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한동안 운영되지 않고 방치되어있던 비덴탕의 상태는 그야말로 참혹했다.
관리되지 않은 건물 앞 정원은 잡초가 무성했고, 목욕탕 내부엔 녹이 슬거나 곰팡이가 피어 있었으며, 바닥에선 대체 정체를 알 수 없는 식물들까지 자라나고 있었다.
본디 고대 로마의 테르마이를 연상시키는 웅장하고 아름다운 건물이었지만, 지금은 과거의 그 모습을 도저히 찾아볼 수 없는 상태였다.
‘일단은 여길 원상 복구하는 것부터 생각하자.’
산수이는 집사를 불러 저택에 남은 모든 사람을 비덴탕 앞으로 모이게 했다.
모두라고 해 봤자 집사와 유모 외엔 몇 명 남지 않았지만.
‘아무리 몰락 귀족이라고 해도, 하인들이 이렇게까지 도망을 갔다니.’
의리가 너무 없다고 생각하며 산수이가 입을 열었다.
“저는 지금부터 이 비덴탕을 새롭게 단장할 생각입니다.”
그녀의 발언에 모두가 술렁였다.
“예? 비덴탕을 말씀입니까? 어차피 당장은 운영이 어려운 상황인데 갑자기 왜…….”
“다시 예전처럼 열 수 있어요. 그러니까, 나를 믿고 다들 도와줘요.”
산수이가 눈을 빛내며 그들을 바라보았다.
얼마 후, 산수이의 지시에 따라 가솔들은 각자 맡은 위치에서 비덴탕을 재단장하게 되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들은 여주인의 행동이 도통 이해가 가질 않았다.
“목욕탕 내부는 저와 얀피르 경이 맡을 테니, 여러분은 지하실과 건물 바깥쪽을 맡아 주세요.”
“예에? 아가씨도 청소하시겠다고요?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말씀입니까!”
직접 청소를 하는 귀족이라니, 그런 건 들어본 적도 없다.
원래 마차 사고 전에도 모두에게 상냥했던 산수이였지만, 이렇게 아랫것들의 일에 발 벗고 나섰던 적은 없었으니까.
“아가씨가 아프시더니 머리가 이상해지신 것은 아닐까?”
“안 그래도 요새 갑자기 우리에게 존대를 하시질 않나. 영 걱정이로군.”
이런 걱정스러운 마음이 들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녀에게 고마움 역시 느꼈다. 이렇게 부족한 인력으로 건물 전체를 청소했다면, 죽어났을 게 분명했으니까.
게다가 영지의 괴담을 해결한 영웅 기사 얀피르 경이 함께 있지 않은가!
그들은 얀피르의 존재만으로도 든든함을 느꼈다.
한편 산수이는 얀피르와 함께 비덴탕 내부 청소에 돌입했다.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광경이었지만, 산수이는 마음을 굳게 다잡았다.
‘힘내자! 천릿길도 한 걸음부터야. 끝난 후에는 목욕이라는 달콤한 보상이 기다리고 있다고.’
온수에 몸을 담글 생각만 했는데도 이미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거기에다 시원한 바나나 우유까지 마시면 완전 딱인데.
빙의된 이후 그 어느 때보다 더 한국에서의 소소했던 일상들이 그립게 느껴졌다.
“자, 그럼 힘내서 치워 볼까!”
그녀는 치마를 돌돌 말아 걷어 올리곤, 자신의 물빛 머리카락을 높이 묶으며 빈 욕조 안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그 모습을 보고 얀피르가 물었다.
“주인…… 정말로 이걸 다 손으로 직접 치울 생각이야?”
“응. 하는 수 없잖아? 하인들은 대부분 도망갔고, 돈도 없고.”
“하아. 주인은 대체 지하실에서 드래곤 주워다가 이럴 때 안 써먹고 뭐 하는 건지.”
“응?”
얀피르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갑자기 그녀는 자신의 몸이 허공으로 붕 떠오르는 것을 느꼈다.
“어, 어?”
얀피르는 산수이의 허리를 가볍게 안아 들어 그녀를 자신의 어깨 위에 앉혀놓고는, 떨어지지 않도록 한쪽 팔로 강하게 붙잡아주었다.
“야, 얀피르? 지금 뭐 하는 거야?”
“의욕은 좋은데 효율이 너무 떨어지잖아, 이 아가씨야. 주인은 그냥 내 어깨 위에 앉아서 편하게 쉬고 있어.”
“뭐? 여기서 쉬라고?!”
아니 의자도 아니고 무슨 어깨에 앉아서 쉬란 말인가.
하지만 그녀가 뭐라 말을 끝맺기도 전에, 얀피르는 목욕탕 내부를 향해 나머지 한 손을 쭉 뻗었다.
이윽고 그의 눈에서 이제껏 본 적 없던 살기가 스치더니, 입에서는 알 수 없는 언어가 낮게 흘러나왔다.
그러자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벽에 피어있던 곰팡이며, 욕탕에 끼어있던 물때나 녹이 차례차례 떨어져나와 공중으로 떠올랐다. 바닥에 피어있던 정체 모를 괴식물들 역시 뿌리째 뽑혀 올려졌다.
곧이어 얀피르는 주먹을 콱 쥐었다.
그러자 공중으로 떠오른 것들이 모두 작은 가루가 되어 순식간에 사라졌다.
얀피르의 어깨 위에 걸터앉아 있던 산수이는 그 광경에 놀라 하마터면 아래로 떨어질 뻔했다.
일을 모두 마친 얀피르는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강아지 같은 표정으로 산수이를 바라보았다.
“끝.”
그가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
“이제 너 핥아도 돼?”
***
아까 봤던 놀라운 광경 때문에 정신이 반쯤 나간 산수이는 목욕탕에 혼자 멍하니 앉아 있었다.
한편, 구석에서 마무리 작업을 마치고 돌아온 얀피르가 그녀를 안아 자신의 무릎 위에 앉히며 말했다.
“차가운 데 앉아 있으면 감기 들어, 주인.”
‘아주 무슨 깃털 다루듯이 번쩍번쩍 잘도 들어 올리네.’
그렇게 생각하며 산수이는 얀피르를 향해 물었다.
“아까 한 거, 청소 마법 같은 거야?”
“청소? 아니, 그냥 제거한 건데?”
“제거?”
“음. 내 눈앞에 거슬리는 건 모조리 다 제거하는 마법이라고 하면, 이해가 빠르려나?”
얀피르는 마치 별거 아니라는 듯 웃으며 허공을 향해 장난스럽게 손바닥을 접었다 폈다 해 보였다.
하지만 산수이는 등골이 오싹했다.
‘미친. 이거 엄청 위험한 능력 아냐? 맘에 안 들면 다 없애버린다는 거잖아!’
그런데 마법이라니, 그럼 바나나우유 같은 것도 만들어 낼 수 있는 거 아닌가?
산수이가 눈을 반짝이며 얀피르에게 물었다.
“얀피르 너 다른 마법도 할 줄 알아? 예를 들면, 뭘 만들어 낸다거나…….”
“아니, 이거 말곤 기억 안 나.”
‘에라이 좋다 말았네…….’
그럼 저 마법이란 거, 위험하기만 하지 쓸모는 없는 거 아닌가?
‘방금 눈앞에서 이 대형 목욕탕이 한 방에 깨끗해지는 걸 보고도 쓸모없는 능력이라니, 나 너무 도둑놈 심보네.’
복잡해 보이는 그녀의 표정을 옆에서 지켜보던 얀피르가 물었다.
“만들 순 없지만 뭐든 없앨 순 있다니까? 혹시 누가 괴롭혀? 내가 죽여 버릴까?”
그러면서 그는 주먹을 다시 한 번 콱 쥐어 보였다.
그 말에 산수이는 놀라 벌떡 일어났다.
“뭐? 그 삭젠지 제건지 하는 마법으로 사람도 죽일 수 있는 거였어?”
“역시, 죽이고 싶은 놈이 있구나? 어떤 놈이야? 말만 해.”
“너, 저어얼대 그 능력은 사람한테 쓰면 안 돼, 알겠어?”
내 앞에서 하도 강아지같이 구니까 이 녀석이 드래곤 종족이라는 걸 잊고 있었다고 산수이는 생각했다.
상대는 드래곤이다. 마음만 먹으면 사람 하나 골로 보내는 건 아무것도 아닌 드래곤이라고.
“알겠어. 주인이 하지 말라면 안 할게. 대신 ‘절대’라는 말은 못 지켜.”
“왜!”
“주인이 위험에 처하게 되는 순간이 오면 난 어떤 놈이든 다 가차 없이 죽일 거니까.”
그녀를 바라보는 얀피르의 황금색 눈이 무섭게 타올랐다.
“농담 아니야. 진짜로 세상 끝까지 쫓아가서라도 다 찢어 죽여 버릴 거라고.”
그 말을 하는 얀피르의 송곳니가 빛났다.
산수이는 자신이 정말 위험한 들짐승을 주워왔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지만 이미 때는 한참 늦어버린 후였다.
***
산수이는 적절한 핑계를 대어 하인들을 모두 물리고, 얀피르와 단둘이만 남아서 그의 마법으로 모든 건물의 정비를 마쳤다.
‘청소가 너무 빨리 끝났다고 하면 이상하게 생각할 수도 있으니까, 적당히 시간 좀 때우다가 들어가야겠다.’
그러는 김에 산수이는 이 비덴탕이라는 곳의 건물 구조를 파악해보기로 했다.
건물 1층의 로비 끝에는 두 개의 대형 홀이 있었고, 각각의 안쪽에는 탈의실 및 목욕탕, 그리고 마사지실 등이 딸려 있었다.
바로 위 2층은 휴게실이 마련되어 있어 고객들이 모여 담소를 나누기에 적합했다.
‘기본적인 실내 구조도는 대충 한국의 대중목욕탕하고 비슷한데?’
그렇게 해가 저물고 난 후, 산수이는 모두에게 비덴탕의 새롭게 바뀐 모습을 보여주었다.
예전과 같은 아름다움을 되찾은 비덴탕을 바라보며, 저택 내 하인들은 모두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특히나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고 있는 대형 열탕 앞에서 그들은 감격해 울먹였다.
“아아……! 비덴탕 옛 전성기 때의 모습을 다시 보게 되다니. 이젠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그들이 특히 감사해한 건 바로 얀피르.
그가 영지의 사건을 해결한 것만으로도 이미 극호감이었지만. 그것도 모자라 이번엔 그가 혼자서 장정 5인분의 일을 해내며 욕탕의 물을 끓였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얀피르는 이제 거의 마왕을 무찌른 영웅급 인사가 되어있었다.
사실은 다시 드래곤의 모습으로 돌아가 5초도 안 되는 시간 동안 불꽃 한번 찍 쏘아줬을 뿐이지만.
얀피르를 보며 유모는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이제 아가씨를 저 믿음직한 사내분께 시집보낼 일만 남았군요.’
사실 산수이는 일전의 마차 사건 이후 제국의 사교계에서 거의 제명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온천이 나오지 않는 몰락한 남작령의 귀족 영애, 부모 사망의 트라우마도 모자라 본인 역시 오랜 기간 식물인간 신세.
게다가 그녀가 마차 사고 이후 아이를 낳지 못하는 몸이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괴소문까지 퍼지면서, 그녀의 미모에 반해 하루가 멀다고 날아오던 청혼장들이 어느 순간 뚝 끊기고 말았다.
결심을 굳힌 유모가 산수이에게 다가가 제안했다.
“아가씨, 이렇게 좋은 날 비덴탕에서 그간의 피로를 푸시는 것은 어떻습니까?”
“좋은 생각이네요! 그럼 모두들 고생했으니 다 함께…….”
“아유, 아가씨! 일단 아가씨부터 탕에 들어가 계세요. 저희는 알아서 천천히 들어갈 테니깐요.”
“알겠어요, 유모.”
그렇게 산수이는 유모의 등에 떠밀려 두 개의 홀 중 한 군데로 들어가 열탕 속에 몸을 누였다.
“하아아…….”
이세계로 건너온 이후 처음으로 가지는 꿀맛 같은 목욕 타임이었다.
“아아, 이제야 좀 살 것 같다.”
산수이는 물 안에서 고개만 내민 채 천장을 바라보았다.
원래 세계에서 숨지기 직전, 마지막으로 보았던 그 천장이 다시금 떠올랐다.
‘열심히 해서 꼭 미션 클리어하고 죽기 직전으로 돌아가야지.’
그때, 갑자기 산수이의 시야 안으로 익숙한 얼굴이 불쑥 나타났다.
“……어?”
그것은 산수이의 예상과는 다르게 유모도, 하녀도 아닌.
“주인! 나 왔어!”
“야, 얀피르?!”
갑작스럽게 자신의 앞에 출몰한 얀피르의 얼굴에 당황한 산수이는 재빨리 물속으로 들어가 제 몸을 손으로 가렸다.
하지만 얀피르는 이미 그녀가 있는 탕 안으로 들어와 앉은 후였다.
“네, 네가 왜 여기 있어?”
“응? 그야 목욕하러 왔지.”
“그니까 남탕엘 안 가고 왜 여기에……!”
“남탕? 그게 뭐야? 유모가 여기로 가라던데?”
“뭐? 그럼 유모랑 나머지 사람들은 다 어디 가고?”
“다 같이 옆에 있는 홀로 우르르 들어가던데? 뭐라더라, 아랫사람은 주인과 같이 목욕할 수 없다고.”
“남녀 사용인들이 모두…… 같은 탕에서 씻고 있다고?”
그 말에 산수이는 머리를 얻어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다.
‘여기 설마, 혼욕 문화야?!’
하지만 산수이가 놀란 마음을 진정시킬 틈도 없이, 여태껏 물속에서 고개만 내밀고 있던 얀피르가 점점 몸을 일으켜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뭐, 뭐야! 너 왜 이쪽으로 오는데!”
“주인, 이렇게 물속에서 보니까…….”
어느새 산수이의 바로 옆까지 다가온 얀피르가 그녀에게 자신의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와 동시에 얀피르의 머리카락에서 흘러내린 물방울이 산수이의 어깨에 톡 하고 떨어졌다.
그 감촉에 산수이가 찌릿함을 느끼던 순간.
얀피르가 그녀의 귀에 대고 나지막이 속삭였다.
“더 핥고 싶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