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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 세신사 영애님-20화 (20/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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얀피르는 방금 전 유모에게서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전해 들었다.

분명 이곳에서 단 하루만 머물 예정이라 했던 발레아나 공주가, 계획을 일주일로 변경했다는 것이다.

“이, 일주일?!”

공주가 온 이후로 산수이에게서 거의 방치되다시피 한 얀피르 입장에선 펄쩍 뛸 노릇이었다.

“하……. 진짜 미치겠네.”

하지만 그보다 더 미칠 일은 따로 있었다.

방금 전, 산수이가 남몰래 잠옷 차림으로 방을 나서다 얀피르와 딱 마주치고 만 것이다.

“주인?”

“깜짝이야! 아 뭐야, 얀피르구나?”

“무슨 일 있어? 밤엔 위험하니까 내가 데려다줄게.”

“아, 아냐! 나 혼자 갈 수 있어. 그럼 잘 자, 얀피르.”

허둥대는 산수이의 모습에서 위화감을 느낀 얀피르가 그녀에게 물었다.

“뭐야, 주인. 너 어디 가는데.”

“아니 그게…….”

“설마, 그 공주인지 뭐시긴지 하는 애랑 같이 자러 가는 거야?”

산수이는 침을 꼴깍 삼켰다.

도대체 이놈의 짐승 육감은 왜 이렇게 뛰어난 것인가.

“이거 비밀이야. 특히 공주님께서 데리고 온 시녀들에겐 더더욱…….”

하지만 얀피르의 표정은 잔뜩 굳어졌다.

“주인, 해도 너무하는 거 아냐?”

“응? 뭐가?”

“왜 걔랑은 같이 자? 난 안 된다면서!”

“야! 같이 잔단 소릴 그렇게 크게 하면 어떡해!”

산수이가 깜짝 놀라며 목소리를 최대한 낮추었다.

하지만 얀피르는 산수이에게 제 얼굴을 들이밀며 진지하게 되물었다.

“나랑 같이 잔 건 별로였어?”

얀피르의 얼굴을 본 산수이는 잠시 동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와 진짜, 그 얼굴로 물어보면 대답은 뻔한 거 아니냐?’

얼굴뿐만이 아니라 체향도, 가슴 근육도, 모든 것이 완벽했다.

‘……그런 네가 시방 너무 위험한 짐승이라 더는 안 된다고!’

물론 입은 차마 떨어지지 않았지만, 이미 산수이의 붉어진 뺨과 귀가 대신 대답을 해 주고 있었다.

얀피르는 그런 변화를 귀신같이 알아채고 되물었다.

“주인. 그런데 어째 요새 얼굴이 자주 빨개진다……?”

“모, 몰라! 하여튼 넌 안 돼. 나 바빠. 공주님 간식부터 얼른 만들러 가야 돼.”

“와! 공주한텐 같이 자는 것도 모자라서 간식까지 만들어 줘? 나는?”

하지만 산수이는 서둘러 자리를 피했다.

“잘 자라, 얀피르. 나는 간다.”

붉어진 얼굴로 빠르게 사라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얀피르가 중얼거렸다.

“뭐지, 분명히 뭔가 나한테 숨기는 게 있는 거 같은데…….”

아쉬움을 뒤로한 채 복도를 걷던 얀피르는, 공주가 머물고 있는 귀빈실을 지나치던 찰나 인기척을 느끼고 홱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산수이가 언제쯤 오나 확인하기 위해 문밖으로 고개를 빼꼼 내민 발레아나 공주가 있었다.

“헉!”

얀피르와 눈이 마주친 발레아나는, 화들짝 놀라며 방 안으로 쏙 숨어들어 갔다.

쾅!

“뭐야, 쟨 또 왜 저래?”

지금 자신의 표정이 어떤지 알 길 없던 얀피르는, 아쉬움을 뒤로한 채 자리를 떠났다.

***

잠시 후.

산수이는 공주의 방문을 두드렸다. 그녀의 옆에는 온갖 간식거리가 가득한 트레이가 서 있었다.

“공주님, 산수이입니다.”

이윽고 방문 안에서 공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와-.”

공주의 방문을 연 산수이는 하녀 대신 자신이 직접 트레이를 밀며 들어갔다.

그런 산수이에게 발레아나가 불만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왜 또 나한테 존대해! 그냥 반말하라니까.”

“아무리 그래도 공주님께 제가 어찌 감히.”

“우리 둘이 있을 때만이라도 반말해. 그래야 나도 편하게…….”

공주가 쑥스러운 듯 머뭇거리다 말했다.

“어, 언니라고 부르지.”

‘지금 뭐…… 언니라고?!’

산수이의 마음속은 이미 공주에 대한 귀여움으로 가득 차 지구를 ‘뿌시고’ 있었다.

‘너, 너무 귀여워! 내 팔자에 이렇게 귀여운 여동생이 생기다니!’

당장이라도 가서 공주를 끌어안고 뺨을 비비고 싶었지만, 너무 그랬다가는 공주가 도망갈 수도 있겠지. 침착, 정숙하자.

산수이는 겉으로 점잖은 척 미소 지으며 답했다.

“그럼, 그러지 뭐. 앞으로 둘이 있을 땐 말 놓을게.”

역시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온 산수이의 영혼은 태세 전환이 빨랐다. 유교걸 산수이에게는 뿌리 깊은 장유유서의 피가 흐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응, 언니!”

발레아나 공주는 산수이가 무례하다고 생각하기는커녕, 드디어 자신도 응석 부릴 언니가 생겼다는 사실에 신나기만 했다.

이어서 발레아나 공주는 산수이가 가져온 간식들을 보며 군침을 삼켰다. 이 낯선 파자마 파티라는 것도 그렇지만, 저녁 늦게 무언가를 먹는 것도 오늘이 처음이었다.

오늘 하루 너무 피곤하니 곁에 아무도 들이지 않고 싶다고 거짓말을 해서 얻어낸 꿀 같은 자유 시간이다.

‘들키면 혼나겠지만.’

공주는 트레이 위에 올려진 간식들을 구경했다.

잘 구워진 머핀 위에는 민트색 생크림이 듬뿍 올려져 있었고, 먹음직스러운 산딸기가 올려진 에클레르도 준비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 발레아나의 눈길을 끈 것은 바로.

“근데 언니, 이게 뭐야?”

공주는 목화솜같이 생긴 정체불명의 새하얀 군것질거리를 가리키며 물었다. 어찌나 고소한 냄새가 나는지 당장이라도 입 안에 넣고 싶었다.

“아, 이건 팝콘이라고 해.”

“팝콘?”

발레아나는 처음 듣는다는 듯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응. 옥수수를 튀긴 거야.”

튀긴 옥수수라니.

제국에서 옥수수란 서민들만 먹는 값싼 식자재였다. 그게 이렇게 고소한 냄새를 풍길 수 있다는 것인가.

“네가 무슨 맛을 좋아할지 몰라서 그냥 다 가져와 봤어.”

산수이가 준비한 팝콘이라는 것은 종류가 다양했다.

소금과 버터로 풍미를 추가했다는 솔티드 버터 팝콘도 맛있었지만, 캐러멜 팝콘은 꼭 보석처럼 빛이 나면서도 달콤했다. 게다가 마늘을 넣었다는 갈릭 팝콘은 단짠이 어우러진 환상적인 맛이었다.

그녀들은 침대에 엎드려 수다를 떨면서 팝콘을 계속해서 집어먹었다.

손이 가고 손이 가다가 어느새 팝콘 세 상자를 모조리 먹어 치운 발레아나 공주는 남은 팝콘을 부스러기까지 손가락으로 찍어 쪽쪽 빨아먹었다.

팝콘의 맛을 본 뒤론 공주로서의 체면은 이미 집어던진 지 오래였다.

“우와 진짜, 오물오물. 구황작물로…… 쩝쩝. 이런 맛있는 간식을 만들어 내다니. 언니는 진짜 천잰가 봐, 꿀꺽.”

“맛있다니 다행이네.”

산수이는 팝콘을 먹는 꼬마 공주님을 귀엽게 바라보았다.

정말로 동생이 있다면 이런 기분일까.

외로웠던 가슴 한구석이 따뜻해지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런데 언니, 나 아까부터 궁금한 게 있는데.”

“뭔데?”

“온종일 언니 꽁무니만 쫓아다니는 그 흑발의 기사 말이야. 이름이 얀피르라 했던가?”

“아, 내 호위 기사? 왜?”

“그 사람, 혹시 언니 정인이야?”

발레아나가 너무도 평온히 던진 말에 산수이는 그만 사레들리고 말았다.

“뭐?! 켁……!”

이 세계에서는 사귀는 사이를 정인이라 불렀으니까.

“아, 아냐, 그런 거!”

산수이는 강하게 부정했지만, 공주의 눈에 피어오르는 의심은 사그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언니를 바라보는 눈빛이 심상치가 않던데. 완전 이글이글 타오르는 게, 꼭 양을 잡아먹으려는 늑대 같았다고.”

‘늑대라. 그래 얀피르가 좀 짐승 같긴 하지…… 가 아니라 짐승이 맞지.’

게다가 맨날 자신을 핥아대지 않나.

그런 관점에서 보면 잡아먹고 싶어 하는 눈빛이라는 게 영 틀린 말은 아니었다.

“아무튼 진짜 아냐.”

“그래? 그러면…….”

공주는 눈을 반짝 빛내며 물었다.

“휘온 오빠는 어떻게 생각해?”

“휘온 공작님? 어떻게 생각하냐니, 아무 생각 없는…….”

아 아니지, 우리 목욕탕 투자자님이시니까 대외적으로는 이렇게 성의 없게 말하면 안 된다고 산수이는 생각했다.

“으으음. 비덴탕에 투자해주신 고마운…… 은인?”

“흐응……. 그게 뭐야 재미없어. 아무튼 언니는 그럼 두 사람 모두한테 별로 관심이 없단 거네.”

발레아나 공주는 잠시 생각에 잠기다 이내 입을 열었다.

“그럼 언니 있잖아, 만약에 말이야.”

“응?”

공주가 침대 위를 데구루루 굴러 산수이 옆에 기대어 말했다.

“우리 오빠가 청혼하면 받아들일 의향이 있어?”

“뭐?!”

이젠 하다 하다 황태자랑 결혼하겠냐니.

산수이는 도대체 이 어린 공주가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넌 내가 황태자 저하랑 결혼했으면 좋겠어?”

“응. 어차피 얀피르 경도, 휘온 오빠도 관심 없다면 울 오빠랑 결혼하면 좋겠어. 그러면 언니가 진짜 내 가족이 되는 거니까.”

발레아나는 수줍게 산수이의 잠옷 자락을 잡았다 놓았다 하며 말했다. 그런 공주를 보며 산수이는 귀엽다는 듯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어떻게 얼굴도 본 적 없는 사람하고 결혼하냐?”

그런 산수이를 보며 발레아나가 진지하게 말했다.

“언니, 남자 얼굴 보는구나?”

응? 얘기가 왜 그렇게 흘러가지?

하지만 그녀가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공주가 말을 이었다.

“걱정하지 마. 우리 오빠 진짜 장난 아니게 잘생겼으니까.”

성격이 더러운 게 문제지만…….

발레아나가 뒷말을 삼키며 웃었다.

한편 산수이는 이 모든 상황이 당황스러울 뿐이었다.

도대체 이 얼굴도 모르는 황태자와 자신이 왜 계속 엮이고 있는 것인가.

산수이는 이 모든 것이 아까 공주의 때를 밀면서 황태자 욕을 해댄 자신의 업보라 생각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고맙지만 마음만 받을게. 나는 지금 연애나 결혼엔 전혀 관심이 없어서.”

“연애에 관심이 없다고? 그럼 언니는 뭐에 관심이 있는데?”

꼬마 숙녀는 충격받은 얼굴로 물었다.

“목욕탕.”

“뭐?”

“목욕탕 운영해서 비덴비덴 남작령을 되살리는 것 말곤 관심 없어, 난.”

그리고 빨리 원래 세계로 돌아가야지.

이번엔 산수이가 발레아나에게 물었다.

“그러는 너는, 마음에 두고 있는 사람이라도 있어?”

“으음, 사실 그게 사실 있잖아.”

발레아나가 머뭇거리다 말했다.

“어려서부터 울 오빠랑 휘온 오빠 얼굴만 보고 자라서 그런지, 지금까지 그보다 더 멋있는 사람을 본 적이 없어서, 딱히.”

“아……!”

산수이는 탄식했다.

그렇겠구나. 어려서부터 꽃미남 조기교육을 받다 보면 이런 부작용이 있었다. 제국 내의 어떤 남자를 봐도 공주의 눈엔 오징어로 보이는 문제가!

산수이는 왠지 그런 발레아나가 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얀피르도 별로야? 걔도 잘생김이라면 빠질 얼굴이 아닌데.”

“사실 얀피르 경이 내가 살면서 처음으로 울 오빠보다 잘생겼다고 생각한 사람이긴 한데…….”

“그런데?”

“너무…… 무서워.”

“뭐? 무섭다고?!”

놀란 산수이가 벌떡 일어서며 물었다.

“얀피르가 너한테 뭐 실례되는 말이라도 했어?”

설마 얀피르가 이 꼬마 공주님한테 가서도 때를 밀지 말라는 둥 실언을 한 건 아니겠지.

하지만 다행히 발레아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건 아닌데. 아까 잠깐 언니가 언제 오나 방문을 살짝 열어봤었거든? 그때 지나가던 얀피르 경하고 눈이 마주쳤는데, 눈이 꼭 무슨…….”

“눈이 어땠는데?”

공주가 겁에 질린 채 말을 이었다.

“매, 맹수 같았어!”

그 말을 들은 산수이는 한숨이 절로 나왔다.

‘내가 발레아나랑 같이 잔다고 그런 거구만? 이 멍멍이가 진짜.’

그런데 맹수의 눈이라니.

‘이 공주님, 촉은 엄청 좋네.’

속으로 피식 웃음이 나는 산수이와는 달리, 발레아나는 거의 울 듯한 모습이었다.

“이유가 뭘까 언니?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뭐 잘못한 게 없는데? 나 진짜 너무 무서웠쪄. 훌쩍.”

“걔가 눈이 무섭게 생겨서 그래. 노려본 거 아니야, 눈물 뚝.”

“진짜야 언니?”

“응, 그럼.”

“힝……!”

발레아나는 울먹이며 산수이의 품에 포옥 안겼고, 산수이는 결국 참지 못하고 발레아나의 부드러운 머리에 제 뺨을 마구 비벼댔다.

“악! 내 동생 너무 귀여워!”

“산수이 언니이이……!”

그렇게 두 사람만의 인생 최초 파자마 파티가 지나가고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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