녀가 더 마음에 들었고, 또…….
‘진짜 그대에게 미치도록 끌립니다, 산수이.’
그는 할 수만 있다면 산수이를 에데카나 공작 부인으로 맞이하여 영원히 독점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
휘온의 대대적인 투자로 얼마 후 비덴비덴 영지엔 이태리타월 대량생산 시설이 들어섰다.
원래 혼자서 이태리타월을 제작하고 있던 우테는, 타월 제작 교육뿐 아니라 생산 과정 전반을 감독하는 총책임자로 승진하기에 이르렀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마을에서 가장 불쌍한 처지였던 우테였지만.
이제는 비덴비덴 남작령 내의 모든 여인이 부러워하는 존재가 된 것이다.
“남편이 처자식 다 버리고 도망갔다고 했을 때만 해도 우테 저것이 이리 잘될 줄 누가 알았겠어?”
하지만 삶의 변화는 우테에게만 일어난 것이 아니었다.
이태리타월 생산 라인이 가동되자, 벌레를 사육하고, 고치를 수집한 뒤 실을 뽑아내어 원단을 짜고 염색하는 일 등.
때수건을 제작하는 일련의 과정에서 수많은 일자리가 창출된 것이다.
이에 온천수 고갈로 인해 개인 목욕탕 파산 신청을 했던 영지민들은 드디어 가난을 벗어나 제대로 된 생활을 이어나갈 수 있게 되었다.
그들이 산수이 비덴비덴 남작 영애에게 하해와 같은 감사의 마음을 가지게 된 건 당연한 일이었다.
“남작님께서 작고하신 후엔 정말 우리 영지는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그때 산수이 영애님까지 돌아가셨다면 어쩔 뻔했나. 정말 신께 감사드릴 일이지.”
이렇게 남작령에서 산수이의 지지도는 하루가 다르게 올라가고 있었다.
한편, 산수이는 우테와 함께 다양한 이태리타월 디자인에 대해 논의했다.
기존의 클래식 이태리타월을 색깔별로 만들어 판매할 뿐 아니라.
새로움을 주기 위해서 일전에 논의했던 때르메스 장갑 타월을 추가로 선보이기로 했고.
또한, 사치품을 선호하는 귀족들을 위해 금사로 자수를 넣은 이태리타월 역시 한정판으로 출시하기로 했다.
물론 엄청난 가격을 매겨서 말이다.
‘여기서 할 수 있는 한 많이 남겨 먹어야지.’
산수이는 비장한 각오를 다지며 우테에게 설명을 이어갔다.
“혹시 이보다 좀 더 프라이빗한 제품을 원하시는 고객이 있다면 아예 이름까지 금사로 새겨 넣어 드리는 것으로 하죠.”
우테 또한 아이디어를 제시했다.
“영애님께서 손에 감고 일하시는 기다란 디자인의 타월 말입니다. 그것도 같이 판매해보면 어떨까요?”
“좋은 생각이네요! 아무래도 혼자 등을 밀 때는 손이 잘 닿지 않으니까요.”
두 사람의 디자인 회의가 밤늦게까지 이어졌다.
그리고 마침내 다양한 종류의 이태리타월들이 공장에서 대량생산되기에 이르렀다.
[찬란하게, 거칠게, 부드럽게! : 이태리타월]
쌓여있는 홍보용 인쇄물들을 보며 산수이는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
산수이는 아예 작정하고 비덴탕 계산대 옆에 부스를 차려 이태리타월을 팔기 시작했다.
‘목욕하러 들어가면서 사가든지, 아니면 나올 때 기념으로 하나 구매하든지……. 어찌 되었든 이 판매대 앞에서 지갑을 열지 않고 지나칠 순 없을 것이다.’
색색의 이태리타월이 예쁘게 진열되어있는 판매 부스는 그 자체만으로도 고객들의 눈길을 끌었다.
게다가 가격 역시 9.99에우로부터 1999.99에우로까지 천차만별이었다.
그중 가장 저렴한 클래식 디자인의 때수건은 코리안 머니로 따지면 한 장당 만 원이라는 적지 않은 가격이었다.
그런데도 미끼 상품 역할을 톡톡히 해내며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귀족들은 물론이거니와 일반 평민들까지도 줄을 서서 사 갈 정도였다.
산수이에게 때밀이 예약을 하려면 1년 이상은 기다려야 한다 들었는데.
생전에 때밀이는커녕 산수이 영애의 얼굴도 보기 힘들 정도였으니까.
그런데 이제는 직접 이태리타월을 구매해 스스로 때를 밀 수 있게 되다니.
그들에게 있어선 이보다 더 기쁜 소식이 있을 수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비덴비덴 남작령의 특산품이라 불리는 이태리타월은 제국 내에서 최고의 인기 선물이 되었다.
청년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연인에게 고급 때수건을 선물했고.
귀부인들 사이에선 서로의 이름을 금사로 새겨 넣은 이태리타월을 선물하는 것이 유행이 되었다.
심지어 아이들 사이에선 때수건 장갑을 끼고 다니는 것이 하나의 놀이문화로 자리매김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눈여겨볼 만한 변화는 바로 때밀이에 대한 귀족 남성들의 태도 변화였다.
귀족 부인들은 저마다 사교 모임에서 자신들의 남편이 이태리타월을 사용하기 시작했다는 얘기를 늘어놓았다.
“지난번에 글쎄, 그이가 제 이태리타월을 몰래 만져보고 있지 뭐예요? 저랑 눈이 마주치곤 어찌나 화들짝 놀라던지.”
“안 그래도 때를 밀면 진짜 그렇게 피부가 고와지냐고 넌지시 물어보기까지 하더라니까요.”
사실 이제 제국 내에서 산수이의 때밀이와 이태리타월에 대해 모르는 자가 없는 상황인데, 남성들 역시 때밀이란 것에 관심이 가는 것이 당연했다.
게다가 아무리 피부 미용에 무지한 자라도 때를 밀고 온 아내의 피부를 보고 나면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원래는 남자가 때를 민다는 것은 사내의 수치요, 가문의 망신이라 생각하며 애써 관심 없는 척해오던 그들이었지만.
이제 그 유명한 이태리타월이라는 것이 집구석에 떡하니 널려있는 상황이 되자 더는 호기심을 참을 수 없었던 것이었다.
결국 이들 중에 아내 몰래 이태리타월을 사용해보는 자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에 부인들은 앞에선 모르는 척해 주며 뒤로는 비덴탕에 방문해 남편들이 쓸 이태리타월을 한두 개 정도 더 구매해가기에 이르렀다.
그런 모습을 보며 산수이는 내심 뿌듯함을 느꼈다.
‘아직까진 남성 고객이 휘온밖에는 없지만, 이렇게 한 걸음씩 나아가는 거지 뭐. 언젠간 제국의 모든 사람이 때밀이를 즐기게 될 거야.’
그렇게 생각하며 산수이는 비덴탕 내부를 둘러보기 위해 몸을 돌렸다.
그때였다.
비덴탕 입구 카운터에 있는 한 남성이 산수이의 눈에 띄었다.
모자를 푹 눌러 써서 얼굴을 가린 허름한 차림의 사내였다.
그는 수상한 모습으로 카운터 앞을 계속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뭐지 저 사람……?’
이상하게 여긴 산수이는 그 사내의 얼굴을 자세히 보기 위해 카운터 쪽으로 다가갔다.
하지만 산수이가 채 도착하기도 전에 그 사내는 이태리타월이 판매되고 있는 부스 쪽으로 다가가 손을 뻗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