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산수이가 휘온의 집무실로 향하기 약 몇 시간 전.
오랜 기다림에 지친 산수이는 화장실에 가려다가 그만 넓은 공작저 내에서 길을 잃고 말았다.
“저택 진짜 크네. 대체 여긴 어디야?”
그렇게 우연히 주방 앞을 지나게 된 산수이.
‘응?’
하인들이 씨앗 자루를 나르는 모습을 목격한 그녀는, 가끔씩 바닥으로 후드득 떨어지는 알갱이를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왜 저걸 주방으로 가져가지? 저건 식용 씨앗이 아닌데?’
그렇게 또다시 헤매던 산수이는 한 외딴 방 앞에 도착했고.
‘엥?’
문을 열어보려던 찰나, 무언가 바스스 밟히는 것이 느껴졌다.
‘이건…… 모래잖아?’
산수이는 문 앞에 떨어져있던 모래 알갱이를 주워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확실해. 이 모래는 분명…….’
그때였다.
“남작 영애님? 왜 이곳에 계십니까?”
산수이를 발견한 공작저의 집사가 그녀에게 다가왔다.
산수이는 당황하여 손에 있던 모래를 얼른 털어냈다.
“아, 여성 휴게실을 찾다가 그만…….”
“이런! 미리 안내해드리지 못한 제 불찰입니다. 저를 따라오시지요.”
“저 그런데, 이 방은 뭐죠?”
“여긴 공작님 외 출입 금지 구역입니다.”
“출입 금지요?”
“예, 그렇습니다. 공작님의 사적인 공간이라 저희 사용인들도 안으로 들어가 본 적이 없습니다.”
오직 휘온만이 사적으로 출입할 수 있는 방 앞에 모래 가루가 떨어져 있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결국 하나였다.
‘이 공작 놈, 혹시 스크럽을 쓰나?’
명색이 온천 관광지였던 비덴비덴 남작저 안엔 온갖 희귀한 스크럽 재료들이 가득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은 몰라도 산수이는 이것들이 의미하는 바를 누구보다 빠르게 파악할 수 있었다.
휘온 에데카나 공작은, 제국 내에서는 구하기 힘든 귀한 모래까지 수입해다 쓸 정도로.
‘스크럽 덕후다!’
그렇게 휘온의 은밀한 취미를 꿰뚫어 본 덕에 산수이는 그의 욕실에 쉽게 출입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이제 제 눈앞에 반라 상태로 엎드려있는 휘온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대박…….’
휘온의 자태를 보며 산수이는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순한 얼굴에 그렇지 못한 성격, 아니 근육이다!’
사실 휘온 에데카나를 한 번이라도 본 여성이라면 결코 그의 수려한 얼굴을 잊으려야 잊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지금, 산수이는 그의 넓은 등짝까지 보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껏 얀피르의 미끈한 반라를 매일같이 마주하며 도를 닦아 온 산수이에게 이제 이 정도 자극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득도한 그녀의 눈에는 휘온 역시 그저 한 명의 소중한 고객님일 뿐.
산수이는 일말의 사심도 없는 평온한 마음으로 돌아와 그의 몸을 살폈다.
휘온의 몸은 예상과는 다르게 잘 관리된 잔근육으로 가득했다. 책상머리에 앉아만 있으면 목이나 어깨가 굽을 법도 한데, 그의 어깨는 완전한 직각이었다.
게다가.
‘피부만 봐도 알 수 있어. 얼마나 자기 몸 관리를 열심히 하는 사람인지. 역시 스크럽 덕후는 다르군. 나랑 같은 과야.’
보통 등은 눈에 보이지 않는 부분이라 관리가 쉽지 않고, 특히나 남성들 같은 경우엔 거의 방치해 두기 마련인데.
휘온의 넓은 등짝은 작은 등드름도 하나 없이 그저 매끄러운 도자기 같았다.
‘이렇게 소중하게 가꿔 오신 몸을 저에게 믿고 맡겨주시다니 영광입니다, 고객님. 이제 제가 때를 밀어서 더 달걀같이 매끈한 피부로 거듭나게 해드릴게요!’
산수이는 오른손을 휘온의 등 위에 척 올렸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공작님!”
“아……!”
자신의 등에 때수건이 닿는 순간, 휘온은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내 버렸다.
‘이런! 나도 모르게 그만…….’
수치심을 느끼며 입을 다문 것도 잠시, 점점 그의 등 위에서 미끄러져 내려가는 때수건의 감촉은 지금껏 그 어떤 스크럽 제품을 쓰면서도 느껴본 적 없는 황홀한 것이었다.
‘이, 이게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이 거칠면서도 부드럽고, 따가우면서도 시원한 감촉은……. 지금껏 내가 찾던 바로 그런 스크럽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산수이는 말없이 휘온의 등 구석구석을 깨끗이 문지를 뿐이었다.
휘온이 움찔거릴 때마다 그의 잔근육이 쩍쩍 갈라지며 모습을 드러냈다.
“공작님, 시원하신가요?”
“으읏…….”
휘온은 이미 무아지경의 상태였다. 그는 입에서 신음이 새어 나가지 않도록 안간힘을 쓰고 있는 터라 그녀에게 대답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많은 경험을 통해 산수이는 저 신음이 만족의 신호라는 걸 알고 있었다.
‘시원한가 보네.’
그녀가 웃으며 그릇에 온수를 받아 휘온의 등 위에 촤악 뿌렸다.
때를 미는 감촉도 기가 막혔지만, 중간중간 그녀가 끼얹는 온수 마사지 또한 일품이 아닌가.
시원했다가 뜨거웠다가. 마치 단짠단짠 같은 맛이랄까.
도대체 그녀는 이런 신의 기술을 어디서 배운 것이란 말인가.
‘크읏…… 때밀이라고 했나? 정말이지, 이런 놀라운 스크럽이라니!’
영애가 그토록 자신 있어 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던 것이었다.
게다가 산수이의 때밀이가 계속됨에 따라, 휘온은 자신의 몸뿐 아니라 마음도 녹아내리고 있는 것만 같았다.
‘영애의 때밀이를 받고 있자니, 왠지 모든 긴장이 풀리는 것 같군.’
결국 그는 자기도 모르게 산수이에게 입을 열었다.
“저, 비덴비덴 남작 영애?”
“네, 공작님.”
“이 때수건이라는 제품, 지금껏 제가 사용했던 그 어떤 스크럽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훌륭하군요.”
예상치 못한 휘온의 칭찬에 산수이는 당황했다.
‘어라, 이렇게 좋은 소리도 할 줄 아는 사람이었어?’
산수이가 멋쩍은 듯 웃었다.
“아하하, 맘에 드셨다니 다행이네요.”
“……사내가 스크럽 제품을 쓴다고 해서 많이 놀라시진 않았습니까, 영애?”
하지만 산수이는 고개를 갸웃했다.
“왜요? 이 때수건만 해도 유니섹스로 판매할 생각인데요.”
“유니섹스……? 그게 무엇입니까?”
아차, 이런 말은 이 세계에선 사용되지 않는구나.
“아, 그게.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판매할 생각이라고요, 하하…….”
“남녀노소라. 영애는 편견이 없는 사람이군요.”
“편견이 없다니요?”
그 말에 휘온이 씁쓸한 표정으로 답했다.
“황실 다음으로 권세가 높은 휘온 에데카나 공작이 스크럽을 즐긴다……. 이것이 사교계에 알려지는 날엔 사내인 제가 이상한 취미를 가지고 있다는 추문이 돌 겁니다. 저에겐 치명적인 약점이 될 테고요.”
여기까지 말하던 휘온은 아차 싶었는지 한마디를 매우 강조하며 덧붙였다.
“물론 저는 이상한 남자가 절. 대. 아닙니다, 영애.”
그렇게 말하면서도 휘온은 부끄러운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라고 말하기엔, 아까 산수이 영애가 때를 밀어줄 때 너무 동요해버렸어. 하아, 부디 영애가 날 변태로 오해하진 말아야 할 텐데.’
그동안 여자를 멀리하고 일에만 매여 살았던 그에겐 몹시 충격적인 경험이었다.
하지만 산수이의 정신은 정작 다른 쪽에 쏠려있었다.
‘이 세계에선 남자들이 피부 관리를 하지 않는 모양이지? 이거, 갈 길이 멀겠는데.’
그녀는 휘온을 향해 안심하라는 듯 답했다.
“저는 그게 약점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자신의 몸을 사랑하고 가꿀 권리는 누구에게나 있으니까요.”
그 말에 휘온은 무언가 마음속 응어리가 탁 풀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의 얼굴에 지금껏 본 적 없는 편안한 미소가 번져나갔다.
“하하……. 이래서 제가 영애에게 비밀을 털어놓았나 봅니다.”
또다.
얀피르에 이어서 휘온마저도 산수이에게 속마음을 털어놓고 있었다.
산수이는 자신의 때밀이가 이 세계에서도 특별한 능력을 발휘한다는 것을 이 두 명의 샘플, 아니 고객님들을 통해 확신했다.
‘물론 얀피르의 경우엔 특별한 비밀을 털어놓은 건 아니었지만.’
아무튼 실로 엄청난 능력이었다.
이대로 마음먹고 각종 고위 인사와 황제 등짝의 때도 밀어준다면, 중대한 국가적 기밀까지 알아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너무 귀찮다……. 난 그냥 신나게 목욕탕 운영하고 때 좀 밀다가 미션 클리어되면 한국으로 돌아갈래.’
원래 정치란 것에 얽히기 시작하면 위험에 빠질 수도 있고, 또 아무리 청렴결백하던 자라도 그 자리에 오르면 결국 변하게 되지 않던가.
그녀는 그저 지금처럼 때를 밀고 사는 삶에 만족했다.
‘때 밀면서 남의 인생 드라마 한 편씩 감상한다고 생각하는 거지 뭐.’
그렇게 생각하며 산수이가 휘온에게 대답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제 입이 무겁기도 하지만, 어차피 곧 이 제국은 변하게 될 테니까요.”
“제국이 변한다……?”
“예, 곧 성별을 가리지 않고 스크럽이든, 때밀이든 즐기게 될 겁니다. 제가 그렇게 만들 거예요.”
산수이가 눈을 빛내며 생각했다.
‘물론 거기에는 공작, 너의 도움이 전적으로 필요하겠지만 말이지?’
***
꿈결 같았던 목욕 시간이 찰나같이 지나갔다.
‘이게 이렇게 아쉬워질 줄은 몰랐군…….’
산수이와 휘온은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고 다시 서재에 마주 앉았다.
생글생글 웃는 그녀의 얼굴을 보자 휘온은 자꾸만 얼굴이 붉어짐을 느꼈다.
‘벗은 몸을 보여준 것까진 그렇다 치자. 내가 어쩌다 분위기에 휩쓸려 그런 비밀스러운 속 얘기까지…….’
하지만 후회하기엔 이미 늦었다. 이제 산수이, 그녀는 휘온의 은밀한 취향을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으니까.
‘황태자 저하께도 차마 말씀드리지 못했던 비밀을, 산수이 영애에게 털어놓게 될 줄은 몰랐군.’
휘온은 그간 자신이 스크럽을 쓴다는 사실을 작고한 양친은 물론이고 자신의 절친이자 유일한 벗인 제국의 황태자에게까지도 숨기고 있었다.
그런 중대한 비밀을 알게 된 산수이는 이제 휘온에게 있어서 제 사람이나 다름없었다.
휘온이 헛기침을 하며 입을 열었다.
“흠흠…… 때밀이라는 것, 실로 굉장하더군요. 정말 만족했습니다.”
“만족하셨다니 저도 기쁩니다.”
산수이가 예쁜 보라색 눈동자를 초승달 모양으로 깜빡이며 휘온에게 해사하게 웃어 보였다.
보통은 이럴 때 심장이 두근거려야 정상인데, 휘온은 때를 밀린 온몸 구석구석 두근거리지 않는 곳이 없었다.
때 정이란 게 정말 무서운 것이었다.
그가 떨려오는 마음을 애써 진정시키며, 짐짓 태연한 척 말을 이었다.
“그, 그럼 이제 아까 하던 이야기를 계속해보도록 하죠. 제게 하시려던 말씀이 무엇입니까, 영애?”
산수이가 기다렸다는 듯 대답했다.
“그럼…… 외람되지만 에데카나 공작님께 두 가지를 요청드리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