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비덴탕 오픈 전.
산수이는 비덴비덴 남작가의 이름으로 미리 제국 전역에 초대장을 보냈고, 저택 내 하인들은 밤낮으로 목욕탕 오픈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평생 비덴비덴 가문을 위해 충성을 다하며 살아오던 이들에게 있어서, 비덴탕의 의미는 그 무엇보다도 컸다.
그들은 누가 시켜서가 아닌, 자신의 의지로 콧노래를 부르며 열심히 임했다.
한편 산수이는 지하실에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도록 조치해 둔 후, 얀피르와 단둘이서만 내려갔다.
사정을 전혀 모르는 유모는 그들의 뒷모습을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우리 아가씨, 적극적인 면이 있으셨네? 이 유모가 알아서 잘 돕도록 하겠습니다. 계속해서 단둘이만 계실 수 있도록…… 후후.’
그런 유모의 배려를 전혀 알지 못한 채, 산수이는 얀피르와 함께 지하실에 도착했다.
“그럼, 부탁할게.”
“걱정하지 말고 맡겨 둬.”
새하얀 빛 속에서 얀피르는 다시 작은 새끼 드래곤의 모습으로 변모했다.
‘역시 이렇게 보면 우리 얀피르는 아기가 맞는데…….’
곧이어 얀피르의 입에서 거대한 화염이 뿜어져 나왔고, 불꽃은 아궁이 속에서 땔감 없이도 꺼지지 않고 계속해서 타올랐다.
그는 마지막까지 꼼꼼히 아궁이 속 화력을 확인한 후, 다시 인간의 모습으로 변해 산수이 앞에 착 하고 내려섰다.
그 모습을 보며 잘생기긴 진짜 잘생겼다고 생각한 산수이였다.
‘이 모습을 보면 도저히 애라고 볼 수가 없고.’
얀피르가 그녀의 앞에서 살랑거리며 말했다.
“자 주인! 이제 핥게 해줘!”
‘하지만 또 이러는 걸 보면 애새끼가 맞단 말이지?’
산수이는 얀피르를 향해 대충 자신의 손등을 내밀었다.
하지만 그는 산수이 곁으로 빠르게 다가와 손등 대신 그녀의 목덜미를 핥았다.
그 야릇한 감촉에 산수이는 놀라 소리쳤다.
“야!”
“어딜 핥을지는 내 맘이라고.”
얀피르가 능글맞게 웃었다.
‘이런 걸 보면 역시 애새끼인 척 연기하는 것 같기도 하고?!’
이렇게 산수이가 혼자서 고민하는 사이, 목욕탕의 물은 딱 좋은 온도로 준비되고 있었다.
잡초만 무성했던 비덴탕 앞 정원엔 다시 수십 가지 꽃들이 피어나 있었고, 자갈이 그득했던 도로 역시 마차를 타고 방문하실 손님들을 위해 깨끗하게 정비되었다.
이렇게 비로소 비덴탕 재오픈을 위한 모든 준비가 끝났다.
“그동안 모두 고생하셨어요. 그럼 이제 손님들을 맞이해 볼까요?”
“예, 아가씨!”
비덴비덴 남작가의 모든 사람은 두근거리는 마음을 안고 각자 맡은 자리에 서서 손님들을 맞을 마지막 준비를 마쳤다.
지난 몇 년 동안 그토록 꿈꿔왔던 순간이었다.
***
그러나.
‘손님이…… 없어.’
그동안의 준비가 무색할 만큼, 비덴탕을 찾는 손님들의 수는 현저히 적었다.
그나마 방문한 손님들은 영지민 일부와 호기심에 찾아온 인근의 귀족 아가씨 몇 명 정도.
무엇이 문제인가?
산수이는 깊은 고민에 빠졌다.
역시 귀족은 평민과 함께 목욕하는 것을 꺼리나? 온천수가 아닌 일반 지하수를 사용해서? 그것도 아니라면…….
이미 비덴비덴이라는 이름은 온천명소로서의 가치를 잃은 것이 아닐까.
그 어느 이유에서건, 문제는 심각했다.
고객들의 반응을 살펴보기로 결심한 산수이는, 손님인 척 가장하고 목욕탕 안으로 들어가 이웃 마을 귀족 영애들의 대화를 엿들었다.
“여기 물 진짜 좋다. 온천수 아니래서 걱정했는데, 피부 매끄러워진 것 좀 봐.”
“역시 비덴비덴 이름값을 하네. 하녀들하고 같이 씻는 게 불편하긴 한데, 남자들하고 같은 탕 안에 있는 것보단 훨씬 낫지 않아?”
비록 이곳을 방문한 사람들의 수는 적었지만, 그들이 말하고 있는 건 모두 비슷했다.
비덴탕 자체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
그렇다면 정답은 하나였다.
‘제품이나 서비스가 문제가 아니라면…… 답은 마케팅이지.’
아마도 사교계에서 평판이 바닥을 친 산수이가 보낸 서신들이 별 효과가 없던 모양이었다.
그럼 어떻게 홍보를 해야 하지? TV도, 인터넷도 없는 이 세계에서 어떤 방법으로 광고를 때리느냔 말이다.
그럴 땐 역시.
‘자본주의, 역시 자본주의가 답이다.’
산수이는 해답을 찾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
***
“모두 보셨다시피 비덴탕을 찾는 손님들의 수가 예전 같지 않아요.”
산수이는 얼마 남지 않은 가솔들을 향해 말을 이어나갔다.
“수질이나 서비스엔 큰 문제가 없는 것 같으니,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사람들로 하여금 비덴탕이 예전의 명성을 되찾았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거예요.”
“무슨 좋은 생각이라도 있으십니까, 아가씨?”
집사의 물음에 산수이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저는 에데카나 공작가를 찾아갈 생각입니다.”
에데카나라고?
산수이의 입에서 그 이름이 나오는 순간 저택 내 사람들은 모두 굳어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오직 산수이와 얀피르만이 그 분위기를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이 서신을 에데카나 공작님께 전해주세요.”
산수이는 미리 준비해 둔 편지를 집사에게 건넸다.
편지를 받아드는 집사의 얼굴이 어두웠지만, 그 역시도 이것 외에는 별다른 방법이 없음을 잘 알고 있었다.
“분부대로 합지요.”
집사는 묵례 후 하인들 모두와 함께 자리를 떠나며 생각했다.
‘……지금의 에데카나 공작님은, 아가씨가 생각하시는 것과는 많이 다른 분일 텐데.’
모두가 떠난 후, 얀피르가 산수이에게 물었다.
“에데카나 공작이 누군데? 혹시라도 문제 생기면 말해. 내가 가서 죽여 버릴 테니까.”
***
휘온 에데카나.
그는 얼마 전 부친 사망 후 작위를 이어받아 제국 유일의 공작이 된 스물셋의 청년이었다.
젊은 미혼의 공작이라는 점 말고도, 그를 수식하는 미사여구들은 수도 없이 많았다.
눈부신 은발과 짙은 회색빛 눈동자를 가진 빼어난 미남자라는 것과, 제국 대학을 최연소 수석 졸업한 수재라는 것 등.
하지만 그는 결코 이런 긍정적인 면으로만 이름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자신의 집무실에서 각종 서류에 파묻혀 일하고 있는 휘온에게 그의 집사가 들어와 아뢰었다.
“공작님, 슈페터 백작의 사업 제안서가 지금 막 도착했습니다만…….”
“약속했던 것보다 하루 늦었군. 갖다 버려.”
“하지만 갑작스런 폭우 때문에 늦어진 것으로 보입니다.”
“날씨까지 미리 계산해서 출발했었어야지. 종이 한 조각도 남지 않게, 깔끔하게 태우도록.”
휘온 에데카나는 바로 꽃 같은 외모와는 다르게 얼음장같이 차가운 성격으로 유명했던 것이다.
게다가 계산적인 면모까지 있어 돈이 안 되는 일에는 손도 대지 않거니와, 인간관계를 맺을 때도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사람들과만 교류했다.
아무튼 그 덕에 휘온이 손대는 사업들은 모조리 성공을 거두었고, 그는 이제 제국에서 황실 다음으로 부유한 남자로 불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그에게도 좋아하는 취미 하나쯤은 있었으니…….
“집사, 목욕물은 준비됐나?”
“지금 가시면 딱 알맞을 겁니다. 오늘도 목욕 시중은 필요 없다 이를까요?”
“언제나처럼 혼자 하도록 하지.”
그렇게 집무실에서 나온 휘온은 자신만을 위해 맞춤 제작된 최고급 대리석 욕조 안에 몸을 누였다.
“후우…….”
물속에 잠긴 휘온이 머리를 쓸어 올리던 찰나, 갑자기 욕실 출입문 바깥쪽에서 노크와 함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공작님, 혹여 필요하신 것은 없으신…….”
“목욕 중에는 절대 말 걸지 말라고 했을 텐데? 다시는 같은 말을 반복할 일이 없었으면 좋겠군.”
“죄, 죄송합니다!”
문밖에서 빠르게 사라지는 발걸음 소리를 들으며, 휘온이 짜증 가득한 얼굴로 뇌까렸다.
“필요 없다는데도 저놈의 목욕 시중 소리는 대체 언제까지 계속할 건지. 앵무새도 아니고.”
한숨을 쉬며 욕조에서 빠져나온 그가 조용히 욕실 서랍장을 열었다.
그 안에는 자물쇠가 달린 커다란 고급 상자가 들어있었는데, 휘온은 몰래 숨겨온 열쇠를 꺼내 자물쇠를 열었다.
철컥—
육중한 소리와 함께 열린 그 상자 안에는, 놀랄 만큼 다양한 종류의 오일과 씨앗들이 한가득 들어있었다.
자신의 컬렉션을 바라보는 휘온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하악…….”
행복에 잠긴 그가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한 채 혼자 중얼거렸다.
“오, 오늘은 어떤 조합으로 해 볼까?”
휘온 에데카나는.
목욕 스크럽 덕후였던 것이었다.
워낙에 깔끔을 떠는 휘온은 자신의 몸에서 그 더러운, 이름조차 언급하기 싫은 ‘때’라는 것이 나오는 걸 특히나 참을 수가 없었다.
이에 세상 모든 스크럽을 다 사용해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었다. 심지어 외국에서 모래까지 수입해다 써볼 정도였으니.
하지만 제국 땅에서 피부 미용에 신경을 쓰는 건 오로지 여성들뿐이었고, 남성들은 보통 이를 시간 낭비라 여기며 혐오했다.
만일 그가 이런 은밀한 취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세간에 알려진다면, 휘온은 불명예스러운 추문을 결코 피할 수 없을 것이었다.
휘온은 상자 안에서 몇 가지 오일과 씨앗을 퍼내어, 미리 준비된 백자에 담아 한참을 섞은 후 제 몸에 바르고 문질러보았다.
하지만 그는 곧 실망한 듯 고개를 저었다.
“이 조합도 영 별로군.”
그렇게 휘온은 언제나와 같이 목욕을 만족스럽지 못하게 마친 채, 가운을 걸치곤 제 침실로 향했다.
혼자만의 고요한 스크럽 덕질 시간을 즐긴 후엔, 얼굴에 영양 크림을 듬뿍 바른 후 낮잠을 청해 꿀피부를 유지하는 것이 휘온에게는 가장 중요한 하루의 일과였기 때문이다.
그는 무엇보다도 자신의 고운 피부를 가장 소중하게 여기고 있었으니까.
“오늘은 캐비어 추출물이 함유된 크림을 발라 볼까……?”
하지만 그때, 정적을 깨고 예상외의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휘온은 손에 들려있던 영양 크림을 재빨리 베개 아래에 감춘 후, 짜증이 가득 섞인 목소리로 벌컥 문을 열었다.
“뭐지? 내 낮잠 시간은 절대 방해하지 말라고 했을 텐데.”
“송구하지만 비덴비덴 남작저로부터 다급한 전갈이 와서…….”
“비덴비덴? 지금 그딴 쓸데없는 서신 때문에 날 방해한 건가?”
“잘 알지요. 하지만 선대 공작님께서 작고하신 비덴비덴 남작과 각별한 사이셨잖습니까.”
“하! 그 몰락한 온천장의 오랜 단골이었던 건 아버지였지, 내가 아니라고.”
만일 선대 공작이 살아있었다면 비덴비덴 남작령의 재건을 누구보다 먼저 도와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뒤를 물려받은 휘온은 그런 돈 안 되는 일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아무튼 알겠으니, 이리 주고 어서 나가.”
결국 잠이 달아나 버린 휘온은, 얼굴에 영양 크림만 한가득 바른 채 침대에 누워 산수이가 보낸 편지를 읽기 시작했다.
“어디 얼마나 대단한 내용이기에 내 단잠을 방해한 것인지 한번 보자고, 비덴비덴 영애.”
그러나 침대 위에 대충 누워 심드렁하게 서신을 읽던 휘온은, 갑자기 벌떡 몸을 일으키고는 곧 편지를 뚫고 들어갈 기세로 정자세를 취했다.
바로 이 한 구절 때문이었다.
[……방문을 허가해 주신다면 기존의 그 어떤 스크럽 제품보다 더 혁신적인 발명품을 들고 찾아뵙겠습니다.]
우연인지 아니면 알고 던진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산수이라는 영애는 지금 휘온의 니즈에 정확히 화살을 쏘아 맞힌 것이었다.
“도대체 그 혁신적인 발명품이 뭔데……?”
휘온은 고민했다.
산수이가 말하는 게 과연 그의 오랜 스크럽 유목민 생활을 끝내줄 수 있을 만한 것일지.
하지만 그 고민은 그리 길지 않았다.
“어디 한번 만나보기나 하자고. 만일 내 시간을 낭비하게 된다면 이 영애는 마땅한 대가를 치르게 될 테니까…….”
결국 그의 스크럽 덕심은 이성적인 판단을 억눌러버렸고, 휘온은 산수이의 방문을 허가한다는 내용의 회신을 보내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