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안수희가 자신의 영혼이 산수이 비덴비덴 남작 영애의 몸에 빙의되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깨어나는 순간 이미 산수이 영애가 가진 온갖 기억들과, 이세계에 대한 지식이 머릿속으로 자연스럽게 흘러들어온 데다가.
원래 세계에서도 각종 콘텐츠를 통해 판타지 세계에 대해선 이골이 나도록 섭렵해오던 그녀였으니까.
이국적인 저택과 의복들도, 자신을 아가씨라 부르는 사용인들도, 그리고 지금 비덴비덴 남작령이 몰락 위기에 처해있다는 사실까지도 그녀는 별문제 없이 받아들일 수 있었다.
‘과거 유럽의 느낌이 나는 곳이로군. 아주 전형적이야. 여신도 만나고 왔는데 이대로라면 드래곤에 마왕까지 나타난다 해도 별로 놀랍지 않겠어.’
그렇게 모든 것을 무리 없이 끄덕이며 넘어간 산수이였지만, 끝끝내 적응할 수 없었던 한 가지가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자신의 얼굴이었다.
‘이건 진짜 너무 예쁘잖아……!’
그녀는 거울 속 자신의 얼굴을 몇 번이고 들여다보았지만, 아직까지도 이게 현실인지 믿을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아니, 어떻게 이 정도로 예쁠 수가 있어? 오히려 이쪽이 여신 아냐?’
연푸른 물빛 머리카락은 허리까지 길게 굽이쳤고, 그녀의 보라색 눈동자와 뽀얀 피부에선 보석처럼 빛이 났다.
게다가 눈코입 어느 하나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하게 아름다운 것이.
바로 산수이 비덴비덴 남작 영애의 얼굴이었다.
그녀는 아직까지도 이것이 자신의 모습이라는 사실을 믿기 힘든 듯, 연신 얼굴을 꼬집어도 보고 더듬어도 가며 감탄을 내뱉었다.
“정말 이제 이 얼굴이 나야? 잭팟 터졌네! 사랑해요, 사우나스!”
그렇게 산수이는 자신의 방 안에서 한참 동안이나 환호성을 질렀다.
하지만 방문 밖에서 그녀가 내지르는 목소리를 들은 유모가 헐레벌떡 문을 열고 들어와 물었다.
“아가씨……?”
유모는 거울을 붙잡고 침을 질질 흘리고 있는 산수이를 보고는 경악한 얼굴로 그녀를 붙잡고 외쳤다.
“아가씨! 정신 차리세요!”
“아, 유모? 하하하. 여, 영지가 너무 걱정돼서 그만…….”
산수이는 제 입가에 흐르는 침을 슥 닦아내고는 최대한 자연스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하지만 유모는 그런 산수이를 보며 눈물을 글썽였다.
“아가씨, 아직 몸이 완전히 회복되지 않으신 거 같은데 역시 좀 더 쉬시는 것이…….”
“아니에요! 다 나았습니다!”
그래야 빨리 사우나스가 내린 임무를 완수하고 소원을 빌 수 있지, 라고 산수이는 속으로만 생각했다.
그녀가 생각하고 있는 소원은 당연히 단 한 가지뿐이었다.
원래 세계의 자신이 사망하기 바로 직전으로 되돌아가는 것.
비록 빙의된 산수이 영애의 몸이 눈물 쏙 빼게 예쁘긴 해도 스마트폰과 전자기기가 없는 삶은 생각할 수도 없었고, 공부를 잘했지만 끝내 돈이 없어 이루지 못했던 대학 생활의 꿈도 마음에 남았다.
그렇게 생각하며 산수이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유모에게 말했다.
“그럼 우선 귀신부터 잡으러 가 볼까요, 유모?”
***
비덴비덴 남작령의 목욕 사업을 재건하는 것보다도 더 급한 일은 저택 괴담의 실체에 대해 파악하는 것이었다.
항간에는 비덴비덴 남작가가 저주를 받아, 온천수가 끊긴 것도 모자라 남작 부부가 사망하고 저택 내 악령이 떠도는 것이라 소문나있었기 때문이었다.
산수이는 집사로부터 그간의 모든 상황이 요약되어있는 서류를 전달받았다.
‘귀신 들린 저택이라니. 그럼 설령 온천수가 다시 나온다고 해도 누가 여기 목욕하러 오겠어?’
하지만 집사가 건네준 서류에는 뭔가 석연찮은 부분이 있었다. 악령이 출몰했다는 시기부터 식자재 소비량이 미묘하게 늘어나 있던 것이었다.
‘이거 귀신이 아니라, 혹시 배고픈 잡도둑 아냐?’
그날 새벽, 침상에서 조용히 일어난 산수이는 미리 준비해 둔 무언가를 품에 안은 채 저택 내부를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이것은 여태껏 산전수전 다 겪으며 살아온 그녀가 겁대가리를 상실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귀신 따위가 뭐가 무서워? 진짜 무서운 건 돈이라고, 돈!’
산수이는 새벽 내내 귀신이 자주 출몰한다던 곳을 조사해봤지만 별다른 소득을 얻지 못했고, 결국 목욕탕의 지하실까지 내려가게 되었다.
‘아, 배고파.’
그녀가 확인했던 서류에서 가장 소비량이 많았던 식자재는 바로 육포였다.
‘체구가 작고 날아다니는 동물이 뭐가 있더라……?’
귀신의 정체를 작은 육식동물이라 추측한 그녀는 범인 포획을 위해 육포 한 봉지를 들고 왔으나, 점점 제가 그 냄새에 취해갔다.
‘……딱 하나만 먹자.’
산수이는 봉지에서 기다란 육포 하나를 꺼내 질겅질겅 씹으며 계단을 지나 지하실로 향했다.
어찌나 맛있게 씹어댔는지 텅 빈 지하실 전체에 그녀의 짭짭거리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윽고 산수이는 마지막 목적지인 지하실 아궁이 앞에 도착했다.
하지만 역시 그곳에서도 아무런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뭐야, 귀신은커녕 바퀴벌레 한 마리도 안 보이네.”
그녀가 실망스러운 표정으로 몸을 돌려 지하실을 나가려던 찰나.
“……꿀꺽.”
“?”
그녀는 아궁이 뒤편에서 누군가 침을 꼴깍 삼키는 소리를 듣고 말았다.
‘오호라?’
산수이는 아궁이 근처로 다가가 육포를 더욱더 맛깔나게 씹어대기 시작했다.
그러자 간헐적으로 무언가 작은 동물의 배가 꾸르륵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여기 숨어 있었구만?’
입가에 사악한 미소를 띤 산수이는 봉지에서 새로운 육포를 하나 꺼내 아궁이 근처에 마구 흔들어대기 시작했다.
마치 고양이를 장난감으로 꾀어내는 것처럼.
그리고 곧이어, 아궁이 뒤에 숨어있던 무언가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그녀의 육포를 향해 거세게 달려들었다.
“크르릉!”
하지만 그 시커먼 동물이 육포를 낚아채는 속도보다, 산수이가 몸을 뒤로 빼는 게 더 빨랐다.
“어허, 어딜!”
산수이는 손에 들린 육포를 하늘 높이 추켜올리곤 제 앞에 나타난 작은 동물의 모습을 확인했다.
그런데…….
“드, 드래곤?!”
그것은 새카만 비늘에 황금색 눈동자를 가진, 아주 작고 귀여운 새끼 드래곤이었다.
“크르르르…….”
하지만 그녀가 이 신비한 동물 앞에서 감상에 젖을 새도 없이, 그 아기 드래곤은 다시 그녀의 손에 들린 육포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러나 빛의 속도로 육포를 이리저리 흔들어대는 산수이를 따라잡기엔 역부족이었다.
“아이구 우리 용용이, 육포가 먹고 싶어쪄요?”
“크르르…… 이리 내놔!”
“오! 너 인간의 말도 할 줄 아는구나?”
“빨랑 안 내놔?”
가끔씩 그가 육포를 붙잡기 위해 날개를 써서 날아오르기도 했지만, 왕년의 고양이 덕후였던 산수이를 이길 수는 없었다.
그녀는 신이 난 듯 기다란 육포를 미친 듯이 흔들며 그를 이리저리 조련하기 시작했다.
“하하하! 육포 잡아 봐라!”
“이게 진짜!”
한참의 실랑이 끝에 약이 바짝 오른 새끼 드래곤은, 결국 입을 쩍 벌려 허공을 향해 불을 크게 내뿜었다.
“크르르르!”
그의 입에서 뿜어져 나오는 불꽃을 보고 놀란 산수이는 마침내 육포 흔들기를 멈추고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버렸다.
“너, 지금 입에서 불이…….”
“흥! 어딜 까불어, 인간!”
아기 드래곤이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턱을 치켜든 채 산수이에게 다가와 육포를 낚아채려는 순간.
산수이가 먼저 두 팔로 그를 잡아 번쩍 들어 올렸다.
“잡았다!”
“뭐, 뭐야! 나를 내려놔라, 인간! 또 불꽃 맛을 보고 싶은…….”
하지만 산수이는 그를 향해 상큼하게 웃어 보였다.
“용용아 너, 나랑 동업할래?”
“뭐?!”
***
산수이는 아기 드래곤과 함께 지하실 바닥에 앉아, 그에게 현재 남작령이 처해있는 상황을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팔짱을 낀 채 심각한 표정으로 산수이의 이야기를 듣던 아기 드래곤이 마침내 그녀를 향해 입을 열었다.
“흐응…… 그러니까 목욕탕 문을 다시 열 수 있게 지하실 아궁이에 불을 때 달라는 소리군.”
“바로 그거야! 지금 우린 아궁이에 불 지필 돈조차 없거든. 하지만 드래곤 좋은 게 뭐냐? 그치, 용용아?”
“……얀피르.”
“응?”
“같이 일하자며? 그럼 제대로 불러 줘, 내 이름. 그런 괴상한 이름 말고.”
“얀피르…… 좋은 이름이네?”
산수이는 얀피르를 향해 미소 지으며 자신을 소개했다.
“나는 산수이라고 해, 얀피르. 앞으로 잘 부탁해.”
그녀는 웃으며 아기 드래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자 돌연 얀피르의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그 모습을 본 산수이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음? 너 열 나는 거 같은데?”
“그, 그런 거 아니야! 그보다, 방금 그거 조금만 더…… 해 봐.”
“뭐? 쓰다듬는 거?”
“그, 그래…….”
산수이가 그를 다시 쓰다듬자, 얀피르는 기분 좋은지 그녀의 손길을 따라 낮은 목소리로 그르렁거렸다.
“크릉…….”
이윽고 얀피르는 제 손으로 산수이의 손가락을 움켜쥐고는 더 가까이 자신의 몸을 갖다 비벼대며 중얼거렸다.
“따뜻해서 기분 좋아. 넌 이제부터 나의 주인이야, 산수이.”
그런 얀피르를 보며 산수이의 심장이 돌연 빠르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귀, 귀여워! 제국 뿌셔……!’
꼭 강아지만 한 크기의 드래곤이 제 손에다 볼이며 등짝이며 비벼대고 있는 것이었다.
워낙에 작은 동물을 좋아했던 그녀는 이제 거의 눈물을 흘릴 지경이 되었다.
‘얘는 그냥 단순한 동업자가 아니야! 내 귀염둥이, 내 반려견……, 아니, 반려용!’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산수이는 제 팔뚝만 한 크기의 얀피르를 번쩍 들어 올려 제 품 안에 안고는 마구 비벼댔다.
“얀피르으으! 너 정말 왜 이렇게 귀엽니?”
“으, 으헉!”
산수이의 품에 폭 파묻힌 얀피르가 놀라서 버둥거렸다.
하지만 곧 그녀에게서 피어나는 향기에 얀피르의 심장이 빠르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크르르, 갑자기 왠지 모를 이상한 기분이……!’
마침내 그가 산수이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저기, 주인? 동업하는 조건으로 한 가지 더 부탁하고 싶은 게 있는데…….”
“뭔데?”
“나 오늘 너랑 같이 자면 안 돼?”
“뭐?”
갑작스러운 부탁에 당황한 산수이였지만, 얀피르는 그녀의 가슴에 매달리며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다시 한 번 애원했다.
“여기 지하실에 숨어서 혼자 지내는 동안, 너무너무 춥고 외로웠단 말이야…….”
그 치명적인 귀여움에 산수이는 결국 제 마음속의 모든 빗장을 해제했다.
“그, 그래! 좋아, 까짓것 오늘 같이 자자!”
“기왕 같이 자는 거, 오늘만 말고 앞으로도 계속…….”
“그럼 당연하지, 뭐 어렵다고! 일루 와!”
원래 애견인들은 댕댕이랑 같은 침대에서 자기도 한다지 않나.
결국 그날 밤, 산수이는 얀피르를 끌어안고 자신의 침대로 함께 들어갔다.
밤새 얀피르를 제 볼에 비벼대며 귀여워 어쩔 줄 모르던 산수이는, 시간이 지나자 피로감에 젖어 깊은 잠에 빠져들었고.
그날 새벽.
가슴이 터질 듯한 고통을 느낀 얀피르가 홀로 잠에서 깨어났다.
“크르르…….”
이윽고 그의 몸에서 새하얀 빛이 뿜어져 나오더니 마치 마법이 풀리듯, 그는 작은 드래곤의 모습에서 성인 인간 남자의 육체로 변모하였다.
얀피르의 비늘 색깔과 똑같은 허리춤의 얇고 검은 천 조각을 제외하면, 그는 거의 나신이나 다름없는 상태였다.
방금 전까지 산수이의 품 안에 안겨있던 그가, 이제는 반대로 제 커다란 품 안에 쏙 안겨있는 그녀를 사랑스러운 눈길로 바라보고 있었다.
‘아까 네가 날 만진 다음부터 너만 보면 심장이 터질 것 같아. 내가 왜 이러지?’
얀피르는 자신의 품 안에서 새근새근 잠들어있는 산수이의 이마에 가볍게 키스하곤, 그녀를 꽉 끌어안으며 귓가에 속삭였다.
“잡힌 건 내가 아니라 너야, 주인.”