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사용인 휴게실 안.
유모와 집사는 서로 마주 보고 앉아 향긋한 티 한 잔을 즐기고 있었다.
비덴비덴 남작 부부 서거 후 오랜만에 찾아온 달콤한 휴식이었다.
“이렇게 마음 편히 쉴 수 있는 날이 다시 찾아올 줄 몰랐어요.”
차를 홀짝이며 유모가 말했다.
“이게 다 현명하신 산수이 아가씨 덕 아니겠습니까. 주인님들께서도 하늘에서 자랑스러워하고 계실 것입니다.”
집사 역시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런데…….”
머뭇거리던 유모가 결국 참지 못하고 먼저 운을 뗐다.
“그래서 집사님은, 둘 중 누가 더 마음에 드시나요?”
그 말을 들은 집사의 모노클이 반짝 빛났다.
그가 손에 들려있던 찻잔을 탁 내려놓으며 말했다.
“후우, 정말 어려운 문제로군요. 몸도 마음도 크고 넓은 얀피르 경이냐, 아니면…….”
이에 유모도 말을 이었다.
“에데카나 공작님이 그렇게 곱게 생기셨을 줄 누가 알았답니까? 게다가 그분과 결혼하면, 우리 아가씨는 공작부인이 되는 거라고요.”
하지만 집사는 잠시 고민하다 말을 이었다.
“자고로 행복이란 돈과 명예보다는 마음이 따뜻한 배우자를 만나는 데 있는 법. 일전의 저녁 식사 때 있었던 일을 생각하면 역시 얀피르 경이…….”
“으음 그랬죠. 그런 일이 있었어요.”
두 사람은 잠시 회상에 잠겼다.
며칠 전, 저녁 메뉴로 오일 파스타가 나왔을 때의 일이었다.
산수이는 배가 고팠는지 서둘러 면발을 돌돌 말아 입에 쏙 넣었다.
그런데, 그 모습을 지켜보던 얀피르가 갑자기 하인들에게 이유를 알 수 없는 지시를 내린 것이다.
“최대한 빨리 차가운 우유 한 잔만 가져다줘.”
모두가 그 이유를 궁금해하던 찰나, 산수이가 혀를 길게 쭉 내민 채 괴로움을 호소하기 시작한 것이다.
“매, 매워……! 켁, 물……!”
아마도 향신료가 과하게 들어간 모양이었다.
식당 내에 있던 사용인들은 갑작스러운 상황에 어쩔 줄을 몰랐다.
그러나 어느새 자리에서 일어난 얀피르가 산수이의 옆으로 가 냅킨을 집어 들고 그녀의 얼굴에 맺힌 땀을 닦아내며 말했다.
“주인 매워하는 거, 너무 귀여워.”
이윽고 하녀가 허겁지겁 우유 잔을 들고 도착하자, 얀피르는 산수이의 손에 잔을 들려주며 다정하게 속삭였다.
“이것도 빨리 마셔, 주인. 그럼 덜 매워.”
산수이는 허겁지겁 찬 우유를 원샷 드링킹하며 물었다.
“어떻게 미리 알고 부탁한 거야? 내가 매워할 거란 거…….”
“이마에 땀방울이 맺히기 시작하던데? 송골송골, 귀엽게.”
여기까지 회상을 마친 집사는 연신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 관찰력! 그건 상대에 대한 애정이 없고서는 불가능하지 않습니까? 게다가 저 정도의 자상함은 타고나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어요!”
“으음, 저도 그날 감동했죠. 아가씨가 아기일 때부터 모셔온 저도 눈치채지 못한 것을 얀피르 경이…….”
하지만 유모는 미련이 남는 표정으로 말했다.
“하지만 아까 응접실에서의 에데카나 공작님을 생각하면…….”
두 사람은 또다시 회상에 잠겼다.
응접실에서 산수이를 기다리고 있던 휘온.
산수이의 준비가 조금 늦어지고 있다는 이야기를 전하고자 유모는 집사와 함께 응접실로 향하고 있었다.
그때, 그들은 열려 있던 문틈 사이로 휘온의 혼잣말을 듣게 되었다.
“하아, 내가 미쳤지. 아무리 보고 싶었다 해도 이렇게 기별 없이 막무가내로…….”
그는 심한 죄책감을 느꼈는지, 연신 제 머리를 쥐어뜯으며 괴로워하고 있었다.
이때 하필 유모는 실수로 문고리를 건드려버렸고, 끼이익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활짝 열려버렸다.
그러자 휘온은 산수이가 도착한 줄 알고 벌떡 일어섰는데 그때의 표정이란—
유모가 침을 튀겨가며 말했다.
“그 세상 행복해 보이던 표정이라니! 게다가 얼마나 우리 아가씨가 보고 싶으셨으면 그 완벽주의자로 소문난 공작님께서 서신도 없이 방문하신답니까.”
집사 역시 끄덕였다.
“확실히 믿을 수 없는 일이었지요. 그분이 체면이고 뭐고 다 집어던지고 달려오셨다는 것은…….”
하아아—
두 사람의 한숨 소리가 더욱 커졌다.
이 매력적인 두 남자의 남편 투표 득표율은 거의 막상막하였다.
침묵을 깨고 집사가 말을 이었다.
“하지만 결국 아가씨가 선택하셔야 할 문제지요. 저는 그저 응원할 뿐입니다.”
“후, 정말 어려운 선택일 거예요. 짐승 같지만 자상한 남자냐, 까칠하지만 내 여자한테는 한없이 약한 남자냐…….”
유모와 집사는 찻잔을 집어 들고 다시금 차를 음미했다.
지금, 그 두 명의 남자가 자신들의 아가씨 등을 밀어주고 있다는 사실은 전혀 상상조차 하지 못한 채.
***
산수이는 마사지 베드에 엎드린 채 지금의 상황을 즐기고 있었다.
‘이거 완전 좌청룡 우백호잖아. 왼쪽은 드래곤에 오른쪽은 공작이라……. 세상에 이런 호사가.’
두 남자는 서로 다른 장점과 매력을 어필하며 열심히 그녀의 등을 밀고 있던 것이다.
“주인, 일하느라 힘들었지? 이따가 내가 발도 씻겨줄게. 추울까 봐 스팀 타월도 준비해 뒀어.”
“영애의 몸 어느 한구석 빠트리지 않고 완벽히 깨끗하게 밀어드리겠습니다. 끝나면 마사지도 해드릴 예정입니다.”
물론 상대에 대한 견제도 잊지 않으면서 말이다.
“그렇게 맥없이 밀어서 어디 때가 나오겠어?”
“너야말로 무식하게 밀다 영애의 연약한 피부에 상처나 내지 말아라.”
그러거나 말거나, 산수이는 얼굴 가득 미소를 띤 채 속으로 생각했다.
‘그래, 싸워라! 계속 싸워! 원래 경쟁이 과열될수록 더 좋은 결과가 나오는 법!’
이 양념 반 프라이드 반 같은 때밀이 속에서 그녀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이렇게 양쪽에서 밀어주니까 배로 시원하네!’
게다가 비현실적으로 잘생긴 남자 둘이다.
산수이는 처음으로 이 세계에 사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그때였다.
“주인, 등 쪽은 다 밀었는데.”
얀피르가 천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제 돌아누워 볼래?”
그러자 맞은편에 서있던 휘온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그가 말까지 더듬으며 얀피르에게 소리쳤다.
“여, 여인에게 그 무슨 무례한 말버릇이냐!”
“아, 그러네!”
얀피르가 아차 싶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공작 저놈은 이제 그만 내보내도 돼? 왠지 저놈이 주인을 보는 게 영 기분 나빠.”
“가만히 있는 나는 왜 파렴치한으로 보는 건데!”
산수이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얀피르, 너도 마찬가지로 보면 안 되거든?”
“왜애?”
산수이가 지끈거리는 머리를 손으로 지그시 누르며 말했다.
“이 앞부분은 말이야, 다른 여자 세신사가 밀어야 하는 거야.”
“어째서?!”
“어째서냐면…….”
드래곤족은 원래 옷 따위 입고 다니지 않는 데다가, 서로 막 핥으면서 씻겨주지 않던가.
‘이건 뭐, 덜자란 애를 가르치는 기분이네.’
산수이가 얀피르에게 천천히 설명해 주었다.
“인간은 말이야, 다른 성별끼리 몸을 보여주는 걸 부끄럽게 생각하거든.”
“뭐……? 하여간 인간들은 정말 너무 복잡하다니까.”
도통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젓던 얀피르는, 이내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물었다.
“그럼 같은 수컷인 내가 저 자식의 아랫도리를 밀어주는 건 괜찮은 건가?”
얀피르가 중요 부위에 수건을 두른 채 서 있는 휘온을 가리키며 물었다.
산수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음…… 그렇지?”
하지만 하얗게 질린 휘온은 자신의 손으로 하반신을 가린 채 정색하며 소리 질렀다.
“네, 네놈이 감히 어디에 손을 대려고 하는 것이냐! 절대 안 된다!”
그런 휘온에게 얀피르가 코웃음을 쳤다.
“그냥 한번 물어본 거야. 밀어달라고 사정을 해도 무시할 생각이었는데, 혼자 설레발은…….”
“네놈에게 그딴 부탁을 할 거라 생각했나!”
두 남자는 또다시 서로를 노려보며 으르렁거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산수이의 입장에선 이제 등도 다 밀었겠다, 쏟아지는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스르르 잠들어 버렸다.
“…….”
“……휴전이다.”
“산수이 영애 덕분에 봐주는 줄 알아라, 드래곤.”
“누가 할 소리.”
두 남자는 잠든 산수이의 등에 따뜻한 수건을 덮어주었다. 그러고는 온수탕에 함께 들어가 몸을 풀며 그녀가 일어나기를 기다렸다.
“이봐.”
잠시 동안의 침묵을 깨고 휘온이 먼저 입을 열었다.
“어떻게 드래곤인 네가 이곳에 있는 거지? 그 종족은 이미 오래전에 사라지지 않았나.”
“나도 몰라.”
“모른다는 게 말이 돼?”
“정말 모른다니까. 기억이 안 나.”
존재 자체만으로도 미스터리한데 기억까지 잃은 드래곤이라.
휘온이 한숨을 깊게 내쉬곤 다시 물었다.
“그럼 질문을 다시 하지. 산수이 영애 곁에 머무는 꿍꿍이가 뭐지?”
“꿍꿍이?”
“목적 말이다. 속셈, 의도!”
“좋아서 옆에 있는데, 이유가 필요해?”
“뭐……?”
얀피르가 온탕에서 몸을 일으켜 세우며 말했다.
“오갈 데 없는 날 거둬줬어. 산수이는 나한테 있어서 구원이자, 가족이자, 모든 것이야.”
하지만 휘온은 얀피르의 말에 집중할 수 없었다. 그의 시선은 이미 다른 곳에 꽂혀 있었으니까.
“허, 허억……!”
얀피르는 휘온이 무엇 때문에 놀란 것인지 알지 못한 채, 탕 밖으로 나가버리며 말했다.
“너랑 얘기하는 거 재미없어.”
그러고는 잠들어있는 산수이의 상태를 살핀 후, 그녀의 뺨을 살짝 핥았다.
그런 얀피르를 보며 휘온은 쩍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 그야말로 짐승이다! 그런데…….’
휘온은 심각한 혼란에 빠졌다.
‘그런 자가, 대체 왜 여인에 대해선 저리 무지한 것이지? 마치 2차 성징이 오지 않은 아이 같지 않은가.’
하지만 그가 아이든 사내든.
이젠 뺨도 모자라 산수이의 목덜미를 핥고 있는 얀피르를 보며, 휘온은 방심할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
다음 날.
휘온은 산수이와 함께 마차를 타고 비덴비덴 영지를 둘러보고 있었다.
‘그 드래곤 자식을 떼어놓고 오느라 애 좀 먹었지.’
달리는 마차 안에서 휘온은 자신의 맞은편에 앉아있는 산수이에게 말을 걸었다.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영애께서는 어째서 혼탕을 없애신 겁니까?”
“공작님께서는 이전에 혼탕을 방문해본 경험이 있으시지요?”
“그야, 제국민이라면 누구나 있지 않겠습니까.”
“누구나……. 그렇겠죠. 그럼 혼탕에 방문하셨을 때, 그곳에는 어떤 사람들이 있었습니까?”
“그야…….”
휘온은 어릴 적 부모님을 따라 목욕탕에 방문했을 때를 떠올렸다.
기억나는 것은 아버지의 지인들과 그들의 부인, 그리고 그들이 데려왔던.
“아들…… 들.”
그렇다.
그의 기억 속 혼탕에는 제 또래의 소녀들은 존재하지 않았다.
“……소녀들, 혹은 젊은 여인들은 혼탕에 오지 않았었군요.”
“안 온 것이 아니라 못 온 것이었겠죠. 그리고 그것이 제가 혼탕을 없앤 이유입니다.”
산수이가 싱긋 웃어 보였다.
그날 오후, 비덴비덴 남작령을 모두 둘러본 휘온은 마차에 올라타기 전 마지막으로 산수이의 손에 키스하려 했지만.
얀피르가 산수이의 손을 빠르게 낚아채며 말했다.
“잘 가-! 다음부턴 꼭 미리 서신 보낸 후에 찾아오고!”
‘저 자식이…….’
휘온은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지만 할 말이 없었다.
결국 그대로 마차에 올라탄 휘온은 아쉬운 마음을 달랠 길 없이 공작저로 향했고.
이튿날.
드디어 카데베르 제국 최대 규모의 귀족 살롱이 열리는 날이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