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쏟아지는 아침 햇살을 받으며 일어났을 때, 산수이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그도 그럴 것이 어젯밤의 아기 드래곤은 온데간데없고, 웬 반라의 커다란 남성이 침대 위에 함께 누운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너무 놀라서 말도 잇지 못하고 눈만 깜빡거리는 그녀를 보며, 얀피르가 귀엽다는 듯 미소 지었다.
“잘 잤어?”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산수이는 저택이 떠내려가라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꺄, 꺄아아악-! 너, 넌 누구! 읍…….”
얀피르가 다급히 산수이의 입을 손으로 틀어막으며 말했다.
“나라고, 나! 얀피르!”
“아이으?”
“그래, 얀피르. 그렇게 소리 지르다간 인간들이…… 아, 이런.”
하지만 이미 산수이의 비명을 들은 유모가 다급히 그녀의 방문을 열어젖힌 후였다.
“아가씨! 괜찮으십니까?”
다행히 얀피르는 문이 열림과 동시에 다시 새끼 드래곤의 형태로 돌아가, 그녀의 이불 속으로 쏙 숨어 들어갔다.
비명을 듣고 허겁지겁 달려온 유모의 표정에서 그녀가 산수이를 얼마나 아끼는지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유모가 얀피르의 존재를 알게 되면 일이 더 커질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한 산수이는, 그녀를 향해 태연한 척 대답했다.
“으응, 유모 미안해요. 나쁜 꿈을 꿔서 그만.”
“아이고 아가씨! 무슨 불한당이라도 들어온 줄 알고 이 유모가 얼마나 놀랐는지 아십니까?”
그 말에 산수이는 살짝 찔렸지만, 짐짓 괜찮은 척 유모에게 억지웃음을 지어 보였다.
“응, 정말 괜찮아요. 그보다 나 조금 더 자고 싶은데.”
산수이는 유모의 시선을 피해 몰래 이불 속을 빼꼼 들여다보았다.
얀피르는 들키지 않도록 몸을 작게 말아 그녀의 허벅지에 찰싹 붙어 있는 상태였다.
“아직 체력이 회복되지 않은 것일 테죠. 그래요, 어서 한숨 푹 더 주무셔요.”
산수이가 침대에 다시 눕자, 유모는 그녀를 걱정스러운 듯 바라보며 이불을 산수이의 목 끝까지 여며준 뒤 방을 나갔다.
찰칵 하고 문이 잠기는 소리를 듣고 나서야 얀피르는 숨을 몰아 내쉬며 이불 밖으로 빠져나왔다.
“푸하-들킬 뻔했다.”
그러고는 또다시 새하얀 빛과 함께 반라의 성인 남성 모습으로 변했다.
그런 얀피르의 변신 과정을 보며 산수이는 정말 이 녀석이 어제의 그 드래곤이 맞다는 걸 실감했다.
“자, 이제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해 보시지?”
몸을 일으킨 산수이가 얀피르를 노려보며 말했지만, 그는 별일 아니라는 듯 제 몸을 가리키며 대답했다.
“나도 몰라. 어젯밤에 가슴이 터질 듯 아프더니, 갑자기 이렇게 커졌어.”
그래, 판타지 속 드래곤들은 거의 다 인간의 모습으로 변신하곤 했지. 그건 그렇게 놀랄 일이 아니다.
다만 이상한 건, 어째서.
“그런데 왜 이렇게 커진 건데? 드래곤일 땐 작은 아가였잖아!”
“아가라니, 무슨 실례의 말을 하는 거야, 주인.”
발끈한 얀피르가 산수이의 코끝까지 다가와 그녀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렇게 다 자란 남자 맞다고, 나.”
자신과 코끝이 닿을락 말락 한 얀피르를 보며, 산수이는 얼굴이 붉어졌다.
사실, 얀피르의 인간화 모습은 엄청…….
‘내 취향이다……!’
저 찰랑거리는 흑발에, 섹시하게 잘생긴 얼굴, 녹일 듯 쳐다보는 금빛 눈동자.
게다가 저 몸은 또 어떻고.
누가 드래곤 아니랄까 봐 잘 발달한 근육에 가슴팍은 또 어찌나 넓은지…….
꿀꺽.
산수이는 자신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인간이 아니라 그런가, 몸의 비율이나 잔근육이 완전 조각이다, 조각. 저건 인간에게서는 절대 나올 수 없는 그런 몸이야.’
만일 그가 산수이에게 단 1mm만 더 가까이 다가갔더라면 그녀는 이성을 잃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안 돼. 미션 클리어해야지, 연애할 시간이 어딨어? 원래 세계로 돌아가기 전까진 절대 연애 금지!’
그녀는 마지막 이성의 끈을 놓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그, 그럼 드래곤의 모습일 때는 왜 그렇게 작은 건데. 사람 헷갈리게.”
“그건…….”
그 질문에 얀피르는 산수이에게서 떨어져 잠시 생각에 잠기다가 머리를 긁적이며 답했다.
“그게, 나도 잘 몰라.”
사실 얀피르는 제 자신에 대해서 모르는 것투성이였다.
얼마 전, 홀로 알껍데기를 깨고 땅 밖으로 기어 나왔을 때부터 그의 의식이나 지적 수준은 이미 성인의 것과 동일했다. 제 자신의 이름까지 미리 알고 있을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어째서인지 체구는 새끼 드래곤의 형태에서 더 자라나질 않았다.
그의 설명을 듣던 산수이가 물었다.
“기억상실 같은 건가?”
“그 외엔 기억나는 게 없으니, 그런 거 같네.”
“으음. 혹시 인간과 드래곤은 정신이나 신체 나이가 서로 다른 건 아닐까? 아니 잠깐! 중요한 건 그게 아니잖아! 나랑 만나던 그 순간에도 너는 인간으로 치면 이렇게 다 자란 상태였단 거네……!”
“응, 그렇지.”
얀피르가 해맑게 끄덕이며 말했다.
그러자 산수이는 옆에 있던 베개를 들고 얀피르를 냅다 내려치기 시작했다.
“그런데 양심도 없이 다 큰 처자를 끌어안고 같이 잠을 자?”
산수이는 눈앞의 그를 때리고 또 때렸다.
얀피르는 속사포처럼 날아드는 그녀의 베개 공격을 모두 막아내며 말했다.
“어젠 내가 귀엽다며! 게다가 분명 나랑 약속했다? 맨날 이렇게 같이 자기로.”
“그거야 네가 다 큰 성인 남자인 걸 몰랐을 때였지!”
“어어? 지금 약속을 어기겠다는 거야?”
그때 갑자기 다시 방문이 철컥 열리며 유모가 들어왔다.
다행히 산수이와 얀피르는 빛의 속도로 다시 이불 속으로 쏙 들어갔다.
그녀는 자면서 잠꼬대를 하는 척했고, 얀피르는 다시금 드래곤의 모습으로 돌아가 그녀의 옆구리에 찰싹 붙었다.
“음냐음냐!”
“이상하네? 분명 남자 목소리가 들렸는데. 우리 아가씨, 얼마나 피곤하셨으면 생전 안 하던 잠꼬대를 이리 크게 하실까.”
유모는 방 안을 두리번거리며 산수이의 안전을 재확인한 후, 다시 방을 나갔다.
“푸하-!”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이불 밖으로 빠져나와 숨을 몰아쉬었다.
이윽고 얀피르는 다시 사람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산수이가 그를 향해 단호하게 말했다.
“아무튼! 네가 애기가 아니란 걸 알게 된 이상 앞으로 같이 자는 건 절대 안 돼.”
“나 없이도 목욕탕 운영할 방법이 있나 보지?”
“와 치사해! 엄밀히 말하면 네가 먼저 사기 친 거잖아! 성인 남자인데 애기인 척.”
“사기라니, 말이 심하네! 그리고 속이긴 내가 언제 속였다고 그래? 딱히 물어보지도 않았으면서.”
“됐고, 어쨌든 같이 자는 건 절대로 안 돼.”
으으, 같이 자는 거 엄청 좋았는데.
얀피르는 입을 삐쭉 내밀었다.
잠시 고민하던 그는 다른 제안을 내놓았다.
“그럼 대신 앞으로 매일 하루에 한 번은 주인을 핥게 해줘.”
“핥…… 뭐?!”
산수이는 아까보다 더 놀란 표정이 되었다. 그녀가 두 손으로 제 몸을 가리며 외쳤다.
“하, 핥긴 나를 왜 핥아?”
“응? 왜긴 왜야, 좋으니까 핥지. 인간들은 그런 거 안 해?”
“좋으니까 핥는다고?”
이건 또 뭔 신박한 개소리일까.
“응. 드래곤 종족은 가족끼리 서로 자주 핥아주는데? 친구들끼리도 만나면 인사하면서 핥고.”
아, 핥는다는 건 드래곤들 사이에서 마치 그런 것인가. 아빠가 출근할 때 뽀뽀뽀. 서양식으론 비쥬 뭐 이런.
“그것도 안 돼?”
그녀를 바라보는 얀피르의 눈이 너무나 간절하고 초롱초롱해서, 그녀는 결국 또다시 허락하고 말았다.
“아, 알겠어…….”
“이번엔 무르기 없기다? 그럼 일단 지금 바로!”
얀피르는 갑자기 그녀에게 뛰어들었고, 이내 둘의 몸이 포개지며 침대 위에 그대로 엎어졌다.
당황한 산수이가 마음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뭐, 뭐야? 나 아직 살면서 뽀뽀도 한 번 안 해봤다고……!’
그러나 산수이의 걱정이 무색할 만큼, 얀피르는 산수이를 끌어안은 채 그저 그녀의 뺨을 기분 좋게 핥았다.
그의 숨결이 자꾸만 귓가를 간질여서 산수이는 정신이 아찔하면서도.
‘뭐지, 이게. 깜빡이도 안 켜고 덤벼들어 놓고는 하는 짓은 고작…… 대형견?’
그런 산수이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얀피르는 매우 만족스러운 표정이었다.
산수이가 길게 한숨을 내쉬며 얀피르에게 입을 열었다.
“대신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이러면 안 돼.”
“왜?”
“으음. 인간들 사이에선 서로 핥지 않거든.”
“뭐?! 그럼 인간들끼리는 대체 뭘 해? 서로 사랑하는 사이여도 안 핥아?”
“뭘 하긴, 그야 당연히 키…….”
키스라고 말할 뻔했다.
저놈이 들으면 분명 그건 뭐냐며 나도 키스라는 거 해볼래, 하고 망아지처럼 달려들 것이 뻔한데!
“키?”
“아, 몰라! 사랑하는 사람이 없어서!”
“사랑하는 사람이 왜 없어? 부모님은?”
“……없어. 돌아가셨어.”
물론 이 산수이 비덴비덴 남작 영애의 부모님이 돌아가셨다는 얘기지만.
원래의 그녀는 부모의 생사는커녕 얼굴조차 본 적이 없으니까.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생각에 잠겨있는 그녀를 보며, 얀피르는 가슴속에서 무언가 울렁이는 기분을 느꼈다.
“주인.”
“응?”
“그럼 내가…… 주인의 가족이 되어줄까?”
산수이는 놀라 얀피르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가 산수이의 손을 잡아 살짝 핥은 후, 씩 웃으며 말했다.
“나한테 아빠-해봐.”
“야!”
산수이는 얀피르의 머리를 콩 때리고는 그를 밀쳐내고 침대 밖으로 걸어 나왔다.
얀피르는 맞은 머리를 문지르면서도, 그녀를 보며 배시시 웃고 있었다.
그런 얀피르를 보며 산수이는 왠지 마음속이 조금 간지러운 듯한 기분이 들었다.
***
지난밤 얀피르에게 들짐승을 잡아 와 달라고 미리 부탁해놨었던 산수이는, 날이 밝자 그가 잡아 온 것들을 저택 내 사용인들에게 보여주었다.
“여러분이 여태껏 귀신이라 생각했던 것은 모두 이 날개 달린 들짐승이었다고 합니다. 창고로 몰래 들어와 음식을 훔쳐 먹고 있었던 듯싶어요.”
“아유 어쩐지 자꾸 음식이 없어진다 했더니……!”
설명을 마친 산수이는 이 사건을 해결한 장본인이 바로 얀피르라고 소개했다.
“이분은 음 그러니까…… 저 멀리 외국에서부터 무사 수행 중이신 얀피르 경입니다!”
괴담의 주인공을 영웅이라고 속이며 산수이는 양심의 가책을 조금 느꼈지만 뭐 어쩌겠는가.
얀피르가 자신을 도와 온천을 부활시킨다면 어차피 영웅이 되는 건 똑같지 않나 하고 그녀는 합리화해버렸다.
‘미래의 공을 미리 끌어다 쓰는 거지 뭐.’
유모가 얀피르에게 다가가 눈물을 글썽였다.
“기사님, 부디 이곳에 오래 머무시면서 우리 아가씨를 지켜주세요.”
“안 그래도 당분간 내 호위 기사가 되어주시기로 했어요, 유모.”
그들을 바라보던 집사 역시 입을 열었다.
“돌아가신 주인님께서 아가씨를 지켜주고 계시는 것이 분명합니다.”
남작저의 유모와 집사.
이들은 수많은 하인이 저택을 떠나는 순간에도 마지막까지 꿋꿋이 남은, 진심으로 비덴비덴 남작가와 산수이를 아끼는 자들이었다.
“그럼 저는 얀피르 경과 잠시 산책을 좀 하고 오겠습니다.”
“예, 아가씨.”
유모와 집사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흐뭇한 미소로 바라보았다.
***
비덴탕.
이곳은 비덴비덴 남작가가 대를 이어 관리해 온, 영지 내에서 가장 큰 목욕탕이었다.
그 외에도 영지 안에는 개개인이 운영하는 수많은 목욕탕이 있었다.
그 목욕탕들은 저마다의 개성을 가지고 있어, 관광객들은 대부분 비덴탕뿐 아니라 다른 사설 목욕탕도 돌아가며 방문하곤 했다.
하지만 이제 그것도 다 과거의 이야기.
현재는 온천수 고갈로 모든 목욕탕이 문을 닫은 상태였지만, 불행 중 다행으로 비덴탕이 위치한 자리에선 지하수만큼은 끊임없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이럴 때 지하수마저 끊겼으면 어쩔 뻔했어. 정말 다행이야.’
덕분에 비덴탕에서는 얀피르가 물만 제대로 끓여주면 그나마 영업은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따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