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때수건, 일명 이태리타월.
이것은 1967년 대한민국의 한 천재에 의해서 발명된 메이드 인 코리아. 한국 고유의 특허 상품이자, 한국인의 목욕 습관에 최적화된 ‘때를 미는 수건’이다.
이탈리아 원단을 사용해 만들었기 때문에 ‘이태리타월’이라고도 불리지만 정작 이탈리아 여행을 가면 전혀 볼 수 없다는 함정.
아무튼 이 때수건을 만들기 위해선 비스코스 레이온이라는 섬유가 필요한데 문제는.
‘……이게 인조 섬유라는 거지.’
목욕 덕후였던 그녀는 때수건의 역사에 대해선 빠삭하게 꿰고 있었으나.
‘아니 원소 기호표도 다 까먹은 내가 어떻게 화학식을 세워서 섬유를 만들어 내냐고요.’
똑똑한 그녀였지만 화학에는 영 젬병이었다.
‘그렇다고 내가 포기할 것 같냐.’
그녀는 결국 영지 내의 모든 직물 가게를 뒤져보기로 했다.
***
화창한 날씨는 산수이의 기분을 더욱더 들뜨게 했다.
옅은 핑크색 드레스를 입고 챙이 넓은 모자를 쓴 그녀는 얀피르와 함께 마차를 타고 광장으로 향했다.
‘그러고 보니 이 세계에 와서 영지를 둘러보는 건 처음이네.’
마차 밖에 펼쳐진 비덴비덴의 풍경은 몰락 위기를 겪고 있는 영지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마치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이윽고 산수이는 얀피르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마차에서 내렸다.
“주인이랑 데이트한다!”
“데이트 같은 소리 하네. 이건 외근이야!”
그렇게 말하면서도 산수이는 자신의 옆에서 나란히 걷고 있는 얀피르를 슬쩍 곁눈질로 바라보았다.
‘얀피르 키가 정말 크구나? 키스하기 딱 좋은 게 이 정도 차이라고 하던…….’
여기까지 생각하던 산수이는 손바닥으로 자신의 뺨을 찹찹 때리기 시작했다.
‘정신 차리자! 얀피르가 매일같이 핥아댄다고 나까지 이러면 안 돼! 머릿속 음란 마귀야, 물러가라아아…….’
그런 산수이를 보며 얀피르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주인? 벌레가 뺨이라도 물었어? 내가 핥아줄까?”
“아, 아니 괜찮아.”
산수이는 대뇌 망상을 멈추기 위해 몰래 제 얼굴에 부채질을 해 댔다.
하지만 그것 역시 산수이만 바라보고 있던 얀피르에게 딱 걸리고 말았다.
“덥구나, 주인? 말을 하지. 팔 아프게 그러지 마. 부채질 내가 해 줄게.”
“으아니 정말 괜찮은…….”
하지만 얀피르는 이미 제 손으로 산수이의 목덜미에 연신 부채질을 하고 있었다.
“시원해?”
그런 모습을 본 산수이는 열이 가시긴커녕 도리어 얼굴이 더 붉게 달아올랐다.
‘얜 또 왜 이렇게 자상하고 난리야? 진짜 미치겠네.’
“주인, 안 되겠다. 얼굴이 자꾸 빨개지는데 역시 한번 핥아야……”
“아, 안 돼. 여기선 사람들이 다 보잖아!”
“……그럼 저기 으슥한 구석에 가서 몰래 핥을까?”
“그건 더 안 돼!”
이렇게 한참을 실랑이하던 그들은 곧이어 영지 내 메인 광장에 도착했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심각한 상태일 줄은 몰랐네.’
아무리 영지민들의 수가 많이 줄었다고 해도, 생각보다 더 많은 가게가 문을 닫은 상태였다. 게다가 창문이 깨져있거나 벽에 낙서가 되어 있는 곳도 수두룩했다.
한때 활기찼던 이곳이 범죄의 온상이 되는 것도 시간문제로 보였다.
‘영지 내에서 해결해야 할 일들이 한둘이 아닌데?’
그녀는 직물 가게로 향하며 거리의 상태를 하나하나 자세히 살폈다.
최대한 많은 원단을 보고 싶었지만, 대다수의 소매상은 이미 문을 닫은 지 오래였고 광장 한복판에 가장 큰 가게 하나만이 남아있었다.
“계세요?”
산수이가 가게 안으로 들어서자, 주인이 오랜만의 손님을 반기며 부리나케 달려 나왔다.
“어서 오십…… 어라? 남작 영애님 아니십니까? 이 누추한 곳에 어쩐 일로.”
“찾고 있는 원단이 있어서요.”
“어떤 색상의 비단으로 보여드릴깝쇼?”
“비단 말고, 가지고 계신 것 중 가장 거칠고 까끌까끌한 원단을 모두 보여주세요.”
“예? 정말 그런 원단을 찾으시는 겁니까?”
그녀의 이상한 요청에 직물상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원단 샘플을 여러 장 들고 나왔다.
하지만 원단을 만져보던 그녀는 계속해서 고개를 저었다.
“이것도, 이것도 아닌데…….”
“영애님, 찾으시는 원단이 대체 어떤 질감인지 자세히 알 수 있을까요?”
“으음 그러니까 빤딱빤딱하면서도 거칠거칠하고, 하지만 부들부들하기도 한…… 그런 거?”
아까부터 옆에서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얀피르는 산수이의 설명을 들으면 들을수록 더욱더 머리가 혼란스러워졌다.
‘빛나면서도 거칠고 부드러운 원단을 찾는다고? 대체 그런 게 세상에 존재하긴 해?’
아니 뭐 어떻게 생긴 건지만 알아도 세상 끝까지 뒤져서 찾아내 줄 수 있는데. 하지만 저 모순적인 3대 조건을 다 갖춘 직물이 세상이 어디 있냔 말이다.
그런 건 드래곤 비늘을 뽑아 써도 만들 수 없을 것이라고, 얀피르는 생각했다.
옆에서 직물상 역시 난감한 표정이었다.
“으으음…… 영애님, 죄송하지만 제가 이 가게를 운영한 지 30년. 제국 수도에서 유통되는 직물들도 거의 다 취급해 보았습니다만, 말씀하신 것과 같은 기적의 원단은 본 적이 없습니다.”
역시 없는 건가.
산수이는 절망했다.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혹시라도 비슷한 물건이 들어오면 꼭 연락해주세요.”
“알겠습니다.”
산수이가 실망이 가득한 얼굴로 가게를 나서려고 할 때, 갑자기 문이 열리며 그 안으로 한 꼬마 여자아이가 들어왔다.
‘응……?’
그 아이의 빼빼 마른 몸과 초라한 옷차림이 마치 자신의 보육원 시절을 보는 것만 같아서, 산수이는 저도 모르게 그 아이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런 산수이를 향해 얀피르가 물었다.
“주인, 아는 애야?”
“아, 아니야. 얼른 가자.”
산수이가 마지못해 가게를 나서려던 찰나, 그 아이가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주섬주섬 꺼내 직물상에게 불쑥 내밀었다.
“아저씨, 제발 이거 한 번만 봐 주세요!”
산수이가 서 있던 곳에선 아이의 손에 들린 물건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한 가지만은 확실하게 볼 수 있었다.
아이를 향한 적대적인 직물상의 표정 말이다.
“아, 이놈 또 왔네. 장사 방해하지 말고 썩 꺼져!”
“부디 한 번만 보기라도……”
“가뜩이나 장사 안 돼서 짜증 나는데, 어디서 이런 거지 같은 게!”
직물상은 아이를 향해 손을 치켜들었다.
순간 산수이에게는 그 모습이 보육원에서 자신에게 손찌검을 해 대던 원장의 모습과 겹쳐 보였다.
“안 돼!”
그녀는 얀피르가 말릴 새도 없이 직물상에게 달려가 제 몸으로 아이를 감싸면서 외쳤다.
“지금 뭐 하는 짓이에요? 어린아이한테!”
“여, 영애님……! 아직 계셨습니까?”
직물상을 노려보던 산수이가 아이에게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꼬마 아가씨, 괜찮니?”
“네, 네에…….”
산수이는 아이를 안심시키기 위해 다정하게 웃어 보였다.
“이 아저씨한테 보여주려던 거, 언니가 대신 사고 싶은데. 한번 볼 수 있을까?”
얼굴이 발그레해진 여자아이는 자신의 손에 들려있던 원단을 산수이에게 조심스럽게 내밀었다.
“보, 보기에는 거칠어 보여도 엄청 좋은 거예요. 우리 엄마가 밤새 열심히 만드셨거든요.”
“그렇구나, 어디 한 번 볼…… 응?”
산수이는 아이의 손에 들린 원단을 보곤 제 눈을 의심했다.
‘이건…… 비, 비스코스 레이온?’
아이에게서 원단을 받아든 산수이는 그것을 이리저리 돌려가며 살펴보았다.
‘이 때깔, 이 감촉……! 분명히 때수건 재질이다!’
산수이는 흥분한 표정을 감출 수 없었다.
그 모습을 본 직물상은 산수이가 지금껏 애타게 찾던 원단이 바로 이것임을 빠르게 눈치챘다.
그가 서둘러 태도를 바꿔 여자아이에게 손을 뻗으며 말했다.
“크흠! 꼬마야. 그 원단, 아저씨에게도 보여주겠니? 값은 내가 후하게 쳐줄…….”
하지만 아이에게로 향한 그의 손등을 산수이가 재빠르게 찰싹 내리쳤다.
“아야! 여, 영애님?”
“감히 어디다 그 더러운 손을 대려고 해? 꼬마 아가씨, 나쁜 사람한텐 이런 귀한 물건 파는 거 아냐, 알겠지?”
“네!”
“여, 영애님! 잠시만 제 말을 좀……!”
하지만 산수이는 직물상의 외침을 가볍게 무시한 채, 얀피르를 향해 말했다.
“볼일이 끝났으니. 우린 이만 나가 볼까, 얀피르?”
“좋아.”
직물상은 꼬마 아이의 손을 잡고 가게를 나서는 산수이를 다급히 붙잡으려 했지만, 자신을 노려보는 얀피르의 살기 어린 눈빛에 결국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렇게 얀피르와 함께 아이를 데리고 가게 밖으로 나온 산수이는 잔뜩 기대감에 찬 모습으로 꼬마 아이를 향해 물었다.
“그래서, 엄마는 지금 어디 계시니?”
***
아이의 엄마 이름은 우테.
원래 그녀는 비덴탕 청소부였던 남편과 함께 어린 딸을 키우며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영지 내에 온천수가 더는 나오지 않게 되면서 남편은 실직했다.
그날 이후, 그가 술에 취한 채 돌아와 자신을 때리는 생활이 매일 이어졌다.
그러던 그가 어느 날부터 다시는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소문에 의하면 일부 영지민들이 인근 백작령으로 이탈해 갈 때 그도 함께였다고 했다.
가족을 버리고 저 혼자만 살겠다 도망쳤다는 게 참으로 기가 막혔지만, 한편으로는 더 이상 남편에게 맞고 살지 않아도 돼 기쁘기도 했다.
그날부터 아이를 키우기 위해 삯바느질로 생계를 유지했다. 그러던 어느 날, 집 근처 숲속에서 처음 보는 벌레 고치를 발견했다.
그 고치에선 실이 나왔다.
혹시 이걸로 귀족들이 즐겨 찾는다던 ‘비단’의 원료인 명주실을 만들 수 있는 게 아닐까?
그녀는 희망에 부푼 마음으로 한 올 한 올 실을 뽑아냈다.
하지만 그녀의 기대와는 다르게 그 실로 짜낸 직물은 거친 데다가 엉성하기 짝이 없었고, 당연히 아무도 구매하려 하지 않았다.
“아니, 이렇게 거칠기만 하고 땀 흡수도 안 되는 원단을 어디에다 쓰란 말이야?”
결국 우테는 원단 판매의 꿈을 접은 채, 다시금 삯바느질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오늘 처음으로 그 원단을 구매하겠다는 손님이 찾아온 것이다.
그것도 바로 이 영지의 주인, 산수이 비덴비덴 남작 영애가 직접 말이다.
“여기가 우테 씨의 집이 맞나요?”
혹시 딸아이가 뭔가 엄청난 실수를 저지른 것은 아닐까 노심초사하던 그녀에게 남작 영애가 던진 말은 예상외의 것이었다.
“우테 씨가 만드신 원단을 제가 모두 구매하고 싶습니다.”
***
산수이는 우테의 집 안에서 그녀가 건네준 원단을 자세히 살폈다.
‘역시, 때수건의 질감과 거의 99% 일치한다!’
산수이가 우테를 향해 물었다.
“이 원단을 어떻게 만드셨나요?”
“그게…… 사실 저희 집 뒤편 숲속에서만 발견되는 이름 모를 벌레가 있습니다. 그 벌레의 고치에서 뽑아낸 실로 만들었지요.”
심지어 원료가 이 영지 안에 있다!
산수이는 떨리는 가슴을 주체할 수 없었다.
“지금 어떤 일을 하고 계신다고 했죠?”
“남편이 실종된 후부턴, 홀로 아이를 키우면서 삯바느질을 하고 있습니다만.”
“우테 씨, 저를 도와 비덴비덴 남작령을 위해 일해보지 않으실래요? 4대 보험…… 아니, 봉급은 부족함 없이 챙겨드리겠습니다.”
산수이가 우테를 향해 말했다.
이런 파격적인 대우에 대한 조건은 매우 간단했다.
고치에서 실을 뽑아 원단을 짜고, 완성품인 때수건을 제작하는 일련의 과정 모두를 우테가 맡아줄 것.
그리고 이 전 과정을 산수이하고만 독점적으로 계약할 것.
우테가 생각하기에 이러한 조건은 자신이 받은 은혜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쉽고 간단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놀라운 제안은 따로 있었다.
“말씀하신 그 벌레 고치에서 나오는 실은, 최초 발견자의 이름을 따서 우테실이라 부르는 것이 어떨까요?”
“저, 정녕 제 이름을 사용하시겠단 말씀이십니까?”
“그럼요. 당연하죠.”
우테는 눈물을 흘리며 산수이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충성을 다 하겠습니다, 영애님……!”
이것은 훗날 제국 역사에 기록될 이태리타월의 원료, ‘우테실’이 최초로 탄생되던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